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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MTB등산여행

장의사 당간지주 총융청 조지서터

by 한국의산천 2008. 2. 17.

세검정 초등학교에 흔적만 남아있는 장의사 당간지주, 총융청터, 조지서터 

[답사·촬영.2008. 2. 17일 일요일 날씨 맑음  ]

 

오랜 시간이 지난 유적지를 찾아가면 눈에 보이는것이 기대보다 못한 경우가 있지만, 그곳에 남아있는 벽돌 하나, 발에 채이는 기왓장 한 조각에서도 오랜 역사의 무수한 바람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가 있다면 그 답사는 보람있는 여행으로 남을 것이다. -한국의산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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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높이 3.68m의 장의사 당간지주 (보물 제235호)ⓒ 2008 한국의산천 

세검정 초등학교 운동장 옆에 장의사 당간지주가 서있다. 이 초등학교 자리가 옛날의 대찰 장의사라는 절터였다.

역사는 사라지지 않고 돌고 돌고 대찰 장의사가 있던 절이 다시 총융청으로 사용되고 또 다시 어린아이들이 해 맑게 뛰노는 학교 운동장으로 변했다. 

 

과거에는 대찰이었던 장의사가 사라지고 지금은 이 두개의 돌기둥만 남아 그당시의 영화를 유츄해볼 뿐이다.

이것은 서울 지역에서는 가장 오래된 당간지주로서 보물 제 235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그 옛날 장의사의 당간지주로 큰 당간을 세워 놓는 받침대이다.

▲ 참고: 경기 안성 칠장사에 잘 보존되어 남아있는 당간 2005. 11월 15일 촬영 ⓒ 2008 한국의산천 

 

당간이란 일명 짐대로 불리는 큰 절의 문 앞에 세워 놓는 깃대로서 부처의 공덕을 나타내는 장엄구이자 큰 행사가 있을때 그려진 불상, 즉 탱화를 올려 달때 쓰였던 것이다.

 

당간은 당을 걸어두는 장대인데 대개 돌이나 쇠로 만들어졌다. '당'이란 본래 사찰의 문전에 걸었던 일종의 깃발과 같은 것으로서 사찰에 기도나 법회 등의 의식이 있을 때 당간 꼭대기에 매달던 것이었다. 또한 '당간지주'란 당간을 지탱하기 위하여 당간의 좌우에 세운 기둥으로 돌로 만들어졌는데 이러한 당과 당간은 통일신라시대부터 각 사찰에서 성대하게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천으로 만든 당은 내구성이 없어서 현존하는 것이 없고 당간과 그 지주만 남아 있는 것이다.

 

조선 초에 중이 1100여명이나 있을만큼 큰 사찰이었던 이곳은 서울 부근에 물 맑고 풍치가 빼어난 곳마다 주색을 즐기고 방탕한 생활을 하기 위해 연회장을 꾸몄던 연산군이 장의사를 헐어버리고 꽃밭을 만들어 버림으로써 그 옛날의 모습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한다.  

 

▲ 당간지주 안내문 ⓒ 2008 한국의산천 

▲ 세검정초등학교 교정內 장의사터(藏義寺址)에 남아있는 당간지주 ⓒ 2008 한국의산천


종로구 신영동 219-4번지, 지금은 세검정초등학교가 들어서 해맑은 어린이들의 제잘대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 곳이 신라 때 창건된 장의사(藏義寺)의 옛터이다.

'삼국사기'와'삼국유사'에 전하는 절의 창건과정을 살펴보면 7세기중엽 한반도에서는 고구려·백제·신라 삼국간의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 무렵 신라의 화랑인 장춘랑(長春郞)과 파랑(罷郞) 둘은 황산벌(지금의 논산지방)에서 한강유역의 쟁탈권을 확보하기 위해 백제와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밀고 밀리는 와중에서 두 화랑은 선봉에 나서 신라군사를 독려하며 용감하게 싸웠다. 그러나 대세는 이미 기울어졌고, 마침내 둘은 장렬하게 최후를 마치게 된다.

절은 이 두 청년과 전사자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659년(무열왕 6)무열왕이 세운 추복사찰(追福寺刹)이다. 나라를 위해 젊은 목숨을 바친 두 화랑의 의로움이 서려있다는 뜻에서 장의사라 하였다. 이후 절에 관한 신라시대의 사정은 더 알 수가 없다. 두 화랑의 회생정신을 기리는 이 절에는 신라인의 발길이 이어졌을 것이다.

고려때는 예종·인종·의종 등이 남경(南京 ; 지금의 서울)에 행차하면서 절에 들르기도 하였으니, 그 규모는 무척 컸으리라 짐작된다. 고려시대의 몇몇 금석문을 보면 원종대사 찬유(869∼958), 법인국사 탄문(900∼975), 자정국존 미수(1240∼1327)등의 고승들이 이곳에 머물렀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태조가 정비(正妃)인 한씨의 기신재(忌晨祭)를 이 절에서 지낼 만큼 한양의 대표적 사찰이었다. 이로부터 왕실의 각별한 지원과 배려가 있었음은 물론이다. 세종(1428∼1450)은 절의 일부 건물에 여러 신하들을 거처하게 하며 글을 읽게 하였고, 성종(1469∼1494)은 나이 적은 문관 채수(蔡壽) 등에게 관직에 오르기까지 여가를 주어 이 절에서 수학하게 하기도 하였다. 1496년(연산군 2) 9월에는 절의 스님이 전각이 기울고 훼손이 심하자 예조(禮曹)에 수리를 청하였더니, 이듬해인 1497년 봄에 국가에서 관리를 파견하여 보수를 돕도록 하였다.

신라때 국왕에 의해 창건되어 고려, 조선을 거치면서 오랜 세월 영화를 누려 왔던 장의사는 이제 연산군이라는 시대의 폭군을 만나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1505년(연산군 11) 연산군은 도성안 백리되는 곳에 푯말을 세워 그 안의 주현(州縣)과 군읍(郡邑)을 폐지하고 백성을 모두 몰아내도록 명령하였다. 또한 기전(畿甸) 수백리를 폐허로 만들어 짐승을 놓아 기르도록 하였다. 계속해서 도성 안의 대궐 근처에 있는 인가를 모두 철거 시키고, 동서로 돌성을 쌓아 한계를 정한 뒤 사냥터로 쓰기 위해 짐승을 길렀다. 백성들의 원성에는 아랑곳없이 연산군의 패악은 더욱 심해져 높은 곳은 깎고, 낮은 곳은 메워 큰길을 곳곳에 만들어 놓고 밤낮으로 궁녀들과 방탕한 생활을 계속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원각사(圓覺寺)는 기생이 거주하는 주색장으로 바뀌었고, 흥천사(興天寺)는 사냥길의 마굿간으로 전락하고 만다. 일찍부터 물맑고 빼어난 풍광에 자리잡은 장의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1506년(연산군 12) 2월 절을 헐고 그 터에 화계(花階)를 설치하여 장의사는 이제 꽃밭으로 변하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850여년의 오랜 연원을 지닌 장의사는 어이없는 연산군의 만행으로 법등이 사라지게 되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절이 헐리기 두해 전인 1504년(연산군 10) 9월 법당의 불상을 삼각산의 다른 절로 옮겨 봉안하였다는 점이다.

절이 사라지기 전에 이곳을 기록한 여러 문헌을 보면 그 풍모를 대강 짐작할 수 있다. “깊은 구름 속에 당간이 높이 솟아 노닐고 풍경소리는 온 산을 찢을 듯 진동시키네”(동국여지승람) 또한 정이오(鄭以吾)는 “홀로 선 탑은 달 속에 비추고, 갸날픈 종소리는 구름 저 멀리서 들리네”라고 하였다.(동국여지승람) 성현(成俔)은 “도성 밖 유람처 중에서 장의사 앞의 계곡이 가장 빼어나다”(용재총화)고 하였다.

터만 남아 있던 장의사에 1712년(숙종 38) 군사훈련소인 연무대가 설치되었고, 1747년(영조 23)에는 총융청(總戎廳)이 설치되어 3백여칸의 건물이 들어섰다. 1886년 이후에는 신식군대인 별기군의 훈련장이 되기도 하였다. 1930년 후반에 국민학교가 세워졌다가 1948년 지금의 세검정초등학교가 들어서게 되었다.

신라 무열왕의 호국의지가 반영되어 창건되었던 장의사는 고려의 고승대덕들이 주석하기도 했으나, 위와 같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연산군의 손에 의해 사라지게 되었다. 지금은 운동장 한 켠에 당간지주와 몇 개의 건물 초석들만이 남아 이곳이 절터였음을 일러 줄 뿐이다.
  

▲ 총융청터 ⓒ 2008 한국의산천

조지서터 표석은 총융청터 표석에서 세검정 초등학교 담장을 따라 세검정(정자) 방향으로 200m 정도 내려오면 길가에 세워져 있다. 

 

총융청터

연산군 시대를 만나 쇠락하고 터만 남아 있던 장의사에 1712년(숙종 38) 군사훈련소인 연무대가 설치되었고, 1747년(영조 23)에는 총융청(總戎廳)이 설치되어 3백여칸의 건물이 들어섰다. 1886년 이후에는 신식군대인 별기군의 훈련장이 되기도 하였다. 1930년 후반에 국민학교가 세워졌다가 1948년 지금의 세검정국민학교가 들어서게 되었다.

 

총융청( 摠戎廳 )

조선 후기에 설치된 중앙 군영(軍營)을 말한다. 1623년( 인조 1 ) 인조반정 후 후금( 後金 )과의 관계가 악화된 가운데 이듬해에 일어난 이괄( 李适 )의 난에서, 그 반군이 수도 외곽인 경기도의 방어망을 쉽게 뚫고 서울을 점령하게 되는 취약성이 드러난 것을 계기로 설치되었다.인조반정 후 왕을 호위해 공주까지 내려간 서인정권( 西人政權 )의 어영군을 강화하는 동시에, 경기도 일대의 정군과 속오군( 束伍軍 )을 조직화해 총융군으로 편제하였다.당초 경기도내의 정군·속오군 및 별마대군( 別馬隊軍 ) 등으로 편제된 총융군의 수는 약 2만여 명에 이르렀다. 경기도의 군사를 수원·광주·양주·장단·남양 등의 5영으로 구성한 초기의 편제는 1영에 3부, 1부에 3사( 司 ), 1사에 3초( 哨 )를 둔 체제였다.총융군은 처음부터 수도를 직접 방위하고 왕을 호위하는 군영이라기보다, 후금과의 관계에 대비해 수도 외곽 방비를 담당해 간접적으로 수도 방어에 기여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1624년( 인조 2 )에 남한산성이 개축되고, 이어 수어청이 설치됨으로써 점차 경기 일원의 방어를 수어청과 나누어 담당하게 되었다.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의 징병이 주로 어영군에서 행해졌다.이 때문에 총융군을 보강하기 위해 1644년 총융사 구인기( 具仁攪 )가 장초군( 將抄軍 ) 10초와 둔장초( 屯將抄 ) 3초를 뽑아 겨울 3개월 동안 도성에 입번해 궁성 숙위의 임무를 가지게 되면서 중앙군의 테두리에 들게 되었다.

 

1674년( 숙종 즉위년 )에는 총융사의 수하 친병인 아병( 牙兵 ) 10초와 둔아병( 屯牙兵 ) 3초가 첨가되어 이른바 내영제( 內營制 )가 성립되었다. 이로써 2부의 내영, 3영의 외영체제가 갖추어졌다.각 부·영에는 지곡관( 知穀官 )·기패관( 旗牌官 ) 등의 훈련 담당관이 있었으며, 수원이 유수부로 승격하면서 중영은 파주로 옮겨지기도 하였다. 1750년( 영조 26 ) 국가 재정의 격감을 이유로 총융사를 경기병사가 겸하도록 하여 본청을 북한산성에 출진( 出陣 )의 형식으로 두게 하고였다.이후 1757년에는 북한산성을 맡아 다스리던 경리청( 經理廳 )을 이관받아 북한산성 중심의 경기 북부 수도의 외곽 방어를 담당하였다. 한때 다시 2부 3영체제로 환원했다가 1792년( 정조 16 ) 이후 내영제를 지양하고 외영체제를 그대로 유지하였다.그러나 영조 때 83초에 이르렀던 총융군이 정조 때에는 43초로 크게 감축되었다. 1793년 이후 정조의 왕권 강화책 일환으로 화성( 華城 ) 중심의 장용외영( 壯勇外營 )이 설치되는 과정에서 모두 이에 이속되었다.순조 초에 장용영이 혁파됨으로써 그 기능을 다시 회복했다가 1884년( 고종 21 )에 친군영제( 親軍營制 )가 성립되면서 폐지되었다.

 

조지서  (造紙署 세검정 초등학교 자리)조지서는 국가에서 사용하는 종이를 만드는 관아로서 1415년 태종 때 조지소(造紙所)란 이름으로 설치 되었다가 1466년 세조 때 조지서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곳에서는 국가문서에 쓰이는 표전지(表錢紙), 지폐용지인 저화지(楮貨紙)와 기타 서적 제작용 종이 문서를 생산하였다. 조지서조선시대 궁중과 중앙정부기관에서 표(表) ·전(箋) ·자문(咨文) 등에 사용할 종이 또는 모든 일에 쓸 지지(紙地)를 제조하는 일을 담당하던 관청으로 중국에 공물로 보내는 종이 등을 생산하던 관설 제지소.1415년(태종 15) 조지소(造紙所)라는 이름으로 설치되었다가 1465년(세조 11) 조지서로 이름이 바뀌었다. 서울 근교의 물이 좋고 넓은 바위가 있어 한지(韓紙) 제조에 적당한 자하문(紫霞門) 밖 탕춘대(蕩春臺)에 설치되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제지 기술자인 지장(紙匠)이 81명, 보조역이라 할 수 있는 차비노(差備奴)가 90명이 있던 수공업장이었다. 지장은 조선의 '부역동원제'에 의해 3교대로 동원되었다. 이들은 전국에서 가장 우수한 제지기술자들이었고, 따라서 조지서에서 생산되는 종이는 국내에서 최고 품질의 종이였을 뿐만 아니라 중국에까지 천하무비(天下無比)로 알려졌었다. 조지서에 소속된 지장들은 이미 조선의 전기부터 조지서 근처에 하나의 마을을 이루어 살면서 생산에 종사할 만큼 전업수공업자화했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한때 조지서가 큰 타격을 받기도 했는데, 1626년(인조 4)의 기록에 의하면 전쟁 후에 조지서에는 겨우 5명의 지장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정부에서 승려지장을 동원했다고 전한다.1882년(고종 19)에 폐지되었다. 

 

▲ 세검정 초등학교 앞에서 바라 본 비봉능선 ⓒ 2008 한국의산천  

겨울은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파란 하늘과 따스한 바람이 봄이 멀지 않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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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족불욕(知足不辱)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지지불태(知止不殆)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가이장구(可以長久) 오래도록 편안할 것이다.  - 노자 도덕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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