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지캠핑의 성지
목계솔밭 캠핑장의 저녁 그리고 아침
참고 : 2023년 3월부터는 다시 정비되어 예약제 유료화로 전환되었습니다
인생은 짧고
세상은 넓다
살아 숨 쉬는 동안 한국의 산천 구석구석을 돌아보기 위해 <한국의 산천>이라 하였소
목계나루
충주땅 들머리 목계교. 충주 역사여행의 출발점이다. 목계교 옆엔 신경림의 ‘목계장터’ 시비가 서 있다.
예로부터 남한강 수운 물류교역의 중심지였으며 내륙항 가운데 가장 큰 규모를 자량했던 남한강 목계나루. 지금은 '목계나루터'라는 입석이 그 옛날의 번창했던 그 곳의 위치를 알려주고 있을뿐이다.
목계 충주구간의 남한강은 딱히 빼어나거나 유명한 관광지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사시사철 풍광이 좋은 드라이브 코스로 손꼽히는 곳이다.
문막에서 섬강을 따라 남한강이 만나는 법천리에서 목계구간도 일품이다. 탄금대까지 이어지는 드라이브 코스는 문화유적지를 돌아보며 다니는 볼거리도 많은 곳이다.
▲ 이곳에서 가까운 노은면 출생이신 신경림 시인의 詩 <목계장터> 시비 ⓒ 2021 한국의산천
목계장터
- 신 경 림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산서리 맵차거든 풀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 새우 끓어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
짐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목계나루에서 20리쯤 떨어진 노은면 연하리에 태를 묻은 신경림 시인에게 목계나루는 소중한 추억의 장소다.
시인은 광복 이듬해인 초등학교 4학년 때 목계나루 솔밭으로 소풍을 갔다가 목계장터를 보곤 강렬한 인상을 받게 된다.
당시까지만 해도 목계나루는 제법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는 시인의 기억 속에 오랫동안 이어지다가 마침내 ‘목계장터’라는 명시로 열매를 맺는다.
찬란했던 시절의 영화는 모두 어디로 사라졌는가.
강에는 나룻배 한 척 매어 있지 않고 도로는 한산하기만하다.
시인 신경림이 쓴 ‘목계장터’마저 없었더라면 ‘목계’라는 지명이 끈질기게 우리들의 입에 오르내릴 까닭을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
목계는 그렇게 문학을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시 한편으로, 수석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기기묘묘한 돌이 모여 있는 곳으로, 또 전통 견지낚시를 아끼는 이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여울로 기억될 뿐 과거와는 철저하게 단절되어 버린 듯했다.
정약용이 쓴 글 중 한강 가에서 살기 좋은 몇 곳을 꼽은 것이 있다. 청담(淸潭) 이중환(1690~1752)이 쓴 ‘택리지’를 읽고 쓴 발(跋)이 그것이다.
그 자신도 한강에 잇대어 있는 소내(苕川)에 살지만 그곳은 오로지 풍광만이 아름다울 뿐 생활하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곳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북한강에서는 춘천의 천포(泉浦)와 지금의 설악면 일대인 미원(迷源), 그리고 남한강에서는 여주의 백애(白厓)와 충주의 목계를 꼽았다.
산이 뒤를 막았는가 하면 앞으로는 여울소리 아름다운 강이 흐르고 큰 배가 닿을 수 있는 마지막 나루터였기에 장터는 언제나 북적거렸으니 그 아니 좋았겠는가.
▲ 목계나루 碑
목계나루
여주에서 산척방면으로 38번 자동차 전용도로를 타고 가다가 19번 도로로 접어들기 위해서 오른쪽으로 새로 길게 지어진 목계대교가 지나는 남한강 상류를 보며 목계교를 건너니 오른쪽으로 목계나루터라는 커다란 입석이 서있다.
번창했던 그 예전의 나루 <목계나루터>라는 표석과 그옆에는 이곳 가까운 노은면 출생이신 신경림 시인의 詩 <목계장터> 시비가 서있다.
남한강의 목계나루는 나라의 세금을 거둬들이는 수곡선이 들어갈 수 있는 남한강 수운의 종점이었다.
곡식 사백 가마니를 실은 배 20여 척이 서로 교차할 수 있었고, 나루 건너편에 세금으로 거둬들인 곡식을 보관하는 가흥창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사과나무 몇그루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목계나루 표석이 있는 건너 강변에 목계 솔밭 캠핑장이 자리하고 있다
최근 코로나와 캠핑붐 차박봄을 타고 목계솔밭 캠핑장이 캠핑의 최적지로 입소문을 타면서 많은 캠퍼들이 찾아들고 있다
입장료가 없으며 간이화장실이 있으며 잔디가 깔린 노지에 소나무가 있어서 캠핑의 적지로 손꼽히는 곳이다.
예전 목계나루 강건너 보이는 목계솔밭 캠핑장
목계진 / 牧溪津
시대 : 조선/조선 후기
충청북도 충주시 엄정면의 남한강가에 있는 조선시대의 나루.
강의 진도(津渡)는 그 당시 사람과 말의 왕래나 물자의 운송로로서 그 구실이 매우 컸으며, 특히 목계진은 강 건너 가금면 가흥리에 있었던 가흥창(加興倉)으로부터 원주ㆍ제천ㆍ청풍 등지로 통하는 중요한 나루였다.
이곳은 중부내륙의 중심지인 충주에서 남한강 수로를 통하여 서울경강(京江) 의 광나루ㆍ송파ㆍ마포ㆍ동작나루 등과 연결되는 나루의 하나이자 남한강의 내륙 수로로서 사람과 물자의 교역이 이 나루를 통하여 많이 이루어졌다.
이곳에서 서울까지는 수로로 260리였으며, 조선시대 최대 규모였던 가흥창과 함께 목계진도 그 성쇠를 같이 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아름다운 솔밭, 목계솔밭
충주시 가금면 장천리 <저우네> 마을 아래편으로 솔 무더기가 있는 곳이 옛 명칭으로 목계나루의 목계솔밭이다.
이곳은 남한강변으로서 제천~장호원간 국도38호선이 지나고 있는 곳에 위치해 있다.
목계솔밭에는 100~200년생 소나무가 80여 그루 자라고 있으며 여름철에 휴가를 즐기는 사람들의 쉼터가 되고 있다.
이 목계솔밭은 소나무로만 이루어진 3,800여 평 숲으로 충주시에서 보호수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남한강변에 위치한 가흥, 목계, 반천, 금천, 북창, 탄금대 등 충주 인근 지역에 있는 나루들의 역할이 컷다.
이 중 수운의 전성기에 가장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였던 나루는 목계이다.
일제 시대까지만 해도 목계나루엔 인천항에서 소금, 건어물, 젖갈류, 생활 필수품 등을 싣고 온 황포돛배가 수십 척씩 붐볐다. 이런 물건들은 내륙 지방인 충청도와 강원도, 그리고 백두대간 너머 경상도의 문경과 상주 각지로 팔려 나갔다.
당시 뱃일하는 인부만도 500여 명이나 되었다 하니, 나루와 이어진 목계장터는 언제나 시끌벅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젠 모두 옛 일에 불과하다. 위용을 자랑하던 조창은 모두 허물어졌고, 주변엔 주춧돌 몇 개와 깨진 기왓장만이 뒹굴고 있을 뿐이다.
강나루의 흔적마저도 모래를 퍼내고 강 언덕에 축대를 쌓으면서 형편없이 변했다. 또 늘상 인파로 북적거렸을 목계장터는 지금은 매운탕집과 수석 가게들만이 한적한 풍경화를 연출할 뿐이다.
목계 솔밭 조성유래
조선 헌종 때 목계 촌장의 꿈에 용이 목을 늘이고 한강물을 마시는데 그 꼬리가 강 건너 가흥땅 장미산에 걸치고 앞발이 목계마을 동산을 딛고 있었다. 이에 촌장이 깨달은 바가 있어 제단을 마련하고 기우제를 지냈다. 그랬더니 “저우내에 용이 머물 수 있도록 솔밭을 가꾸도록 하라.”는 노인의 음성이 촌장 귀에 들렸다. 이 무렵 저우내 촌장도 같은 꿈을 꾸었다.
송림을 만들어 놓으면 이곳에 가뭄을 타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의 꿈이었다. 그래서 두 마을에서는 마을과 강의 중간 지점에 소나무를 심었다. 그러자 그 순간부터 비가 내려 해갈이 되었다.
이러한 효험을 맛본 두 마을에서는 서로 솔밭을 관리하려고 하였다. 저우내에서는 자기 마을 땅에 있는 것이니 자기네가 관리를 해야 한다고 하고, 목계마을에서는 비록 저우내 땅이지만 자기들이 소나무를 심었으니 자기네가 관리를 해야 한다고 하였다. 결국 두 마을에서 서로 실력행사를 하다가 목계 사람들이 숫적으로 우세해 저우내 사람들이 패하고 관리권은 목계 사람들의 손으로 넘어갔다.
그로부터 목계마을 사람들 손에 의해서 가꾸어지는 솔밭이라 하여 ‘목계 솔밭’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출처:디지털 충주문화대전)
목계솔밭에 얽힌 두 가지 전설
목계나루 솔밭에는 2가지의 전설이 있다. 그 중 하나는 목계나루는 이조 때 내륙 수운로로 성황을 이루었다. 그런데 목계나루는 매년 큰 화재가 나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이러한 화재를 극복하기 위해 고민하던 중 한 풍수지리 하는 분이 이곳을 찾아 왔다가 불의 기운이 승한 줄 알고 막을 비책을 알려주었다.
그 방법은 물길을 돌리는 것으로 동네사람들은 강 가운데에 흙을 퍼다가 산을 만들었다. 반년이 넘어 강물을 목계쪽으로 돌리게 됐고 그 산에는 소나무를 많이 심어 놓았다. 이것이 오늘날의 목계솔무더기인 것이다.
또 하나의 전설은 옛날 목계를 비롯한 이 지방에 가뭄이 심해서 기우제를 여러 번 지냈으나 아무 효과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꿈에 한 노인이 현몽하여 “저우내에 용이 머물 수 있도록 솔밭을 가꾸도록 하라.”는 촌장에게 말했다.
송림을 만들어 놓으면 이곳에 가뭄을 타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의 꿈이었다. 그래서 두 마을에서는 마을과 강의 중간 지점에 소나무를 심었다. 그러자 그 순간부터 비가 내려 해갈이 되었다.
이러한 효험을 맛본 두 마을에서는 서로 솔밭을 관리하려고 하였다. 저우내에서는 자기 마을 땅에 있는 것이니 자기네가 관리를 해야 한다고 하고, 목계마을에서는 비록 저우내 땅이지만 자기들이 소나무를 심었으니 자기네가 관리를 해야 한다고 하였다.
결국 두 마을에서 서로 실력행사를 하다가 저우내 사람들이 패하고 관리권은 목계사람들의 손으로 넘어갔다.
그로
부터 목계마을 사람들 손에 의해서 가꾸어지는 솔밭이라 하여 ‘목계 솔밭’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목계솔밭캠핑장 전경
넓은 초원과 남한강의 아름다운 경치와 강바람을 느끼며 각자 자기 취향에 맞는 캠핑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이곳은 충주시의 관리시설물이지만 충주시에서는 특별히 캠핑장으로 관리하지 않고 있고 다만 화장실이나 개수대 청소 등 최소한의 관리만 하고 있는데 이것이 오히려 자유를 추구하는 캠퍼들의 성향에 맞아 우리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캠퍼들 스스로의 자율적인 캠핑장이 형성되어 일년내내 찾는 이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캠프사이트는 별도로 규제하지 않고있으며 선착순 입장하여 장소를 정하고 어느 누구의 간섭 없이 바로 캠핑을 즐길 수 있다.
주변에 앙성온천과 목계나루터 중앙탑등을 둘러볼 수 있으며 강풍경이 아름다운 곳이다.
공용취사시설과 이동식 간이화장실
귀가길에 아라뱃길 수향루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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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족불욕(知足不辱)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지지불태(知止不殆)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가이장구(可以長久) 오래도록 편안할 것이다. - 노자 도덕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