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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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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시인의 언덕 서울미술관 석파정 나들이

by 한국의산천 2024. 1. 8.

윤동주 시인의 언덕을 오르고 자하문을 나서서 서울 미술관 석파정 나들이

 

▲ 윤동주 시인의 언덕에서 보이는 북한산 비봉능선 ⓒ 2016 한국의산천  

 

▲ 석파정이 있는 대원군 별서 ⓒ 2016 한국의산천

▲ 아름다운 인왕산 자락 남쪽에 자리한 흥선대원군 별서 ⓒ 2016 한국의산천

 

▲ 석파정 가는 길 ⓒ 2016 한국의산천

흥선대원군 별서 앞에서

▲ 석파정 ⓒ 2016 한국의산천  

 

 

 

 

▲ 삼계동 각자 ⓒ 2016 한국의산천

 

그리운 것은 다 산뒤에 있다.

 

                           -  김  용  택

 

이별은 손끝에 있고

서러움은 먼데서 온다.

강 언덕 풀잎들이 돋아나며

아침 햇살에 핏줄이 일어난다.

 

마른 풀잎들은  더 깊이 숨을 쉬고

아침 산그늘 속에

산벗꽃은 피어서 희다.

 

누가 알랴, 사람마다

누구도 닿지 않는 고독이 있다는 것을

돌아않는 산들은 외롭고

마주보는 산은 흰 이마가 서럽다.

 

아픈데서 피지 않는 꽃이 어디 있으랴

슬픔은 손끝에 닿지만

고통은 천천히 꽃처럼 피어난다.

 

저문 산 아래

쓸쓸히 서 있는 사람아

 

뒤로 오는 연인이 더 다정하듯이

그리운 것들은 다 산뒤에 있다.

 

 

 

 

 

 

 

 

▲ 스물여덟 꽃다운 나이에 떠난 동주. 그 분을 기리는 시인의 언덕 ⓒ 2016 한국의산천

 

  우리 민족의 정서를 가장 잘 표현한 것으로 평가받는 윤동주 시인은 연희전문학교 문과 재학 시절(1941년 5월) 세종마을(종로구 누상동 9번지) 소설가 김송(金松.1909~1988)의 집에서 5개월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하숙생활을 하며 별헤는 밤, 자화상, 쉽게 쓰여진 시 등 주옥같은 작품을 남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러한 인연으로 종로구에서는 지난 2009년 시인의 체취가 서린 장소인 인왕산 자락 청운공원에 「윤동주 시인의 언덕」을 조성하여 윤동주 시인의 시비(詩碑)를 세웠고, 2012년 7월 윤동주문학관을 개관했다.

 

  윤동주문학관(창의문로 119)은 흉물을 보물로 재탄생시킨 문화 공간으로 청운아파트가 철거되고 용도폐기로 버려진 수도가압장과 물탱크를 활용해 윤동주 시인의 시 세계를 잘 표현할 수 있는 공간으로 조성된 것이다.

 

 

 

윤동주문학관, 기념관, 시인의 언덕 

윤동주 시인은 1917년 12월 30일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나 1945년 2월 16일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항일운동 혐의로 인한 투옥과 이른 죽음은 그를 영원한 저항시인, 청년시인으로 남게 했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기 전 4년간 다녔던 연희전문(지금의 연세대학교) 교정과 주변에서 지금도 시인이 남긴 흔적들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소학교(초등학교)를 다니면서 친구들과 문예지 《새명동》을 만들 만큼 일찍부터 문학에 소질을 보였다. 중학교를 졸업한 윤동주는 의과 진학을 고집하는 아버지의 만류를 뿌리치고 고종사촌 송몽규와 함께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했다. 이곳에서 당시 최고의 국어학자였던 최현배와 역사학자 손진태의 강의를 들으며 민족에 눈을 떴다고 한다.

 

 

시인의 언덕

 윤동주 시인은 연희전문 입학 2년 만에 기숙사를 나와 종로구 누상동에서 후배 정병욱과 함께 하숙을 시작했다. 경복궁 서쪽 누상동은 지금 서촌이라 불리는 지역에 있다. 서촌에는 윤동주뿐 아니라 시인 이상과 화가 이중섭의 집도 있었다. 윤동주가 하숙을 했던 곳은 소설가 김송의 집이었다. 화가 박노수와 이상범의 집도 서촌이었다.

 

  이곳에 머물던 시인은 종종 효자동길을 따라 인왕산에 올라 시상을 다듬곤 했다. 눈 아래 펼쳐지는 식민지 경성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미래와 민족의 앞날을 생각했을 것이다. 시인이 오르던 인왕산 자락에 '시인의 언덕'이 있다. 창의문 맞은편 길로 난 나무계단을 따라 조금만 오르면 서울성곽 앞으로 이곳이 윤동주 시인의 언덕임을 알리는 자그마한 표지석이 있다. 그 옆에는 〈서시〉를 새긴 시비가 있고, 아래로는 옛날 시인이 봤던 것과는 사뭇 다른 서울의 풍경이 펼쳐진다.

 

 

슬픈 족속(族屬)

                    

                        -윤 동주

 

흰 수건이 검은 머리를 두르고

흰 고무신이 거친 발에 걸리우다

 

흰 저고리 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고

흰 띠가 가는 허리를 질끈 동이다 (1938. 9.)

 

 

  1941년 11월, 졸업을 앞두고 있던 윤동주 시인은 자신이 그때까지 써놓은 시 가운데 18편을 뽑고 거기에 '서시'를 붙여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의 시집을 엮었다.

그리고 3부를 필사해서 1부는 자신이 갖고, 다른 1부는 같이 하숙하던 후배 정병욱에게 주고, 나머지 1부는 연희전문 은사인 이양하 교수에게 주었다.

하지만 이 교수는 윤동주의 시가 일제의 검열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고 출판 보류를 권했다.

 

  이듬해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일본 유학길에 오른 시인은 결국 자신의 시집이 나오는 것을 보지 못한 채 옥사하고 만다. "조선인 유학생을 모아놓고 조선의 독립과 민족문화의 수호를 선동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된 지 1년 반 만의 일이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유고시집이 되어 시인 정지용의 발문을 달고 1948년 세상에 나왔다. 그리고 모두가 알다시피, 윤동주는 지금까지 한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으로 남아 있다.

 

 

 

 

슬픈 족속(族屬)

 

 흰 수건이 검은 머리를 두르고

흰 고무신이 거친 발에 걸리우다

 

흰 저고리 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고

흰 띠가 가는 허리를 질끈 동이다 (1938. 9.)

 

※ 우리 백의 민족이 일제치하 암흑 세계에서 가난하고 피로에 지쳐 민족의 고달픈 현실을 말하면서도 의연하게 저항하는 뜻을 표현하는 시이다

 

 

 

 

 

 

 

 

 

 

 

 

 

 

 

 

 

 

 

 

 

 

 

 

 

 

 

 

 

 

 

 

 

2008년에 찾았던 석파정과 주변 둘러볼곳 

 

석파정(石坡亭

  2008년 현재 출입금지: 출입구가 가림막으로 완전 봉쇄되어있음) 

서울 종로구 부암동 산 16-1번지 인왕산 넓은 산자락에는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26호인 석파정(石坡亭)이 자리하고 있다.

[답사·촬영.2008. 2. 17일 일요일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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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족불욕(知足不辱)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지지불태(知止不殆)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가이장구(可以長久) 오래도록 편안할 것이다.  - 노자 도덕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