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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강화53돈대탐방

강화 손석항돈대 손돌목돈대 광성포대

by 한국의산천 2019. 4. 20.

강화 손석항돈대 (손돌목돈대) 광성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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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석항돈대(江華孫石項墩臺)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53-1

광성보 경내에 위치한 돈대로 동향이며 동남쪽으로 포좌 3문을, 서벽 중앙에 출입문을 배치하였다.

남북간 직경은 30m, 동서간은 34m로 평면 원형에 가까운 돈대이며, 둘레는 108m에 달한다. 

 

조선 숙종 5년 (1679) 3월 승군 8,000여명과 어영군 4,000여명을 투입하여 80일만에 공사를 끝냈으며,

현재는 광성보의 경내에 위치하지만 원래는 덕진진의 관할이었다.

돈대 내부에 건물을 두어 창고와 수직(守直)하는 병사의 숙소로 삼았다. 

 

 

 

손돌목돈대는 손석항돈대라고도 하는데 구릉 정상부에 둥그런 형태로 축조됐다.

강화 일대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지점에 위치해 전시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돈대다.

 

손돌목돈대는 고려 고종 때 뱃사공 손돌의 이름을 붙여 지은 것이다.

뱃사공인 손돌은 자신의 배에 임금을 태우고 가던 중 물길이 요동치고 배의 운행이 위험하자 몽골의 첩자로 오해한 임금의 명령으로 처형된 인물.

그러나 손돌이 물길을 잘 아는 충직한 뱃사공이었음을 뒤늦게 알게 된 임금이 손돌의 묘를 만들어주고 그 앞바다를 손돌목으로 부르게 된다.

 

 

 

 

 

 

 

손석항이란?

손돌목의 또 다른 이름이다.

고려 고종에게 뱃길을 안내하다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손돌(孫乭)이고 그 이름을 따서 손돌목이라 부른다.

다다쪽으로 튀어나온 지형에 곶(串)이나 목이라 부르는데 여기서는 목 항(項)을 붙였다.

 

신분이 낮은 사람이니 한자로 바꾸는 과정에서 손돌(孫乭)이 되기도 하고 돌 석(石)을 붙여 손석(孫石)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강화부전도에서는 손돌항(孫乭項), 통진부 지도에는 손석항(孫石項)으로 적었고 대동여지도에는 ‘덕포(德浦)’, ‘손량항(孫梁項)’으로 표시하였다.

 

손돌목과 강화도 사이는 강처럼 보이지만, 사실 바다이다. 물살이 세고 지형에 익숙한 사람이 없으면 쉽게 지나갈 수 없는 곳이다.

예를 들자면 울돌목(명량), 태안의 안흥량, 인당수 같은 곳도 마찬가지이다.

 

고려 고종이 개성에서 강화로 오는 과정에서 손돌이 뱃길을 잘못 안내한다는 오해를 받아 죽은 것이다.

현재 손돌의 묘가 만들어진 곳이 덕포진이다.

덕포진 남쪽에 있는 포구가 대명포구(대명항)이고 이곳에서 강화도를 가려면 초지대교를 건너면 된다.

 

 

 

손돌에 관한 일화 

광성보 용두돈대 앞 손돌목은 물살이 세기로 유명하다.

손돌목의 손돌은 고려시대 몽골의 침입으로 강화로 도망가던 고종 임금을 배에 태우고 가던 뱃사공의 이름에서 따왔다.

고려 고종 임금이 이곳을 지날 때 배가 심하게 요동치자 손돌이 자신을 죽이려고 일부러 그런다고 생각해 죽이고 만다.

손돌은 죽어가면서까지 임금이 건너갈 수 있도록 "바가지를 물에 띄우고 그것을 따라가면 반드시 뱃길이 트인다"고 말해줬다.

자신이 오해한 것을 안 고종 임금은 손돌을 후하게 장사지내 주도록 했다.

 

지명과 관련한 이런 일화를 알고 있던 조선 후기 명장 양헌수 장군은 병인양요 당시(서기 1866년) 프랑스군에 점령당한 강화를 탈환하러 가는 길에

김포 덕포진 북쪽 해안에 있는 손돌의 묘를 찾았다.

   
양 장군은 "손돌님의 영혼이 있다면 조선군이 안전하게 건너갈 수 있게 해 달라. 이곳을 지나는 적선도 모조리 전복되어 전멸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이 기도가 받아들여진 것인지 물살이 세기로 유명한 손돌목을 아무런 피해없이 건너 덕진진을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당시 조선군은 신문물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어서 사거리가 100여보에 불과한 총을 가지고 있었던데 비해

프랑스군은 5배가 넘는 화력을 가지고 있는 총을 보유하고 있었다. 화력이 월등히 좋은 화포도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족산성 전투에서 양장군은 프랑스군에 큰 피해 주며 40여일만에 프랑스군을 몰아내는데 성공했다.

 

 

 

 

▲ 손돌목 돈대에서 염하 건너 보이는 손돌의 묘  

 

240. 손돌목(孫石項)

 

 - 화남 고재형(華南 高在亨, 1846~1916)


孫石荒墳倚斷阿

손돌의 황량한 무덤이 절벽 위에 있는데,


舟人指点酹而過

뱃사람 그곳 가리키며 술 따르고 지나가네.


年年十月寒風至

해마다 시월 되면 찬바람이 불어오니,


知是冤魂激激波

원혼이 격렬하게 물결쳐서 그러는 것이려니.


○ 다음과 같이 전한다.

고려왕이 몽고의 군대에 쫓겨서 배를 타고 이곳을 지나다가 바다길이 구부러지고 막혀 전진할 수 없을 듯한것을 보고는

사공이 왕을 속였다 생각하고 목을 베라고 명하였다.
그의 시신은 바닷가 산등성이에 묻혀있는데, 10월 20일이 되면 회오리바람이 몰아치는데 대체로 손돌이 죽은 날이라고 한다.

그 아래를 배로 지나는 자들은 술을 붓고 간다.

 

 

241. 손장군(孫將軍)

 

 - 화남 고재형(華南 高在亨, 1846~1916)


卉寇何年到窄梁

오랑캐가 어느 해인가 착량에 들어와서,


許多戰艦夜烟光

수많은 전함에서 밤에 불을 밝혔었네.


可憐孫將隨流矢

가련하다 손광유 장군 화살에 맞았으니,


滿岸丹楓落落霜

강 언덕 단풍잎 지고 서리가 내렸도다.


○ 고려 신우 3년 정사년(1377)에 왜인(倭人)들이 밤중에 강화의 착량(窄梁) 침입하여 전선 50여 척을 불질렀고, 죽은 자들이 천여 명이었다.

이때 만호 손광유(孫光裕)519)가 이곳에서 흐르는 화살에 맞아 죽었다.

착량은 손돌목(孫石項)이라고 하는데, 당시 규율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도적 떼들이 마을마다 쓸고 지나갔다고 하였다.
왜인에 잡혀갔다가 돌아온 자가 말하기를 ʻ적들이 두려워하는 이는 머리가 하얗게 센 최 만호(崔萬戶)뿐ʼ이라고 하였다.

머리가 하얀 최만호는 곧 최영(崔瑩) 장군이다.

 

손광유(생몰년 미상) 고려 말기의 무신.

1376년(우왕 2) 밀직부사·해도상원수(海道上元帥)를 겸임하였다가 1377년 만호(萬戶)가 되었다.

이때 왜적이 밤에 착량(窄梁)에 들어와 많은 배가 불에 타고 죽은 사람도 대단히 많았는데,

이는 최영(崔瑩)이 '착량강 어귀에만 머물며 군대의 위엄을 보이고 바다에 나가지 말라'고 한 지시를 어기고

착량을 떠나 술을 마시고 깊은 잠이 들었다가 참패를 당한 것이었다.

 

 

 

 

덕포진

손돌묘 참고 사진

 

 

 

 

 

 

 

 

지족불욕(知足不辱)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지지불태(知止不殆)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가이장구(可以長久) 오래도록 편안할 것이다.  - 노자 도덕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