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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강화53돈대탐방

강화 화도돈대 화도수문개축기사비

by 한국의산천 2019. 4. 20.

1. 강화 화도돈대

2. 화도수문 개축기사비

 

강화도 53개 돈대 둘러보기 클릭 >>> 강화돈대 둘러보기

 

 

▲ 대청교를 지나서 편의점 뒤편으로 화도 돈대가 있다

 

심도기행(沁都紀行)

연동 (煙洞; 현재 선원면 연리)

​- 화남 고재형(華南 高在亨, 1846년~1916년)

 

煙洞村中最一門 (연동촌중최일문)

연동 마을에는 훌륭한 가문이 있었으니

 

權都元帥奉祠孫 (권도원수봉사손)

권율(權慄) 도원수의 봉사손(奉祠孫)이라네

 

楣前敬讀丹旌字 (미전경독단정자)

문 이마의 정려 글자 경건하게 읽어보니

 

世世風聲海岳尊 (세세풍성해악존)

대를 이은 가풍 명성이 산과 바다만큼 존귀하네​​

▲ 화도 돈대

화도(花島)돈대는 1679년(숙종 5)에 쌓은 48돈대 가운데 하나로 오두돈대·광성돈대와 함께 광성보에 속했다.

원래는 화도보 소속이었으나, 1710년(숙종 36)에 화도보가 폐지되면서 광성보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방형 구조로 둘레가 129m이다.​

 

 

화도돈대[花島墩臺]

인천광역시 강화군 선원면(仙源面)에 있는 조선시대의 국방 유적.  


지정종목 : 문화재자료 
지정번호 : 인천문화재자료 제17호 
지정일 : 1999년 03월 29일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선원면 연리 54 지도 
시대 : 조선 
종류/분류 : 전적지 

 

1999년 3월 29일 인천광역시문화재자료 제17호로 지정되었다.
병자호란 후 강화도 해안지역의 방어를 튼튼히 하기 위하여 해안선을 따라 축조한 강화 53돈대 중 하나로
1679년(숙종 5) 5월에 완성된 48돈대에 이후 5개 돈대가 추가로 지어졌다.

48돈대는 황해도·강원도·함경도 승군 8,900명과 어영청 소속 어영군 4,262명이 80일 정도 걸려서 쌓았다.

돈대 축조를 기획하고 감독한 이는 병조판서 김석주였고 실무 총괄은 강화유수 윤이제였다.  

 

화도(花島)돈대 또한 이때 축조되었으며 오두돈대·광성돈대와 함께 광성보에 속했다.

원래는 화도보 소속이었으나, 1710년(숙종 36)에 화도보가 폐지되면서 광성보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돈대지 남서쪽에 화도 수문개축비가 있다. 과거에는 이 수문을 통하여 큰 배가 드나들 수 있었다고 한다.

 

간척지 벌 가운데의 작은 동산 위에 위치하는 화도돈대는

오두돈대(鰲頭墩臺)·광성돈대와 함께 강화의 7보(堡) 5진(鎭) 중 하나인 광성보(廣城堡)의 관리하에 감시소와 방어진지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남쪽으로 700보 거리에 오두돈대가 있고 북쪽으로 1,390보 거리에 용당돈대(龍堂墩臺)로 이어진다.

강화외성과 연결되어 있으나 현재 주변의 외성은 소실되었다.

동쪽으로 나 있는 수구(水口) 옆에는 강화유수 한용탁(韓用鐸)이 1803년 세운 '화도수문개축기사비(花島水門改築記事碑)'가 있다.

 

성벽터로 볼 때 평면은 사각형이었던 것으로 추측되고,

북쪽에 무너진 성벽의 석재들이 약간 남아 있는 것을 제외하면 성벽의 터만 남아 있을 뿐 완전히 소실되었다.

복원전 얼마전까지만해도 무너진 화도돈 터에 개인 과수원이 있었다고 한다

몇 년후 화도돈대 터를 복원할 때 입구에 있던 몇 그루만 남겨 놓고 축대만 복원하였다.

 

 

화도돈대가 있는 화도(花島)는 섬이었는데 대청언 간척으로 본도에 편입되었다.

마니산이 있는 화도면(華道面) 과는 전혀 다른 이름이다.

숙종 바로 전 현종대에 고려 말에 축조된 승천제와 가릉언 등을 보수하고 대청언과 장지언을 축조하였다.

 

화도돈대는 위치적으로 개화기때 큰 전쟁 당시 대청포구의 역할이 컸기에 운반선의 각종수송물자지원과 후방지원 까지 순조롭게 감당하였을 것으로 전해진다. 

간척이전 대청포구를 통해 혈구산 밑까지 들어간 배는 지금의 불은면 삼성리 안양대학교가 있는 동네 “돌성”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고 전하며

지금도 삼성교회 길 건너편에는 “돌성저수지”가 있다.

지금의 삼성1리는 옛 돌성, 매재미[馬場洞]를 합하여 조성되어 있는데 매재미에는 혈구군 시절 나라의 말을 기르던 목장이 있었기에 지어진 이름이라 전한다.

한편 돌을 쪼는 사람들이 사는 동네를 일컬어 매재미라 하였다고도 한다.

이곳 혈구산 돌성에서 질 좋은 돌을 채취하여 마차로 운반하고 배로 운송할 수 있어서 그 많은 48개 돈대의 석축을 쌓을 수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화도 갑문의 위에돈대가 있으니 “화도돈대(花島墩臺)”이다

그 형상이 마치 꽃핀 가지가 물에 떠있는 듯했기 때문이다.

 

 

화도 수문 개축기사비

▲ 대청교 옆에 세워진 화도수문개축기사비 


화도수문개축기사비 [花島水門改築記事碑]
강화유수 한용탁(韓用鐸)이 1803년

힘들고 어렵게 축조한 후 세운 비석으로 화도수문의 개축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크기는 높이 150cm, 너비 52cm, 두께 24cm의 규모이다.

 

화도수문개축기사비 전문 [花島水門改築記事碑 全文]
 
迪府治東南行二十里有海口曰花島府之大靑浦納衆水爲巨川而奔出焉與洋通故潮水又奔入焉實爲海防要地松谷趙公居留時置三石門用以淺川而限潮民國賴之北一門後頹至英廟丙戌留守相國李公回外城之築重起頹門爲虹形去趙公盖百四年也汛源衝撞旋復廢圮浸至今三十八年旁蝕不▨益深且廣南二門以其據巖故雖呀然尙存地勢反高而無用潮來益大淼漫成港淹沒民田累百頃海舶乘入十餘里爲府中父老憂久矣而前尹▨▨於財未遑余莅任翌年爲視形便 請得南庫留儲若干緝▨閏春始事先伐石於西沿乾坪由海而運以舊址之穿匯齦堮捨而退十數步定基而築之及初秋而訖費日一百五十度工九十萬有餘大小石一千八百大者專艦小者滿舠雜石又累萬擔城長七百十尺廣四十五尺高十八尺南依岸而漸殺北抱崖而張▨▨中▨二門廣各占十二尺長視城之廣高與城而齊上盖巨石上又列女堞三十其爲役也甚鉅而艱賴僚佐之賢校胥之力以迄于成於關防民業▨有裨益豈非幸歟▨自古無不獘之法天下無不境之物是門也百四十年之間凡三歷修而得有其存絶此者苟不忘乎振獘興境之政則雖千萬年長存可也是則窃有望於後人云

 

留守 西原 韓用鐸 識

崇禎紀元後三癸亥七月 日

達城 徐恭修 謹書

 

都廳中軍兼修城將前防禦使 嘉善 李晩遠 監董前五衛將 嘉善 朴宗秀 前郞廳 徐恭修 內策應監官行首敎鍊官資憲 金景國 色吏吏房 金延晦 吏房 金▨鶴 外䇿應修城監官敎鍊官出身 曺漢賢 色吏 趙宇▨ 築城兼女墻牌將敎鍊官出身 金▨鉉 敎鍊官嘉善 崔逢海 浮石兼女墻牌將敎鍊官 張智明 敎鍊官出身 金宗浮 兼督運都差員船頭別將嘉善 李時得 色吏 金昌國 拾石兼負土牌將▨▨▨▨ 劉▨▨ 閑良 崔應祿 木物將牌壯左兵房折衝 盧䅰 督運差員井浦別將折衝 田胤興 長串別將前萬戶 金景默 領運差員月串僉使折衝 趙國藺 濟物萬戶 金斗郁 鐵串別將折衝 洪鳳章 昇天別將 金應佑 貿鐵軍器監官 李疇宇 資炭監官閑良 朴秀根 燔灰牌將中營軍官 吳聖集 宇內廣城別將兼築堰 秦星復 募軍領付牌將行首捕校折衝 宋敬寛 刻▨省役捕校 吳載元 手石邊首折衝 車允大 折衝 李貴東 折衝 李福起 冶匠邊首 李大豊 金得仁 策應庫子 李廣福 旗手 胡才云 曳石等牌 姜大良

 

화도수문개축기사비 해설

 

부(府)의 관아에서 동남쪽으로 20 리에 있는 해구(海口)를 화도(花島)라 한다.

부(府) 내의 대청포(大靑浦)는 대량의 물을 받아들여 큰 개울을 이루어 세차게 빠져서 바다로 통한다.

그리고 조수(潮水)가 또 세차게 밀고 들어오니 실로 바다를 방어하는 요충지이다.

송곡(松谷) 조(趙: 趙復陽), 김상헌의 문인으로 인조 때 사마시에 합격함)공이

부사(府使)로 있을 때에 3개의 돌문을 설치하고 얕은 천을 이용하여 조수(潮水)를 제한하였다.

백성과 나라가 이에 의지하였는데, 북쪽의 문 하나가 뒤에 무너졌다.

영조 병술년(영조 42, 1766년)에 유수(留守: 수도 이회의 중요한 곳을 맡아 다스리던 정이품 외관벼슬)

상국(相國: 삼정승을 통틀어 이르는 말)공 이회(李回)가 외성(外城: 성 밖에 겹으로 쌓은 성, 나성)을 다시 쌓을 때,

무너진 문을 홍예(虹霓: 무지개) 모양으로 세우니, 조(趙)공이 떠난 지 대략 104년이다.

 

조수(潮水)와 큰 비에 부딪혀 얼마 안 있어 다시 무너져 물에 잠겼다.

이후 지금까지 38년이 지났는데, 옆은 침식되었고, 아래는 ▨한 것이 더욱 심하다.

또 폭이 넓은 남쪽의 두 개의 문은 바위에 의지하고 있는 까닭에 비록 우뚝이 아직도 보존되어 있으나, 지세가 도리어 높아 쓸모가 없다.

조수(潮水)가 밀려오면 물이 아득한 항구를 이루고, 백성들의 밭 수백 이랑이 물에 잠기니, 바다에서 배를 타고 10여리나 들어올 수 있다.

부(府) 내의 부로(父老: 동네의 나이 많은 남자)들이 오래도록 걱정하였으나,

전임 윤▨(尹▨)은 재력이 부족해 돌아볼 겨를이 없었고, 나도 부임한 다음해에야 형편을 알았다.

남쪽 창고에 남아 있는 약간의 돈으로 윤달 봄부터 일을 시작하였다.

먼저 서쪽 연건평(沿乾坪)에서 돌을 다듬어,

바다를 따라 운반해, 뚫리고 물이 돌아나가 비탈을 갉아 먹은 곳을 버리고, 십 수 보(步) 뒤쪽에 터를 정해 쌓았다.

초가을에 이르러 공사를 마치니 150일만의 일이다.

공사를 헤아리니, 크고 작은 돌 90만개 중 큰 돌 1,800개는 오로지 군함(軍艦: 전투에 참여하는 배)으로 옮기고, 작은 것은 거룻배에 채워 옮겼다.

막돌은 또 수 만 번 지어 날랐다.

성(城)의 길이는 710척(215.13m), 폭이 45척(13.63m), 높이가 18척(5.45m)이다.

남쪽은 언덕에 의지한 채 점점 줄어들고, 북쪽은 감싸고 있는 벼랑이 날개를 펼친 듯하다.

가운데에 두 개의 문을 내었는데, 너비는 각각 20척(6.06m)이고 길이는 성의 폭과 같으며 높이도 성과 같다.

위는 거대한 돌로 나란히 덮었으며,

그 위에 여첩(女堞: 성가퀴로 성 위에 낮게 쌓은 담, 여기에 몸을 숨기고 적을 공격하거나 감시한다) 30개가 줄지어 있다.

 

이 공사는 대단히 크고 어려운 일이었는데,

요좌(僚佐: 속관)의 현명함과 장교와 서리들의 힘에 의지해서, 관(關)을 방어하기에 이르렀고

백성들의 일에 보탬이 되니, 어찌 다행스런 일이 아니겠는가?

예로부터 천하에 폐해지지 않는 법이 없고, 무너지지 않는 사물이 없다 했는데, 이 문은 140년간에 세 번의 수리를 거쳐 그 보존과 끊어짐을 이었다.

이는 참으로 잊지 못할 일이다. 떨치고 이지러지며 일어나고 무너지는 정치라도 비록 천만년이 지나도 길이 보존하는 좋을 것이다.

이를 후인에게 바라는 바이다.

 

 유수(留守) 서원(西原) 한용택(韓用澤)이 지음.

숭정(崇禎) 기원후 세 번째 계해년(순조 3, 1803년) 7월 일

달성(達城) 서공수(徐恭修)가 삼가 씀.

 

화도수문개축기사비(花島水門改築記事碑)

강화도의 간척사업과 강화외성의 축성과정을 잘나타내고 있는 기사비(記事碑)로

1803년(순조3)에 세워졌고 조복양(趙復洋, 1609년~1671년)이 석문을 설치하여 조수를 막았고

영조 대에 외성을 축조하면서 다시 수문을 쌓았다는 기록이 새겨져 있다

 

▲ 왼쪽은 대청교 오른쪽은 수문

심도기행(沁都紀行)

8. 대청교(大淸橋)

 - 화남 고재형(華南 高在亨, 1846년~1916년)

 

溪流東走大淸橋 (계류동주대청교)

시냇물은 동쪽으로 흘러 대청교를 지나는데

 

十里相通花島潮 (십리상통화도조)

십리나 떨어져 있는 화도호와 통하네

 

滿月一坪瀦水濶 (만월일평저수활)

만월평의 저수지는 넓기도 넓으니

 

年年稼事奏豊謠 (년년가사주풍요)

해마다 농사 잘 되어 풍년가를 부르네


○ 혈구산 이남의 시냇물은 모두 대청교(大淸橋)로 흘러가는데,

화도(花島) 사이의 조수와 서로 통하였기에 주민들이 제방을 쌓아 대청포(大淸浦)·만월포(滿月浦)를 만들어서 가뭄 걱정을 하지 않게 되었다.

화도 갑문의 위에는 하나의 돈대가 있으니 ʻ화도돈대(花島墩臺)ʼ이다. 그 형상이 마치 꽃핀 가지가 물에 떠있는 듯했기 때문이다.


○ 현종 갑진년(1664)에 유수 조복양(趙復陽)24)이 제방 등 수문을 쌓았다. 그 후에 유수 이은(李溵)25)이 수문을 수리하고 기문을 지었다.

그 기문은 다음과 같다.

“화도수문은 심부(沁府) 남쪽 20리 떨어진 곳에 있으며, 광성보의 북쪽에 있다. 수문의 이름이 화도(花島)인 것은 화도돈대의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문의 외부에는 오두양(鼇頭洋)이 있으며 바다 안쪽으로는 대청포(大淸浦)가 있다.

 

이 섬의 여러 계곡에서 내려오는 물은 바다와 포구의 좌우로 모이고 또 수백결의 민전이 있어서 ʻ만월평(滿月坪)ʼ이라고 하는데

선원면·인정면·불은면 3면의 백성들이 이곳에 의지해서 생활하고 있다.

1백년 전 갑진년(1664,현종 5)에 조복양(趙復陽)이 유수로 재직할 때에 연변에 수십 리나 되는 긴 제방을 쌓아서 태풍에 대비하고

조수가 전지(田地)에 침범하는 것을 막았으므로 ʻ포구ʼ라고 하였으며,

3개의 수문을 설치해서 안쪽의 물을 밖으로 빼냈으므로 ʻ화도 수문ʼ이라고도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문을 설치한 것이 어찌 절실하다 하지 않겠는가?

 

수문을 삼가지 않으면 내지의 물이 넘칠 뿐만 아니라 바다의 조수가 침범하게 되어 큰 제방이 무너지면 바다를 지키는 일이 허망해지고

국가의 유사시를 대비하는 일도 말할 수가 없으며 또한 3면에 거주하는 백성들의 생명도 매우 위태롭게 되므로 국가를 위해서나 백성을 위해서나 폐할 수 없는 것이다.

 

수문을 지키는 것은 이처럼 중요한 일이다. 최초로 설치할 때에는 바위를 깎아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는 큰 돌로 덮어서 너비가 십여 보,높이가 한 장쯤 되었다.

그 공력이 매우 컸으며 그 규모와 제도 또한 장엄하였다.

그러나 안으로는 포구이고 밖으로는 조수가 있어서 서로 충돌하여 그 위치가 매우 험하며,문의 곁으로는 또 흙이 있어서 흙에 물이 스며들어 틈이 생겼다.

이 때문에 1백년 전에 처음으로 수리했을 때에는 그 기간이 얼마나 걸렸는지 알 수가 없다.

북쪽의 한 문에서 물길이 무너졌고 여름 장마에 막혀 성안으로 범람해서 경작지가 무너질 지경에 이르러 오래도록 폐기될까 우려해서

거주하는 백성들이 수리를 요청한 것이 여러 번이었지만 시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유수로 부임한 처음에 그 형편을 살펴보았더니 공력이 클 뿐만 아니라 썰물 후에야 비로소 공사를 시작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조수가 하루에도 여섯 번 드나드는데 공사 시각이 매우 제한적이어서 그럭저럭 세월만 가고 오래도록 복구하지 못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관방이 중요하고 백성들의 생업이 걸려있는 만큼 이대로 둘 수 없어서 재물을 모아 성 수축 시기에 맞추어 한꺼번에 공사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붕괴 위험은 북문 옆의 흙에 물이 스며드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예전에 쌓았던 것을 모조리 걷어내고 물길을 터놓고서 돌을 많이 가져다가

옛것과 새것을 섞어 좌우의 무사석(武砂石)과 훤선(楦墠) 등은 두꺼운 장방형의 돌받침으로 길게 엇갈려 쌓고

위에는 다듬은 돌을 사용해서 홍예(虹霓)를 만들어 흙이 무너지는 병폐를 방지하고 너비를 약간 넓게 해서 물의 출입을 편리하게 하자

일몰 후에도 물이 넘쳐 붕괴되는 근심을 면하게 하였다.

 

공사를 시작하자 백성들이 스스로 와서 공사에 참여하겠다고 한 자들 중에서는

단지 하루만 일할 것을 허락하였으므로 백성들을 위한 정사가 매우 절실하고 급했음을 알 수가 있다.

병술년(1766,영조 4) 4월 13일에 공사를 시작해서 6월 10일에 공사를 마쳤다.

공사가 끝나갈 즈음 감독·장교·공장 등을 모아 공사 장소에서 회식을 시켜주었다.

 

아!조공이 처음 공사할 때 수십 리나 되는 긴 제방을 3개의 수문과 동시에 시행하였으니 그 비용이 많이 들었음을 알 수 있다.

수문에 돌을 사용하지 않은 것은 재력이 부족해서이다. 내가 쌓은 것은 옛 제방 중에서 무너진 곳을 보수했으므로 수리한 곳은 한 개의 수문뿐이다.

공권력이 매우 적게 들었고 이미 망가진 곳을 보아서 돌홍예를 설치하였으며 남쪽의 두 문은 망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돌을 덮는 제도를 따랐다.

후에 개수할 때에도 이 제도에 따라 3문을 모두 돌로된 홍예문을 완성한다면 해안 방어와 백성들의 생업은 영원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것을 기록하는 것은 공사 완료 뿐만 아니라 장차 후인에게도 알리고 싶어서이다.”

 

* 조복양(1609∼1671)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중초(仲初), 호는 송곡(松谷).
강화유수로는 1664(현종5) 1월에 부임하여 1665년 2월에 이임하였다.
* 이은(1722∼1781)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치호(稚浩), 호는 첨재(瞻齋).1766~1767년 강화유수로 재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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