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강화 승천보
2. 고려 고종 사적비
승천보와 고려 고종 사적비를 찾아 가는 길
▲ 들판 끝에 멀리 보이는 승천보
민간인 출입통제 지역이기에 가까이 다가 가지 않았다.
승천보(江華 昇天堡)
인천광역시 강화군 송해면 당산리 397번지 일대
승천보가 있던 승천포 이 지역은 고려시대 개성지역과 왕래하던 전통적인 포구지역이었으며,
갑곶나루와 함께 강화도에서 배를 댈 수 있는 몇 안되는 지역이다.
현 당산리 박촌마을 동쪽 끝자락 언덕 위에 있었다는 말이 전한다.
19세기 중엽에 그려진「강화관방도」에 따르면 승천보에는 동헌과 내사, 삼문이 모두 갖추어져 있었는데
동헌은 3칸의 기와지붕으로, 내사는 ‘ㄱ’자 건물로 꾸몄다.
효종 8년(1657) 신설되었던 승천보에는 종9품의 별장과 군관 25명에 토졸 16명을 배치시켰으며,
휘하에 석우, 빙현, 소우, 숙룡, 낙성돈대 등 모두 5개의 돈대를 관할하였다
한국 역사 연구회
함께하는역사 [강화이야기] 승천포
By 홍순민 [2007년 12월 26일]
승천포
홍순민(중세사 2분과)
염하가 뚫린다는 것은 조강이 살아난다는 뜻이다. 조강이 살아난다는 것은 D.M.Z.가 걷히고 남과 북이 연결되는 것, 통일을 뜻한다.
그 날이 오면 인천서 염하를 지나 오른편으로 돌아 조강을 거슬러 한강을 치달아 서강으로, 마포로, 용산으로 이어지는 뱃길이 열릴 것이다.
인천서 서울 가는 뱃길만 있는 것이 아니다. 염하 끝에서 왼편으로 돌면 조강을 타고 내려가는 뱃길도 있다.
조강을 타고 내려가는 뱃길과 함께 조강을 건너는 뱃길도 이리저리 적합 곳을 따라 열려 있었다.
우리는 지금 이 뱃길을 거의 잃어 버렸다. 잃어 버린 것만이 아니고 잊어 버렸다.
그 뱃길을 찾으려면 이제는 하는 수 없이 옛 지도들을 뒤져 볼 수 밖에 없다.
조강을 끼고 열려 있던 뱃길 가운데 가장 큰 것이 예성강을 거슬러 연안(延安), 배천(白川), 개성(開城)으로 가는 뱃길이다.
예성강 하구의 벽란 나루(碧瀾渡)는 고려 시대 제일의 국제 무역항이었다.
옛 지도들과 지지(地誌)들을 이리저리 뒤적거리다가 한 지명이 번쩍 눈에 띄었다.
강화의 북쪽 해안 가운데 쯤에 있는 승천이라는 이름이다.
기록에 따라서는 ‘昇天’이라고도 하고 ‘升天’이라고도 되어 있지만 앞의 것이 정확한 이름인 듯하다.
강화읍에서 이십리 되는 승천에는 승천진(昇天津) 또는 승천포(昇天浦)가 있었다.
‘진(津)’은 나루요 ‘포(浦)’는 포구니 결국 같은 뜻, 배 닿는 곳이다.
{강화부지(江華府志)}라고 하는 정조 연간에 만들어진 읍지를 보니 양서(兩西),
곧 황해도, 평안도에서 서울로 가는 선박들은 모두 이 곳을 거쳐갔다고 하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꽤 컸던 뱃터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대동여지도} 등 몇 지도에는 그 승천포에서 조강을 건너 맞은편 풍덕 땅에도 같은 이름, 승천포라는 지명이 보인다.
두 승천포는 서로 맞보며 건너 다니는 나루였다.
이 승천나루가 고려 시대 개경에서 강화를 잇는 뱃길이었을 것임은 자명하다.
풍덕에서 개성은 사십리 길이다. 그렇게 보면 강화에서 개성은 줄잡아 70리가 못되는 거리이다.
강화에서 서울이 140리니 그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 강화에서 인천보다도 가깝다. 이렇게 보니 고려 시대에 개경에서 강화로 온 것이 저절로 이해가 되었다.
강화의 그 승천포는 지금도 50,000:1 지도에 이름이 살아 있다.
강화군 송해면(松海面) 당산리(堂山里) 박촌말 승천포. 그 곳에는 승천포 돈대도 있는 것으로 표기되어 있다.
48번 국도를 타고 강화읍을 지나쳐 가다가 송해면 솔정리에서 오른쪽으로 갈라지는 301번 지방도로를 따라가면 그 끄트머리 조강가에 있다.
반가운 마음에 차를 달려 갔다. 그러나 지금 승천포는 없다. 아니 죽은 상태로나마 거기 있겠지만 갈 수가 없었다.
가다가 보니 어딘가 검문소에서 해병대 아저씨들이 길을 막는다. 관계자가 아니면 더 이상 갈 수가 없단다.
왜 갈 수가 없느냐고 물었더니 여기서부터는 민통선이란다.
민통선. 나는 민통선이 철의 삼각지 철원 어디나 아니면 임진각 돌아오지 않는 다리 그런데만 있는 줄 알았다.
한데 강화에도 민통선은 있다. 이렇게 강화로 통하는 중요한 길, 뱃길들은 콱콱 막혀 있다.
[공유]
고려 고종 사적비
130. 승천포(昇天浦)
- 화남 고재형(華南 高在亨, 1846~1916)
昇天浦口問歸船
승천포 나루에서 돌아가는 배 물어보니,
或指開城或漢川
어떤 것은 개성이요 어떤 것은 한강을 가리키네.
念昔高皇麾二將
옛적에 태조께서 두 장수 거느리고,
倭氛掃盡此津邊
왜구를 소탕한 곳이 바로 이 나룻가네.
○ 고려 우왕 4년 무오년(1378)에 우리 태조 고황제(高皇帝)와 최영(崔瑩), 양백연(楊伯淵)이 승천부(昇天府)에서 왜병(倭兵)을 크게 격파하였다.
○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이 이곳을 건너면서 시를 지었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바람 물결 모질어 막지도 못하는데(遮莫風濤惡),
호기를 부리는 손과도 같지 않네(無如客興豪).
파란 하늘은 작은 돌에 기대 있고(靑天欹片石),
하이얀 저 눈은 봄 옷을 씻는구나(白雪洒春袍).
고래악어 보고서는 크게 한 번 웃어주고(一笑看鯨鱷),
술내오라 명하고서 노래를 부르네(長歌命酒醪).
외로운 배 아무리 실세했다 하지만(孤槎縱失勢),
저 높은 하늘을 해치지는 못하네(未害上天高).”
○ 포음(圃陰) 김창집(金昌緝)의 시는 다음과 같다.
“마니산을 나막신 신고 가고(摩山收蠟屐)
승천포 가에서 고기를 낚는구나.(昇浦上漁舠)
지는 해에 초루가 작아보이니(落日華譙小)
봄바람에 푸른 바다 높구나.(春風碧海高)
배 지나니 악어가 놀라고(揚帆驚怒鱷)
배 멈추니 높은 파도 밀려오네.(散帙信飛濤)
집안의 경계를 범할지라도(縱犯垂堂戒)
내 길에서 스스로 호기 부리네.(吾行也自豪)”
송해면 당산리 당산 동쪽에 있던 포구이다. 고려 때 개경으로 건너가는 나루터였다.
현재는 송해면에 편입되었다. 송정면과 삼해면이 합하여 송해면이 되었다.
송해면 당산리 당산 마을로, 당집이 있던 당산 아래에 있다.
이윤중(생몰년 미상) 조선 후기의 사인. 본관은 홍주(洪州). 호는 신재(愼齋).
문간공(文簡公) 이서(李舒)의 후손으로 강화에서 태어나, 일찍이 진사(進士)에 합격하였다.
벼슬에 뜻이 없어 고향 강화 송해에서 유유자적하며 여생을 보냈다. 시문에 뛰어났으며, 저서≪포상만록(浦上漫錄)≫이 있다.
▲ 고려고종사적비
'고려고종사적비'는 1232년 고려 23대 임금 고종이 강화도에 온 사건과 장소를 기념해 세운 비석으로 강화군 송해면 당산리 '승천포'에 있다.
▲ 염하
강화도는 물살이 빠른 염하와 갯벌, 겨울철 유빙 등으로 몽골군이 들어오기에 쉽지 않은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몽골침략과 강화천도
글 경인일보 김진국 논설위원
고려왕조는 1232년 수도 개경(개성)을 떠나 강화로 수도를 옮기는 '강화천도'를 단행한다.
고려가 강화도로 천도한 것은 기마병 위주의 몽골군이 해전에 약하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강화도는 물살이 빠른 염하와 갯벌, 겨울철 유빙 등으로 몽골군이 들어오기에 쉽지 않은 조건이었다.
악명높은 기마병, 중원 제패
강화로 수도 옮겨 39년 항쟁
염하·갯벌·유빙… 지리 이점
3중성 쌓아 7번 침공 막아내
▲ 고려고종사적비 ⓒ 2019 한국의산천
고려고종사적비 (高麗高宗事跡碑).
커다란 돌거북 등 위에 얹혀진 검은비석이 봄하늘을 향해 힘있게 솟아 있다.
사적비에서 바다 방향 철책 뒤로 북한 땅이 눈에 들어온다. 안개에 싸인 것처럼 봄철 미세먼지는 개풍군을 흐린 회색빛으로 덧칠해 놓았다.
그럼에도 손을 쭉 뻗으면 닿을 것처럼 가깝게 느껴진다. 2018년 봄, 강화군 송해면 당산리 397·399 일대 사적비 주변에선 공사가 한창이다.
여기, 승천포(昇天浦)는 지금으로부터 786년 전인 1232년 음력 7월6일 고려 23대 임금 고종이 수도 개경(개성)을 떠나 뱃머리를 댄 곳이다.
세계 영토의 4분의 1을 휩쓴 몽골제국에 맞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을 결심한 고려왕조가 강화로 수도를 옮기는 '강화천도'의 첫 여정이었다.
고려는 이후 1270년까지 강화에 수도를 구축하며 몽골제국과 전쟁을 치른다. 이 39년의 대몽항쟁 기간을 '강도(江都)시기'라고 한다.
강화로 도읍을 옮기기 한 해 전인 1231년, '살리타이'가 이끄는 몽골대군은 압록강을 건너 고려에 들어온다. 제1차 침공이었다.
몽골침략 뒤 전전긍긍하던 무신집권자 최우는 대신들을 몇 차례 소집해 천도를 논의한다.
1232년 6월16일, 천도를 반대한 별초지유 김세충의 목을 자른 최우는 마침내 임금을 앞세워 강화천도를 단행한다.
고려는 고려일 뿐, 몽골이 아무리 강할지라도 고려는 민족자존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싸우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명이었다.
그러나 몽골이 어떤 나라인가.
12세기 중반 몽골유목민 출신인 칭기즈칸(생몰년 1155 추정~1227).
어려서 아버지를 독살로 잃고 불우하게 자란 그였으나, 결국 몽골의 여러 부족들을 통합하며 거대한 기마병군단을 양성해낸다.
이후 중앙아시아, 서남아시아, 러시아와 동유럽을 정복하며 대영제국에 이어 역사상 2번째로 큰 제국을 건설한다.
몽골족은 말이나 양을 키우며 목초지를 따라 이동하며 살아가는 유목민이었다.
유목민은 한 곳에 정착하지 않기 때문에 큰 건물이나 조형물은 필요하지 않으며 목초지 확보나 재물의 약탈을 위해 전쟁을 일으킨다.
토지와 노예를 얻기 위해 전쟁에 나서는 농경사회 국가와는 목적 자체가 다른 것이다.
유목민인 몽골군은 궁술과 기마로 단련된 특수부대였다.
3~7살이면 이미 말을 능숙하게 다뤘고, 체형 자체가 말 타기 좋은 안짱다리가 많았다.
몽골군은 보급부대 없이 군인 1명당 5~10마리의 말을 끌고 다니며 하루 70㎞씩 이동이 가능했다.
이는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하루 20㎞를 이동한 것에 비하면 3배가 넘는 수치이다.
몽골군은 공포심을 유발하는 심리전에 능숙했다.
항복할 경우 점령지 주민을 노예로 삼거나 재물을 약탈하는 것에 그쳤으나,
저항할 경우 개미 한 마리 남기지 않고 살육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이런 소문 때문에 지레 겁을 먹고 도망가거나 백기를 드는 경우도 많았다.
몽골군이 유럽의 기사와 싸우는 방식 역시 말을 이용한 전투였다.
유럽기사가 입는 전신갑옷은 그 무게만 30㎏~40㎏에 달했는데 장비가 워낙 무겁다보니
사람도 말도 쉽게 지쳤고 몽골군은 이같은 약점을 활용했다.
처음엔 후퇴하는 척 하다 유럽기사들이 지치면 다가가 활을 쏘거나 돌멩이를 던져 죽이는 방식으로 상대를 공격한 것이다.
거대한 피바람을 일으키며 중원을 제패한 몽골제국에게도 약점은 있었다.
기마병 위주이다보니 백병전과 해전에 취약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물살이 빠른 염하와 갯벌, 겨울철 유빙과 같은 강화도의 지리는 몽골군이 싸우기에 상당히 불리한 조건이었다.
"오랑캐 종자가 비록 완악하다고 하지만 어찌 능히 날아서 물을 건널 수 있으랴.
저들도 역시 건널 수 없음을 알기에 와서 진쳐 시위할 뿐이네 … 중략 … 물에 들어가면 곧 모두 죽을 것이기에".
이규보의 시는 고려의 강화천도 배경을 추정하게 해 준다.
강화도는 예성강, 한강, 임진강이 한 곳으로 모여 황금어장을 이루는 황금바다이기도 했다.
본래의 수도인 개경과 지리적으로 가깝다는 측면도 고려했을 것이다.
고려왕조가 천도한 뒤 강화도는 현에서 군(郡)으로 승격하며, 이름도 '강도(江都)'로 바꾸어 부르기 시작한다.
고려왕조가 강화천도를 단행한 뒤 몽골군은 전국을 유린하며 보복에 나선다.
초조대장경과 황룡사 9층목탑 등 무수한 문화재가 소실된 시기도 이 때다.
몽골군은 1257년까지 모두 7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공하며 끊임없이 항복과 개경환도를 요구하나
고려왕조는 외성·중성·내성의 3중성을 쌓고 격렬하게 저항한다.
고려는 아울러 능란한 외교술로 대처하며 개경환도를 단행하는 1270년까지 강화도에서 국가를 지켜낸다.
이 기간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팔만대장경과 같은 눈부신 문화유산을 남긴 사실은 주목해야 한다.
786년 전, 승천포에 서서 고종이 바라보았을 개경의 종묘사직은, 2018년 기자가 바라보는 북한 땅처럼 처연했으리라.
글·사진 김진국 논설위원 (출처 경인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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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족불욕(知足不辱)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지지불태(知止不殆)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가이장구(可以長久) 오래도록 편안할 것이다. - 노자 도덕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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