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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문화문학음악

치자꽃 설화

by 한국의산천 2022. 10. 22.

박규리의 ‘치자꽃 설화’

                     - 박  규  리

사랑하는 사람을 달래 보내고
돌아서 돌계단을 오르는 스님 눈가에
설운 눈물방울 쓸쓸히 피는 것을
종탑 뒤에 몰래 숨어 보고야 말았습니다.

아무도 없는 법당 문 하나만 열어놓고
기도하는 소리가 빗물에 우는 듯 들렸습니다.

밀어내던 가슴은 못이 되어 오히려
제 가슴을 아프게 뚫는 것인지
목탁 소리만 저 홀로 바닥을 뒹굴다
끊어질 듯 이어지곤 하였습니다.

여자는 돌계단 밑 치자꽃 아래
한참을 앉았다 일어서더니
오늘따라 엷은 가랑비 듣는 소리와
짝을 찾는 쑥국새 울음소리 가득한 산길을
휘청이며 떠내려가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멀어지는 여자의 젖은 어깨를 보며
사랑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일인 줄 알 것 같았습니다.

한 번도 그 누구를 사랑한 적 없어서
한 번도 사랑받지 못한 사람이야말로
가장 가난한 줄도 알 것 같았습니다.

떠난 사람보다 더 섧게만 보이는 잿빛 등도
저물도록 독경소리 그치지 않는 산중도 그만 싫어,
나는 괜시리 내가 버림받는 여자가 되어
버릴수록 더 깊어지는 산길에 하염없이 앉았습니다.

시집 『이 환장할 봄날에』 창작과비평사. 2004-02-15

치자꽃이 미니소시지처럼 생겼다던 지인의 말이 생각난다. 

꽃과 소시지,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지만 은유적 표현인가 싶었다. 잠시 분위기 살피며 바로잡기를 망설였다. 

시골에서 자란 사람은 알게다. 파란 달빛 아래 하얀 치자꽃, 어둠 속에서도 기죽지 않던 고혹적인 자태를. 대부분의 꽃들이 향기를 앞세워서 자신의 존재를 어필하듯이 은은한 냄새가 여름밤의 무더위를 잊게 했다. 

 

감수성이 무딘 사람도 매료되기 충분한 꽃이다. 할머니는 제사나 명절이 되면 말린 치자를 짓찧어 물에다 담갔다. 노란색이 비밀처럼 풀어졌다. 그 물로 반죽하여 생선전을 부치고 고구마전도 부쳤다. 그러니까 지인이 언급한 소시지는 치자열매를 말한 것이었다.

‘치자꽃 설화’에 언젠가 명치끝을 누르고 읽었던 수필 한 편이 포개진다. ‘시니어문학상’ 당선작이다. 집안의 대들보처럼 믿었던 큰아들이 출가하여 승려가 된 안타까운 사연이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유수한 대학에서 박사과정까지 마치고 교수의 길을 걸을 줄 알았단다. 좋은 곳에서 중매도 들어왔다고 하니 이제 한시름 놓을 줄 알았으리라. ‘부처님께 귀의하여 포교활동을 하며 좀 더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싶다’는 뜻밖의 편지를 받는다. 뜬눈으로 밤을 새고 득달같이 달려갔으나 이미 확고한 아들의 마음을 돌리지 못한다. 느닷없는 게 삶이라지만 처연하고 무게감 있는 줄거리였다. 그 어머니 심정이 어땠을지, 감히 헤아리기조차 미안했다.

박규리 시인은 8년간 공양주생활을 한 사람이다. 

관찰자시점의 화자는 어떤 애끓는 이별을 지켜본 듯하다. 제목에서 암시하듯이 이야기 시의 형식을 취한다. 스토리가 있으면 가독성이 좋은 건 당연하다. 달래서 보낸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판단이 느린 나는 열 줄 이상 내려가서야 눈치 챈다. 온몸에 전율이 일어나는 흔치 않은 일화에 비장미마저 느껴진다. 청각적 심상을 시각적 심상으로 변주하는 시구들이 감각적이다. 어느 한 구절도 가슴 절절하지 않은 데가 없다. 멀어지는 여자의 젖은 어깨에 얼마나 많은 뼈아픈 사연이 함축되어 있을까. 햇스님의 잿빛 등, 독경소리 깊은 산중, 다 싫은 화자는 돌연 자신이 버림받는 여자가 된다.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이 시에는 세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사건의 주체인 스님과 여자,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시적 화자 '나'가 그들이다. 시적 화자는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며 두 사람의 심경과 그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서정적으로 그리고 있다. 특히 가랑비 속에 치자꽃이 피어 있고 쑥국새가 울음을 우는 6월의 고즈넉한 산사의 분위기는 이별의 정한을 북돋우면서 서정적인 분위기를 이끌어 낸다.

시는 스님이 사랑하는 여자를 돌려보낸 시점으로부터 시작한다. 시적 화자가 관찰한 스님의 모습은 속세의 인연을 모두 버리고 담담한 심경으로 불도에 정진하는 불제자가 아니라, 옛 사랑에 힘겨워하며 슬픔의 눈물을 보이는 평범한 사람이다. 버림받은 여자는 온몸에 힘이 빠진 채 산을 내려간다. 이렇게 이루어질 수 없는 두 사람의 사랑을 가슴아파하는 시적 화자는 그들보다 더 서러움을 느낀다. 사랑과 이별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지켜보면서, 그런 추억 하나 없는 사람은 더 가난한 사람임을 알게 되고, 자신이 버림받은 여자가 된 것처럼 서러움을 느끼는 것이다.

산중 깊은 암자일수록 속세와의 연이 더욱 질기게 이어져 있다. 역설이다. 세간에서 받은 상처가 깊을수록 더 깊은 산중으로 찾아들지만, 암자로 이어진 아주 작은 오솔길은 제 아무리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 '눈물의 길'이다.  박규리 시인의 <치자꽃 설화>는 이미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린 바 있다. 산중 암자의 한 일화를 그대로 옮겼을 것만 같은 이 시는 매우 산문적이면서도 절묘하게 시적 울림을 증폭시킨다. 시를 읽노라면 비에 젖은 치자꽃 향기가 온몸에 척척 달라붙는 느낌이다. 종교적 엄숙주의 혹은 그 가식에 질릴 대로 질린 이들이라면 이 시에 감동받지 않을 이 몇이겠는가.

시 속에 등장하는 '사랑하는 사람을 달래 보내고 돌아서 돌계단을 오르는 스님'도 비로소 스님답고, 실연에 겨워 '돌계단 및 치자꽃 아래 한참을 앉았다 일어서'는 여인도 비로소 사랑을 아는 여인다우며, '괜시리 내가 버림받은 여자가 되어 버릴수록 더 깊어지는 산길에 하염없이 앉'아 있는 화자인 시인도 절집에 살 만한 보살답다.

그리 길지 않은 이 시는 '설화'가 아니라 부연 설명이 필요 없는 한 편의 영화다. 아니, 허구의 영화가 아니라 감동적인 다큐멘터리가 아닐까. 그렇다. '사랑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일'이니 이 시를 되새기며 우리 함부로 사랑의 이름으로 사기치지 말자. (시인.  이원규)

 ■ 시인 박규리

박규리는 공양주(供養主, 절에서 밥짓는 일을 주로 하는 사람) 시인이라는 독특한 이력을 지니고 있다. 

그는 깨달음을 얻으려는 수도승도 아니고, 속세에서 선(禪)의 세계를 동경하는 위치에 있는 것도 아니다. 시인은 세속적 욕망을 미처 털어내지 못한 자의 갈등하는 내면을 드러낸다. 가령 이 시에서, 속세에서 찾아온 정인(情人)을 달래보낸 뒤 몰래 눈물짓는 스님을 엿보며 같이 서러워하는 장면은 욕망의 뿌리를 끊어내지 못한 수행자의 모습을 애잔하게 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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