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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강화53돈대탐방

강화 용진진 좌강돈대

by 한국의산천 2019. 4. 20.

1. 강화 용진진 (江華龍津鎭)

2. 강화 좌강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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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진진

[龍津鎭 ]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42호.

 

강화군 선원면 지산리 215에 위치한 조선후기 관방시설로 용당곶에서 지산리로 향하는 해안도로 서편에 위치한다.

용진진은 용진나루에서 용진진으로 진입하는 문루인 참경루(斬鯨樓)의 남서쪽 민가에 위치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 흔적은 찾을 수 없다.

참경루는 조선 숙종 17년(1691) 강화 외성 초축 당시에는 누각 없이 암문의 형태로 존재하던 것을

정조 7년(1783) 강화유수 김노진이 암문 옆으로 문루를 새로 지으면서 이름붙인 것이다.

 

따라서 해안에서 용진진으로 진입하는 문루이기는 하나, 용진진의 부속시설이 아니라 강화외성의 부속시설로 보아야 하며,

차후에 지정 명칭도 용진진에서 강화외성 참경루로 변경하여야 할 것이다.

홍예석과 기단석만이 남아 있던 것을 1999년에 문루와 인근 좌강돈대 및 외성과 함께 복원하였다.


용진진이 위치한 곳은 용진나루, 용당포 등으로 불렸으며, 병자호란 이후 종4품의 수군 만호를 배치하여 해안을 방비하게 하였으며, 감목관(監牧官)까지 겸하게 하였다. 효종 7년(1656) 수군 만호를 진장(鎭將)으로 하는 수군진을 설치하였으며,

현종 6년(1665) 강화도에 설치되어 있던 수군진을 육군진으로 바꾸면서 병마만호가 배치되기 시작하였다.

17세기말 용진진에는 군관 18명과 토졸 37명이 주둔하였고, 각궁·교자궁·목궁 등의 재래식 무기와 조총, 불랑기 등 각종 중화기로 무장하고 있었다.

 

가리산돈대, 좌강돈대, 용당돈대 등 3개의 돈대를 관할하였고, 진에 속한 선박이 3척, 토졸의 위답이 20섬지기에 군향미 174섬, 조가 25섬 장이 8섬이었다

 

 

▲ 용진진 참경루

 

15. 참경루(斬鯨樓) : 용진진의 문루로, 1999년 복원되었다.

 

- 화남 고재형(華南 高在亨, 1846~1916)


斬鯨樓下水聲多

참경루 아래에는 물소리가 요란한데,


操習千軍摠去何

훈련하던 많은 군사 모두다 어디 갔나.


申使關防誰不憶

신(申) 통어사 나라 지킨 일 그 누가 잊으리,


斜陽撫釰一高歌

석양에 칼 어루만지며 한바탕 크게 노래하노라.


○ 수군 훈련장은 용진진(龍津津)과 제물진(濟物津) 앞쪽 바다에 있었는데, 매년 봄·가을에 한 번씩 훈련하였다. 참경루(斬鯨樓)는 용진진 남쪽에 있는 문루인데, 숙종 신미년(1691)에 유수(留守) 겸 진무사(鎭撫使) 신후재(申厚載)50)가 처음 세워 대장의 좌기소(坐起所)로 삼았다.

 

○ 정조 계묘년(1783)에 유수 김노진(金魯鎭)51)이 기문(記文)을 지었다.

그 기문은 다음과 같다.

“누각의 이름을 ʻ참경ʼ이라 한 것은 장차 뜻을 두려는 것이다. 뜻을 두는 것은 하늘의 질서와 사람의 규범이 세워지는 것이다.

병자 정축년의 호란을 당하여 저 어리석은 자들이 교만하게 굴면서 국사를 그르친 원인은 뜻을 세우지 못했기때문이다.

뜻이 없었기 때문에 나태했고 탄환을 가지고도 쏘지 않았고 배를 타고 도망하였으니, 그렇다면 어떻게 고래의 발을 자르려하는 뜻을 둘 수 있었겠는가?

 

참경루는 강화부 관아 남쪽 9리 되는 곳에 있으니, 즉 용당돈(龍堂墩) 있는 곳이다.

돈대가 있으면 반드시 첩(堞)이 있고, 첩이 있으면 반드시 문(門)이 있고, 문이 있으면 반드시 누(樓)가 있는 것은 전쟁의 방어를 갖추기 위함이니

하나라도 부족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오래되다 보니 누각이 허물어졌다.

이에 내가 재물을 모으고 장인을 모집하고, 사찰의 목재를 거두어서 도움이 되게 하였다.

이에 10일 지나지 않아 옛날의 모습이 선명하게 회복되었다.

이제 전쟁이 그친지 수백 년이 지나 대해의 파도는 높지 않고, 배를 삼킬만한 고기도 다니지 아니하니 ʻ확연히 일이 없다ʼ고 할만하다.

그러나 이것에 힘쓰는 것은 그 뜻을 헤아리기 위해서이다. 더구나 조정에서 통어영을 이곳에 옮긴 것은 용당의 앞바다를 수군의 조련소로 삼은 까닭이다.

대체로 대장의 깃발을 세우고 북을 두드리며 삼도의 함선을 영도하여 바람을 타고 돛을 올리며 개연히 노를 저어 파도를 깨뜨리는 뜻이 있어서였다.

그렇다면 이 땅에 이러한 참경루가 없어서는 안된다.

 

아! 이 일대를 빙 둘러 해안과 포구를 따라서 돈대는 몇이며 첩은 몇이고 문은 몇 개이며 누는 몇 개이던가?

그러나 고래를 참하는데 뜻을 둔 것은 한결같다.

이 누각에 올라 참경이란 이름을 되돌아보니 후대에 반드시 나의 뜻과 같이 하여 기록하는 자가 있을 것이다.”

 

○ 지금은 모두 폐허되었기 때문에 탄식할 뿐이다.


신후재(1636∼1699)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덕부(德夫), 호는 규정(葵亭)·서암(恕庵). 강화유수·개성유수·한성판윤 등을 역임하였다.

강화유수로는 1690년 3월부터 1692년 2월까지 재임하였다. 저서로는 시문집≪규정집≫7권이 있다.
김노진(1735∼1788) 본관은 강릉. 자는 성첨(聖瞻). 강화유수·형조판서·이조판서 등을 지냈다. 편서로 ≪강화부지 江華府志≫가 있다.

 

용진진은 강화군 선원면 지산리 215번지에 소재하며, 인천시기념물 제42호이다.

1656년(효종 7)에 축조되었으며, 가리산돈대·좌강돈대·용당돈대 등 3개의 돈대를 관리하였다.

 

 

 

 

 

 

 

 

 

 

 

좌강돈대(江華 左岡墩臺)


인천광역시 강화군 지산리 215번지 비교적 낮은 구릉위에 위치하고 있다.

원형돈대로 지름은 32m이고, 동쪽을 향해 4문의 포좌가 설치되어 있으며 출입문은 서벽 중앙에 위치한다.

당초 기단석만 남아있던 것을 참경루와 함께 복원하였다.

 

조선 숙종 5년(1679) 3월 승군 8,000여명과 어영군 4,000여명을 투입하여 80일 만에 공사를 끝냈으며, 용진진의 관할에 있었다.

돈대 내부에 건물을 두어 창고와 수직(守直)하는 병사의 숙소로 삼았다. 

 

 

 

 

 

 

 

 

 

 

 

 

 

 

 

 

 

 

 

지족불욕(知足不辱)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지지불태(知止不殆)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가이장구(可以長久) 오래도록 편안할 것이다.  - 노자 도덕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