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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문학음악

경허 선사 열반 100주년 기념 禪 서화전

by 한국의산천 2012. 3. 16.

경허 선사 열반 100주년 기념 禪 서화전 [chosun.com 이태훈 기자 / 정리 : 한국의산천 : http://blog.daum.net/koreasan ]

 

본문에 앞서...

 

경허(鏡虛, 1849년~1912년)는 한국 근현대 불교를 개창했다는 대선사이다.

1849년 전주에서 태어났고, 9세 때, 경기도 과천 청계산 에 있는 청계사로 출가하였다. 속가의 이름은 송동욱(東旭)이고, 아버지는 송두옥(斗玉)이다. 법호는 경허(鏡虛), 법명은 성우(惺牛)이다.

 

 1879년 11월 15일 동학사 아래에 살고 있던 진사인, 이처사(李處士)의 한 마디, '소가 되더라도 콧구멍 없는 소가 되어야지.' 이 한마디를 전해듣고는, 바로 깨달아 부처가 되었다는.... 1대 조사인 인도의 마하가섭존자 이래 75대 조사이다. 콧구멍 없는 소(牛無鼻孔處: 우무비공처)는 중국 법안종의 종주 법안(法眼) 선사의 어록에 실려 있는 선어다. 당시 경허의 시봉을 받들던 사미승 원규는 경허의 사제인 학명의 제자였고, 이처사는 사미승 원규의 속가 아버지였다.

 

1886년 6년 동안의 보임(保任)을 마치고 옷과 탈바가지, 주장자 등을 모두 불태운 뒤 무애행(無碍行)에 나섰다.

한동안 제자들을 가르치다가, 돌연 환속하여 박난주(朴蘭州)라고 개명하였고, 서당의 훈장이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함경도 갑산(甲山) 웅이방(熊耳坊) 도하동(道下洞)에서 1912년 4월 25일 새벽에 임종계를 남긴 뒤 입적하였다. 나이 64세, 법랍 56세이다. 저서에는 '경허집'이 있다.

 

 경허의 수제자로 흔히 '삼월(三月)'로 불리는 혜월(慧月, 1861년 - 1937년), 수월(水月, 1855년 - 1928년)ㆍ만공(滿空, 1871년 - 1946년) 선사가 있다.

 

  경허는 '만공은 복이 많아 대중을 많이 거느릴 테고, 정진력은 수월을 능가할 자가 없고, 지혜는 혜월을 당할 자가 없다'고 했다. 삼월인 제자들도 모두 깨달아 부처가 되었다. 이들 역시 근현대 한국 불교계를 대표하는 선승들이다.

현재, '북송담 남진제'의 두 큰스님의 경우에, 송담스님은 경허(75대)-만공(76대)-전강(77대)-송담(78대)의 계보이고, 진제스님은 경허(75대)-혜월(76대)-운봉(77대)-향곡(78대)-진제(79대)의 계보이다. -문헌참고-

▲ '무이당(無二堂)' 편액 ⓒ 2012 한국의산천

 
  오는 26일~31일 서울 견지동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1층 나무갤러리에서 열리는 '한국 불교의 중흥조 경허(鏡虛·1846∼1912)선사 열반 100주년 기념 선서화전'에 전시될 경허 스님의 친필 두 점. 충남 청양 당곡사에 보낸 '무이당(無二堂)' 편액, 심우도 6곡 병풍이다. 경허스님의 남아있는 친필은 전국을 통틀어 10점이 채 되지 않는다. /제공=경허선사 열반 100주년 기념사업회

 

한국 불교의 중흥조 경허(鏡虛·1849∼1912) 선사는 소와 인연이 깊었다. 그의 원래 법명은 ‘깨달은 소’라는 뜻의 ‘성우(惺牛)’였다. 또 그는 1879년 31세 때 “중이 중노릇 잘 못해 소가 되더라도 콧구멍 없는 소가 돼야 한다”는 말을 전해 들은 뒤 크게 깨달았다고 한다. 이 말은 ‘무비공(無鼻孔)’이라는 유명한 화두가 됐다.

 

 

오는 3월 26~31일 서울 견지동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1층 나무갤러리에서 열리는 ‘경허선사 열반 100주년 기념 선서화(禪書畵)전’에도 그가 남긴 심우도(尋牛圖) 6곡 병풍 친필<사진>이 전시된다.

 

심우도는 수행의 여러 단계를 동자나 스님이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해 묘사한 불화다. 이번 전시를 주최하는 예산 수덕사의 박물관장 정암 스님은 “심우도 병풍은 함께 전시될 청양 당곡사 무이당(無二堂) 편액 글씨와 함께 일반에 처음 공개되는 경허 스님의 친필”이라고 했다.

 

경허 스님은 조선의 500년 억불정책으로 근근히 숨만 붙어 있던 한국 선불교를 다시 크게 일으켜 세운 인물이었다. 경율론(經律論)과 유불선(儒佛仙)에 두루 통달했고, 전국의 사찰을 쉼없이 돌면서 대중들을 지도했다.

 

‘삼월(三月)’로 불린 수제자 혜월(慧月·1861~1937), 수월(水月·1855~1928), 만공(滿空·1871~1946)을 비롯해 수많은 근대불교의 선지식을 키워낸 이도 그다. 경허 스님의 법맥은 ‘남(南) 진제 북(北) 송담’으로 불리는 현재 한국불교의 대표적 선승 두 사람에게도 이어졌다. 차기 종정 진제 스님은 혜월, 인천 용화선원장 송담 스님은 만공의 법을 이었다.

 

경허 스님은 일화도 많다. 계율 엄격하기로 이름난 송광사 법상에 올라 태연히 돼지고기를 뜯으며 술을 마셨다는 얘기가 전할 만큼 승(僧)속(俗)에 얽매이지 않는 무애행(無碍行)도 이름 높았다. 바위 위에 좌선하는 스님 앞에 호랑이들이 찾아와 무릎 꿇었고, 스님이 눈을 뜨고 ‘다들 물러가라’고 하자 그제야 사라졌다는 얘기도 전한다.

 

 이번 전시에는 특히 제자 만공 스님의 경허선사 법문 10곡 병풍을 비롯해 경봉, 탄허, 구하, 숭산, 서옹, 월하, 원담 등 고승(高僧)들의 선기(禪氣) 넘치는 친필과 다양한 선화(禪?), 불상 조각 등도 만날 수 있다.

경허 스님의 법손인 차기 종정 진제 스님의 친필 휘호, 수덕사 방장 설정 스님과 무형문화재 118호 불화장(佛?匠) 석정 스님의 글씨와 그림 등도 함께 전시된다. (02)2198-5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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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화 한편을 소개합니다

 

경허선사의 제자 만공은 40여 년간 덕숭산 가야산 일대를 떠나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날 스승 경허가 북한 삼수갑산에서 서당 훈장을 하다가 입적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비승비속의 삶을 살다가 이름도 남김없이 눈을 감은 것이다.

 

‘착하기는 부처님보다 더하고

사납기는 호랑이보다 더했던 분, 경허 선사여!

천화하여 어느 곳으로 가셨나이까?

술에 취해 꽃 속에 누워 계십니까?’

 

'빈 거울' 경허 / '텅빈 충만' 만공

 

1866년 5월 어느 날 해질녘. 두 탁발승이 홍성의 한 마을을 지나고 있었다. 텁석부리 수염의 한 스님은 체구가 건장했다. 걸음도 성큼성큼 앞서 걸었다. 뒤따르는 젊은 스님도 몸집은 큰 편이었지만 어딘지 선이 부드러웠다. 등에 걸머진 바랑은 두 스님 모두 불룩했다. 하루 탁발을 끝내고 절로 돌아가는 중이었던 것이다.

 

“스님, 좀 쉬었다가 가시지요. 바랑이 무겁고 다리가 아픕니다.” 젊은 스님이 말했다. 하지만 앞서 가던 스님은 들은 척 만 척 휘적휘적 갈 길을 갈 뿐이었다. 그때 마침 한 동네의 우물가에 다다랐다. 한 아낙네가 물동이를 이고 그들 앞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갑자기 텁석부리 스님이 그 아낙네의 양 볼을 잡더니 ‘쭉∼’ 하고 입을 맞추었다. “에구머니나!” 아낙네가 질겁했다. 물동이가 “와장창 깨졌다. 주위 논에서 일하다가 이 장면을 본 농부들이 괭이나 몽둥이를 들고 달려왔다. 텁석부리 스님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나는 듯이 도망쳤다. 젊은 스님도 죽자 살자 내뺄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갔을까. 뒤쫓던 사람들이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앞서 가던 텁석부리 스님이 멈춰 서더니 씨익 웃으며 말했다. “아직도 다리가 아프더냐? 등의 바랑이 무겁더냐?”

 

경허(鏡虛·1849∼1912)와 그의 제자 만공(滿空·1871∼1946) 스님의 일화다. 당시 그들은 서산 천장사에서 살고 있었다. ‘빈 거울’ 경허는 행동에 걸림이 없었다. 계율에 얽매이지 않았다. 음식도 술 고기 등 가리지 않았다. ‘텅 빈 충만’ 만공은 이런 스승을 깍듯이 모셨다. ‘일체 걸림이 없는 사람은 단번에 생사를 벗어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만공은 소박했다. 법문도 저잣거리 사람이 알 정도로 알기 쉬웠다. 거문고 타기를 즐기거나, 서울 부민관의 최승희 춤 구경을 갈 정도로 풍류를 알았다. 만해 한용운(1879∼1944)을 “내 애인”이라며 아낀 것이나, 한참 아래인 김좌진 장군(1889∼1930)과 팔씨름하며 허물없이 지낸 것도 소탈한 그의 성품을 잘 보여준다.

 

만공은 1945년 8월 16일 수덕사에서 광복 소식을 들었다. 그는 제자들 앞에서 무궁화 꽃송이에 먹물을 듬뿍 묻혀 한지에 ‘世界一花(세계일화)’라고 썼다. 그리고 말했다.

 

▲ 수덕사에서 정혜사로 오르는 길에 있는 세계일화 만공 탑 ⓒ 2012  한국의산천         

 

▲ 봉곡사에 있는 만공탑. 세계일화(世界一花)라고 쓰여있다  2005년 4월 24 꽃피는 봄날에 촬영 ⓒ 2012  한국의산천 

 

“너와 내가 둘이 아니요, 이 나라 저 나라가 둘이 아니요, 이 세상 모든 것이 한 송이 꽃이다. 머지않아 이 조선이 ‘세계일화’의 중심이 될 것이다. 지렁이 한 마리도 부처로 보고, 저 미웠던 왜놈들까지도 부처로 봐야 이 세상 모두가 편안할 것이다.” [donga. com 김화성 전문기자]

 

경허 & 명경

 

명경이란?

 세상에 거울처럼 두려운 물건이 다신들 있을 수 있을까!

인간 비극은 거울이 발명되면서 비롯했고, 인류 문화의 근원은 거울에서 출발했다고 하면 나의 지나친 억설일까? 백 번 놀라도 유부족(猶不足)일 거울의 요술을 아무런 두려움도 없이 일상(日常)으로 대하게 되었다는 것은 또 얼마나 가경(可驚)할 일인가? -산정무한 중에서-

 

▲ 천장사 2007 연암산 ~ 삼준산 산행시 촬영 ⓒ  2012 한국의산천


  고북면 소재지에서 동쪽 장요리 방향으로 약3.5km정도에 연암산이 위치한다. 천장사는 장요리의 뒷산 연암산의 남쪽 중턱에 위치하고 있다. 천장사는  산기슭의 경사가 심하여 앞에는 축대를 2단으로 높이 쌓아 사찰을 조성하였는데 경내에는  대웅전과 산신각 그리고 요사체가 있다.

 

 사찰에 전하는 말에 의하면 천장사는 서기 633년  백제의 담화선사에 의하여 초창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기록문이나 유물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 조선말에는 경허선사가 수도하고 송만공대사가 득도한 고사찰로써 법당인 민법당을  중심으로 주변에 소형의 산신각과 요사체를 구비함으로써 가람을 구성하였다. 규모의  사찰이지만 천장암에는 문화재자료 제202호인 천장사칠층석탑을 비롯한 조선 고종33년(1896)에 제작된 제석, 천룡도, 영산회도 등 귀중한 자료들이  있다.

 

연암산 남쪽에 자리잡은 천장사는 대한 불교 조계종에 속해있으며 인법당내에 관음보살을 봉안하고 있다.

천장사의 창건 연대는 백재 무왕34년(633)에 담화선사가 수도하기위해 창건한 사찰로 전하며 조선 말기 고종 순종때의 고승 경허선사( 1849~1912)가 이 사찰에 기거하며 수도하였고 또한 그의 제자인 송만공 선사가 득도하는 등 조선말 승려들의 수도장으로 널리 알려진 사찰이다.

인법당은 "ㄷ"자형 목조 와가로 축대를 2단으로 높게 조성하고 자연석 덤벙 주초석 위에 원주를 세워 정면 6칸 측면 2칸이며 겹처마 팔짝 지붕으로 건립되었다. 1988년 8월 18일 전통 사찰로 지정되었다. 

 

 

 

"경허의 선사상-돈점관을 중심으로" - 한중광 에서 발췌

경허선사는 1849년 8월 24일 전주 자동리(子東里)에서 부친 송두옥(宋斗玉)과 모친 밀양 박씨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어릴 적 이름은 동욱(東旭), 법호는 경허(鏡虛), 법명은 성우(惺牛)이다.

일찍이 부친상을 당해 9세 때 경기도 광주 청계사에서 계허(桂虛)스님을 은사로 출가했으며, 14세 때 청계사에 머물렀던 박처사(朴處士)로부터 글을 배우며 재동으로 칭송이 자자하던 중 은사 계허스님이 환속하면서 추천한 계룡산 동학사에 있는 만화강백(萬化講伯)을 찾아가 일대시교와 유교경전과 노장까지 두루 섭렵하였다.

23세 때부터 동학사 강원의 강사로서 크게 명망을 떨치다가, 31세 때 여름 옛 은사스님인 계허스님을 찾아뵈러 가던 도중 천안 인근에서 심한 폭풍우를 만나 민가에 머물러 피하려 했으나 악성 호열자가 만연되어 시신이 널려 있는 참혹한 현장에서 생사의 절박함을 깨닫고 비로소 대발심하여, 동학사에 돌아와 학인들을 해산하며 강원을 철폐하고 영운선사 (靈雲禪師)의 려사미거 마사도래(驢事未去 馬事到來 :나귀의 일이 가지 않았는데 말의 일이 닥쳐 왔다)라는 화두를 들고 용맹정진하던 중 11월 보름경 한 사미승이 전하는 “소가 되어도 고삐 뚫을 구멍이 없다”는 말에 활연대오하였다. 이때가 고종 16년 1879년 11월 보름경이었으니, 한국근대선이 개안開眼하는 순간이며 한국불교가 중흥되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32세 때 봄에 연암산 천장사 (天藏寺)로 옮겨 보림을 하여 33세 때 일대사를 마치고  주장자를 꺾어 던지며 오도송(悟道頌)을 읊었다. 

 

문득 콧구멍 없다는 소리에
삼천대천세계가 내 집임을 깨달았네
유월 연암산 아랫길에
일없는 들사람 태평가를 부르네.

 

이로부터 20여 년간 천장사・수덕사・정혜사를 비롯하여 호서(湖西)일대에 선풍을 크게 진작시키며 많은 기행과 일화를 남겼으며, 영호남의 해인사・범어사・송광사 일대에도 유력하면서 선원을 개설하고 납자를 제접하면서 선을 중흥시켰다. 56세 때 천장암에 돌아온 경허는 만공에게 전법송(傳法頌)으로 후래불법(後來佛法)을 부촉하고, 오대산 월정사에서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법회에서 법문하고 석왕사에서 오백나한 개분불사를 증명하고는 자취를 감추고 만다. 

 

앎은 적고 이름 높아 어지러운 이 세상에
알 수 없네 그 어디에 이 몸 감추랴
어촌인들 술집인들 어찌 그곳 없으랴만
숨긴이름 더욱 새로워질까 저어할 뿐인 것을.

 

1905년 57세 이후 경허는 삼수(三水)・갑산(甲山)・장진(長津)을 떠돌다가 강계군의 김탁(金鐸)의 집에 머물며 선비 박란주(朴蘭洲) 또는 유발거사 박진사(朴進士)로 훈몽생활(訓蒙生活)을 하기도 하고, 관서와 관북 일대는 물론 만주지방을 비승비속 차림으로 떠돌며 인연 따라 중생을 제도하다가, 1912년 4월 25일 갑산 웅이방 도하동에서 법랍 56세, 세수 64세로 입적하였다. 

 

마음 달이 외로이 둥글어
빛이 만상을 삼켰도다
빛과 경계를 함께 잊으니
다시 이것이 무슨 물건인고.

 

▲ 집사람과 함께 연암산 천장사를 지나서 계속해서 삼준산으로 이동하며 돌아본 연암산 ⓒ 2012 한국의산천

 

경허선사 생사의 문 넘은 동학사 [한겨레신문]

 

“죽음앞 혼비백산 내 배움이 헛됐구나”

충남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 3일 아침 동학사 오르는 길엔 매서운 바람이 마중한다. 칼바람에 낙엽이 허공을 가르고, 나무의 잔가지는 부서져 흩어진다. 바윗장보다 두꺼운 얼음이 계곡물을 막아섰다. 산도 얼고 계곡도 얼었다.

경허(1846~1912)의 새벽 또한 이랬을 것이다. 9살 어린 나이에 청계사로 출가한 경허는 겨우 글만 깨친 가운데 14살에 이곳 동학사로 왔다. 당시 조선 제일의 강사로 명성을 떨치던 만화 보선으로 부터 불교와 유교 경전 등을 배워 두각을 나타낸 그는 23살의 젊은 나이에 강사에 추대됐다. 33살이 된 그는 청계사에서 어린 동욱(경허의 속명)을 친아버지처럼 돌봐주다가 환속한 옛 스승 계허를 만나러 길을 떠났다. 그는 조선 제일의 강사로 어엿이 출세한 자신의 떳떳함을 내보이며 스승을 기쁘게 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콜레라 마을서 도망쳤던 33살 조선 제일의 강사
산으로 돌아와 20년 수행
“콧구멍이 없다” 말듣고 ‘본성품의 소’를 깨닫다 

 

서울로 향하던 경허는 천안을 지나며 매서운 비바람을 만나 한 마을로 피해 들어갔다. 그러나 어느 집도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이 집 저 집 문을 두드린 끝에 열린 한 집 주인은 “지금 이 마을엔 호열자(콜레라)가 창궐해 모두 죽어 시신이 지천에 깔려 있으니 전염돼 죽고 싶지 않으면 어서 어서 멀리 달아나라”며 문을 닫았다. 그는 모골이 송연해졌다. 대중들이 우러러보러 가운데 법상에 올라 “생과 사는 뜬구름 같은 것, 생과 사는 둘이 아니”라고 가르치던 그가 아닌가. 갑자기 죽음에 대한 극심한 공포로 혼비백산해 달아나는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경허의 심중이 어땠을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조선 제일의 불교 지식이 생사의 갈림길에선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호랑이를 그린 그림은 그림일 뿐 호랑이가 아니었다. 부처의 글은 불경일 뿐 부처가 아니었다. 동학사에 돌아오는 길에 그의 가슴에도 칼바람이 몰아쳤을 것이다.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동학사에 돌아온 그는 20년 동안 스승 만화 보선이 일군 강원을 스승의 진노를 뒤로 한 채 폐쇄하고, “지금까지 내가 한 소리는 모두 헛 소리”라며 학인들을 내보냈다. 그리고 토굴에 들어가 문을 닫아 건 채 용맹정진을 시작했다. 당나라 때 영운 지근 선사의 ‘나귀의 일이 끝나지 않았는데, 말의 일이 닥쳐왔다’는 화두를 들었다. 그는 이 의심뭉치를 놓치지 않기 위해 턱 밑에 송곳을 세워놓고 정진했다. 

 

50년 전부터 비구니 사찰이 된 동학사에 들어서니 옛 자취는 없고 정갈한 산사가 학처럼 사뿐히 앉아 있다. 5분 가량 가파른 산길을 오르니 실상선원이다. 경허가 용맹 정진했던 토굴이 있던 자리다. 1958년 15살의 나이로 이곳에 출가한 주지 요명 스님(61)은 “허름은 토담집이던 경허 스님의 토굴터는 신도안에서 와 상투를 틀고 도를 닦던 한 가족 4명이 살았는데, 50년대 말 절에서 돈을 주고 내보내고 그 집을 헐었다”고 전해주었다. 지금은 그 자리에 실상선원이 지어져 강원 4학년인 화엄반들이 살고 있다. 생명에 대한 공포를 넘어서려던 경허의 수행처에 100여년 뒤 후학들이 생명의 이치를 밝히는 화엄학을 공부하고 있다. 

 

땅에서 넘어진 사람은 땅을 딛고 일어서야 한다. 경허는 두려움에서 넘어졌다. 어려서 아버지가 사망하자 죽음이 두려웠고, 이를 이기기 위해 불과 9살의 나이에 출가했다. 그토록 어린 나이에 사랑했던 어머니와 이별하는 것도 어린 그에겐 깊은 두려움이었다. 이런 모든 두려움을 극복했다고 금의환향할 때 그는 한 마을에서 최근 지진과 해일의 공포에 떨던 동남아시아의 피해자들처럼 나약한 인간의 한계를 절감한 것이다.

그가 두려움을 회피하지 않고 두려움을 마주하며 목숨을 건 수행을 한 지 3개월 뒤 어느 날이었다. 사미승 동은이 이미 깨달은 바가 있는 자신의 속가 아버지 이처사가 한 말을 경허의 문 밖에서 던져 물었다. 

 

“소가 되어도 ‘콧 구멍이 없다(무비공·無鼻孔)’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바로 그 때 경허는 자신의 실상을 찰나에 꿰뚫어보았다. 생사의 경계는 어디던가. 들이쉰 숨을 내뱉지 못하거나 내 쉰 숨을 다시 들이쉬지 못한 순간 생사는 갈라지고 만다. 숨구멍에 생사의 갈림길이 있다. 그런데 ‘콧구멍이 없다’는 것이다. 일순간 경허의 숨이 턱 막혀 버렸을 것이다. 사미승의 질문은 오직 화두 일념이던 경허의 급소를 찔렀고, 생사경계에 선 그를 백척간두에서 밀어버린 셈이다. 궁하면 통한다던가. 더 이상 갈래야 갈 곳 없는 곳에서 하늘은 열렸다. 그를 극한 공포로 사로잡은 바로 그 두려움이 지옥이 문이었는데, 그것이 해탈의 단초가 된 것이다. 숨구멍이 사라져 숨조차 쉴 수 없는 곳에서 그는 허당에 빠지듯 한 생각을 여읜 순간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본성품을 발견한 것이다.

그의 법명은 성우(性牛). 드디어 애타게 소를 찾던 그가 원래부터 ‘본성품의 소’였음을 깨달은 것이다.

 

  동학사를 뒤로 하고 내려오니 경허를 대신해 계룡산이 생멸과 생사가 둘이 아닌 이치를 일러준다. 이 칼바람이 바로 봄이 오는 소리며, 저 계곡의 얼음이 바로 시원한 봄날 시냇물이 아닌가. [글· 한겨레 조연현 기자]

 

▲ 연암산 ~ 삼준산 두산 잇기 산행에서 ⓒ 2012 한국의산천

 

오도가(悟道歌)에 나타난 돈점관(頓漸觀)

1879년 11월 보름경 31세 때 경허는 영운선사(靈雲禪師)의 려사미거 마사도래(驢事未去 馬事到來) 화두를 들고 용맹정진하던 중 한 사미승이 전하는 “소가 되어도 고삐 뚫을 구멍이 없다”라는 말에 生死가 본래 空한 이치를 철견하고 자기의 본래면목을 확철대오했다. 1880년 봄 32세 때에 경허는 연암산 천장사로 옮겨 1년간 누더기 한 벌로 한번 앉아서 장부의 일대사 인연을 해결하고, 1881년 6월 33세 때 오도가(悟道歌)를 읊고 전등연원(傳燈淵源)을 밝혔다. 

 

오도가(悟道歌)는 경허의 설할래야 설할 수 없고 볼래야 볼 수 없는 깨달음의 경지를 여지없이 드러낸 글이기 때문에 경허의 돈점관(頓漸觀)을 살펴보는 데 중요한 자료라 생각된다. 그 주요 부분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사람이 없어 의발을 누구에게 전하랴. 의발을 누구에게 전하랴.
사방을 둘러보아도 사람은 없어. 봄산에 꽃은 활짝 피고 새가 노래하며, 가을 밤에 달이 밝고 바람은 맑기만 하다. 정녕 이러한 때에 무생(無生)의 일곡가(一曲歌)를 얼마나 불렀던가?

산빛은 문수의 눈이요, 물소리는 관음의 귀로다. 소부르고 말부름이 곧 보현이요, 장서방 이첨지가 본래 비로자나로다. …… 다행히 숙연이 있어 사람되고 장부되어 출가하고 득도하니 네 가지 얻기 어려운 가운데 하나도 모자람이 없도다.

어떤 사람이 희롱해 말하기를 ‘소가 되어도 고삐 뚫을 구멍이 없다’함을 인해서 그 말 아래 나의 본래면목을 깨닫고 보니, 이름도 공하고 형상도 공하여 텅비고 고요한 가운데 항상 빛나더라. 이로부터 하나를 들으면 천 가지를 깨달아 눈앞은 외로이 밝은 적광토요, 정수리 뒷모습은 금강의 세계로다. …… 사대 오음이 청정한 법신이요, …… 눈에 부딪치는 대로 본래 천진면목이니 기이하고 기이하도다. ……

한마디로 말해서 내가 대법왕이 되었음이로다. 저 법에 모두 자재함이니 옳고 그름과 좋고 나쁨에 어찌 걸림이 있을까 보냐. ……

 

송으로 이르되,
홀연히 고삐 뚫을 구멍이 없다는 말을 듣고
몰록 삼천대천세계가 내 집임을 깨달았네
유월 연암산 아랫길에
들사람 일이 없어 태평가를 부르네.

 

위의 오도가 중에서 ① 득도하니 네 가지 얻기 어려운 가운데 하나도 모자람이 없고 ② 나의 본래면목을 깨닫고 보니 사대 오음이 청정한 법신이며 ③ 대법왕이 되어서 ④ 일이 없어 태평가를 부른다라는 구절에서 살펴보면, 경허의 깨침은 불조佛祖의 견처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구경각이며, 더 이상 닦을 것이 없는 돈오돈수(頓悟頓修)인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경허의 경계는 그의 선시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무사가 오히려 일이거늘
사립문 밀치고 졸다가 보니
그윽한 새들은 나의 고독을 알고
창앞에 와 어른거리네.

속세와 청산 어디가 옳은가
봄 성터 어디엔들 꽃 아니 피랴
누군가 성우의 일을 묻는다면
돌계집 마음속 겁외의 노래라 하리라.

 

위의 선시에서 ① 무사가 오히려 일이거늘 ② 누군가 성우의 일을 묻는다면 돌계집 마음속 겁외의 노래라 하리라라는 구절에서도 일대사 인연을 요달하고 장부의 일을 마친 무사도인 무위진인(無事道人 無位眞人)으로서의 경허의 취모검이 번쩍임을 알 수 있다. 요컨대 오도가(悟道歌)나 여러 게송(偈頌)에서 살펴볼 수 있는 것처럼 경허는 돈오점수(頓悟頓修)의 선풍을 사자후하고 있다. 
[鏡虛의 禪思想― 頓漸觀을 중심으로 ― 韓 重 光 참고] 

 

 

꽃이 피는 봄에는 또 다시 자징거를 타고 이곳을 돌아볼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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