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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강화53돈대탐방

강화 망월돈대 및 장성

by 한국의산천 2019. 4. 20.

강화 하점면 망월돈대 및 장성

 

망월돈대 및 장성[ 望月墩臺 長城 ]

인천광역시 강화군 하점면 망월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돈대와 장성.    


지정번호 : 인천문화재자료 제11호 

지정일 : 1995년 03월 01일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하점면 망월리 2107 외 1필지 

시 대 : 조선 

종류/분류 : 전적지 

 

 

 

 

 

망월돈대(望月墩臺) 및 장성(長城 : 문화재자료 제11호)

위치 :  하점면 망월리

 

이 돈대는 조선 숙종 5년(1679)에 병조판서 식암 김석주(息庵 金錫冑)의 명에 의해

유수 윤이제가 정비한 것으로 40∼120㎝의 돌을 장방형으로 쌓아 가로 38m․세로 18m․높이 2.5m 규모로 축조한 것인데,

윗부분에는 전으로 된 여장(女牆)이 둘러져 있었으나 현재 여장은 남아 있지 않으며

남쪽에 있는 계룡돈대와 함께 영문 관할로 돈장을 두었다

 

'만리장성(萬里長城)'으로 불리기도 하는 높이 7m․너비 1.5m 규모의 이 장성은

고려 고종 때 강화로 천도하면서 해안 방비를 위해 외성으로 축조한 것으로 누문 6개소․수문 7개소가 있었으며,

이후 조선에 와서 광해군(光海君) 10년(1618) 안찰사 심돈으로 하여금 수축케 했고 영조 21년(1745) 유수 김시환이 개축하였는데,

현재는 홍수를 막거나 물을 저장해 두는 제방으로 사용되고 있다

 

 

 

158. 망월동(望月洞)

 

- 화남 고재형(華南 高在亨, 1846~1916)


望月洞開大野中

망월동은 넓은 들판 가운데에 펼쳐있고,


烏橋春水鵲橋通

까마귀다리 봄물은 까치다리로 통하네.


水秧旱播隨天氣

비 오면 모내고 가물면 씨 뿌려 날씨를 따르지만,


穡事年年實有豊

해마다 농사일은 풍년이 든다네.


○ 망월동(望月洞)의 서쪽 아래에는 오교(烏橋)가 있고 위로는 작교(鵲橋)가 있으니 모두 큰 평야이다.
하점면 망월리이다. 마을이 벌판 가운데 있어서 달을 보기에 좋은 곳에서 유래한 이름이라 한다.

 

 

 

 

 

 

 

바다 건너 교동도가 가까이 보인다 

너른 평야 가운데 있기에 찾기기 쉽다.  바로 해변에 붙어있어 방죽 역화도 함께 하고있다 

크기 38×18m, 높이 2.5m의 성채이다.

성채에 이어져 북쪽으로 높이 2m정도의 정도의 축대가 바닷가를 따라 있는데 만리장성이라 불린다고 하며 강화나들길 16코스에 있다.

 

 

 

망월돈대(江華望月墩臺)

 

망월돈대는 북쪽에 있는 무태돈대<無殆墩臺>와 함께 영문<營門> 관할로 돈장을 두었다.

장성은 고려 고종때 강화로 천도하면서 해안방비를 위해 "외성"으로 축조하였는데 규모는 7m, 너비가 1.5m였고, 누문<樓門> 6개소, 수문<水門> 7개소가 있었다.

이후 조선에 와서 광해군<光海君> 10년(1618) 안찰사<按擦使> 심돈<沈惇>으로 하여금 수축케 했고 영조 21년(1745) 유수 김시환<金始煥>이 개축하였다. 

 

이곳은 다른 돈대와는 다르게 고려시대 간척된 너른 평야위에 축조되었다.

수심이 낮은 강화도 서남해안의 경우 동북해안에 비해 선박의 접근이 쉽지 않았기 때문에 돈대가 조밀하게 배치되지 않았고, 돈대의 주변이 평야지대이기 때문에 굳이 높은 위치가 아니더라도 조망이 용이했기 때문이다.

동서간 길이 18m, 남북간 길이 40m의 장방형 돈대로 남벽은 사면을 이루고 있다.

서쪽으로 4문의 포좌를 배치하였고 돈대의 출입문은 동벽의 남쪽으로 치우쳐 냈다. 석벽이 대부분 훼손되어 있던 것을 최근 복원하였다.

돈대 내부에 건물을 두어 창고와 수직(守直)하는 병사의 숙소로 삼았다.

 

 

 

 

 

 

 

1995년 3월 1일 인천광역시문화재자료 제11호로 지정되었다.

강화도는 예부터 외적의 침입이 잦았고 개성, 한양 등 중부 내륙지방을 지키는 전략적 요충지로 해안방어에 각별히 힘써 왔던 곳이다.

이런 이유로 조선시대 숙종은 이곳에 6진(鎭), 7보(堡), 9포대(砲臺), 53돈대(墩臺)를 축조하였다.

 

1679년(숙종 5)에 병조판서였던 김석주(金錫胄)에게 강화도의 지형을 돌아보게 한 뒤

어영군 4,000명과 함경도·강원도·황해도에서 뽑은 승병(僧兵) 8,000명을 동원해 49개의 돈대를 축조하였다.

망월돈대도 이때 축조된 것이다.

 

망월돈대는 40~120cm의 돌을 가로 38m, 세로 18m, 높이 2.5m의 직사각형 모양으로 쌓았고

윗부분에는 성가퀴(몸을 숨기고 적을 공격하기 위해 성 위에 덧쌓은 낮은 담으로 여장 또는 성첩이라고 함.)의 흔적이 남아 있다.

또 돈대의 중간중간에는 사람이 드나드는 문과 총구멍이 있다.

 

당시 함께 축조된 돈대로는 택지·삼암·분오리돈대(인천광역시유형문화재)와

장곶·계룡·망양·건평·굴암·미루지·북일곶등대(인천광역시기념물), 선수·화도·무태등대(인천광역시문화재자료) 등이 있다.

특히 해안에 위치한 강화군 화도면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장성(長城)은 고려 때 강화로 천도하면서 해안방어를 위한 외성(外城)으로 축조한 것으로 길이 7m, 너비 1.5m, 누문(樓門) 6개, 수문(水門) 7개의 규모이다.

1618년(광해군 10) 관찰사 심돈(沈惇)에 의해 개축되었고, 1745년(영조 21) 유수 김시환(金始煥)에 의해 개축되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만리장성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현재는 제방(堤方)으로 사용된다.

 

 

▲ 망월돈대

망월돈대는 1679년(숙종 5년)에 쌓은 48돈대 가운데 하나로 진무영에서 직접 관할하는 영문 소속 돈대였다. 방형구조로 둘레 124m, 석벽의 높이는 180~300㎝이다.

 

강화도에서 가장 큰 저수지인 고려저수지에서 흘러내려오는 내가천 수로가 바다와 접하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 망월리 일대는 넓은 평야를 이루고 있는곳이다 이 간척지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국방강화를 위한 방편중 일환으로 강화도내 식량증산을 위해 바다를 막는 매우 큰 규모의 토목공사였다고 한다. 이렇게 긴 뚝방 중간에 위치한 망월돈대는 지형에 따라 역시 낮은곳에 자리하고 있지만 바다와 평야 쪽으로 가릴것이 없기에 경계를 위한 조망은 매우 좋은곳이다.

남쪽으로는 계룡돈대, 북쪽으로 무태돈대가 있다.

 

 

 

 

 

 

 

 

 

 

돈대 크기 

돈대크기 가로 38m, 세로 18m, 높이 2.5m

장성 길이 7m, 너비 1.5m 

 

 

 

 

 

 

 

 

 

 

 

 

 

 

 

 

 

 

▲ 강화 관방유적 5진 7보 53돈대지도

자세한 위치는 돈대의 주소를 확인하시기를 바랍니다 -한국의산천

 

강화도 53개 돈대 둘러보기 클릭 >>> 강화돈대 둘러보기

 

지족불욕(知足不辱)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지지불태(知止不殆)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가이장구(可以長久) 오래도록 편안할 것이다.  - 노자 도덕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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