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난 이들이 아려서… 팔순 詩人은 오늘도 꿈을 꾼다
6년 만에 열한번째 시집 '사진관집 이층' 펴낸 신경림 [정리 : 한국의산천 ]
올해로 팔순을 맞은 신경림 시인(예술원 회원)은 요즘 세 가지 꿈을 꾼다고 한다.
"얼마 남지 않은 내일에 대한 꿈도 꾸고 내가 사라지고 없을 세상에 대한 꿈도 꾼다. 때로는 그 꿈이 허황하게도 내 지난날을 재구성하기도 한다." 그런 시인이 꿈속의 시간여행을 노래한 시집 '사진관집 이층'(창비)을 최근 펴냈다. 6년 만에 내는 열한 번째 시집이다.
꿈꾼 풍경을 사진으로 찍은 듯이 선명하게 되살려냈다. 화려한 원색이 아니라 빛바랜 흑백사진이다.
시인을 만났더니 "나이가 든다고 달관하는 게 아니니까 자꾸 옛날로 돌아가면서 이렇게 시를 쓰지"라고 했다.
시어(詩語)로 인화한 추억의 사진엔 가난과 불행과 고통으로 얼룩진 가족사(家族史)가 사실적으로 담겨있다.
'신경림 시학(詩學)'이라면 교과서에 수록된 '가난한 사랑 노래'가 대표하듯 빈곤과 결핍에 시달리는 민초(民草)들의 가슴 아픈 삶을 담담하게 묘사한 것이다.
이번 시집에선 시인이 누구보다 가난하게 살았던 체험을 고스란히 털어놓았다.
'가난한 아내와 아내보다 더 가난한 나는'이란 시가 있다. "떠나온 지 마흔해가 넘었어도/나는 지금도 산비알 무허가촌에 산다"고 되돌아봤다. 여기엔 잊히지 않는 아픔이 있다.
충북 충주가 고향인 시인은 1956년 데뷔했다가 낙향한 뒤 1968년 가족을 이끌고 서울로 올라왔다.
서대문구 홍은동 산 일번지에 둥지를 틀었다. 부엌이 따로 없는 사글셋방이었다.
시인은 출판사와 잡지사를 옮겨 다니며 겨우 시를 썼다. 하지만 가족을 먹여 살리기엔 부족했다.
시인의 아내가 봉제공장에서 얻어온 헌옷에 단추를 달아 돈을 벌었다.
시인은 꿈속에서 그 판잣집 시절로 되돌아갔다. "도시락을 싸며 가난한 자기보다 더 가난한 내가 불쌍해/눈에 그렁그렁 고인 아내의 눈물과 더불어 산다"고 읊었다.
그 아내는 40여 년 전 암으로 세상을 떴다. 노년에 이른 시인은 꿈에 아내를 다시 만나곤 한다.
▲ “나이 들면 체념이 많아지다 보니 언어가 진솔해지더라”며 지난 몇 해 사이 자주 꾼 꿈을 꾸밈없이 노래한 신경림 시인. /이덕훈 기자
꿈에서 본 가족과 친구들 사진 찍듯 되살려 노래
"고향 떠난 것 같지만 제자리… 생각도 결국 꿈이더군요"
시인의 가족사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할머니는 치매, 아버지는 중풍을 앓았다. 세상을 뜬 가족이 자꾸 꿈에 나타난다. 시인은 시 '나의 마흔, 봄'에서 '그리워서 찾아가는, 그 봄이 싫다'고 했다. 시인에게 "힘드셨겠지만 '싫다'는 말씀은 반어법(反語法)이죠?"라고 물었더니 "그렇지, 싫어도 자꾸 꿈에 나타나는 걸 어떡해"라고 답했다.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세상을 뜬 친구들도 추억했다. 재야 철학자 민병산, 화가 여운이다. 민병산은 환갑 하루 전에 숨을 거뒀다. 시인은 준비했던 환갑 축하시를 조시(弔詩)로 바꿔야 했다. 하나둘씩 주변에서 떠나는 사람이 늘어났다. 시인은 빛바랜 사진 속으로 떠나간 사람들이 되돌아오는 꿈을 꾼다. 그러다 자신도 어느새 흑백사진에 갇혀있다는 꿈을 꾼다. 그런데 '비로소 나는 안도한다'고 노래했다.
시인이 되돌아본 지난 삶은 버렸던 것을 되찾아가는 과정이었다. 그런데 이젠 '당당히 빈손을'이란 시를 썼다. '찾았던 것들을 다시 버리는 기쁨은 더욱 크니까'라고 노래했다. 시인은 어린 시절, 고향 역전 사진관집 이층에 하숙을 하고 싶어 했다. 그곳에 살면 언제라도 기차를 타고 어디론가 떠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꿈은 이뤄지지 않았지만 시인은 살아가면서 이곳저곳 여행을 다녔다. 그런데 요즘 꿈에 그 사진관이 자꾸 나타난다. '살아보지 못한 새로운 세상으로 가는 첫날을/다시 삐꺽대는 사진관집 이층에 가 머물고 싶다.' 시인은 헤어지기 전에 인생에 대해 몇마디 던졌다. "살아보니까 고향을 떠난 것 같아도 결국 제자리에서 맴돌았더라구. 꿈은 잠잘 때만 꾸는 게 아니야. 생각도 꿈이더라구." / 박해현 문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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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계나루. 이곳 가까운 노은면 출생이신 신경림 시인의 詩 <목계장터> 詩碑 ⓒ 2014 한국의산천
일제 시대까지만 해도 목계나루엔 인천항에서 소금, 건어물, 젖갈류, 생활 필수품 등을 싣고 온 황포돛배가 수십 척씩 붐볐다. 이런 물건들은 내륙 지방인 충청도와 강원도, 그리고 백두대간 너머 경상도의 문경과 상주 각지로 팔려 나갔다.
당시 뱃일하는 인부만도 500여 명이나 되었다 하니, 나루와 이어진 목계장터는 언제나 시끌벅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젠 모두 옛 일에 불과하다. 위용을 자랑하던 조창은 모두 허물어졌고, 주변엔 주춧돌 몇 개와 깨진 기왓장만이 뒹굴고 있을 뿐이다. 강나루의 흔적마저도 모래를 퍼내고 강 언덕에 축대를 쌓으면서 형편없이 변했다. 또 늘상 인파로 북적거렸을 목계장터는 지금은 매운탕집과 수석 가게들만이 한적한 풍경화를 연출할 뿐이다.
목계나루에서 20리쯤 떨어진 노은면 연하리에 태를 묻은 신경림 시인에게 목계나루는 소중한 추억의 장소다. 시인은 광복 이듬해인 초등학교 4학년 때 목계나루 솔밭으로 소풍을 갔다가 목계장터를 보곤 강렬한 인상을 받게 된다. 당시까지만 해도 목계나루는 제법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는 시인의 기억 속에 오랫동안 이어지다가 마침내 ‘목계장터’라는 명시로 열매를 맺는다.
목계장터
- 신 경 림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산서리 맵차거든 풀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 새우 끓어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
짐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 목계나루 碑곁에서 딸아이의 포즈 ⓒ 2014 한국의산천
목계나루
여주에서 산척방면으로 38번 자동차 전용도로를 타고 가다가 19번 도로로 접어들기 위해서 오른쪽으로 새로 길게 지어진 목계대교가 지나는 남한강 상류를 보며 목계교를 건너니 오른쪽으로 목계나루터라는 커다란 입석이 서있다. 번창했던 그 예전의 나루 <목계나루터>라는 표석과 그옆에는 이곳 가까운 노은면 출생이신 신경림 시인의 詩 <목계장터> 詩碑가 서있다.
남한강의 목계나루는 나라의 세금을 거둬들이는 수곡선이 들어갈 수 있는 남한강 수운의 종점이었다. 곡식 사백 가마니를 실은 배 20여 척이 서로 교차할 수 있었고, 나루 건너편에 세금으로 거둬들인 곡식을 보관하는 가흥창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사과나무 몇그루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신경림 [ 申庚林 출생-1936.04.06 ~ ]
출생지 충청북도 충주
데뷔 1955.문학예술에 「갈대」, 「묘비」 등이 추천되어 등단
1936년 4월 6일 충북 충주 출생. 동국대 영문과를 졸업했고, 1955년 『문학예술』에 「갈대」, 「묘비」 등이 추천되어 등단했다.
이후 계속 침묵하다 1965년에 다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1973년 첫 시집 『농무』를 간행했고, 평론집 『한국 현대시의 이해』 등을 간행했다 1974년 시집 『농무』로 만해문학상을 수상했고, 1981년 한국문학작가상, 1990년 이산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농무』(1973), 『새재』(1979), 『달 넘세』(1985), 『민요기행 1』(1985), 『남한강』(1987), 『가난한 사랑노래』(1988), 『민요기행 2』(1989), 『길』(1990), 『갈대』(1996),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1999) 등이 있고, 평론집에 『한국 현대시의 이해』(1981), 『삶의 진실과 시적 진실』(1983), 『우리 시의 이해』(1986) 등이 있다.
신경림의 등단 작품인 「갈대」, 「묘비」 등은 대상을 농민으로 한정하지 않고 인간 삶의 보편적인 쓸쓸함과 고적함을 주된 분위기로 하고 있다.
첫 시집인 『농무』 이후 신경림의 시는 농민의 삶의 현장을 그린 시로 일관되어 있지만, 등단 초기의 서정성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그의 시는 농민의 고달픔을 다루면서도 항상 따뜻하고 잔잔한 감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 감동을 준다. 그의 시는 여타의 노동시에 비해 강력한 울분이나 격렬한 항의, 개혁의 의지 등은 상대적으로 작은 편이다. 이러한 특징은 신경림 시의 장점이자 한계로 지적되기도 하지만, 중간층의 독자를 확보하는 가장 큰 요인이기도 하다.
『새재』 이후에 쓰여진 『민요기행』, 『남한강』, 『길』 등의 시집은 우리 것에 대한 시인의 애정을 보여주는 작품으로서, 우리 민요와 지리 등을 소재로 하고 있다.
특히 장시집인 『남한강』은 농민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우리 역사를 바라보고자 한 시도로서, 서사적인 스케일을 보여주는 방대한 작품이다.
시집으로 『농무』(1973), 『새재』(1979), 『새벽을 기다리며』(1985), 『달넘세』(1986), 『씻김굿』(1987), 『우리들의 북』(1988), 『가난한 사랑노래』(1988), 『남한강』(1989), 『쓰러진 자의 꿈』(1993), 『우리들의 복』(1989), 『저 푸른 자유의 하늘』(1989), 『갈대』(1996),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1998), 『목계장터』(1999), 『뿔』(2002), 『낙타』(2008) 등이 있다.
학력
동국대학교 - 영어영문학 학사
수상내역
1974작품명 '농무' - 시집 농무로 만해문학상을 수상, 1981한국문학작가상, 1990 이산문학상 작품목록농무(1973) 남한강(1987)
[출처 한국현대문학대사전]
▲ 목계나루에 세워진 목계대교 ⓒ 2014 한국의산천
신라와 고구려를 지난 남한강 물줄기는 장미산성을 크게 휘돌아 흐르며 목계나루로 이어진다.
목계나루는 강물이 말라붙은 갈수기에도 언제나 배가 드나들 수 있는 남한강 수운의 가항종점(可航終点)이었다. 조선 시대에 재정 확보를 위해 거둔 쌀과 베 따위를 보관하는 창고인 가흥창(可興倉)도 이 곳에 있었다.
생선이 있으면 파리가 날아들고 나락이 쌓여 있으면 쥐가 들끓듯이 이곳 가흥창도 예외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선산부사를 지낸 점필재 김종직이 이곳을 지나며 ‘가흥참(可興站)’이라는 시를 남겼는데 경상도 백성들이 세곡을 바치는데 따른 고통과 부패한 가흥참 관리들의 실상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어 읽어 볼 만하다.
우뚝이 솟은 저 계립령은
예로부터 남북의 한계가 되었는데
북인들은 호화로운 생활을 탐하여
남인들의 기름과 피를 달게 여기네
우마차로 험난한 산길을 통해라
들판에는 장정 남자가 전혀 없네
밤이면 강가에서 서로 베고 자노니
아전들은 어찌 그리도 탐획한고
시장에선 생선을 가늘게 회치고
모점에는 술이 뜨물처럼 하얀데
돈 거두어 노는 계집 불러오니
머리꾸미개에 연지를 발랐네.
백성들은 심장을 깎는 듯 괴로운데
아전들은 방자히 취해서 떠들어대며
또 두곡(斗斛)의 여분까지 토색을 하니
조사(漕司)는 의당 부끄러울 일이로다
관에서 부과한 건 십분의 일인데
어찌하여 이분 삼분을 바치게 하나
강물은 스스로 도도히 흘러서
밤낮으로 구름과 아지랑이를 뿜어내는데
배 돛대가 협곡 어귀에 그득히
북쪽에서 내려와 다투어 실어가니
남인들의 얼굴 찡그리고 보는 것을
북인들이 누가 능히 알겠는가. [출처: 이지누 한강을 걷다]
詩作 59년 신경림 "지금도 꿈꿀 수 있다는 게 큰 축복"
열한 번째 시집 '사진관집 이층' 출간
"시 쓰기와 인생은 긴 여행…죽어라고 떠나왔지만 내가 선 자리는 처음 그대로"
신경림 시인(사진)처럼 ‘작은 거인’이라는 표현이 잘 어울리는 인물이 있을까.
160㎝도 안 돼 보이는 자그마한 체구에 소년처럼 맑은 음성이지만 그처럼 한국 문학과 사회에 단단하게 자리잡고 있는 시인도 드물다.
시를 읽지 않는 세태라고 하지만 ‘농무’ ‘가난한 사랑노래’ ‘목계장터’와 같은 그의 절창(絶唱)을 아는 사람은 여전히 많다.
신 시인이 마지막 신 시인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열한 번째 시집 《사진관집 이층》(창비)을 발표했다.
1936년생이니 벌써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 서울 광화문에서 14일 만난 그는 “과연 (시집을) 더 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며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이번 시집을 엮었다”고 했다.
자연스럽게 지난 세월을 정리하는 시들이 많아졌다. 가난과 상실로 고통스러웠던 지난날이 매일 꿈에 나왔다.
“나이를 먹으니까 많이들 물어봐요. 가장 행복했던 때가 언제냐고. 사실 없어. 전부 고통스러웠을 뿐이지.
아내가 암으로 세상 뜨고, 할머니는 치매고 아버지는 중풍으로 쓰러져 있고. 그런데 나는 하루가 멀다 하고 수사기관에 불려 다니고…. 꿈에 그때가 제일 많이 나와요. 뭔가 시를 써서 털어버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지.”
고달픈 현실이었지만 그는 ‘꿈’을 꾸며 이겨냈다. 그는 “꿈꿀 수 있다는 걸 축복으로 여겨 왔다”며 “여든의 나이지만 나는 앞으로도 꿈꿀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
그래선지 이번 시집은 하나의 긴 여행을 하는 느낌을 준다. 소년부터 노인까지의 시간, 정릉시장 골목길부터 세계 곳곳의 풍경까지 크고 긴 시공간이 담겨 있다. 하지만 시인은 그 시간과 공간들이 “결국 하나”라고 했다. 그는 “죽어라고 떠나왔는데 결국 제자리라는 생각이 든다”며 “인생도 엄청나게 달라진 것 같은데 결국 같고. 세상도 상당히 많이 변한 것 같은데 본질을 보면 변한 게 없더라”고 회고했다.
‘정릉동 동방주택에서 길음시장까지, 이것이/어머니가 서른해 동안 서울 살면서 오간 길이다./(…)/어려서부터 집에 붙어 있지 못하고/미군 부대를 따라 떠돌기도 하고/친구들과 어울려 먼 지방을 헤매기도 하면서,/어머니가 본 것 수천배 수만배를 보면서,/나는 나 혼자만 너무 많은 것을 보는 것을 죄스러워했다./하지만 일흔이 훨씬 넘어/어머니가 다니던 그 길을 걸으면서,/(…)/메데진에서 디트로이트에서 이스탄불에서 끼예프에서/내가 볼 수 없었던 많은 것을/어쩌면 어머니가 보고 갔다는 걸 비로소 안다.’(‘정릉동 동방주택에서 길음시장까지’ 부분)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4·19혁명, 5·16, 5·18 등 격변의 현대사를 모두 거쳐온 그는 “역사와 변혁도 중요하지만 엄청난 격변 속에서 희생당하는 삶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변화도 중요하지만 그 속에서 희생되는 개인의 삶도 중요하다는 얘기다.
“적어도 내 경험으로는 역사적 사건이나 자연재해에서 희생되는 건 항상 착하고 약한 사람들이었어요. 즐거움도 모르고 산 사람들. 그 사람들을 누가 기억하고 기록해주겠어요. 쓰러진 사람들을 위로해주는 건 시밖에 없겠구나 생각을 합니다.”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시집에 대한 소감을 묻자 그는 “아쉬울 것도 뿌듯할 것도 없다”고 했다.
“시라는 게 쓸 수 있을 때 쓰면 좋지만 무리해서 쓴다고 좋은 건 아니거든. 시집으로는 마지막일 수 있지만 살아있는 동안엔 시를 쓰지 않을까…. 안 쓰면 뭘 하겠어요, 할 일도 없는데.” / 박한신 기자
▲ 2012년 목계나루 답사때 ⓒ 2014 한국의산천
목계나루 플러스
<다시쓰는 택리지>를 읽으며
1권 후반부에 (344-347쪽)에 "남한강변의 나루들"에서 목계 장터 이야기가 나옵니다.
조선 후기 5대 하항중의 하나였던 목계는 전성기때 호수가 800호 이상 되었던 큰 도회지로서 100여척의 상선이 집결하던 곳이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목계는 동해의 생선과 영남 산간지방의 화물이 집산되며, 주민들은 모두 장사를 하여 부자가 된다”고 하였다. 서울에서 소금배나 짐배가 들어오면 아무 때나 장이 섰고, 장이 섰다 하면 사흘에서 이레씩이었다고 한다.
그처럼 번성했던 목계장터는 1920년 후반 서울에서 충주 간 충북선 열차 개통으로 남한강의 수송기능이 완전히 끊어지면서 규모가 크게 작아졌다.
1973년에 목계교가 놓이면서 목계나루의 나룻배도 사라져 목계장터는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오직 목계교회,목계반점,목계슈퍼 등 상호만 남아 그 옛날의 목계나루를 떠올리게 할 뿐이다. -다시쓰는 택리지 중에서 -
정약용이 쓴 글 중 한강 가에서 살기 좋은 몇 곳을 꼽은 것이 있다. 청담(淸潭) 이중환이 쓴 <택리지>를 읽고 쓴 발(跋)이 그것이다. 그 자신도 한강에 잇대어 있는 소내(苕川)에 살지만 그곳은 오로지 풍광만이 아름다울 뿐 생활하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곳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북한강에서는 춘천의 천포(泉浦)와 지금의 설악면 일대인 미원(迷源), 그리고 남한강에서는 여주의 백애(白厓)와 충주의 목계를 꼽았다.
산이 뒤를 막았는가 하면 앞으로는 여울소리 아름다운 강이 흐르고 큰 배가 닿을 수 있는 마지막 나루터였기에 장터는 언제나 북적거렸으니 그 아니 좋았겠는가.
전해 오는 이야기 막흐래기
목계에서 선창벼루를 지나가면 소태면 양촌부락이 나오고 다시 강변을따라 내려가면 <막흐래기>라는 마을이 있으며 그 앞의 강물은 물살이 세기로 유명한 곳인데 소위<막희락탄 (莫喜樂灘)>이다.
옛날 내륙의 삼대하항이라면 경기도 양평, 여주 그리고 목계를 지칭 했었다. 그중 대형선박이 출입할 수 있는 종착항으로 목계나루가 가장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고한다.
옛날 충청북도는 물론 경상북도나 강원도 일부까지도 한양에 가려면 충주지방을 거쳐야 했는데 말이나 당나귀 등을 이용한다는 것은 보통사람들은 어렵고 거의가 목계에 와서 배를 타고 갔던 것이다.
사람뿐만 아니라 내륙과 경인지방과의 교역물품도 이곳이 중심이 되고 있었다. 따라서 이곳은 출입하던 배들은 지금 우리들이 보고 있는 나룻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배였다고 하는데 서울쪽으로 가는 배는 강 가운데를 운행하고 목계쪽으로 오는 배는 강가를 통해하도록 되어 있어서 많은 배들이 규칙적으로 운행되어 장관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큰 문제는 가끔 부딪치는 여울 때문인데 여울을 잘못 운행하다가 큰 사고가 나게 마련이어서 가장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막흐래기 앞에 있는 막희라기 여울이 가장 유명했다고 하는데 각 여울마다 끌패라고 해서 배를 끌어 넘겨주고 임금을 받아 먹고 사는 사람들인데 이곳 막흐레기 여울에 있는 끌패들이 제일 많고 벌이도 제일 잘됐다고 한다.
막흐래기란 뜻은 한자로 말막자, 기쁠희자, 즐거운락자를 써서 莫喜樂인데 글자대로 풀이한다면 희희낙낙하지 말라는 뜻이 된다. 그러니까 이 여울이 너무도 어려운 장소이니 희희낙낙하다가는 큰일난다는 말이다 그래서 옛날 목계항의<도선별장>은 막흐래기 나루의 사고가 안 나도록 하는데 항시 힘을 기울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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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돈사지 >>> https://koreasan.tistory.com/12777470
청룡사지 >>> https://koreasan.tistory.com/12777457
블로그 소개 >>> https://koreasan.tistory.com/15606891?category=974597
지족불욕(知足不辱)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지지불태(知止不殆)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가이장구(可以長久) 오래도록 편안할 것이다. - 노자 도덕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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