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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MTB등산여행

충주 중앙탑 탑평리 칠층석탑과 고구려비

by 한국의산천 2021. 5. 9.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 [ 忠州塔坪里七層石塔 ]

국토의 중앙에 위치하기에 일명 중앙탑으로도 불린다

 

신라 석탑 중 유일하게 7층인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국보 제6호)

한반도 내 유일한 고구려 비석인 '충주 고구려비'(국보 제205호) 

제천 의림지를 돌아보고 충주로 이동하기

 

인생은 짧고

세상은 넓다

살아 숨 쉬는 동안 한국의 산천 구석구석을 돌아보기 위해 <한국의 산천>이라 하였소

 

제천에서 충주로 가는 길

충주 지역은 한강과 낙동강 유역을 잇는 지정학적 특성과 풍부한 철 산지라는 점 때문에 고대 삼국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백제, 고구려, 신라 등 고대 삼국은 이 땅을 차지하기 위해 각축을 벌였다.

고구려의 온달 장군이 "계립현과 죽령 서쪽을 되찾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라고 말했듯이 이 지역은 삼국의 남진과 북진의 주된 통로로 활용됐다. 

 

충주댐을 지나서 탑평리로 이동

 

수운교통의 요지를 장악하기 위해 치열한 전투 속에 백제와 고구려, 신라 순으로 주인이 바뀐 이 지역은 고려 태조 23년(940) 때 고을의 중심이란 뜻의 '충주'(忠州)로 개칭됐다. 

이런 역사적 배경 탓에 삼국시대의 문화유적이 곳곳에 남아 있는데, 신라 석탑 중 유일하게 7층인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국보 제6호)과 한반도 내 유일한 고구려 비석인 '충주 고구려비'(국보 제205호)는 중원문화의 대표적 유산이다. 

 

충주 지역은 삼국시대부터 교통의 요지였던 곳으로 삼국은 모두 이 지역을 전진기지로 중시해왔다.

 

충북 충주는 예부터 한반도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남쪽에서 한강으로 진출하려면 충주땅을 지나야 했고, 반대로 북쪽에서 한강을 통해 남쪽으로 진출하고자 할 때도 이 땅을 지나야 했다. 그래서 삼한시대 마한과 백제는 충주를 주요 근거지로 삼았고, 고구려 장수왕은 이곳을 정복해 ‘나라의 벌판’이란 뜻으로 국원성(國原城)이라 불렀다.

훗날 신라가 이 땅을 차지한 뒤로 진흥왕은 이곳을 신라의 행정구역 9주 5소경 중 국원소경(國原小京)으로 승격하고 수도 경주에 살던 귀족들을 이주시켰다.

이것은 충주를 경주에 버금가는 ‘제2의 수도’로 여겼다는 뜻이다. 한발 더 나아가 통일신라는 ‘국토 중앙의 수도’라는 뜻을 가진 ‘중원경(中原京)’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위용도 당당히 서있는 칠층석탑 

충주 탑평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칠층석탑 높이 14.5m 국보 제6호

충주에 오면 꼭 들려보고 싶은 곳 목계나루와 이곳 중앙공원

개인적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탑이라고 생각한다 

 

탑평리 칠층석탑

충북 충주시 가금면 탑평리 남한강변 연안 폐사지의 높은 대지에 우뚝 선 채 1천2백여년간 우리나라 질곡의 역사를 굽어봐 온 탑평리 7층 석탑(일명 중앙탑.국보 제6호).

국토의 가장 중심에 있다고 해서 중앙탑으로 더 알려진 탑평리 7층 석탑은 통일신라시대 석탑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높다. 

 

중앙탑과 관련하여 전해오는 설화 가운데 통일신라 원성왕(재위 785∼798)과 관련된 설화는 탑의 건립시기와도 관련된다.

내용은 원성왕 때 신라 국토의 중앙 지점을 알아보기 위해 국토의 남북 끝 지점에서 같은 날 같은 시간에 같은 보폭을 가진 잘 걷는 사람을 정하여 출발시켰더니 항상 이곳에서 만났기에 이곳에 탑을 세우고 중앙임을 표시했다고 한다.

 

중앙탑면에 있는 지명 중 ‘안반내’라는 지명이 있는데 여기서 반내[半川]라고 하는 것은 남북 끝에서 반이되는 내라고 해서 반내라고 했으며 본래는 ‘한반내’였으며 이는 한국의 반, 곧 중앙을 뜻하는 것이 된다는 뜻이라고 한다.

 

또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통합한 뒤 부처의 힘을 빌려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을 포용하고 안정을 꾀하기 위해 세운 탑이라거나 충주 지역에 왕기가 발흥하고 있어 탑을 세워 누르고자 했다는 설도 전해 내려온다

 

 

높직한 토단 위에 세운 탑평리 칠층석탑은 언제봐도 키크고 훤출한 모습이 멋지다  
서기 8세기 후반∼9세기 초에 세워진 탑평리 칠층석탑은 현존하는 통일신라 시대 탑 중 가장 높고 크다.

탑 전체의 높이는 14.5m이지만 높직한 토단 위에 우뚝 서 있어 실제 높이보다 훨씬 더 높아 보인다.  

 

이 탑은 지난 72년 대홍수 때 남한강물이 크게 불어나면서 기단부까지 물이 잠겼고 90년 수해 때도 85년 완공된 충주댐 조정지댐 물이 역류하면서 역시 기단부에 물이 차는 등 범람과 붕괴의 위기를 맞기도 했으나 꿋꿋이 역사를 지켜오고 있다.

 

의연하게 천년의 세월을 지켜온 칠층석탑을 보니 오래전 학창시절 배운 시조 한 수가 아련히 떠오른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도라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듸 업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남한강 탄금호를 접하고 있는 중앙탑 일대에는 1992년 사적공원이 조성됐고, 석탑 바로 옆에 충주박물관이 있다. 

 

계속해서 이곳에서 멀지않은 용전리에 위치한 고구려비로 이동합니다 

 

 

고구려의 한강 이남 진출 입증하는 고구려비 

중앙탑에서 3㎞ 떨어진 입석마을의 '충주 고구려비 전시관'에서는 국내 유일의 고구려 석비인 '충주 고구려비', 중국 지린성 지안현의 광개토대왕릉비 탁본, 황해남도의 안악 3호분과 개마무사 관련 자료를 통해 고구려의 흔적을 만나볼 수 있다. 

문화관광해설사는 "장수왕이 아버지인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광개토대왕릉비를 세웠듯이 문자왕도 할아버지인 장수왕의 영토확장에 대한 공을 기리기 위해 충주 고구려비를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며 "고구려비는 당시 삼국의 관계와 고구려의 한강 이남 진출을 입증하는 귀중한 유물"이라고 말한다. 

 

신라의 탑도 서있고 고구려의 비도 서있는 이곳 충주는 단군이 나라를 세우고 많은 부족국가가 형성되면서 남쪽 마한, 진한, 변한의 3한이 고구려, 백제, 신라의 3국으로 정립됐고 충주(중원)는 신라의 북진정책, 백제의 동진정책, 고구려의 남진정책으로 세 나라가 서로 뺏고 빼앗기는 각축장이었다.

 

한반도에 있는 유일한 고구려의 비석으로 고구려가 주로 북방을 공략한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 시대에 남진정책을 본격적으로 펼치면서 한반도 중부까지 영토를 확장한 뒤, 현재의 충주 지역에 세웠다.

 

충주고구려비는 오랫동안 선돌(입석)로 여겨졌기에 비가 서 있던 마을 이름도 입석 마을이었고, 비를 조사할 당시에도 일부 주민들에게는 신앙의 대상이었다.

선돌은 1972년 대홍수에 쓰러지기도 하면서 기나긴 세월 동안 고구려 역사를 간직한 채 서 있었다. 충주 지역 향토사 연구단체인 예성문화연구회가 1979년 우연히 발견해 학계에 제보했고, 1979년 단국대학교 박물관 학술조사단에 의해 조사되었으며 이름 없이 서 있던 비석의 글씨를 판독하면서 고구려의 비석임이 알려지게 됐다. 

이어 1981년에 국보 제205호로 지정되었다. 그 후 현재의 고구려비 전시관을 건축한 뒤 전시관 안으로 옮겼다.  

예전엔 '중원 고구려비'라고 불렀는데 명명 당시 비가 있는 장소가 중원군이었기 때문. 현재는 중원군과 충주시가 1995년 도농복합시가 되어 합쳐졌으므로 '충주 고구려비'라고 부른다.

크기는 높이 203 cm, 전면 폭 55 cm, 좌측면 폭 33 cm이고 1행 23자꼴로 528자를 새겼다. 

 

2012년 문을 연 고구려비 전시관 내부

충주고구려비는 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 용전리에 있는 사각 기둥 형태의 고구려비이다.

발견된 곳의 당시 행정 구역이 중원군이어서 중원고구려비라고 명명하였으나, 중원군이 충주시로 통합되었기 때문에 지금은 충주고구려비라고 한다.

전체적으로 글자의 마모가 심하여 판독에 어려움이 있지만 5~6세기경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정보가 담겨 있다. 

 

충주고구려비가 건립된 연대나 목적에 대해서도 논란이 분분하다. 판독문상으로는 직접적으로 건립 연대가 드러나지 않으므로, 내용과 일부 글자들을 근거로 추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비문 중 보이는 “12월 23일 갑인(十二月卄三日甲寅)”이라는 일간지를 이용해 이러한 조건에 맞는 연도들을 비문 건립 연대의 후보군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건립 시기에 대해서는 광개토왕(廣開土王) 시기, 장수왕(長壽王) 시기대, 문자명왕(文咨明王) 시기, 평원왕(平原王) 시기 등이 제기된 바 있는데 대체로 5세기 초~5세기 말의 범위에서 찾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이 중에서도 장수왕대 말기 내지 문자명왕대 초기인 5세기 후반설이 우세한 편이나 최근에는 5세기 중엽 장수왕대설을 주장하는 이들도 늘고 있다. 

비의 성격과 건립 목적에 대해서는 고구려의 태자(太子) 공(共)이 신라와 싸워 우발성을 재정복해 무훈을 세우고 만든 공적비로 보는 견해, 비문에 등장하는 대사자(大使者) 다우환노(多亏桓奴)의 기공비로 보는 견해, 장수왕의 공적 기념비로 보는 견해 등이 있는가 하면, 고구려가 신라와 국경을 확정하며 세운 정계비(定界碑)나 척경비(拓境碑)로 보는 견해도 있다. 고구려 왕의 순수비(巡狩碑)로 보는 견해도 있으며, 고구려와 신라 양국의 왕이 만나 세운 회맹비(會盟碑)로 파악하기도 한다.

출처 :  [국가문화유산 포털]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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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계 솔밭 야영장의 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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