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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문화문학음악

소주 한 잔 했다고 하는 얘기가 아닐세 - 백창우

by 한국의산천 2012. 1. 25.

백창우 그는 누구인가? [정리: 한국의산천

http://blog.daum.net/koreasan

 

 

 

음유시인 백창우의 詩 한수 소개합니다. 

간혹 카페나 또는 블로그 웹 서핑을 하다보면

이 詩의 지은이가 이외수의 詩로 둔갑하여 웹에 올려져 있기에

바로 잡고자 이글을 올립니다 - 한국의산천

 

소주 한 잔 했다고 하는 얘기가 아닐세

                                       

                                        -  백  창  우   백 창 우  백 창 우  

                                
울지 말게

다들 그렇게 살아가고 있어

 

날마다 어둠 아래 누워 뒤척이다, 아침이 오면
개똥같은 희망 하나 가슴에 품고
다시 문을 나서지

 

바람이 차다고, 고단한 잠에서 아직 깨지 않았다고
집으로 되돌아오는 사람이 있을까

산다는 건, 만만치 않은 거라네
아차 하는 사이에 몸도 마음도 망가지기 쉽상이지
화투판 끗발처럼, 어쩌다 좋은 날도 있겠지만
그거야 그때 뿐이지

 

어느 날 큰 비가 올지, 그 비에
뭐가 무너지고 뭐가 떠내려갈지 누가 알겠나

그래도 세상은 꿈꾸는 이들의 것이지
 

개똥 같은 희망이라도 하나 품고 사는 건 행복한 거야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고 사는 삶은 얼마나 불쌍한가

 

자, 한잔 들게나
되는 게 없다고

이놈의 세상
되는 게 좆도 없다고
술에 코 박고 우는 친구야.

 

백창우는 '시 쓰고 노래 만드는 사람'이다. 명함에다 아예 그렇게 박아 다닌다.

실제로 적지 않은 히트곡을 만들었고 4권의 시집도 냈다.

그는 ‘나를 키운 것의 절반쯤은 시와 노래였다’고 할 만큼

오랫동안 꾸준히 시를 읽고, 쓰고, 시에 곡을 붙여 노래를 불러왔다.

 

 ‘이 시들이, 이 노래들이 어느 날 누군가의 가슴에 민들레 꽃씨처럼 둥둥 날아가 앉았으면 좋겠고,

아주 조그만 울림이라도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피력했는데,

그 바람대로 많은 이들이 그의 시와 노래에서 희망과 용기 그리고 위안을 얻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백창우(1960~ )는 작곡가면서 잡곡가(雜曲家)다.

 

동요,가요,창작민요,민중가요,환경노래,가스펠 가리지 않고 만든 노래가 2천 곡을 넘겼다.

가수 임희숙의 '내 하나의 사람은 가고',노래마을의 '나이 서른에 우린',

운동가요 '남누리 북누리',동요 '똥꼬'에 이르기까지,누구라도 혀를 내두를 만한 활동폭이다.

 

그러나 그에겐 음유시인이란 이름이 더 어울린다.

지금껏 네 권의 시집,9장의 작곡집을 '엎질러낸' 것 때문만은 아니다.

노래 한 곡 만들 때마다 손 씻고,맨발에 고무신 신고,새벽 5시에 취침하는 기행 때문도 아니다.

그는 "이 땅이 아름답지 않다면 그건 시를 읽어야 할 사람들이 시를 읽지 않아서이다.

…삶의 모든 순간을 시와 노래로 채우고 싶다"고 허튼 생각하는 자다.

그래서 그의 시에는 노래가 있고,노래에는 시가 있다.


“나이 서른에 우린 어디에 있을까/ 어느 곳에 어떤 얼굴로 서 있을까/ 나이 서른에 우린 무엇을 사랑하게 될까/ 젊은 날의 높은 꿈이 부끄럽지 않을까/ (하략)”(노래마을의 ‘나이 서른에 우린’, 1993, 백창우 작사·작곡).

 

백창우는...
1980년대 중반 포크그룹 「노래마을」을 이끌었다.

‘부치지 않은 편지’(김광석) 등의 곡을 만든 작곡가이기도 하다.

어린이음반사 「삽살개」, 어린이 노래모임 「굴렁쇠 어린이」를 이끌고 있다.

1995년부터 전래동요를 비롯해 이원수, 이문구, 백창우 등의 시에 노래를 붙였다.

태교 노래, 자장노래, 놀이노래 등 그의 노래들은 어린이 뿐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폭넓게 사랑받았다.

2005년에는 윤동주, 한용운, 김소월 같은 근현대 대표 시인들의 시를 노래로 만든 ‘백창우 시를 노래하다’(우리교육)를 음반을 냈다.

얼마전 노래 112곡을 담은「이오덕 노래상자」, 「권정생 노래상자」, 「임길택 노래상자」 (보리출판사)를 내놓았다.

 

 

 

 

 

 

 "내 하나의 사람은 가고"

                                                - 백창우 작사 ·작곡. 임희숙 노래

 

너를 보내는 들판엔 마른 바람이 슬프고

내가 돌아선 하늘에 살빛 낮달이 슬퍼라
오래토록 잊었던 눈물이 솟고

등이 휠 것같은 삶의 무게여 

가거라 사람아

세월을 따라 

모두가 걸어가는 쓸쓸한 그 길로

 

이젠 그 누가 있어 이 외로움 견디며 살까

이젠 그 누가 있어 이 가슴 지키며 살까
아 저 하늘에 구름이나 될까

너 있는 그 먼 땅을 찾아 나설까

사람아 사람아
내 하나의 사람아 뒤 늦은 참회를 너는 아는지 [사람하나 만나고 싶다. 신어림 1994 수록]

 28819

 

 

위 가사중에 '...등이 휠 것같은 삶의 무게여~'

 

어느 누가 이런 삶의 표현을 할수있을까? 정말 놀라울 다름이다. 

이곡의 작곡가 백창우를 아십니까?

작곡가 백창우님은 흔히 말하는 음유시인이자 노래 운동가로 

서적 외판원등 고단하고 힘든 삶을 살아가던 백창우가 27세 때 만든 노래였다고...

아니 노래 가사 이전에 詩로 먼저 태어났었지요.

 

‘내 하나의 사람은 가고’(백창우 작사·작곡·1984)는 길고 어두운 터널과도 같은 시련기를 지나온 임희숙을 부활시킨 노래다.

이 노래 역시 중장년층의 폭넓은 사랑을 받는 스테디셀러다.

이 노래는 작사·작곡자 백창우가 스물일곱살에 만들었다.

시인이자 노래운동가로, ‘제2의 김민기’로 불리던 백창우가 이 같은 노래를 만들어 임희숙에게 전달하게 된 동기나 과정도 궁금하다.

임희숙은 대마초사건에서 해금된 81년 말부터 ‘연예인 교회’에 나갔다.

‘삶의 무게’를 벗기 위한 것도 있지만, 솔과 같은 가스펠을 부르기 위해서였다.

그 당시는 나름대로 ‘사람을 위한 노래’를 부르겠다고 다짐하던 시기였다.

그러던 중 작사자 지명길을 통해 곡의 제의가 들어왔는데,

그게 백창우의 ‘내 하나의 사람은 가고’였다.

임희숙은 “‘사랑’이란 단어는 빼고 사람을 위한 노래라면 부르겠다”고 했는데,

그만 ‘삶의 무게여’라는 가사에 반하고 말았다.

그런데도 임희숙은 “판이 나온 뒤 2년 후에야 백창우를 직접 만났다”고 한다.

그는 “진정 난 몰랐네’가 운명적인 노래라면 ‘내 하나의 사람은 가고’는 신으로부터 받은 선물” 이라고 말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되고

                  

                                           -  백창우

 

이렇게 아무런 꿈도 없이 살아갈 수는 없지

가문 가슴에, 어둡고 막막한 가슴에

푸른 하늘 열릴 날이 있을 거야

길이 없다고, 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그대 그 자리에 머물지 말렴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되고

그 길 위로 희망의 별 오를 테니...

길을 가는 사람만이 볼 수 있지

길을 가는 사람만이 닿을 수 있지

걸어가렴, 어느 날 그대 마음에 난 길 위로

그대 꿈꾸던 세상의 음악 울릴 테니

지금까지 걸어온 길과

이제부터 걸어갈 길 사이에 겨울나무처럼

그대는 고단하게 서 있지만 길은 끝나지 않았어,

끝이라고 생각될 때

그때가 바로 다시 시작해야할 때인걸..

 

- 시집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되고> (신어림,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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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오늘은 어느곳을 서성거리는가

                                        

                                       -  백 창 우

 

그대 오늘은 어느곳을 서성거리는가

그대 오늘은 또 어느 곳을 서성거리는가
꾸부정한 모습으로 세상 어느 곳을 기웃거리는가
늘 어디론가 떠날 채비를 하는 그대
그대가 찾는 건 무엇인가

한낮에도 잠이 덜 깬 듯
무겁게 걸어가는 그대 뒷모습을 보면
그대는 참 쓸쓸한 사내라는 생각이 든다

언제나 들고 다니는
그대의 낡은 가방 속엔 뭐가 들었을까
소주 몇 잔 비운 새벽엔
무척이나 사람을 그리워하는 그대

가끔씩은 그대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다
그대 눈 속에 펼쳐진 하늘
그대 가슴 속에 흐르는 강물
바람인가,
그대는 이 세상을 지나는 바람인가...... 

 

 

 

 

 

[추억의 LP 여행] 백창우(上) 2004-03-31   
 

 

 

문학과 음악의 결합을 통해 대중 음악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해 가고 있는 싱어-송 라이터 백창우.

그의 초기 노래들은 1980년대 운동권 학생들의 애창 민중 가요였다.

임희숙의 히트곡 '내 하나의 사람은 가고'는 대중에게널리 알려진 그의 창작곡이다.

 

노래 동아리 '노래 마을'의 리더였던 그는80년 말

'노래를 찾는 사람들'과 더불어 민중 가요를 폭 넓은 대중에게 전파시켰던 노래 운동가였다.

네 권의 시집을 낸 시인이자 독집 2장을 발표한 포크 가수이고

김광석 트리뷰트 앨범 '가객', 동요 북&송 등 스무 장가량의 음반을 기획·연출한 음반기획자인 그는 한마디로 표현하기 쉽지않은 아티스트다.

 

백창우는 예명이다.

본명은 백남욱. 하지만 사고를 당할 액운이 있다고 해백남훈이란 이름도 얻었다.

데뷔 때, 제작자 지명길이 그를 '고집 세고 앞뒤 꽉 막힌 소'같다며 벽창우로 부름에 힌트를 얻어 백창우라고 예명을 정했다.

 

그는 평안도 진남포에서 소학교 교장을 했던 부친 백낙영과 평양신학대를 다닌 신여성이었던 모친 임영신의 7남 1녀 중 막내로 1958월 12월23일에 의정부에서 태어났다.

조만식 선생을 도와 선전부장일을 했던 부친의 전력 때문에 그의 가족은 공산당을 피해 보따리 하나 달랑 들고 월남을해 수없이 이사를 다녔다.

처음에는 인천 앞 바다 보름도에서 살다가 경기도 의정부로 갔다.

백창우는 빈번한 이사로 친구를 사귈 수 가 없었다.

그래서 형들이 보던 만화, 선데이서울 같은 주간지나 루팡류의 추리소설들을읽으며 친구를 대신했다.

'실수로 덤으로 세상에 나온 늦둥이'인 그의 어린 시절의 기억은 아버지와 전차를 타고 약장수,

서커스 구경을 다닌 풍경으로 가득 차 있다.

 

3-4살 때 한글을 뗀 그는 신동으로 통했다.

보따리 포목장사 어머니 등에업혀 어머니가 알려 주는 가게 간판을 보며 한글 공부를 했던 것.

IQ 152가 넘는 수재였지만 의정부 중앙초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몸이 아파 1년을쉬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져 자식들만 양평의 외곽 마을 산밑으로 보내져 외로운 시절을 보냈다.

그의 집안은 정착을 위해 양계장, 참기름 장사, 연탄가게, 쌀장사. 만화가게 등 온갖 일을 다 했다.

집안 사정이 좋아지자 수락산밑으로 이사해 상계초등학교를 다녔다.

 

그는 2년 반 동안 한 곳에 거주했던 이때를 '자신의 인생 중 가장 화려한 시절'로 기억한다.

이때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놀면서 어울려 벌이는 놀이나 전래 동요를 처음으로접했다.

5학년 때 황량한 먼지 들판인 광주대단지(지금의 성남)로 또 이사를 갔다.

 

생계대책이 막막했던 이주민들은 유신 정권 최대의 시위를 터트렸다.

시위구경을 나간 어린 그는 빗속에서 최루탄과 투석전 와중에 한 참외 트럭이 전복하는 걸 보았다.

갑자기 돌을 던지던 사람들이 주린 허기를채우기 위해 노란 참외를 주워 먹기 위해 몰려 들었다.

이 장면은 평생 그의 뇌리에 박힌 돌이 되었다.

 

철거민을 위해 생겨난 수진초등학교로 학교를 옮겨 1회 졸업생이 되었다.

성남 서 중에 들어가며 풍금이 있는 성남 교회의 유치원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며 문학에 빠져 들었다.

 

그의 중 3시절은 음악과 깊숙한 연관을 맺은, 일생의 중요 계기였다.

취직을 한 누나가 4,000원 짜리 세고비아 클래식기타를 생일 선물로 주었다.

 새로운 세상을 만난 듯 흥분했다. 학교에서'8마디 곡 만들어 오기' 숙제를 냈다.

좋아했던 여자 음악 선생님이 그의곡을 풍금 연주를 하며 “참 좋다. 잘했다”고 칭찬을 했다.

 

칭찬은 어린마음에 창작의 물꼬를 터 주었다.

그는 기타와 풍금을 이용해 친구들에게생일 선물로 곡을 만들었다.

어느 날 전학을 온 교회 동급생에게 풍금을쳤다. 장난을 치기 위한 엉터리 연주였다.

헌데 진지하게 곡에 대한 느낌을 이야기 해 오자 당황했다.

 

이때부터 "음악은 장난스럽게 하면 안 된다"는 교훈을 얻었다.

어느 날 교회친구가 만돌린을 연주했다.

처음 보는 악기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친구는 태평동에 살았던 선배 포크가수 한돌의 친동생이었다.

 

성남 서고에 입학해 음악에 관심을 가지면서 문제아들과 어울려 쉬는 시간이나 방과 후 들에 야전(야외 전축)을 들고 나가

진추하, CCR 등 외국 팝송들과 김민기, 양희은, 이연실, 한대수, 박인희 등 70년대 통기타 가수들의 노래를 접했다.

천일극장 예술제 때 이 친구들과 밴드를 만들어 연습도했다.

하지만 학교 공부가 시시해진 그는 밤을 세워 시와 소설의 습작에몰두했다.

등굣길의 헌책방 가게에서 몰래 빼돌린 육성회비로 헌 문예지들을 많이 사 탐독했다.

 

 77년, 고3때 아버지가 위암으로 세상을 등졌다.

그는 사랑하는 아버지를 위해 아무것도 해줄 수 없음에 절망했다.

삶이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절망감에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40일 동안 강원도 탄광촌등 전국을 돌아 다녔다.

담임 선생의 도움으로 졸업을 했지만 고통에 신음하던 그를 지탱시켜 준 것은 다름 아닌 음악이었다.

 

다음해 어머니의 희망대로 신학 대학에 들어 갔지만 몇 달만에 그만 두었다.

이때가 1979년. 친구들과 성남 신구대 앞에서 밤에는 포장마차, 낮에는 보따리 책장사를 했다.

제법 호황을 누리던 중 10ㆍ26사태가 터졌다. 군인이 학교를 점령하자학생들 외상값도 못 받고 망했다.

이 시기에 소설을 쓰는 선배의 소개로 음반 기획자 지명길의 종로3가 사무실에 놀러가 그 동안 쓴 악보와 글을보여주었다.

 

지명길은 '제2의 김민기'가 나타났는가 착각할 정도였다.

우선 그의 곡들을 기타를 쳐 마란츠 녹음기로 녹음을 했다.

12월 어느 날,지명길은 정식 앨범 제작을 제안해 왔다.

- 글 : 최규성 가요 칼럼니스트

 

[추억의 LP 여행] 백창우(下)

 

 

가수의 꿈은 없었지만 '재미있겠다' 싶어 이촌동 서울스튜디오에서 이틀간 녹음을 했다.

당시는 중앙정보부의 요원이 검열을 하던 시절. 백창우의모든 곡들은 조사 대상에 올랐다.

하지만 대학생도 아니고 위험 그룹에 소속되지도 않은 개인인지라 문제가 되는 곡의 가사는 수정하고빼버리는선에서 넘어 갔다.

당시는 가사 내용 중 새가 북쪽으로 가도, 슬퍼도, 비가 계속 와도 안 될 뿐더러,

더구나 붉은 태양이 떠오르는 것은 절대로 용납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데뷔 음반 제작자인 지명길은 김민기 시대의 음악을 알았던 DJ출신.

그는 백창우를 '80년대식 제 2의 김민기'로 만들려했다.

당시 언론들도 포크의 기대주로 보도했다.

 

가위질로 만신창이가 된 데뷔 음반을 받아 든 그는 기쁨보다 “귀 빼고 좆뺀 당나귀 꼴”이라며 한탄했다.

음악이 정치, 사회와 깊은 연관을 가진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타이틀 곡 '바램'은 대학가에서는 '새농민가'로 불렸다.

 

 이화여대 체육대회 때 응원가로 처음 불렸던 이 곡은대학가의 농활 운동가로 애창되었다.

백창우는 자신이 부를 수 없는 곡들을 일반 가수에게 주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노래는 임희숙의 재기 곡 '나 하나의 사람은 가고'와 강영숙의 '사랑'. 히트 넘버 작곡가로 이름이 나자 정애리, 혜은이, 김세화, 이동원 등수 많은 가수들이 곡을 청해왔다.

 

그는 심의를 거치는 음반보다는 매니저를 맡은 구자룡과 종로 '무아' 등 서울과 지방의 음악실에서 간이 토크 콘서트 위주로 활동을 시작했다.

DJ들과 교류하며 영미 음악이 아닌 3세계의음악을 접했고 선배 오세은에겐 기타 주법을 배우고 곽성삼 등 포크 계열의 가수들과 교분을 쌓았다.

 

80년대 초반, 성남의 달동네에 교회를 연 곱사등이 전도사를 도와 여름 성경학교 선생님이 되었다.

그곳에서 문화 혜택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에게성가와 전래 동요를 가르치다 어린이 문화 모임 '굴렁쇠'와 동아리 '두레'를 결성했다.

그의 음반에 수록된 상당수 동요곡은 이 당시 만든 노래들. 빈민들을 위한 성남 시민회관의 '포크 콘서트82'는 고 김정호의 마지막공식 무대이기도 했다.

김정호의 음악을 사랑했던 그는 추모 곡 '겨울새'를 작곡했다.

 

83년, 주변의 무명 가수들과 성남YMCA에서 4시간동안 통기타 공연을 열었다.

당시 참여했던 친구들과 노래패 '노래 마을'을 결성해 성남 중동의 술집거리의 신생 소극장에서 첫 공연을 열었다.

군사정권의 서슬을 피해 은유적인 노래, 구전 가요, 전래 동요 등을 주로 노래했다.

하지만 대학 무대에서는 사회성 강한 곡들을 마음껏 불렀다.

'노래 마을'은 집단성만을강조하는 민중가요에 반기를 들고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노래를 추구했던노래 모임이었다.

노래마을 1집은 안기부 요원이 검열을 했다.

12곡 중 11곡이 심의에 걸려 '은자동아 금자동아'만 심의를 통과했다.

 

검열보다 더 높은 벽은 제작자의 상업적 기획이었다.

타이틀 곡을 고르는데만 하루 종일을 싸웠다.

결국 합법적으로는 자신이 원하는 음반을 만들수 없음에 직접 프로덕션 '노래나무'를 만들어 노래마을 2집, 3집 그리고독집 2집을 제작했다.

2집 '사람 하나를 만나고 싶다/1990년'은 곽성삼과 비 내리는 남한산성 근처 숲 속에서 만든 노래들.

하지만 제작사 대우음반이 망해 93년에 덕윤산업에서 1만장 한정으로 CD를 만들었지만

이곳에서도단 한푼도 못 받고 마스터까지 빼앗겼다.

하지만 '노래마을'과 '노래를 찾는 사람들'은 민주화 열기를 타고 '민중가요의 대히트'라는 가요 혁명을일궈 냈다.

 

90년대 초, 백창우는 고 김광석과 시와 음악을 결합하는 새로운 노래를 꿈꿨다.

김광석의 유작 노래인 '부치지 않은 편지'는 이때의 결과물. 하지만갑작스런 김광석의 죽음으로 물거품이 되었고 두 번의 화재를 당하는 시련도 겪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백창우가 노름에 미쳐서 음악을 그만 두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당시는 영화 예술 채널 A&C 코오롱에서 '시처럼 노래처럼' 프로 진행을 하던 시절이었다.

소문의 진원지가 지금껏 돌봐 주었던 노래마을의 스탭으로 밝혀지자 사람에 대한 환멸이 느껴졌다.

가끔 재미삼아 했던 일을 빌미로, 자신에겐 한 마디 묻지도 않고 뒤에서 엉터리 사실로 매도한 사람들이 섭섭해 1년 반 동안 세상을 훌쩍 떠나버렸다.

 

99년초, 세상으로 돌아온 그는 기획사 '삽살개'를 만들어 전래동요 2개, 이원수 동요집 2개를 제작했다.

어느 날 홍대 앞 사무실에 '바위섬'의 가수 김원중이 찾아와 음반 프로듀서를 제안했다.

그는 모두가 자신을 매도 할 때, 유일하게 믿어 주었던 가수. '이등병의 편지'를 작곡한 김현성과 함께김원중의 3집 음반 작업을 했다.

의기투합한 세 사람은 시-노래 동인 '나팔꽃' 결성의 발판을 마련했다.

 

99년 3월, 도종환, 김용택, 정호승, 안도현 시인이 합류해 '나팔꽃'은 마침내 태동했다.

6개월 후 '작게 낮게 느리게'라는 기치 아래 한양대 동문회관 대강당에서 첫 공연을 열고

2회 공연부터는 2003년까지 대학로 샘터파랑새극장에서 매달 정기적으로 공연을 열었다.

 

금년부터는 대학로 소극장 정미소에서 철마다 공연을 펼치고 있다.

최근 나팔꽃 동인들과 국악 반주 음반을 발표한 백창우는 빚을 지고 되찾은 LP로 발매되었던 ‘노래마을1-3집’ 마스터 작업을 완료해 CD 재발매는 물론, 11년 만에 세 번째 신보작업에 몰두해 있다.

오랫동안 동요 작업에만 매달려 온 그는 이제 한국적인 정서를 담은 자기 본연의 포크 음악으로 돌아가려 한다.

그는 자연 속에서 시냇물과 바람 소리와 더불어 연주한 음반을 내겠다는 소박한 꿈을꾸고 있다.[주간한국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일산,덕양,파주,김포]
우리 지역 문화인물 _ 백창우 씨  [2010-10-18 게재]
 

 

“동요를 만들고 부를 때, 가장 착해지는 순간이지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한 것일까. 아이들이 끼적거린 글이나 내뱉은 말을 노래로 만든다는 생각 말이다.

백창우 씨는 되묻고 있다.

삶이 노래가 되고 아이들의 말이 음악이랑 친구라는 것을 잊고 사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지 않느냐고.

지난 7일, 주인을 닮은 풍산개가 느릿느릿 마루를 걸어 다니는 출판단지 작업실에서 그를 만났다.

 

외롭던 어린 시절 흥얼거리던 가락이 노래로 작은 도서관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책이 많은 작업실 한쪽에는 개와 관련된 책, 영화 테이프, 사진 따위가 가득 꽂혀 있었다.

그러고 보니 입고 있는 옷에도 강아지 스누피 캐릭터가 그려져 있었다.
“개와 책을 아주 좋아해요. 어릴 때부터 그랬어요.”


그의 부모님은 이북이 고향이다.

6.25 무렵 잠시 내려왔다 다시 돌아가지 못했다. 그는 경기도 의정부에서 태어나

양평, 상계동, 성남 곳곳을 돌아다니며 살았다. 한 곳을 빼고는 1년 넘게 산 곳이 없을 만큼 이사가 잦았다.

늘 낯선 마을에서 새로운 학교와 친구들을 만나야 했다.

사람과 친해지는데 시간이 필요한 어린아이에게는 어려운 일이었다.
“혼자 시간을 보내는 일에 익숙했죠. 사람을 새로 사귀고 적응할 때 까지는 책을 읽고 개랑 같이 산으로 들로 돌아다녔어요. 그러면서 흥얼거린 것들이 노래가 됐죠.”


어린 시절에는 늘 노래를 불렀다.

재미있는 일을 따라 살다보니 노래 만드는 어른이 되어 있었다.
“여러 노래를 만들었는데 동요가 가장 재밌어요. 동요를 만들 때 제가 제일 착해져요.”
착해진다는 건 순해진다는 뜻일까.

그가 ‘가장 착해질 때’ 만든 노래들은 몸과 마음에도 순하게 와서 안긴다.

소는 들어도 못들은 척 하고
보고도 못 본 척 하고 소는 가슴속에 하늘을, 하늘을 담고 다닌다
「권정생 노래상자」에 실린 ‘소는 가슴속에 하늘을 담고 다닌다’ 가운데서.

 

슬픈 노래에는 슬픔을 이겨내는 힘이 깃들어 있다
그는 어린이 노래를 좋아한다. 하지만 동요를 ‘어린이들만의 노래’로 만들지 않았다.

얼마 전 내놓은 노래집 「이오덕 노래상자」, 「권정생 노래상자」, 「임길택 노래상자」 (보리출판사)에 ‘동요집’이 아닌 ‘노래상자’라는 이름을 단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저는 ‘따오기’, ‘오빠생각’ 같은 노래를 어머니한테 들었어요.

동요는 삶이 팍팍한 어른들에게 더 필요한 노래예요.

어떤 어른도 동요를 부를 때 표정이 악해지는 경우가 없었어요.

어린 시절 살던 우물이 있는 집, 뛰어 놀던 골목으로 마음이 달려가는 거예요.”


그의 노래에는 ‘외로웠던 어린 백창우’의 감성이 깃들어 있다.

1999년 이원수 시에 붙인 노래집을 만들었을 때도 출판사 관계자들을 비롯한 어른들은 “이렇게 슬픈 노래를 누가 듣겠냐?”고 물었다.

하지만 지금은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음반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노래집「살구꽃 봉오리를 보니 눈물 납니다」에 실린 15분짜리 긴 노래,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는’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아이들의 반응은 달랐다.

권정생 선생님이 돌아가신 지 3주년을 맞는 행사에서 불렀을 때 한 아이가 와서 “이 노래 너무 슬프고 너무 좋아요”라고 말했다. 그는 긴 노래, 어려운 노래, 슬픈 노래는 아이들은 안 들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도 어른들의 편견이라고 말했다.


“감성은 한 번에 만들어지지 않아요. 기쁜 결, 슬픈 결, 외로운 결이 다 있어요. 슬픔을 겪어보지 않은 아이는 슬픔을 이겨낼 힘도 없어요. 밝고 환한 곳에만 있는 아이가 어두운 곳에 가면 길을 잃게 돼요. 그런 아이들이 나중에 큰 벽 앞에 서게 될 때 어떻겠어요? 우리 교육에서는 (삶의) 어두운 면을 너무 안 보여주고 있어요.”

 

 

 

22일부터 아시아출판센터에서 ‘이태수 백창우의 조금 별난 전시회’ 열어
 그는 앞으로도 어린이들 곁에서 하고 싶은 일이 많다. 그 가운데 하나가 어린이들의 글과 말로 노래를 만드는 일이다.「맨날 맨날 우리만 자래」에 실린 ‘비오는 날’이라는 노래 가사는 두 줄이다. 여섯 살 난 어린이가 한 말을 유치원 선생님이 받아 적은 것에 백창우 씨가 곡을 붙인 것이다.
“‘오늘은 해님 안 떠요. 비 오는 날이에요’ 두 줄이어도 노래로 만들었어요. 그렇게 아이들 말이나 글에 노래를 붙이는 일을 더 하고 싶어요.”


하고픈 일은 또 있다. 그가 ‘어린이 음악 놀이터’라 이름 붙인 박물관 겸 놀이터를 만드는 일이다. 자연 가까운 곳에 터전을 마련하고 아이들이 와서 놀고 산책하며 노래를 바탕으로 쉴 수 있는 곳으로 구상하고 있다.


놀이터를 만들 꿈으로 한 발짝 내딛는 연습일까. 오는 22일부터 2011년 4월 말까지 파주 출판단지 안에 있는 아시아 출판센터에서 생태세밀화가 이태수 씨와 함께 전시회를 연다.

 

<이태수 백창우의 조금 별난 전시회>로 ‘노래편지와 자연그림’을 선보이는 자리다. 두 작가의 작업실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공간, 악보 스케치한 초고와 원고에 손 글씨로 쓴 편지들, 지금껏 모아온 캐릭터들을 전시한다. 노래를 마음껏 부르는 음악방, 어린이 놀이방도 마련한다.

 

 이태수 작가와 함께 작업한 노래집 「우리 반 여름이」의 그림과 악보 전시, 두 작가의 사진을 실물 크기로 만들어 사진을 자유롭게 찍을 수 있는 포토존도 마련할 예정이다. 그가 구상하는 ‘어린이 음악 놀이터’와 이번 전시회를 설명하는 내내 그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신나는 일을 앞두고 있는 어린아이 같아 보인다고 할까. 만나보니 그가 아이 마음속에 들어가 있는 듯 노래를 만드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그는 어린이를 위해서 노래를 만들지 않았다. 그의 마음속에 살아있는 어린아이가 노래를 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향지 리포터]

 

지족불욕(知足不辱)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지지불태(知止不殆)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가이장구(可以長久) 오래도록 편안할 것이다.  - 노자 도덕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