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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강화53돈대탐방

강화 오두돈대 강화외성 강화전성

by 한국의산천 2019. 4. 20.

강화 오두돈대 강화외성 [강화전성(江華 塼城)]

 

강화도 53개 돈대 둘러보기 클릭 >>> 강화돈대 둘러보기

 

 

오두돈대

 

247. 오두동(鰲頭洞)

 

- 화남 고재형(華南 高在亨, 1846~1916)


一村花樹列成庄

꽃나무로 동산 이룬 오두리 마을에선,


於讀於耕日月長

글 읽기와 농사일로 세월을 보내네.


最愛此中丹桂籍

그중에서 소중한 일은 과거에 급제한 일이니,


永承雨露放餘光

나라 은혜 길이 이어 큰 빛을 발하리.


○ 불은면 오두리 터진개 서북쪽 안산이 마을이다.

오두동(鰲頭洞)에는 제주 고씨(濟州高氏)가 많이 살고 있는데,나와 같이 영곡공(靈谷公)과 관란재공(觀瀾齋公)의 후손이다. 

 

 

▲ 자라머리를 닮은 지형에 세워진 오두돈대(鰲頭墩臺)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오두리 산1번지

 

돈대가 위치한 지역은 자라의 머리와 비슷하게 생겼다 하여 오두리라고 부르는데, 바다 쪽으로 돌출되어 있어 염하의 조망이 매우 뛰어나다.

서면을 제외한 나머지 면이 급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남쪽 아래로 조선시대 강화 8경의 하나인 오두정이 있던 바위와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20호인 강화전성이 지난다.

원형돈대로 직경은 32m, 벽체의 두께는 3.5m이다. 동쪽과 남쪽으로 4개의 포대를 배치하였고 출입문은 서북쪽으로 두었다.

처음에는 화도보(花島堡)에 속했으나 1759년(영조 35)에 광성보 관할 하에 들어갔다.

조선 숙종 5년(1679) 3월 승군 8,000여명과 어영군 4,000여명을 투입하여 80일 만에 공사를 끝냈으며,

당초 화도보의 관할이었다가 후에 광성보 관할로 이속되었다. 돈대 내부에 건물을 두어 창고와 수직(守直)하는 병사의 숙소로 삼았다

 

원래 오두돈대가 있었던 자리는 오두정(鰲頭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오두정은 자라의 머리와 같은 지형에 설치되어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1602년(선조 35년) 정3품 당상관인 첨지중추부사를 지낸 송인범(宋仁範)이 지었다고 한다.

 

 

 

248. 오두어화(鰲頭漁火)

 

- 화남 고재형(華南 高在亨, 1846~1916)


碧鰲頭上白鷗翩

오두리 푸른 하늘에 백구가 날아오르고,


漁火如星海色鮮

고기잡이불 별처럼 빛나니 바다색이 선명하네.


認是權公開別墅

권율 장군 세운 별장 있음을 알게 하니,


疎松晩翠舊堂前

만취당 앞에는 큰 소나무가 서있네.


○ 도원수 권율(權慄)530)의 별장이 오두정(鰲頭亭)에 있었는데 그당의 이름을 만취당(晩翠堂)이라고 하였다.
○ 오두의 고기잡이불도 강화부 10경(景)의 하나이다.

권율(1537∼1599) 조선 중기의 문신·명장. 본관은 안동. 자는 언신(彦愼),호는 만취당(晚翠堂)·모악(暮嶽).

 

 

 

 

오두돈대는 지형 이름에서 나타나듯이 자라의 머리(오두)와 같은 지형에 설치되어 있으며

원형으로 지어졌으며 지름이 32m에 달한다

 

 

 

 

 

 

 

 

 

 

 

 

 

강화외성 (강화전성)

 

 

 

강화전성은 불은면 오두리의 오두돈대 동남쪽과 성곽 일부를 벽돌로 만든 성벽입니다.

다듬은 돌을 쌓아 기초를 마련하고 그 위에 벽돌로 쌓아 만들었습니다.

 

본래 강화외성은 고려 강화도읍기 때는 흙으로 쌓은 토성이였으나 조선 영조 때 강화유수 김시혁의 건의로 벽돌로 다시 쌓았습니다.
전성은 우리나라에는 거의 없습니다.

강화전성은 지금은 겨우 2백여 미터 정도 남아있을 뿐입니다. 그 희소성으로 역사적 가치가 높은 곳입니다.

 

현재 남아 있는 전성 성곽의 일부 모습은 오두돈대 남쪽 아래의 음식점 주차장 해안가 성곽에서 볼 수 있다.

강화전성은 현재 사적 제452호 강화외성의 유구 일부로 강화외성의 유구가 대부분 훼손되어 거의 망실되었지만 원형에 가까운 유구를 찾을 수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1872년(고종 9) 당시의 강화외성은 현재의 신설된 해안 도로를 따라 형성되어 있는 모습으로 유추할 수 있다.

 

현재는 강화전성 성벽의 일부가 고목의 뿌리에 의해 성곽에 깊이 파고 들어있음을 볼수있다

 

강화전성(江華 塼城)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20호로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오두리 563번지에 위치한다.

강화 외성에 속한 성으로, 전성(塼城)은 벽돌로 쌓은 성을 말한다.

 

강화외성

해안에 쌓은 외성 일부가 남아 있다.

강화외성은 1233년 몽골의 침입에 맞서기 위하여 강화의 동쪽 해안 방어를 위해 염하를 따라 적북돈대부터 초지진까지 쌓은 성이다.

둘레는 무려 23km에 이르며 문루 6개소, 암문 6개소, 수문 17개소를 설치했다고 한다. 

 

 

 

 

강화 외성(江華外城,  대한민국 사적 제452호) 

"고려사(高麗史)" 성보에​ 고종20(1233년) 강화에 외성을 쌓았다​

​고종37년(1240년) 처음으로 강도(江都)에 중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2960여 간이며 크고 작은 문이 도합 17개였다

고종39년(1242년) 처음으로 승천부에 성랑(城廊; 성의 망루)을 만들었다​

​"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1237년(고려고종24)에 강화외성을 쌓았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1233년~1235년(고려 고종20~22) 중성을 방어하기 위한 1233년부터 축조하기 위하여 1235년12월 각 주현(州縣)의 일품군 {一品軍; 공역군(公役軍)}을 징발하여 강화 동쪽 해협의 적북돈대에서 길상면 초지리 초지진까지 약23km에 걸쳐 축성된 토성으로 수전에 취약점을 지닌 몽고군이 바다를 건너 공격하지 못하게한 방어시설입니다

 

조선 시대의 강화외성은 높이 20척, 폭은 5척으로 문루는 월곶진의 조해루​(朝海樓), 진해사 앞의 복파루(伏波樓), 관문역활 갑곶진의 진해루(鎭海樓), 용진진의 참경루(斬鯨樓), 덕진진의 공조루(拱潮樓), 광성보의 안해루(晏海樓)의 6개의 문루와 암문(暗門)6개소 수문(水門)17개​가 설치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1618년(조선 광해군10) 강화 외성 보수

​1677년(숙종3)1636년 병자호란때 허물어진 외성을 석축으로 다시 축성함

1743년~1744년(영조19~20) 강화유수 김시혁이 갯뻘층에 머리돌을 기초로 쌓고 그 위에 머리돌을 아시 전돌(벽돌)을 이용한 전축성(塼築城)으로 보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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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족불욕(知足不辱)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지지불태(知止不殆)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가이장구(可以長久) 오래도록 편안할 것이다.  - 노자 도덕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