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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문화문학음악

이문열, ‘나’ 그리고 ‘지금, 여기’를 말하다. 황석영

by 한국의산천 2024. 1. 3.

“난세에 인물 없어 才士 한동훈 영웅 될 판”
이문열, ‘나’ 그리고 ‘지금, 여기’를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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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영 기자 입력2024-01-01 09:00:02

재주 있는 사람은 시절 잘못 만나면 맞아 죽어
윤석열은 잔재주 안 부리나 엉뚱한 사람
우파는 단합 못 하는 게 문제
가장 공 들인 소설은 ‘사람의 아들’
건강 좋지 않아 술 끊었다

 

이문열 작가는 2022년 심하게 앓은 후 건강관리에 힘쓰고 있다. [박해윤 기자]

난세다. 물가가 치솟고 금리가 높아져 살기가 팍팍하다. 온갖 정책적 노력에도 저출산 기조가 반전 없이 이어진다. 인구 소멸, 국가 소멸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지역 갈등만큼이나 세대, 젠더 갈등이 심각하다. 예로부터 전해오는 말대로라면 이제 영웅이 나올 차례다. 2024년 총선이 그 무대가 될까.

한국 문학계 거장 소설가 이문열(75)을 만났다. 1948년생. 

197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 소설 ‘새하곡’이 당선하면서 중앙 문단에 발을 들였다. 

이후부터 지금까지 출간한 책은 90여 권. 이 중 상당수가 베스트셀러에 올라 누적 판매고가 3000만 부에 달한다. 

그의 책 중엔 영웅에 관한 것이 많다. 번역서인 ‘삼국지’와 ‘수호지’, 직접 쓴 ‘초한지’와 ‘영웅시대’가 대표적이다. 

영화로 제작된 단편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도 빼놓을 수 없다.

‘다독’ 즐긴 소년
겨울 초입, 이 작가가 사는 경기 이천시 부악문원을 찾았다. 

한적한 전원마을에 터 잡은 부악문원 거실에는 손때 묻은 책이 겹겹이 세운 책장에 빼곡하게 꽂혀 있다.

몸은 어떤가.

“건강이 좋지 않다. 그래서 술도 끊었다. 몇 달 됐다.”

애주가로 유명하다.

“소주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맥주나 막걸리를 소주 서너 병 양은 마셨을 거다.”

글의 힘이 술에서 나오나.

“이태백이 술 한 말에 시 300수라고 했는데, 나는 그리 안 된다. 술 마시면 글을 전혀 못 쓴다. 쉴 때만 양껏 마셨다.”

지난해 인터뷰에서 “마지막 작품으로 격동의 80년대를 증언하는 대작을 쓰겠다”고 했다. 왜 하필 1980년대인가.

“1980년대는 우리 사회가 여러모로 격동의 시대였다. 별난 사건이 많이 일어났다. 개인적으로도 뜻깊다. 의식이 가장 활발하게 깨어 있는 시기였다. 1980년대 대구에서 서울로 이사를 와 작가 이문열로서 가장 바쁜 시절을 보냈다. 시대를 현장의 중심에서 보고 싶어 상경했는데 가까이에 있다고 보이는 게 아니더라. 30대 초중반에서 40대 중반까지 서울에서 소란스럽게 묻혀 살았다. 1980년대는 그야말로 1950년대 이후 최대의 격변기다. 그 시기를 구체화해 보고 싶었는데 결국 마무리하지 못하게 될 것 같다. 기억력이 예전 같지 않다.”

어릴 때 문학과 책 읽기를 좋아하는 소년이었나.

“책을 많이 읽긴 했다. 책 읽기를 좋아해서라기보다 환경의 영향이 크다. 가족이 자꾸 떠돌아다녀 학교에 못 가는 날이 많았다. 그건 좀 쓸쓸한 우리 가족사 때문이다. 아버지가 6·25전쟁 때 월북해 우리 가족은 한동안 거주지를 옮기며 숨어 다녔다. 주민등록번호가 생기기 전이라 우리가 자취 없이 사라지면 경찰이 찾아냈다. 그 기간이 길면 석 달이 걸렸다. 집에서 할 일이 별로 없어 손에 잡히는 대로 책을 읽었다. 위로 형님 두 분과 누님 한 분이 보는 학원사 명작집과 소년소녀문학전집이 늘 주변에 있었다. 저절로 책 읽는 버릇이 생겼다. 형님, 누님 책이라 또래가 읽는 것보다 수준이 높았다. 또래 아이들이 흥미로워하지 않는 동화도 재미있어했다고 어머니가 그러시더라.”

책을 얼마나 많이 읽었나.

“헤아려보지는 않았다. 2001년까지 읽은 책이 1만 권에 가까울 거다.”

다독 습관이 작가가 되는 데 영향을 끼쳤나.

“10대 후반에 막연하게 ‘말과 글이 내 삶의 가장 중요한 도구가 될 것 같고 나는 아마 이걸로 삶을 영위하게 될 것 같다’는 자각이 생기더라.”

왜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

“공부를 주로 독학으로 해서 그런 것 같다. 이사를 많이 다녀 전학이 잦았다. 국민학교(초등학교)를 세 번 옮겨 다녔다. 경찰에 얘기하지 않고 전학을 가서 몇 달씩 놀다가 편입했다. 그때는 편입이 쉬웠다. 중학교 때는 학교가 없는 시골로 이사하는 바람에 졸업을 못 했다. 검정고시로 중학교 과정을 마치고 안동고등학교를 1년 다녔는데 또 졸업을 못 해 검정고시를 치렀다.”

그러고 나서 서울대 사범대학 국어교육학과에 진학했다. 왜 중퇴했나.

“졸업장과 인연이 없나 보다. 초등학교 졸업장밖에 없다. 사실 국어교육학과가 꼭 가고 싶었던 학과는 아니다. 2지망이었다. 별로 내키지 않아 보통고시를 치렀다. 사법 및 행정요원을 뽑는 예비시험인데 합격하면 법대를 나오지 않아도 사법고시를 칠 수 있었다. 2학년 때 보통고시에 합격했다. 사법고시에 집중하려고 학교를 그만뒀는데 뜻대로 안 됐다. 아버지가 월북 상태여서 고시에 합격해도 임용될지 불투명하다는 얘기를 들었다.”

문학적 재능은 아버지 유전자

이문열 작가는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은 지 오래됐지만 근래 돌아가는 판국이 걱정된다”고 말했다.[박해윤 기자]

그의 아버지는 1950년 미군이 인천에 상륙했을 때 월북했다. 아버지는 전시(戰時) 서울대 농대 학장이었다.

좌파 교수들과 제자들을 트럭에 태우고 월북할 때 세 살배기이던 그는 두 형, 누나 한 명, 동생 한 명, 어머니와 함께 고향으로 내려갔다.

아무런 기억도 없고, 기약도 없던 아버지가 평생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며 그와 가족을 힘들게 할 때가 많았다. 그럼에도 그는 아버지를 원망하느냐는 물음에 씁쓰레 웃기만 했다.

“어릴 때는 거추장스럽기도 하고 원망스럽기도 했는데 크면서 감각이 없어졌다. 

내 앞날을 생각하거나 외국 나갈 때나 어떤 직업을 선택할 때는 특수하긴 했다. 

아버지 때문에 예를 들면 육사를 가고 싶다 해도 안 된다 하고, 심지어는 사법시험도 안 되는 거 아닌가 했는데 나중에 보니 그거는 괜찮다고 하더라. 그 정도의 고려 사항이었지 아버지가 그렇게 많이 떠오르지는 않았다.”

글 잘 쓰는 건 아버지 유전자인가.

“아버지가 나중에 글을 쓰고 싶다는 얘기를 어머니에게 한 적이 있다고 들었다. 

아버지가 나이 예순이 넘어 내게 보낸 편지가 있다. 비유나 지적이 아주 문어적(文語的)이었다. 내가 공연히 이 일을 하게 된 게 아니구나 싶었다.”

대구매일신문 기자로 활동한 경력이 있다. 언론인을 꿈꿨나.

“꿈꾼 게 아니고 어쩌다 하게 됐다. 1976년 전역하고 이듬해인 1977년 내가 쓴 단편소설 ‘나자레를 아십니까’가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입선했다. 

그해에 대구매일신문에서 기자를 뽑더라. 당시 입사지원서를 내는데, 아무래도 대학 중퇴 학력이라 자신이 없었다. 

호기롭게 신문사로 전화해 그걸 따져 물었다. ‘지원서 기재란 중에 한글로 학력란이 있는데, 그 ‘력’이 ‘힘력(力)’이냐 ‘역사력(歷)’이냐’고. 마침 전화 받은 사람이 웃으면서 ‘왜 그러냐’ 물었다. ‘힘력이면 되는데 역사력이면 안 되겠다’고 말하니, 그래도 ‘일단 내보라’고 했다. 그래서 응수했다. 

‘그럼 내가 1등 못 하면 들어갈 생각 않겠다’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때 전화 받은 사람이 편집국장이었던 모양이다. 그가 나중에 그랬다. ‘전화로는 치기인 줄 알았는데, 국어-영어-상식 3과목 300점 만점에 1~2등 점수 차이가 50점 났다’고. 그렇게 이듬해 수습 편집기자로 입사했다.“

기자로 일할 때 기억에 남는 취재원이 있나.

“대구매일신문에 한 3년 있었다. 취재부는 아니고 편집부 기자였다.”

그는 197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후 그해 출간한 소설 ‘사람의 아들’로 평단과 대중의 큰 관심을 받는다. 그때부터 그가 쓴 책은 나올 때마다 불티나게 팔렸다. 1980년대는 그야말로 이문열의 시대였다.

1980년대 숱한 베스트셀러를 내고 작가상을 휩쓸다시피 했다. 모두 새로 쓴 글인가.

“이전에 썼던 작품도 있다. ‘사람의 아들’도 새로 쓴 건 아니다. 어떤 부분은 그전에 준비가 돼 있었다. 신구약을 몇 번씩 읽고 정리해 둔 게 있었는데 그게 쓰였다.”

출간하는 책마다 큰 사랑을 받았다. 비결이 뭐라고 생각하나.

“나도 무엇 때문에 사람들이 재미를 느끼는지 모르겠다. ‘사람의 아들’도, 다른 베스트셀러도 별로 재미있는 책이 아니다. 내가 좀 자신 있어 하고 많이 아는 분야는 세계사를 포함한 역사다. 역사는 독학하기 좋다. 어려운 로마사는 물론 별의별 역사책을 다 읽었다.”

영웅의 재발견

이문열 작가가 쓴 책들이 재출간되고 있다(왼쪽). 이문열 작가의 손때 묻은 책. [박해윤 기자]

역사에 특별한 관심을 가진 이유가 뭔가.

“역사적 인물은 거의 대부분이 문학적 주인공들이다. 심지어 독일의 카를 마르크스도 지적으로 엄청난 사람이다. 아돌프 히틀러도 학력은 낮지만 대단한 독서가였다. 하사관일 때 책을 하도 읽어서 영창 간 적도 있다고 할 정도로 책을 좋아했다.”

작품 중에 영웅을 소재로 한 것이 많다. 영웅을 동경하나.

“특별히 동경하진 않는다. ‘우리 시대의 영웅’이라는 말이 어릴 때는 굉장히 중요하고 큰 의미를 지닌 말이었다. 그때는 장래 희망을 물어보는 사람이 많았다. 멋있게 대답하고 싶은데 생각나는 게 없었다. 

어떤 때는 맥아더가 되고 싶다고 했다가, 어떤 때는 이순신이 되고 싶다고 했다. 그러다 한번은 고등학교 3학년인 형님한테 물었더니 ‘21세기를 흔드는 영웅이 되겠다’고 하더라. 영웅이 뭐냐고 물으니 좋은 거라고만 했다. 그래서 초등학교 2~3학년 때는 누가 장래 희망을 물어보면 ‘21세기를 흔드는 영웅이 되겠다’고 말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영웅은 한자로 꽃부리 영(英)에 수컷 웅(雄)이다. 고약하지 뭔가. 나는 영웅을 굉장히 흉측하고 엄청나고 무시무시한 존재로 생각했는데 ‘꽃부리 같은 수컷’이라니. 하하하.”

가장 존경하는 영웅은 누군가.

“젊은 시절에는 역사적으로 가장 위대한 인물로 생각한 사람이 나폴레옹이다. 적어도 스무 살 이전에는 그랬다. 

나폴레옹 그림을 많이 그렸다. 나폴레옹이 알프스산을 넘는 그림을 크레용으로 색칠해 붙여놓기도 했다.”

나폴레옹의 어떤 점에 매료됐나.

“출신이 대단하지 않은 사람임에도 자기 능력으로 뜻을 이뤄내는 과정이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그 사람 자체도 비범하지만 그에게 따랐던 행운도 부러웠다.”

문학계에서 황석영, 한때는 김지하의 대척점에 있는 우파의 대표 문인으로 꼽힌다. 실제 사이는 어떤가.

“김지하 씨와 생전에 참 친했다. 황석영 씨와도 사이가 좋다. 

황석영 씨는 나만 보면 6·25 때 잃어버린 동생 찾았다고 한다. 나보다 다섯 살 많다. 나는 원래 좌파, 우파를 안 따진다. 누가 좌파인지, 우파인지도 잘 모른다. 

우리 문단에 사실은 좌파라고 할 만한 사람이 별로 없다. 좌파적 생각에 동조하는 정도의 사람들은 있지만 옛날에 칼 들고 월북하던 수준의 좌파는 못 본 지가 30년 넘는다. 

김지하 씨는 좌파적인 사람도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사적이고 우파적이다. (사상이) 얼마나 자유롭다고. 자기가 자유로우려면 좌파이기 힘들다. 좌파는 지킬 게 많은 사람들이다. 

우파는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추구한다. 황석영 씨도 결코 좌파적이지 않다.”

뜻밖의 평가다.

“북한에 갔다 오고 김일성과 친하다는 인식 때문에 황석영 씨를 그렇게 보는데 실은 북한에서 김일성 속을 많이 썩인 것 같더라. 

김일성이 ‘동무는 왜 그리 재주가 많소’ 하며 좋아하다가도 ‘왜 그렇게 근성을 못 버리냐’고 했단다. 

그럼에도 김일성한테 사랑을 많이 받았다. 귀한 산삼을 받았을 정도다. 

한국에 갖고 오면 산삼이 성할 것 같지 않아 돌아오는 길에 먹었단다. 

요새 감기에 안 걸리는 게 산삼을 생으로 한 개 다 먹어서 그렇다고 하더라.”

김일성한테 사랑받은 이유는 뭘까.

“황석영 씨 별명이 황구라일 정도로 말을 참 재미있게 잘한다. 

만나면 김일성이 ‘동무는 어떻게 이리 재간이 좋소? 얘기 하나 더 해보기요’ 그랬단다. 하하.”

오해와 진실


예술과 문학계에 좌파 성향의 인물이 많다.

“그 말에 동의할 수 없다.”

우파 성향의 예술인이나 문학인이 목소리를 내기 어렵다는 얘기를 들었다.

“좌파는 목소리 내기를 좋아한다. 우파는 말을 안 할 뿐이다.”

지금은 우파를 대표하는 문인이지만 원래는 정치 성향이 좌파였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원래 좌파 성향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월북했지만 좌파에 대한 감정적 거리가 가깝진 않았다. 

어릴 적에는 좌파는 해서는 안 되는 나쁜 놈, 빨갱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우리 가족이 살던 경상북도에 좌익이 심했다. 

참혹한 일이 많았다. 아버지 때문에 고생하고 이런저런 이유로 좌익에 대한 감정이 결코 좋을 수는 없었다. 감성적인 면에서도 나와 안 맞았다. 좌익이 추구하는 평등은 거칠고 너무 일률적이었다. 

그들이 말하는 정의도 아주 상스러운 느낌이 있어서 거부감이 들었다. 더구나 우리 집안은 전통적으로 유교에 뿌리를 두고 있어서 좌파 논리와 맞을 수가 없었다. 

예를 들면 무조건적인 평등 같은 건 유교의 가르침에 맞지 않는다.”

좌파 단체가 시위하는 모습을 홍위병 같다고 표현해 곤욕을 치른 바 있다. 책 장례식을 벌이는 과격 시위도 일어났다. 당시 엄청난 충격을 받았을 것 같다.

“꼭 홍위병 같아 홍위병이라고 했을 뿐이다. 큰 충격을 받진 않았다. 만인이 떠들어대면 쇠도 녹인다고 했는데 그것은 당파에 기반한 시위였다.”

책 장례식 등에 충격을 받아 절필하고 외국에 갔다는 얘기가 있었다.

“그 때문이 아니라 체류 작가로 초대를 받아 미국에 3년 가 있었다. UC버클리에서 1년, 하버드대에서 2년간 (체류 작가를) 했다.”

대통령선거에서 윤석열 대통령을 지지했다. 한 인터뷰에서 그 이유 중 하나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당선해선 절대 안 된다’고 했던데.

“그렇게 언급한 적이 없는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 생각을 한 적도 없다. 이재명 후보에 대한 특별한 감정이 없었다.”

윤 대통령을 지지한 이유는 뭔가.

“어쩌다 만나게 됐을 때 하소연하듯이 ‘대선에 출마하려고 하는데 문인 중에 지지해 주는 사람이 없다. 

이재명 후보는 도올 김용옥이 지지 선언을 했는데 자기는 없다’고 했다. 내 이름을 넣어서 지지 성명을 발표해도 좋다고 했다.”

그 당시에 한 인터뷰를 보면 윤 대통령에게 원래 호감을 갖고 있었다는 느낌이 든다.

“윤 대통령이 대학에 다닐 때 청와대 부근에 삐라가 붙었다. 

‘상기 두 사람을 체포하라. 전두환, 노태우. 특이사항은 두 사람 모두 청와대 부근에 자주 출몰함’ 이런 내용이었다. 서울대 법대에서 이 사건을 갖고 모의재판을 해서 전두환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그때 재판장이 윤석열이었다. 

그 얘기를 재미있게 들어서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또 다른 재미난 얘기도 있다. (윤 대통령이) 사법고시에서 계속 떨어져 9수를 하지 않았나. 

고시 공부를 할 때 고시생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했는데 본인은 떨어지고 수강생은 붙고 그랬다고 한다. 전해 들은 거라 사실인지는 모르겠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어떻게 평가하나.

“그냥 한 시대 자기 역할이 생겨서 맡겨진 역할을 하고 간 사람이다. 그 사람은 사실 앞장서는 저돌적 인물은 아니었다.”

문재인 정권에 실망해 돌아선 인사가 적지 않다. 왜 이런 분위기가 만들어졌다고 보나.

“잘은 모르겠지만 리더십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기 때문 아니겠나. 문재인이라는 사람은 좌파를 마음대로 컨트롤하기 힘들었을 거다.”

죽기 살기로 덤비는 치열함이 없다


윤 대통령의 장단점은 뭐라고 생각하나.

“그렇게 자주 만나거나 많은 얘기를 나눈 적이 없다. 보이는 그대로가 내가 아는 전부다. 그때 잠깐 만나봤을 때 느낌은 가식이 없었고 옛날부터 알던 사람처럼 친근했다. 

잔재주를 안 부리고 엉뚱한 면이 있는 사람이다. 근래 보고 있으면 걱정스러울 때가 많다. 민심을 더 살피고, 더 엄정하고, 더 예민하게 국정을 운영해야 한다. 막 인심 쓰고 다닐 때가 아니다.”

좌파의 잇단 악재에도 우파가 힘을 결집하지 못하고 있다. 우파의 문제가 뭘까.

“우파는 단합이 잘 안 된다. 단합은 누군가가 리더십을 발휘하고 주위에서 삼삼오오 모여들 때 가능하다. 

요즘은 양 진영 모두 옛날같이 죽기 살기로 덤비는 치열함이 떨어진 것 같다. 우파적 정의도, 좌파적 정의도 보이지 않는다. 양 진영이 다 무슨 이익단체와 비슷해졌다.”

신당 창당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난 걸까.

“이준석처럼 갈 데 없는 정치인이 많이 생겨서 그런 것 같다. 근데 당이 문제가 아니다. 요새는 정치인들이 어디를 향해 가는지가 보이지 않는다. 여당도 야당도 신당도 마찬가지다. 핵심이 누군지 모르겠다. 

민주당 핵심도 이재명이 아닌 것 같다. 핵심도 없고 깃발도 없다. 이 정도면 거의 지리멸렬이다. 예전엔 김영삼, 김대중처럼 쭉쭉 끌고 가는 인물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리더십을 발휘하는 영웅이 없다?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는 인물들이 있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대표적인데 서울시장 역할에 만족해 버렸는지 스스로 위상을 높이고 이미지메이킹을 하는 데 소홀한 것 같다. 

요새는 한동훈이 눈에 띈다. 재치 있는 사람이다. 원희룡도 재주가 있는 사람이다. 학력고사에서 전국 수석을 한 게 기억날 만큼 뛰어난 사람이다.”

신당 창당을 준비하는 이준석은 어떤 영웅에 비유할 만한 인물인가.

“영웅 축에 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잔재주로 몇 번 솜씨를 부렸다. 재사(才士)인지는 몰라도 영웅 축에 들기엔 처신이 가벼워 보인다.”

한동훈에 대해선 어떻게 평가하나.

“재주가 뛰어나다. 재사인데 난세에 인물이 없으니 지금 영웅이 될 판이다. 

정말 재주 있는 사람인데 이런 사람이 시절을 잘못 만나면 맞아 죽는다.”

무엇 때문에?

“바른말을 잘하지 않나.”

한동훈을 차기 대선후보로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건 천기에 속해 단순하게 계산할 수 없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재승박덕에 안 빠졌으면 좋겠다. 재승박덕은 재주는 아주 넘치고 덕은 박하다는 뜻이다. 

사실 덕도 굉장히 중요한 재주라고 나는 생각한다. 덕은 베푼다는 것이다. 보통 재주 많은 사람이 덕이 없어 보이기 쉽다.”

40년 넘게 글 쓰는 일에 매진했다. 그 과정에서 슬럼프를 경험한 적이 있나.

“슬럼프라기보다 글을 쓰다 보면 생각이 막힐 때가 있다. 지나치게 작업량이 많아 몸이 지치면 생각도 안 나고 다 귀찮다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땐 여행을 간다든지 쉬든지 술을 마신다든지 해야 기분이 풀렸다. 

사실 여행을 갈 시간도 없어서 술로 해소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생각과 관념을 많이 모아야 할 때는 골치가 아프고 정신이 없다. 보통은 술을 마시면 괜찮아졌다. 소주를 3병 마시면 효과가 있고, 5병 마시면 상당히 괜찮고, 그 이상 마시면 상당히 시너지효과까지 있고. 하하하. 그래서 술을 끊기가 쉽지 않았다.”

소설가 안 됐으면 철학자 됐을지도

이문열 작가는 김지하, 황석영을 떠올리며 환하게 웃었다. [박해윤 기자]

담배는 쉽게 끊었나.

“안동고등학교를 1년 다니고 놀 때 검정고시를 준비하며 담배를 배웠다. 40년을 무고하게 피우다 60살이 되면서 끊었다. 

평소 담배를 60살까지만 피운다고 말했고 그걸 지켰다. 한 번에 딱 끊었다. 신기할 정도다.”

누적 판매고가 3000만 부에 달한다. 가장 많이 팔린 책이 뭔가.

“그중 2000만 권은 ‘삼국지’ 판매량일 거다. ‘사람의 아들’은 200만 권 정도 판 걸로 안다.

‘변경’은 생각보다 많이 안 나갔다. 의외로 ‘황제를 위하여’가 많이 팔렸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단편인데 많이 팔렸다기보다 많이 읽혔다. 영화로도 나왔다.”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을 꼽는다면.

“‘젊은 날의 초상’과 ‘변경’이다. 내 삶이 녹아 있고 추억이 깃들어 있어서다. 

‘변경’에는 그런 면에서 몇 군데 가슴 아픈 대목이 있다.”

직접 쓴 책 가운데 베스트와 워스트는 뭔가.

“내가 들인 공에 값을 과하게 받았다는 생각이 드는 책 중 하나가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다. 영화로 만들어지고 책도 많이 팔렸는데 집필 기간이 두 달밖에 안 걸렸다. 힘을 안 들이고 썼는데 수십만 부가 나가 부끄러운 생각이 든다. 

횡재한 돈은 돈 같지 않게 여겨지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내가 가장 공 들여 쓴 소설은 ‘사람의 아들’이다. 여기 진열돼 있는 책 중에도 ‘사람의 아들’을 쓰기 위해 산 것이 많다.

평생 글 쓰는 작가로 외길을 걸었다. 인생을 관통하는 좌우명이 있나.

“좌우명이라고 할 만한 게 없다. 살다 보니 그럭저럭 지금에 이르렀다.”

글쟁이가 안 됐다면 지금 뭘 하고 있을 것 같나.

“젊을 때는 이 일이 아니더라도 하고 싶은 게 있었다. 지금은 짐작이 안 간다. 

예전에는 글보다는 좀 더 어려운 뭔가를 전심해 연구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철학자가 됐을지도 모르겠다.”

어느덧 약속한 시간이 다 됐다. 작가로서 치열하게 산 그의 인생을 되짚다 보니 한 편의 소설을 읽은 듯한 착각이 들었다. 

내년 이맘때 또 인터뷰를 하기로 약속하며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영화 ‘버킷리스트’의 주인공처럼 살아있는 동안 꼭 해보고 싶은 목록을 작성한다면 무엇이 담길까.

“그런 것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2022년에 좀 심하게 앓았다. 진료소에서 확인한 건 아니지만 코로나19에 걸렸던 게 아닌가 싶다. 

완전히 정신이 나가 헛것이 보이고 사흘간 인사불성이 됐다. 이러다 갑자기 죽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다행히 후유증은 없다. 앞으로 꼭 해야 할 것과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있는데 아직 실행에 옮기진 못했다.”

 

김지영 기자

 

[오늘의 역사] 1943년 1월 4일 소설가 황석영 출생
문화부
매일신문 입력 2024-01-03 15:18:36 수정 2024-01-03 16:11:10가가

 

박상철 일러스트레이터

한국 문단의 대표적인 소설가 황석영이 만주 장춘에서 태어났다. 

경복고 자퇴 후 '사상계'에 '입석부근'이 당선돼 등단했다.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1970년대에 '객지' '한씨연대기' '삼포 가는 길' 등 사회적 리얼리즘 소설들을 발표했고, 1980년대엔 대하소설 '장길산'을 한국일보에 연재하여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989년 방북하여 김일성을 만난 일로 국가보안법 위반에 적용돼 5년간 징역을 살고 출감한 후 왕성한 창작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박상철 일러스트레이터 estlight@naver.com

 

팔순 황석영 “90세까지만 소설 쓸 것…앞으로 서너 권 정도?”
신준봉입력 2022. 12. 15. 00:02수정 2022. 12. 15. 0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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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황석영씨가 팔순을 맞았다. 고교 중퇴 후 사상계에 발표한 등단 단편 ‘입석부근’ 이후 60년 넘는 작가 인생이다. 

황씨는 이날 “앞으로 10년은 더 소설을 쓰겠다”고 했다. [사진 휴먼큐브]

“어떤 스님을 만났는데 내가 113세까지 산다는 거야. 근데 103세에 위기가 닥친대. 사실은 한 90세까지만 소설을 쓰려고 합니다. 앞으로 서너 권 정도는 더 쓰겠죠.”

인생 100세 시대, 팔순의 소설가 황석영씨가 기염을 토했다. 앞으로 10년간 정정하게 집필에 매진하겠다는 거다. 

13일 저녁 서울 광화문의 한 식당에서 열린 자신의 팔순 잔치에서다. 

황씨는 1943년 12월 14일 지금의 중국 길림성 장춘에서 태어나 이날이 생일 전날이었다.

황석영이 누군가. 황석영 없이 한국 현대사를 쓸 수 없다는 말은 성립하지 않아도, 황석영의 인생 역정을 통해 한국 현대사를 얼마든지 얘기할 수 있다. 그만큼 그는 작품에서나 삶의 궤적에서나 시대와 호흡을 함께 했다. 

 

현실을 가감 없이 재현하는 리얼리즘 문학에 갇혀 있지 않았고, 실정법을 어겨 가며 남북한 체제를 넘나들었다. 당대를 호령한 인기작가였고 방외인이었으며 1970년대 문화운동을 이끌었던 문화인이었다.


이날 모인 40여 명은 말하자면 그 길에서 만난 사람들이었다. 축하연 사회를 맡은 강형철 시인이 분위기를 띄웠다.

“황석영 선생 가시는 곳에는 항상 무슨 일인가 벌어진다.”

이날 갑작스러운 거센 눈발로 행사에 늦거나 불참하는 사람이 있다는 얘기였다. YS 정부에서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을 지낸 김정남씨가 “황석영 선생이 있어서 우리 사회, 민족 전체가 조금 신나지 않았나 한다”고 하자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이 “나는 좀 시끄러웠다”고 받았다. 

 

박 이사장은 1995년 김지하 시인 등과 함께 방북 사건으로 수감돼 있던 황석영을 면회한 일화를 들려줬다. 정상적인 경로로 황씨 면회가 되지 않았다. 박 이사장이 당시 국회의원이었기 때문에 특별 면회가 가능했다. 황석영·김지하 두 사람이 만나자마자 동아시아 등을 들먹이며 세 시간 동안 줄기차게 떠들더라고 했다. 나머지 면회 일행은 말 한마디 못했다는 것. 이부영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이 “그 연세에 자세히 취재해 2020년 장편소설 『철도원 삼대』를 내셨다. 계속 건필을 휘두르시길 바란다”고 하자 지난봄 미수(88세) 축하연을 열었던 방배추(본명 방동규)씨가 “황석영 선생 때문에 내가 ‘구라(걸쭉한 이야기꾼)’ 대접을 받으며 잘 먹고 산다”고 했다.

드디어 황석영씨 차례. “2년 전까지만 해도 스스로 청년 같았는데 이제는 다리 힘이 살짝 풀렸다. 야, 참 빠르다. 뒷간 갔다 왔더니 1세기가 벌써 다 간 거야.” 너스레를 떨었다.

이어 “세속적인 욕심은 없다. 내 카카오톡 프로필 문구가 ‘몇 발짝 더 가자!’인데, 그런 마음으로 작품을 써나가겠다”고 했다.

하지만 황씨의 앞날은 단순하지 않을 수 있다. 역사 강사 설민석 책을 수백만 부 판매한 휴먼큐브 출판사가 황씨의 시각으로 풀어낸 어린이 민담 시리즈(30권) 출간과 황씨 작품을 재해석해 IP를 웹툰·웹소설 등으로 가공하는 작업을 진행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이날 축하연에는 도종환 국회의원, 원혜영 전 국회의원, 최열 환경재단 이사장, 곽효환 한국문학번역원장, 채희완 무용평론가, 언론인 김선주·조선희, 문학평론가 신수정·정홍수씨 등이 참석했다.

신준봉 기자
Copyright©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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