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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강화53돈대탐방

강화 갑곶돈대 갑구지돈대

by 한국의산천 2019. 4. 20.

강화 갑곶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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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곶돈대

 

갑곶돈대(江華 甲串墩臺 : 사적 제306호)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해안동로1366번길 18 

문화재지정 : [갑곶돈] 사적306호(1984.08.13 지정)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갑곶리에 있는 강화 53돈대 가운데 하나이다.

육지와 강화도를 오가는 나루터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는 방어시설로 맞은편 육지에 있는 김포 문수산성과 마주보며 강화해협을 지키는 요새이다.

 

강화의 삼국시대 이름이 갑비고차(甲比古次)인 것에서 유래하여 오늘날까지 이름이 전해오는 것으로 보이나,

고려 고종 때 몽고군이 이곳으로 건너가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안타까워하면서

“우리 군사들이 갑옷만 벗어서 바다를 메워도 건너갈 수 있을텐데……”라고 한탄하며 말했다는 유래도 있다.

 

고려가 몽고의 침입에 대항하면서 강화로 천도하고 강화도 해안을 지키기 위해 외성을 쌓았을 때부터 육지로 가기 위한 요충이었고,

조선 인조 때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 피난할 때와 병자호란(丙子胡亂)때 왕자와 비빈(妃嬪)들이 피난할 때도 이곳을 통하였다.

 

효종 7년(1656)에 이르러 국방을 강화하고 특히 서울을 중심으로 국방시설을 확충하고 만약의 외침에 대비하기 위해

강화도를 요새화하면서 요충지마다 진(鎭)을 설치하였는데, 그때에 이곳에 돈대(墩臺)를 설치하였다.

 

갑곶돈대는 통진(通津:지금의 김포시 통진읍)에서 강화로 들어가는 갑곶나루에 축조되었는데, 주위가 113보에 지첩이 40이었다.

돈대는 진보다는 작은 규모의 보루를 만들고 대포를 배치하여 지키는 곳인데, 이곳에는 대포 8문이 배치되었다.

 

그 후 숙종 5년(1679)에 이르러 작은 성채모양의 돈대와 포를 장치한 포대가 축조되고,

이곳의 경영이 본격화되어 관리책임자인 병마만호(兵馬萬戶) 아래에 군관(軍官) 36명, 군병(軍兵) 100명, 돈군(墩軍) 24명이 소속되고 군량미 157석과 배 8척이 있었다.


이 갑곶나루에는 1875년에 축조된 갑곶포대가 있는데 갑곶돈대는 망해(望海)·제승(制勝)·염주(念珠) 등 세포대와 더불어 제물진(濟物鎭)에 소속되었다.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프랑스함대가 6백인의 병력을 이곳으로 상륙시켜 강화성을 점령하였으나,

정족산성(鼎足山城)전투에서 양헌수(梁憲洙) 부대에 패한 뒤 물러났다.

이때 강화성 내에 있던‘강화동종’을 가져가려 하였으나 무거워 가져가지 못하고 성내에 있던 외규장각 도서 등을 약탈하였다.

 

1876년에는 일본의 전권대신(全權大臣) 구로다[黑田淸隆]가 6척의 함선을 이끌고 와서 이곳으로 상륙한 다음

강화 연무당(鍊武堂)에서 조선의 접견대관 신헌(申櫶)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한 역사적인 유적이다.


이곳에는 성 문루인 진해루(鎭海樓)가 있었고, 고려시대 몽고와 외교관계를 맺었던 이섭정(李涉亭)의 터가 있었는데, 그 후 성벽 포대가 폐허화되었다.

1977년에 이르러 옛터에 새로 옛 모습을 되살려 보수·복원하였다.

현재 전시되고 있는 대포는 조선시대의 것으로 바다를 향해 침입하는 외적의 선박을 포격하던 것이다

 

 

 

 

 

 

 

 

 

 

 

 

 

 

 

 

104. 오종도비(吳宗道碑239))


甲串津西石立崇  갑곶진 서쪽에 한 비석이 우뚝하니,
壬辰天將紀吳公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군 오종도공을 기념했네.
峩峩浩浩山河氣  높고 넓은 강산 같은 당시의 기백,
永世同傳撫綏功  위무해준 공로를 영원토록 전하리니.


○ 선조 임진년(1592) 난리에 중국 절강(浙江)의 소흥부(紹興府)사람 오종도(吳宗道)가 흠차관(欽差官)으로서 황명을 받들어 동쪽으로 왔다. 정유년(1597) 왜가 다시 침략하였을 때에 형개(邢玠)의 군문에 소속되어 수병을 이끌고 강화에 머물면서 주민을 보살피니 섬의 모든 사람들이 신뢰하고 편안하게 여겼다. 그가 돌아갈 때에 강화도 사람들이 그를 생각해서 갑곶나루 위에 비석을 세워 떠나는 사람의 은혜를 표현하였다.

 

그 말은 다음과 같다.

 

“아아, 천군(天軍)의 강성함은 해안을 따라 늘어서 있으며,(於鑠王師 聿遵海澨)

오공(吳公)의 밝고 정성스러움은 실로 그 군사를 장악하였도다.(顯允吳公 實掌其旅)

인의(仁義)가 가득 차고 울창하여 큰 소리로 노래 부르니,(仁涵義鬯 護譊歌謳)

푸르고 서늘한 바람에 따뜻한 기운을 불어 넣음과 같음이라.(譬彼靑颸 是吹是煦)

우리를 불구덩이에서 건져내어 목전(目前)에 두었으며,(拯我燎灊 措之袵席)

덮은 장막을 걷고 폭풍을 부려서 미치지 못하게 하였도다.(帲幪乍輟 飊馭莫及)

높은 귀부(龜趺)는 대로(大路)에 드러나 보이고,(嵽嵲龜趺 表玆達路)

마니산은 높고 늠름하며 강물은 장대하다.(尼山峨峨 河水浩浩)

아아, 공의 아름다움을 만세에 걸쳐 사모하리라.(繄公之烈 萬世之慕)”


239) 본래 갑곶나루 진해루 안쪽 언덕 위에 있었으나, 2000년에 강화역사관 비석군으로 이전되었다.

 

 

 

 

 

 

 

 

 

 

 

 

 

 

 

 

 

 

지족불욕(知足不辱)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지지불태(知止不殆)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가이장구(可以長久) 오래도록 편안할 것이다.  - 노자 도덕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