국제 일본
“속 불편한 세상… 혼자서 편히 먹으면 푸른 하늘까지 맛있더라”
日 음식 드라마 ‘고독한 미식가’
원작자 구스미, 혼밥을 말하다
도쿄=성호철 특파원 /입력 2023.12.12. 03:51 업데이트 2023.12.12. 17:34
고독한 미식가 ‘서울편’에서 돼지갈비집을 방문한 주인공 이노가시라 고로. /TV도쿄 캡처
“좋은 음식을 어떻게 맛있게 먹을까. 이 문제는 하나의 전쟁입니다.”
지난 7일 도쿄 인근 기치조지에서 만난 일본 음식 드라마 ‘고독한 미식가’의 원작 만화 작가 구스미 마사유키(久住昌之·65)씨는 “맛있는 식사는 내놓는 사람의 ‘좋은 음식’이라는 성(城)을 어떻게 함락시킬까 하는 싸움”이라고 했다.
구스미씨는 1994년부터 잡지에 연재된 ‘고독한 미식가’의 이야기 작가다. (그림을 담당했던 다니구치 지로씨는 2017년 세상을 떴다. 그 후 만화 연재는 중단됐다.) 이를 바탕으로 같은 이름의 음식 드라마가 2012년부터 제작돼 지난해 시즌 10까지 만들어졌다.
유명 배우 마쓰시게 유타카(松重豊)가 주인공 ‘고로’(이노가시라 고로)로 나와 일본 여러 도시, 때로는 한국 등 해외 각지에 있는 식당을 찾아다니는 이 드라마는 한국에서도 큰 인기를 끌고 있다.
구스미씨는 “나는 미식가가 아니다”라며 “무슨 포도주에다, 어느 셰프의 프랑스 요리와 같이 값비싼 식당을 찾아가는 건 해보지도 않았고 싫어한다”고 했다.
일본의 대표적인 음식 드라마 ‘고독한 미식가’에서 주인공 이노가시라 고로를 연기한 유명 배우 마쓰시게 유타카가 한 식당에서 혼자 덮밥을 먹고 있다. 작은 사진들은 동명인 원작 만화의 장면들. /TV도쿄·후소샤
음식은 여행… 늘 설레고 두근두근
-맛있는 음식의 정의는.
“첫째, 긴장하지 않고 편안하게 먹는 것이다. 좋은 음식도 처음 만난 지위 높은 사람과 함께 하면 긴장하고 맛이 없다. 또 하나는 배고플 때 먹으면 된다. 작품에선 ‘하라가 헷타’(배고프다는 뜻)라고 표현했다. 드라마의 주인공 배우인 마쓰시게 유타카는 촬영 전날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고 촬영하러 온다. 너무 배고프니 정말 맛있게 먹는다. ‘푸른 하늘까지 맛있다’라고 하는 풍경이 먹는 장면에 담겨 있다.”(거의 모든 에피소드에서 주인공은 식사하기 전 절실한 표정으로 ‘하라가 헷타’라는 독백을 한다.)
-주인공은 ‘혼밥’(혼자 식사)만 하더라.
“한국은 혼밥을 잘 안 한다고 들었다. 한국 식당은 혼밥하기엔 반찬이 너무 많이 나온다. 일본은 보통 혼자 음식점에 들어가도 편하다. 참, 일본도 한국 같은 곳이 있긴 하다. 료칸(일본 전통 숙박시설)은 저녁 식사가 포함돼 있는데 양이 많다. 가이세키(일본 연회용 요리)와 같은 코스가 나오니 다 먹을 수도 없다. 물어봤더니 ‘가격이 정해져 있으니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 굉장히 싫은 시스템이다. 한국 음식점들도 반찬을 더 줄이고 혼밥이 편한 분위기로 바뀌었으면 좋겠다. 몇 년 있으면 혼밥 좋아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고독한 미식가’에 많이 나오는, 골목 귀퉁이의 숨은 맛집을 고르는 원칙이 있나.
“‘가게를 고르는 원칙을 안 만든다’는 게 원칙이다. 예컨대 ‘노렌’(상점 앞에 쳐놓는 천)이나 간판을 보고 정한다고 하면, 맛집의 다른 힌트를 놓친다. 밖에서 봐도 알 수 있는 ‘좋은 가게’의 힌트는 많다. 가게 문 옆에 신발을 가지런히 놨는데 아주 예쁘거나, 빗자루와 쓰레받기가 깔끔하게 구석에 놓여 있거나 하는 것들 말이다. 매일 가게 문 앞을 깔끔히 정리하는 사람이 만든 요리는 맛있다.”
-전에 음식을 여행에 비유했더라.
“모르는 장소로 가는 여행은 시작과 끝이 있고, 중간에 만남이 있다. 모르는 곳이니 불안하기도 하다. 낯선 가게에 들어갈 때 그런 여행 같은 기분이다. 두근두근한다. 그곳의 문화도, 역사도 모른 채 설레면서 들어간다. 그리고 반드시 본래 있던 곳으로 돌아온다. 여행, 그리고 음식이란 그런 것이다.”
일본 음식 드라마 ‘고독한 미식가’의 원작자 구스미 마사유키가 7일 그의 작업실이 있는 도쿄도 외곽 기치조지역 인근에서 기자를 만나 미소를 짓고 있다. /성호철 특파원
-작품에 명대사가 많다. 스스로 하나만 꼽으면.
“내가 쓰는 모든 대사를 좋아한다. 쓰고 나선 ‘바보 같다’고 생각하며 웃으면서 또 쓴다.
만화에서 주인공이 중국집에서 화를 내는 장면이 나온다. 대사가 ‘뭐야. 이것 봐. 이렇게 남았잖아’였다.
중국집 주인이 아르바이트생을 나무라니 주인공이 화내는 대사다. 식사하는 앞에서 가게 주인이 화를 내는 바람에 음식 맛이 없어져서 다 못 먹었다는 의미다. 사실 그런 가게가 없지 않다. 음식 먹는데 그 앞에서 화내면 안 된다. 내가 혼나는 사람의 기분이 돼버리니 맛이 없어진다. 음식을 먹는 일은 조용하고 풍요로운 행위여야 한다.”
-원작 만화는 일본의 거품경제 시기(버블기)인 1990년대에 시작했다.
“나는 버블기의 혜택을 전혀 못 받았다. 버블기와 전혀 상관없는 곳에서 살았다. 당시는 버블기라서 일본 최초로 미식 붐이 일었다. 심지어 ‘비싼 버릇’(다카이 구세)이란 말이 유행했다.
프랑스 요리, 고가(高價) 포도주, 어디어디산(産) 고급 참치 등 엄청난 돈이 드는 음식문화가 인기였다. 난 그런 게 싫었다. 당시 알던 만화잡지 편집자가 ‘심지어 음식까지, 돈이 모든 걸 말하는 게 너무 싫다’고 하더라. 그렇지 않은 음식 만화를 그리자고 시작한 것이 ‘고독한 미식가’다.”
-음식 만화인데 문체는 ‘하드보일드(폭력적 주제를 무심하게 묘사)’다.
“맞는다. 음식 만화는 통통한 사람보다 꽉 마른 사람이 카레라이스를 먹으면서도 진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카레가 부족하니 밥 한 숟가락에 이 정도만 카레를 곁들여야 마지막 밥까지 맞출 수 있다’는 진지함이다. 음식을 만드는 요리사도 본래 하드보일드 하다. 웃는 낯이지만 칼을 들고 진지하게 만든다. 먹는 사람도 하드보일드 하게 음식을 대해야 한다.”
-서민 음식을 많이 다루는데, 본인 점심은 얼마짜리를 먹나.
“점심은 1000엔(약 9000원) 이내가 좋다. 워낙 고물가의 시대가 돼서 요즘은 1200엔 정도까지일까. 도쿄엔 좀처럼 없다.
도쿄의 유명 소바(메밀국수)집은 점심때 1인당 2000~3000엔씩 한다. 나는 1000엔 미만의 소바를 찾아서 먹는다. 수타(手打·손으로 뽑은 면)가 아니면 어떤가.”
드라마 주인공, 전날부터 굶고 촬영
-비싼 가게를 피하는 이유가 있나.
“긴장을 시켜서 싫다. 1만엔 넘는 고급 요리는 보고 싶지도 않고 관심도 없다.”
-정작 드라마 속 식사는 1000엔을 훌쩍 넘고, 주인공은 많은 음식을 주문하던데.(고로씨는 보통 혼자서 3인분 정도를 시켜 다 먹는다.)
“많이 먹는 장면은 내 꿈이다. 소식(小食)이라 스모 선수처럼 많이 먹는 사람이 부럽다. 만화는 본래 히어로(영웅)를 그리는 것이다. ‘고독한 미식가’엔 많이 먹는 주인공을 ‘수퍼맨’으로 만들었다. 단 주인공은 술을 못 마신다. 약점이 없으면 역시 히어로가 아니지 않은가. 대신 나는 술을 잘 마신다.”(구스미씨는 대부분 에피소드 말미에 직접 나와 실제 식당 주인과 함께 편안하게 술 한 잔 곁들인 식사를 한다. 극 중 고로씨는 술을 못 해 보통 시원한 우롱차를 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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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인분 시키면 음식 남기지 않나.
“다 먹는다. 주연 배우인 마쓰시게가 혹시 다 못 먹을까 봐, 전날 스태프가 가서 같은 메뉴를 먹어본다. 먹을 수 있는 양인지 점검하기 위해서다.”
-혼밥 문화가 보편적이지 않은 한국에서 인기다. 윤석열 대통령도 팬이라는데.
“요리사와 손님 사이에, 식사는 전쟁이다. 요리사는 맛있는 음식으로 공격하고 손님은 맛있게 먹어 반격한다. 혼밥은 더욱 그렇다. 이 가게에 들어갈지 결정하는 순간 승부는 이미 시작된다. 윤 대통령도 그렇고 한국 사람들도 매일같이 ‘결정’이라는 전쟁을 하고 있지 않나. 그래서 공감하지 않을까.”
-좋아하는 한국 음식은.
“한국엔 네 번 정도 방문했다. 서울엔 40년 전 친구들과 처음 갔는데 한국어 ‘맥주’를 기억했다가 시켰다. 얇게 채를 썬 양배추가 안주로 나와서 놀랐다. 상표도 안 붙은 막걸리도 인상적이었다. 포장마차 갔다가 옆 테이블에서 엄청 많이 먹어 놀라기도 했다. 5~6년 전에 아들과 서울에 갔는데, 그땐 우동이 참 맛있었다. 좋아하는 음식은 김치다. 전주로 기억하는데… 살짝 시큼하게 신맛이 일품이었다. 작년엔 서울 광화문에서 있는 북엇국집 갔다. 복어보다 더 맛있었다.”
☞고독한 미식가
구스미 마사유키의 스토리에 고(故) 다니구치 지로가 작화한 만화는 잡지 ‘스파’에 1994년 처음 게재됐다. 수입 잡화상을 운영하는 중년 주인공(이노가시라 고로)이 혼자서 골목의 서민 식당을 즐기는 음식 만화다. 단행본은 20쇄 이상 찍은 스테디셀러다. 2012년 TV도쿄에서 드라마로 만들었고, 범죄 드라마에서 범인 역을 자주 했던 마쓰시게 유타카가 주연을 맡았다. 지난해로 시즌 열 개를 방영했다.
도쿄=성호철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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