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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MTB등산여행

화성에 행차한 정조

by 한국의산천 2021. 12. 15.

[박종인의 땅의 歷史] 284. 사도세자 아들 정조가 은폐해버린 기록들

화성에 행차한 정조 “내 아버지처럼 군복을 입고 산성에 올랐느니라”

 

[박종인의 땅의 歷史] 283. 노론을 떨게한 정조의 한마디 “난 사도세자의 아들이니라”
 금등지서의 비밀과 융건릉

경기도 팔달산 수원화성에 있는 화성장대. 장대는 군사작전을 지휘하는 사령부다.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함께 사도세자가 묻힌 현륭원(현 융릉)에 참배한 뒤 화성장대에서 야간 군사훈련을 지휘했다. 많은 의혹 속에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는 아들 정조에 의해 상당량의 사료가 왜곡되거나 삭제되고, ‘무사 기질과 현명함을 갖춘’ 군주로 변신했다. 현륭원 참배길에 정조는 ‘그 아버지를 기억하기 위해’ 어김없이 군복을 입고 말에 올랐다. /박종인

박종인 선임기자
입력 2021.12.15 03:00


재위 15년째인 1791년 마침내 화성으로 이장한 사도세자에게 정조가 첫 참배를 떠났다. 무덤 이름은 현륭원이다. 사도세자에게는 일찌감치 장헌이라는 존호를 올렸다. 출발 전 정조는 이렇게 하명했다. “옛날 온천에 행차할 때도 평융복(平戎服)을 입기도 하고 혹은 군복을 입기도 했다. 앞으로 현륭원에 행차할 때 복장도 이대로 해야겠다.”(1791년 1월 14일 ‘정조실록’) 평융복 또한 군복 일종이다. 1월 16일 한성을 출발한 참배 행렬은 진눈깨비 속에 수원부에 도착했다. 다음 날 정조는 현륭원에 올라 제사를 올린 뒤 18일 궁으로 돌아왔다. 뒤주에 갇혀 죽은 전주 이씨 왕실 비극의 주인공은 그렇게 공식적으로 복권됐다.

그리고 4년 뒤 어머니 혜경궁 홍씨 회갑을 맞아 정조가 화성으로 행차를 한다. 어머니가 탄 가마가 앞서고 군복을 입은 정조가 백마에 올라 뒤를 따랐다. 윤2월 꽃들이 만발한 봄날이었다.

참배를 마친 그날 밤 정조가 황금 갑옷으로 갈아입고 화성 산성에 올라 야간 군사훈련을 벌였다. 훗날 정조가 ‘화성장대’라 명명한 서쪽 지휘소, 장대(將臺)에서 포성이 울리자 화성 동서남북문에서 잇따라 청룡기와 주작기와 백호기와 현무기가 나부끼고 포를 응사했다. 발아래에는 야심작인 신도시 화성이 펼쳐져 있었다. 장관이었다. 만족한 정조가 시를 썼다. ‘한나라 고조 대풍가 한 가락을 연주하니 붉은 해가 비늘 갑옷에 있구나(大風歌一奏 紅日在鱗袍·대풍가일주 홍일재린포)’.(화성장대에 걸린 정조 어제시(부분))

위 글에 나오는 ‘장헌세자’와 ‘온천행차’와 ‘화성장대의 장엄함’에는 몇 가지 정조가 은폐해버린 진실이 숨어 있다. 그 진실 이야기.

[박종인의 땅의 歷史] 284. 사도세자 아들 정조가 은폐해버린 기록들
지워진 진실 1: 승정원일기


왜 영조가 친아들을 뒤주에 가둬 죽였나.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여러 종류다. 당쟁의 희생물이라는 말도 있고 아들 사도세자가 비정상적인 광기를 보인 탓에 그리 됐다는 분석도 있고 반역을 기도하다가 실질적으로 처형됐다는 말도 있다. 탕평책을 쓸 정도로 당쟁은 극심했었다. 실제로 대리청정을 하는 세자에게 사사건건 노론이 시비를 건 흔적도 보인다. 세자가 광기 속에 여러 목숨을 앗았다는 기록도 있다. 그 기록들이 저마다 당파가 다른 입장에서 쓰인 기록들이라 명쾌한 파악이 쉽지 않다. 불리한 사실을 왜곡하거나 은폐한 흔적들도 숱하게 보인다.

그런데 실록에 기록돼 있는 ‘공개적인’ 왜곡 혹은 은폐 흔적이 있으니, 바로 사도세자 사망 직후 그 아들 이산(정조)에 의해 시도된 왜곡이다.

1776년 2월 4일 왕세손 이산이 관료들 앞에서 펑펑 울면서 이리 하소연했다. 처음으로 자기 아버지 사도세자 묘인 수은묘에 참배를 하고 온 날이었다. “승정원일기에 차마 들을 수 없고 차마 볼 수 없는 말이 많이 실려 있다. 이것을 버려두고 태연하게 여긴다면, 이것이 어찌 아들의 도리이겠는가?” 그리고 왕세손은 곧바로 할아버지 영조에게 상소를 한다. 내용은 이러했다. “실록 기록은 영원히 남아 있으니 승정원일기에서만는 (사도세자 부분을) 삭제해주소서.” 그날 영조는 뒤주에 갇혀 죽기까지 경위를 적은 승정원일기를 세초(洗草·물에 씻어 없애버림)하라고 지시했다. 이리 말했다. “천민도 다 보고 사람들 이목을 더럽히며 죽은 사도세자가 보면 눈물을 머금을 것이다.”(1776년 2월 4일 ‘영조실록’) 한 달 뒤 영조가 죽었다. 그 흉악한 날에 대한 기록은 승정원일기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사라진 진실 2: 실록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히던 1762년 윤5월 13일 자 ‘영조실록’은 이렇게 끝난다. “이때에 밤이 이미 반이 지났었다. 임금이 전교를 내려 중외에 반시했는데, 전교는 사관(史官)이 꺼려하여 감히 쓰지 못하였다(傳敎史官諱而不敢書·전교사관휘이불감서).” 이날 밤 영조가 내린 전교는 세자를 서인으로 강등시키는 이유를 담은 ‘폐세자반교’다. 이리저리 얽혀 있는 사도세자 죽음의 원인을 가장 명확하게 알 수 있는 자료인데, 이 반교문이 ‘사관이 꺼려서’ 삭제된 것이다. 다른 문집에 기록된 반교문에는 ‘백여 명에 이르는 사람을 죽이고 불로 지졌고 주야로 음란한 짓을(...)’이라고 적혀 있다.(‘현고기 번역과 주해’, 김용흠 등 역주, 서울대출판문화원, 2015, p80)

사도세자가 영조에게 반역을 기도했다는 내용까지 적힌 이 반교문이 실록에서 사라져 있으니, 이는 “승정원일기를 삭제해도 실록에는 기록이 남는다”는 왕세손과 영조 논리에 맞지 않는다. 어찌 보면 이는 당연한 결과였다.

영조실록은 정조 때 편찬됐다. ‘영종대왕실록청의궤’에 따르면 정조는 편찬 작업 당시 이렇게 명했다. “1758~1762년 사이 각 부서 업무 기록과 승정원일기에는 사람들 눈을 어지럽힐 부분이 있으니 당분간 꺼내지 말라.” 그리고 이 기간 사료 분류 작업을 담당한 사람은 이휘지라는 인물 한 사람이었다.(정병설, ‘사도세자의 죽음을 둘러싼 논란’, 동아문화 58, 서울대 동아문화연구소, 2020) 대개 집단적 취사 선택으로 이뤄지는 실록 편찬 작업이 사도세자와 영조 사이 갈등이 극단으로 치닫던 시기만은 한 사람에 의해 단독으로 진행됐고, 그마저 어명에 의해 진행이 늦춰진 것이다. 이유는 ‘사람들 눈을 어지럽힐 부분이 많으니까.’ 이미 영조 또한 승정원일기 세초를 명하면서 “일기를 보더라도 다시 그 글을 들추는 자는 흉악한 무리로 엄히 징계한다”고 경고했었다.(1776년 2월 4일 ‘영조실록’) 그리하여 승정원일기에 이어 실록에서도 가장 중요한 부분은 사라지고 말았다.

정조릉인 건릉 분묘에서 바라본 정자각. 생전에 사도세자를 항상 염두에 뒀던 정조는 사후에 아버지 옆에 묻혔다. /박종인


사라진 진실 3: 영조가 쓴 묘지명
즉위 열흘 뒤 정조는 영조로부터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받았던 자기 아버지에게 ‘장헌(莊獻)’이라는 존호를 추가했다. 사도는 무엇이고 장헌은 무엇인가. 사(思)는 ‘追悔前過(추회전과·지난 과오를 뉘우침)’이다. 도(悼)는 ‘年中早夭(연중조요·일찍 죽음)’다. ‘사도’는 ‘죄를 뉘우치고 일찍 죽었다’는 뜻이다. 아들 정조에게는 끔찍하기 짝이 없는 시호다. 정조는 즉위와 함께 아버지에게 무인(武人) 기질을 지닌 총명한 사람을 뜻하는 ‘장헌’으로 존호를 올렸다.

그리고 양주 배봉산에 있던 사도세자묘 수은묘를 영우원으로 격상한 뒤 이를 화성 현륭원으로 천장했다. 그때 천장 기록이 매우 의미심장하다. 배봉산 사도세자묘 관을 꺼내던 날, 묘 속에서 영조가 직접 쓴 묘지문이 발굴됐다. 묘지문은 무덤 주인의 행적을 기록해 함께 묻은 기록이다.(1789년 8월 12일 ‘일성록’: 정병설, ‘이장 과정을 통해 본 현륭원지의 성격’, 장서각 43, 한국학중앙연구원, 2020, 재인용) 그런데 영조 때 승정원일기에는 ‘영조가 묘지문을 구술했다’는 기록만 있고 내용은 삭제돼 있다. 이 또한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정조는 본인이 새로운 묘지명을 작성하면서 ‘한 글자를 쓰면 쓰는 대로 감추고 비문이 완성되자 곧바로 묘 속에 묻어버려 세상 사람들이 내용을 알지 못했다.’ 그 덮개에는 ‘장헌세자 현륭원지’라고 새겼는데, 현장에서 ‘사도’라는 글자가 빠졌다고 하자 그제야 추가하라고 명했다.(’현고기 번역과 주해’, p262)

정조 생전에는 아무도 몰랐던 이 묘지문 내용은 정조 사후 출간된 정조 문집 ‘홍재전서’에야 수록됐다. 정조의 명(혹은 묵인)에 의해 다시 배봉산 옛 무덤에 묻힌 영조 묘지문은 1968년 기적적으로 배봉산 땅속에서 발견됐다. 묘지문에는 ‘무도한 군주가 어찌 한둘이오만 세자 시절 이와 같다는 자의 얘기는 내 아직 듣지 못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서장대야조도(西將臺夜操圖) 부분. 정조가 현륭원 참배 후 화성 산성에서 야간 군사훈련을 지휘하는 장면이다. /화성박물관 복제본

황금갑옷과 군복과 온천
아버지와 갈등 끝에 말기에 광증과 기행을 보이다 죽은 세자는 그렇게 무사 기질을 가진 위풍당당한 비운의 군주로 둔갑했다. 1793년 정조는 ‘영조 선대왕 또한 세자 죽음을 후회했다’는 내용을 담은 ‘금등지서’를 공개하면서 자기 판단과 주장에 대한 반론을 결정적으로 봉쇄해버렸다.(2021년 12월 8일 <박종인의 땅의 역사> 참조)

그리고 그가 군복을 입고 자기 아버지를 찾아간 것이다. 왜 군복이었나.

1796년 정조가 다시 화성으로 행차를 한다. 참배 후 귀경길에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는지, 이리 시를 읊는다. ‘오늘 또 화성에 와 보니/궂은 비는 침원에 부슬부슬 내리고/이 마음은 재전을 끝없이 배회하누나’ 그리고 그가 말을 이었다. “1760년 (내 아버지가) 온천에 행행하실 때 군복을 입으셨다. 기유년 이후 내가 참배할 때 군복을 입은 것은 (영정도 제대로 그리지 못한) 내 아버지를 추억하겠다는 뜻이다(必用軍服 蓋出於追述之意也 필용군복개출어추술지의야).”(1796년 1월 24일 ‘정조실록’)

기유년은 배봉산에 있는 사도세자묘 천장을 결정한 1789년이다. 1760년 온천 행행은 사도세자가 군사 호위 속에 온양온천으로 행차했던 사실을 가리킨다. 한해 전인 1795년부터 정조는 이 온천행차를 세세히 조사해 ‘온궁사실’이라는 책을 편찬하기도 했다.

정조는 이 온천 행차를 아버지 사도세자가 ‘수원부 산성에서 군사를 사열하고 연도에서는 민심을 청취한 뒤 행궁에서는 날마다 경연을 열었던’ 행차로 기억한다.(정조, ‘홍재전서’ 16권, ‘현륭원지’)

위풍당당하게 군사를 지휘하고 민심을 묻는 그 모습. 누구인가. 바로 정조다. 그 풍경이 무엇인가. 백마를 타고 군복을 입고 장엄한 행렬 속에 산성에 올라 수천 병졸을 지휘하고 연로에서 민심을 직접 듣는 화성행궁 행차 풍경이다. 사도, 아니 장헌세자가 아들 정조로 환생한 것이다. 사도세자 죽음의 진실은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그가 창조해낸 장헌세자가 스스로에게 환생했으니까.

#땅의 역사
박종인 선임기자
기억은 추억이 되고 추억은 역사가 됩니다. 땅에는 흔적이 남습니다. 그게 역삽니다 역사.

 

[박종인의 땅의 歷史] 노론을 떨게한 정조의 한마디 “난 사도세자의 아들이니라”
283. 금등지서의 비밀과 융건릉

사도세자 무덤인 경기도 화성 융릉은 홍살문-정자각-봉분 배치가 일직선이 아니다. 봉분이 한쪽으로 치우쳐 있고 방향도 다르다. 아버지 사도세자 복권을 필생의 업으로 삼은 정조가 ‘천 년 만에 있을 길지’를 고른 끝에 내린 풍수학적인 배치다. 정조는 세자를 죽인 영조가 적어내린 한(恨)을 품은 문서 ‘금등지서’를 17년 동안 숨겨놓고 노론 눈을 피해 아버지 복권 작업을 벌였다. /박종인
박종인 선임기자
입력 2021.12.08 03:00


한가위를 7일 앞둔 1793년 8월 8일 왕위에 오른 지 17년이 된 노련한 국왕 정조가 문서 한 장을 꺼내 읽는다. 듣는 사람은 전·현직 대신과 기타 문무 관료들이다. 내용은 이러했다.

“피 묻은 적삼이여 피 묻은 적삼이여, 오동나무여 오동나무여, 그 누가 충신인고. 내 죽은 자식 그리워 잊지 않노라.”

필자는 선왕인 영조였고, 아들을 죽인 사실을 후회한다는 내용이었다. 정조는 1776년 3월 자기가 왕위에 오르고 두 달 뒤 이미 이 문서를 알고 있었다고 덧붙였다. 사도세자 죽음을 방조, 묵인, 사주했던 노론세력은 목에 칼이 들어오는 느낌이 들었으리라. 사사건건 국책 사업에 시비를 걸던 노론은 입을 꿰매고 정조에게 무릎을 꿇었다.

오랜 세월 비장한 이 문서를 ‘금등지서(金縢之書)’라고 한다. 금등지서는 쇠줄로 단단히 봉한 상자에 넣은 비밀문서를 뜻한다. 정조는 등극과 함께 확보한 이 문서를, 가장 필요한 때까지 숨겨뒀다가 공개한 것이다. 다섯 달이 지난 1794년 1월 25일 정조의 야심찬 신도시 화성 행궁 터 닦이 작업이 시작됐다. 화성으로 이장한 아비 사도세자 옆에 신도시를 건설하겠다는 것이다. 금등지서에서 화성 신도시까지 숨 막히게 벌어졌던 왕실 권력 투쟁 이야기.

283. 금등지서의 비밀과 융건릉
“세손은 정치 알 필요 없음”


1764년 2월 20일 영조는 자기가 뒤주에 가둬 죽게 만든 사도세자 아들 이산(李祘·‘이성’으로도 읽을 수 있다)을 세손에 책봉했다. 그날 그가 손자에게 이리 물었다.

“혹 사도세자 일을 말하는 자가 있다면 옳은 일이냐, 그른 일이냐?” 세손이 답했다. “그른 일이옵니다.” 왕이 거듭 물었다. “그렇다면 군자냐 소인이냐?” 손자가 답했다. “소인입니다.” 영조는 이 대화를 실록에 기록하라고 지시했다.(1764년 2월 20일 ‘영조실록’) 앞에서 보나 옆에서 보나 불상사인 사도세자 죽음을 재론하지 말라는 엄중한 명이었고, 세손은 명에 순종했다.

11년 뒤인 1775년 영조는 노쇠함을 견디지 못하고 세손 이산에게 대리청정을 지시했다. 노론 세력은 “세손은 노론, 소론도 알 필요 없고 이조판서나 병조판서를 알 필요도 없으며 조사(朝事)도 알 필요 없다”고 일축했다.(1775년 11월 20일 ‘영조실록’) 당정도 국정도, 조정 일도 알 필요 없고 모든 정치는 자기들이 다 하겠다는 뜻이었다. 이른바 ‘삼불필지지설(三不必知之說)’이다. 열흘 뒤 영조가 “팔십 노인이 기력이 쇠했다”며 다시 대리청정 뜻을 밝혔다.

아니 될 일이었다. 아비 영조로 하여금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고 죽이게 만든 세력이 바로 이 노론이 아닌가. 아무리 ‘재론 불가’ 서약을 했어도, 그 아들이 세손이 되었고, 영조가 죽기 전 그 세손이 권력을 접수하게 되면 노론에는 가늠할 수 없는 거친 피바람이 몰아닥칠 판이었다.

삼불필지를 주장했던 좌의정 홍인한은 아예 왕명을 적어내리는 승지 앞을 가로막고 왕명을 듣지도 글을 쓰지도 못하게 막아버렸다.(같은 해 11월 30일 ‘영조실록’) 뒤주에 갇혀 죽어가는 아비를 목격했던 세손, 미래에 왕위를 이어받을 세손은 왕 앞을 가로막는 노론 대신들을 옆에서 지켜보았다.

창경궁에 있는 문정전. 1762년 여름 이 앞뜰에서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었다. /박종인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이듬해 영조가 죽고 경희궁에서 정조가 즉위했다. 의례적인 교문을 반포하고 대사면령을 내린 정조는 빈전 앞뜰에서 대신들을 접견하며 이렇게 일성을 던졌다.

“아(嗚呼·오호),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1776년 3월 10일 ‘정조실록’) 망나니 칼 수십 개가 한꺼번에 노론 대신들 귀에 박혔다. 넋이 반쯤 나간 채 와들와들 떨어대는 대신들에게 정조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불령한 무리들이 사도세자를 추숭(追崇)하자는 의논을 한다면 선대왕 유언에 따라 형률로 논죄하겠다.” 사도세자 죽음을 둘러싼 의혹과 의문에 더 개입하지 않겠다는 말이었으니, 노론에게는 대사면령보다 더 기쁜 복음이었다.

한 달이 채 안 된 4월 7일 정조는 자기 대리청정을 극렬 반대했던 노론 홍인한을 여산으로 유배 보낸 뒤 사약을 먹여 죽여버렸다.(같은 해 4월 7일, 7월 5일 ‘정조실록’) 노론 넋을 끄집어냈다가 집어넣었다가 또 멱살을 잡고 흔들어대는 국왕 앞에서 노론은 오래도록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사도세자 묘 이장과 현륭원
이미 등극과 함께 노론을 휘어잡은 정조는 이어 아버지 사도세자 묘 이장을 시도했다. 경기도 화성으로 옮기기 전 사도세자 묘는 양주 배봉산에 있었다. 

 

묘는 수은묘(垂恩墓)라 불렸다. 즉위 한 달 전 정조는 수은묘에 참배를 하고 ‘목이 메여 좌우를 감동시킬 정도로 눈물을 흘렸다.’(1776년 2월 5일 ‘영조실록’) 즉위 9일 후 정조는 그때까지 관리자가 없던 수은묘에 수봉관을 두고 다음날 수은묘를 영우원(永祐園)으로 격상시켰다. 존호 또한 사도(思悼)에서 ‘장헌(莊獻)’으로 바꿨다.(1776년 3월 19일, 3월 20일 ‘정조실록’)

그런데 수은묘는 풍수상 좋은 자리가 아니었다. 봉분 뗏장이 말라죽고 청룡혈이 휑하니 뚫려 있는가 하면 정자각 기와에는 뱀이 살았다. 정조는 곧바로 이장을 하려 했지만 노론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실록에는 ‘즉위 초부터 이장할 뜻을 가졌으나, 너무 신중한 나머지 세월만 끌어온 지가 여러 해 되었다’라고 기록돼 있다.

이후 자그마치 13년 세월이 흘러 금성위 박명원이 상소를 했다. 박명원은 사도세자 누나 화평옹주의 남편이니 정조에게는 고모부다.

“죽음을 무릅쓰고 아뢰나이다. 영우원 안부를 걱정하느라 깊은 궁중에서 눈물을 뿌리신 것이 얼마인지 모르며, 봄비와 가을 서리에 조회에 임해서도 자주 탄식하셨다는 것을 여러 번 들었나이다. 천장을 결정하시라.”정조가 말했다. “내가 어리석게도 지금까지 가슴속에 담아 두고 답답해하기만 한 문제였다.”(1789년 7월 11일 ‘정조실록’)

13년을 기다린 상소였다. 마침내 아버지 묘를 옮길 수 있게 된다는 생각에 정조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원래 가슴이 잘 막히는데, 지금 가슴이 막히고 숨이 가빠 말이 나오지 않는다. 잠시 쉬도록 하자.”

잠시 뒤 정조 입에서 너무나도 전문적인 풍수 이론과 배봉산 불가론 논리가 술술 튀어나왔다. 정조는 고려 때 풍수가 도선의 말까지 인용하며 “나의 뜻은 천 년에 한 번 만날까 말까 한 수원으로 결정하였다”라고 선언했다. (1789년 7월 11일 ‘정조실록’)

그해 사도세자 묘를 이장하게 된 이론적 배경과 화성 입지에 대해 정조가 쓴 ‘천원사실(遷園事實)’은 한자로 2만자가 넘었다. 게다가 정조는 “올해가 모든 운이 길한 해라 즉위 때부터 이날만을 기다려왔다”고 했다. 길년(吉年)을 잡아두고 자그마치 13년 동안 묘 이장에 대해 만반의 준비를 해왔다는 뜻이다. 자기 고모부가 상소를 올리기 전 이미 긴밀한 사전 협조를 거쳤음을 뜻하는 글이기도 했다.

그리되었다. 찌는 여름날 창경궁 문정전 앞뜰에서 뒤주에 갇혀 죽은 아비 사도세자가 형편없는 묫자리를 떠나 보무도 당당하게 왕릉에 버금가는 유택(幽宅)으로 천장을 하게 된 것이다. 이후 천장 작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석 달 뒤인 10월 4일 사도세자 유해를 담은 영가(靈駕)가 배봉산을 출발했다. 10월 16일 천장이 완료됐다. 

 

정조는 새 묫자리 이름은 현륭원(顯隆園)으로 개칭했다. 현륭원은 1899년 대한제국 황제 고종에 의해 융릉(隆陵)으로 격상되고 사도세자 또한 황제로 추존됐다.(1899년 9월 1일, 12월 7일 ‘고종실록’)

영조가 쓴 사도세자묘지문. 자기가 왜 사도세자를 죽게 만들었나에 대한 이유가 적혀 있다. 하지만 채제공에게 전해준 비밀 문서에는 사도세자 죽음을 후회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국립중앙박물관


화성 신도시 건설과 금등지서
정조는 천장 결정과 함께 이렇게 선언했다. “고을을 옮길 계획을 세우라. 백성을 옮길 일은 이미 계획돼 있느니라.”

노론이 득실거리는 한성을 떠나 권력을 과시할 신도시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천장 결정 나흘 뒤 새로운 능묘 주변인 수원도호부 백성이 10리 북쪽 팔달산 아래로 이주됐다. 그리고 능묘 주변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니, 그 도시가 화성이다.

신도시 건설 디자인은 규장각 초계문신 정약용이 맡았다. 1793년 1월 12일 정조는 수원부를 화성으로 개칭하고 부사를 유수로 승격시켰다. 그날 판중추부사 채제공을 수원 유수로 전격 임명했다. 그해 4월 정약용이 행궁 건설계획서를 제출했다. 정조는 채제공을 영의정으로 임명했다.(1793년 5월 25일 ‘정조실록’)

사흘 뒤 영의정 채제공이 상소문을 올렸다. “극악무도한 자들의 지친과 인척들이 벼슬아치 장부를 꽉 메우고 있다. 사도세자를 추숭하고 저들을 처벌하시라.”

정약용도 채제공도, 화성을 길지라고 주장한 윤선도도, 수원으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했던 유형원도 모두 남인이었다.(1793년 12월 8일 ‘정조실록’) 그 남인의 수장 채제공이 ‘조정에 가득한 극악무도한 자들을 처단하라’고 주장한 것이다. 피 냄새가 조정에 넘실거렸다. 노론인 좌의정 김종수는 “채제공은 역적 앞잡이”라며 저항했다.(1793년 5월 28일, 5월 30일 ‘정조실록’)

추석 일주일 전, 끝없는 노론 저항 속에 정조가 문무백관을 모아놓고 말했다. “영조께서 당시 도승지 채제공을 휘령전으로 부른 적이 있었다.”

휘령전은 사도세자 혼전으로 쓰이던 창경궁 문정전을 가리킨다. “영조께서 친필 문서를 채제공에게 주며 위패 아래 방석 속에 감춰두라고 했다. 이게 그 문서다.”

그리고 정조가 보여준 글이 ‘피 묻은 적삼’이었다. “즉위 직후 채제공이 이 문서를 나에게 알려줬느니라. 상소는 이 문서에서 연유한 것이니 입 다물라. 오늘 이후 시끄럽게 굴면 한 사람 한 사람 일일이 다스릴 것이다.”

17년 동안 독기를 품고 간직했던 글이었다. 즉위 일성이었던 ‘사도세자의 아들’, 노론 대신 홍인한의 처형과 현륭원 천장, 남인 중용에 이어 노론에게 던진 마지막 경고였다. 이듬해 1월 13일 정조가 화성 현륭원에 행차했다. 향을 피우며 감정을 삭이듯 낮은 소리로 울다가 무덤가로 올라가서는 오열했다. 노론 입은 열리지 않았다. 화성 신도시는 예정대로 진행됐다. 행궁은 일사천리로 준공됐다. 이상 사도세자 죽음에 맺힌 한이 신도시 개발로 이어진 ‘금등지서’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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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족불욕(知足不辱)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지지불태(知止不殆)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가이장구(可以長久) 오래도록 편안할 것이다.  - 노자 도덕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