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문화문학음악

[바람의 노래]내하나의 사랑은가고

by 한국의산천 2022. 9. 8.

 

[추억의 LP 여행] 임희숙 

허스키하며 호소력있는 목소리의 주인공 임희숙

내가 돌아선 하늘엔 살빛 낮달이 슬포라...등이 휠것같은 삶의 무게여~~ [작사 작곡 백창우]

백창우...어쪄면 이렇게 시를 짓듯이 노랫말을 지었을까? 

 

너를 보내는 들판에 마른 바람이 슬프고 내가 돌아선 하늘엔 살빛 낮달이 슬퍼라
오래도록 잊었던 눈물이 솟고 등이 휠 것 같은 삶의 무게여
가거라 사람아 세월을 따라 모두가 걸어가는 쓸쓸한 그길로

이제 그누가 있어 이 외로움 견디며 살까 이젠 그 누가 있어 이가슴 지키며 살까
아~~ 저하늘의 구름이나 될까 너있는 그 먼땅을 찾아 나설까
사람아 사람아 내하나의 사람아 이늦은 참회를 너는 아는지 


 

 

긴 생명력의 가수 임희숙. 인기 정상의 가수라기보다는 최고의 가창력을지닌 가수라는 표현이 합당한 가수이다. 인생의 깊이가 느껴지는 그녀의노래들은 절절한 호소력으로 솔, 트로트, 재즈, 가스펠 등 여러 장르를 넘나들며 대중의 사랑의 받았다.

 

임희숙
1950년 6월 29일生
덕성여자고등학교 
한양대학교 학사
   

 

여자 가수의 인생치곤 고난이 많았던 지라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여러 차례 활동을 중단하는 아픔도 겪어야 했다.

그때문에 많은 히트 곡 보다는 범접하기 힘든 뜨거운 가창력으로 스스로를 대중음악사에 중요한 아티스트로 자리매김 됐다.
' 진정 난 몰랐네', ' 나 하나의 사랑의 가고' 등 그가 남긴 히트 곡들은 지금도 중·장년층들의 사랑을 받는 불멸의 히트 넘버이다. 두 번의결혼 실패와 대마초 사건, 그리고 병마와 싸우며 활동 중단을 거듭했던 평탄치 않은 삶의 여정을 지나온 그녀의 노래 속엔 아픔만큼 삶의 절절함이 배어 있다.

 

80년대 중반, 재기에 성공한 이 후 그녀는 방송 출연을 비롯해 각종 공연과 미사리 등 음악 카페에서 매일 같이 노래를 부르고 있다. 짙은 허스키에 영혼을 울리는 그녀의 바이브레이션 창법은 흑인 재즈 가수로착각을 일으킬 정도이다.

 

임희숙은 한국 전쟁이 발발한 1950년 6월 29일 태어나 조종순씨의 편모슬하에서 성장했다. 전쟁 중에 부친이 사망했기 때문. 재혼한 어머니는 두명의 동생을 낳았다.


영화 ‘ 개같은 날의 오후’로 주목을 받았던 이민용감독이 그의 친동생이다. 활달한 성격의 그녀는 중학교 2학년 때 외국 팝송을 많이 접했는데 특히 미국 흑인가수 샘 쿡(Sam Cook)의 노래에 푹 빠져 지냈다.


어린 그녀는 짙은 감성으로 사람의 영혼을 감싸주는 외국의 솔가수들의 끈적끈적한 솔이나, 블루스 같은 흑인 재즈성향의 노래가 특히좋았다.


노래에 관심이 많아진 그녀는 덕성여고 2학년 때인 1966년에 작곡가 손목인과 손석인으로 부터 재즈를 배우며 가수의 꿈을 키웠다.


가수로서의 첫 무대는 워커힐이었다. 67년 데뷔 곡 ‘ 그 사람 떠나가며’를 발표하며 워커힐 무대에 이어 TBC TV의 ‘ 쇼쇼쇼’, ‘ OB카니발’,동아방송 등 방송에 출연해 팝송을 주로 불렀다. 가창력을 인정받자 CM송까지 부르며 주목 받는 신인 가수로 착실하게 성장을 했다.


1968년 덕성여고를 졸업하고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바쁜 가수활동 때문에 학업을 병행하기 힘들어 1년이 못 되어 중퇴를 했다. 본격적인 음악 활동에들어간 그녀는 독특한 소울 창법과 남자 같은 화통한 성격 때문에 비슷한시기에 데뷔한 조영남과 곧잘 비교되었다. 그래서 생겨난 별명이 ‘ 여자조영남’. 외모를 비하했던 별명이었던지라 그녀로서는 달갑지 않았지만,그만큼 대중의 관심이 증폭되었던 증거이기도 했다.

 

전우중의 곡 '그 사람 떠나고'를 받아 처음으로 음반을 낸 것이 1969년. 당시는 주류 대중 음악을 지배하던 트로트가 서서히 대중의 관심 밖으로 내몰리던 시기였다. 미 8군 무대를 기점으로 영입된 솔, 록, 포크 등다양한 장르의 기세가 어느 때 보다 드셌기 때문이었다.


그 해에 미 8군의' 신중현 스페셜 쇼'에 출연한 임희숙은 음악적 코드가 통했던 한국 최초의 소울 가수 박인수 등과 음악적 교류를 했다.

이 때의 활동 때문에 임희숙은 ' 신중현 사단'에 간혹 포함이 되곤 하지만 사실 신중현의 곡을부른 것은 군방송 드라마 주제곡 ' 슬픈 고백' 등 그리 많지는 않았다.

 

 

 임희숙의 넘치는 끼를 높이 산 신중현은 ' 님은 먼 곳에' 등 자신의 곡을 임희숙에게 주려고 했지만, 이미 작곡가 김희갑으로부터 MBC드라마 '왜 울어'의 주제가를 받아 노래한 그녀는 의리를 지키기 위해 김희갑 휘하로 갔다. 그래서 김희갑곡 ' 진정 난 몰랐네-1970'를 부르게 되었다.

 

빅 히트가 터진 이 노래는 그녀의 이름을 대중에게 알리는 도화선이 되었다. 30여년의 세월을 초월해 지금도 소위 중장년층의 '18번'으로 뽑히는 이 노래는 그녀의 대표곡이 되었다. 또한 여러 가수에 의해 다시 불리거나 리메이크도 됐다. 그러나 솔 풍의 가요인 ' 진정 난 몰랐네'를 처음 불렀던 가수는 임희숙이 아니었다. 김상희였다. 하지만 1967년 맑은 음색의 김상희의 노래는 빛을 발하진 못했다.


임희숙의 호소하는 듯한 소울풍의 끈적한 목소리는 3년이 지난 후에야 이 노래를 한국 대중음악사의 명곡으로 되살려냈다.
"사실 저도 노래를 부른 뒤 곧 바로 히트를 터트리진 못했고, 2년 정도 흐른 뒤 뜨기 시작했어요.

음악을 제대로 아는 사람들의 입을 타고 알려진 경우입니다. 당시 키보이스가 반주를 했고, 한 번에 동시 녹음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후 트로트 작곡가인 박춘석과 손잡고 ' 잊어야할 사람', ' 잊었을 거에요'(1971)를 발표해 인기 가수의 반열에 올랐다.

 

71년 8월, 봉봉사중창단의 이계현이 운전한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 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소울 가수로 이름이 난 그녀는 72년 8월, 싱가폴 건국기념 재즈페스티발에 한국 대표로 초청을 받는 영광을 안기도 했다. 또한 ' 지난날'(1974), ' 돌아와 주오', ' 믿어도 될까요'(1975) 등으로 꾸준히 자신의 음악적 위상을 이어갔다.

 

74년 2월, 경기고, S대 법대를 나온 조**씨와 결혼을 했다. 하지만 혼인 신고도 하지 않은 채 5개월 만에 헤어졌다. 75년 11월, 임희숙은 종로5가 칠복여관에서 음독자살을 기도해 세상을 놀라게 하는 사건을 벌였다.

 

두 번째 결혼도 많은 갈등을 안고 있었던 것. 더구나 1975년 가요정화운동이라는 명분의 대마초 파동에도 휘말렸다. 이처럼 이혼, 대마초 사건, 음독 자살 시도 등 개인사의 고난이 한꺼번에 밀려든 이 시기는 그녀의 표현대로 가혹한 시절이었다. 하지만 세상을 알게 된 것은 인간적으로 ‘철이든 계기’이기도 했다.


"사람이 모질지 못했죠. 워낙 운명이 거칠기도 했지만, 돌아 보면 나 자신이 똑똑하지 못했던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던 것같아요"신군부가 들어서면서 해금이 되자 재기 곡 '돌아와 주오'를 발표했지만 예전과 같은 반응을 얻지는 못했다. 그래서 무리하게 출연한 81년 10월의TV 공개 방송 ‘명랑 운동회’는 또 다른 불행의 씨앗이었다. 여자로서는감당하기 힘든 과격한 게임으로 허리를 다치는 불의의 사고를 당했던 것.

 

척추 디스크는 3년 4개월 동안 활동 중단이라는 좌절의 시간을 또 다시 안겨 주었다. 그러나 그냥 주저앉지는 않았다.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이때부터 연예인 교회에 나가 신앙 생활에도 전념하며 재즈 피아노를 익혔다. 삶에 진지해진 그녀는 사랑 노래보다는 영혼을 노래하는 솔과 가스펠을 부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척추 디스크에 이어 왼쪽 다리에도 마비가 오자, 무려 180개의 금침을 몸에 넣는 시술을 했다. 효과를 보았다.

 

84년 5월, 몸을 추스르고 재기 곡 '내 하나의 사람은 가고'를 발표했다. 작사자 지명길을 통해 받은 가사를 읽어 본 임희숙은 ‘삶의 무게여’라는 부분에 반했다.


이 노래는 길고 어두운 터널과도 같은 시련기를 딛고일어서는 부활의 노래가 되었다. 강렬하면서도 정적인 목소리는 이전에 느낄 수 없었던 삶의 향내가 배여 나왔다. 큰 반응이 있자 신세계레코드와3년 계약을 이루어졌고 ‘한국의 티나 터너’로 거듭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작곡가는 시인이자 노래 운동가로, ' 제2의 김민기'라고도 불렸던 백창우(현재 시노래 동인 나팔꽃의 리더). 서적 외판원으로 고단한 삶을살아가던 백창우가 27세 때 만든 노래였다. 시인의 고단한 삶과 그녀의 아픈 과거가 호소력 짙은 보컬과 어우러지면서 빅히트가 터졌다.


2003년 12월, 시전문 문예계간지 ‘시인세계’가 국내 유명시인 100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한 결과, 이 노래는 전체 순위 8위에 랭크되기도 했다.


임희숙은 "음반이 나온 뒤 2년 후에야 작곡가 백창우를 직접 만났다"고 한다.

85년 오준영의 곡을 받아 골든 2집 '상처'를 발표하며 이번에는 트롯가수로도 변신에 성공했다.
86년엔 지명길 곡 '사랑의 굴레'를 히트시킨골든 3집 음반도 연속으로 발표했다. 활발한 활동을 시작한 그녀는 리틀엔젤스 회관에서 열렸던 대한민국 제 1회 Jazz Festival 공연에도 참가했다.


또한 한때 연극 영화를 전공했던 그녀는 86년 KBS1 TV 드라마 '노다지', 87년 영화‘토요일은 밤이 없다(송영수 감독)’ 등에서 주제가를 부르며 특별 출연을 했다.


89년엔 KBS TV드라마 '사랑의 굴레'의 주제가로인기를 얻고, 그 해 10월 26일 대방동 해군해관에서 선배 재즈 가수 박대식과 재혼을 했다.


91년 6월엔 재즈가수 김준의 록 트로트 곡 '머물수 없는 사랑'을 발표했다. 자신의 아픈 사랑과 이별의 사연을 담은 이 노래는제법 성공을 거뒀다. 11월엔 동경 재일 한국인 음성 나환자촌 위문 공연을갖기도 했다. 94년엔 KBS 2TV 드라마 '남자는 외로워'서 기지촌 가수로 출연해 만만치 않은 연기 실력을 뽐냈다.

 

재즈 가수로 변신한 그녀는 95년 1월 김준, 정훈희, 이동원과 함께 KBS 빅쇼에 출연해 절묘한 4색화음을 선보이기도 했다. 6월에는 KBS 2TV ‘밤에음악사이’에 출연, 굴곡 많았던 자신의 노래인생 40년을 되돌아보는 뜻깊은 시간을 가졌다.

 

친동생인 영화감독 이민용의 감독 데뷔작 '개 같은날의 오후'에서는 출연료를 받지 않고 콩국수집 식당 주인 포항댁으로 출연을 했다. 당초 출연하기로 했던 김을동이 시의회 선거에 출마하는 바람에 이루어진 첫 주연급의 영화 데뷔였다.


영화의 성공으로 96년 1월 SBSTV 가족드라마 ‘엄마는 못말려’에도 출연을 했다.그 해 3월,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메이플’이라는 고가구점과 카페를 겸한 공간을 오픈해 사업가로 변신했다. 


음악은 중단하지 않았다. 그 해 6월, 과천 시민회관에서 재즈콘서트를 개최하고 11월에는 동생이 감독한 영화‘인샬라’에서 사하라사막 현지로케에 동행했다. 밥짓기는 물론 짐꾼 등온갖 험한 일을 맡아 돈독한 남매 사랑을 과시했다.

 

99년 9월, 후배 장욱조의 도움으로 첫 CCM음반 '마음으로 사랑으로 영으로'를 발표했다. 2001년에는 세종문화회관에서 독일의 재즈 캄보 살타첼로와 협연한 것을 비롯, 뮤지컬 ‘블루 사이공’과 ‘겨울 나그네’에 출연 하는 등 폭 넓은활동을 이어 갔다.
또 2002년에는 병마에 쓰러진 선배 솔 가수 박인수를 돕자는 콘서트를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미담을 남기기도 했다.

"왕년의 히트 가수가 아니라 그냥 곁에 있는 가수로 팬들에게 기억되고싶다"는 그는 대중적 인기보다는 음악으로 오랜 생명력을 지켜오는 흔치않은 가수다. 그에게 음악은 인기에 영합한 일회성 열기가 아니라인생을호흡하게 하는 삶의 전부이다.
"과거를 돌아보면 스스로 대견함을 느낄때도 있어요. 많은 고통 속에서 일어나 이렇게 노래를 부르고 있고, 아직도 저의 노래를 사랑해 주는 분들이 있으니 저는 복도 많고 행복한 여자같아요."[최규성 가요 칼럼니스트]

 

 

끝없는 열정과 끼를 가진 보컬리스트 임희숙 프로필

 

1950: 6월 25일 한국전쟁 시작

1950: 6월 29일 서울 태생
1966: 작곡가 손목인으로부터 재즈 사사, 워커힐 무대 데뷔
1969: 전우중 작사.곡 ‘그 사람 떠나고’ 발표, Show, Show, show 등 TBC, KBS  출연시작
         미 8군 신중현, 임희숙, 박인수 Special show 공연 시작
1970: 김희갑 작곡, 김중순 작사 ‘진정 난 몰랐네’ 발표
1971: 박춘석 작곡 ‘기다려야 할 사람’ 발표
1972: 박춘석 작곡 ‘생각나면 오겠지’발표,

        싱가폴 National Day Jazz Festival 초청 한국대표 공연
1974: 김중순 작사,곡 ‘지난날’
1975: 백순진 작사.곡 ‘돌아와 주오’
1976: 손학래 작곡 ‘이마음 아시나요’
1977: 이장희 작곡 ‘믿어도 될까요’
1984: 백창우 작사.곡 골든 1집 ‘내하나의 사람은 가고’
1985: 오준영 작사.곡 골든 2집 ‘상처’
1986: 지명길 작사.곡 골든 3집 ‘사랑의 굴레’
        대한민국 제 1회 Jazz Festival 공연 (리틀엔젤스 회관)
1987: 일본 Sharp & flat Jazz Big Band 내한 협연 공연 2회
1988: ‘88 서울 올림픽 Jazz festival' 공연 (현대예술 극장)
1991: 김준 작사,곡 ‘머물 수 없는 사람’ 발표
         ‘Again & Again' 대한민국 남자 가수 Remake 음반 발표
1994: 신관웅 Jazz Big Band 협연 순회 공연 (부산, 울산, 대구, 광주, 인천)
1995: 김준& 임희숙 ‘행복이 가득한 집’
1996: 임희숙 Jazz Concert (과천 문화회관)
1997: 서울 Summer Jazz Festival 참여 (세종문화회 관)
2000: 서울 팝스 오케스트라 Jazz 협연 (예술의 전당, 세종문화회관)
         경기도립 오케스트라 Jazz 협연 (수원 문화예술 회관)
2001: 독일 쌀타첼로 Jazz Band 협연 (세종문화회관, 울산 현대 문예회관, 목포예술회관)
         야누스 재즈클럽 정기공연 중
         Moon Glow 재즈클럽 정기공연 중
         이외: Jazz Club 천년동안도 180회 공연 (Jazz Club 천년동안도)
         Jazz Club Birdland 150회 공연 (Birdland)
         개같은 날의 오후 출연(영화)
         블루 사이공, 겨울 나그네 공연 (뮤지컬) 

 

23837

 

백창우 ( 인터넷 소굴 개밥그릇)

작사가·작곡가·가수·시인·음악 프로듀서.

시집 네 권과, 작곡집 9장을 냈고 <노래마을> 1·2·3집, 김광석 트리뷰트 앨범 <가객>을 비롯해 스무 장 가량의 음반을 기획·연출했으며

개성있는 음악인들이 꾸미는 토크 콘서트 프로그램인 (케이블TV 37 영화예술채널)을 일년 넘게 진행하기도 했고, 시노래모임 <나팔꽃>동인으로 나팔꽃이 펼치는 크고 작은 공연을 연출하고 있다.

인디레이블 <노래나무>, 백창우 노래작업실 <개밥그릇>을 만들어 굴리고 있으며, 어린이 음반사<삽살개>를 만들어 전래동요와 창작동요를 음반과 책으로 내고 있다.

 

 

 

'문화문학음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순식간 순간 별안간 찰나 백구과극 경각 삽시 수유  (0) 2022.12.09
치자꽃 설화  (0) 2022.10.22
삼포 가는길  (0) 2022.09.08
가을 시  (1) 2022.08.27
올리비아 뉴튼 존 영면  (0) 2022.08.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