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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MTB등산여행

독립문과 삼전도비

by 한국의산천 2008. 3. 2.

독립문

2008년 3월 1일 아침 도로가에 걸린 태극기를 보면서 출근하고, 서대문에 있는 독립문을 보면서 퇴근하였습니다. [2008.3.1.한국의산천]

독립문은 저에게 가까이 있었습니다.

저의 큰집이 서대문에 있을 때 초등학교 시절 방학이면 저는 큰집에 갔습니다. 그곳에서 사촌형으로 부터 공부를 하고 시간나면 독립문(노터리)의 홍예를 가로질러 인왕산에 오르고 사직공원 풀장에가서 놀았습니다.   

 

▲ 삼일절 출근길 도로 풍경 ⓒ 2008 한국의산천

 

라디오에서 나오는 삼일절 행사를 들으며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이 떠올랐다.

"프랑스 말은 온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분명하며 굳센 말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 민족이 노예가 된다 하더라도 자기들의 국어만 유지하고 있다면 감옥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수업이 끝나려고 할 무렵 프러시아 군의 나팔 소리가 울려 왔다. 그러자 선생님의 얼굴은 창백해지며 무척 아쉬운 듯이 

 

"여러분, 여러분, 나는…나는…"하고 할 뿐 말을 더 잇지 못하였다.

 

선생님은 흑판 쪽으로 돌아서시더니 "프랑스 만세!" 하고 크게 썼다.

 

"설사 민족이 노예가 된다고 해도 제 나라 말을 지키고 있는 한 감옥의 열쇠를 손에 쥐고 있는 것과 같다."

- 알퐁스 도데 '마지막 수업'중에서-  

 

진정한 平和를 원한다면 열심히 전쟁 준비를 하여야 한다. 군수물자와 막강한 화력을 준비하여야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

입으로만 평화를 외치며 힘의 균형이 깨지면 절대로 평화를 보장하기 어렵고, 전쟁을 막을 수가 없다. -한국의산천-  

 

 

▲ 독립문 전경ⓒ 2008 한국의산천 

1896년(건양 1) 독립협회(獨立協會)가 한국의 영구 독립을 선언하기 위하여 청(淸)나라 사신을 영접하던 영은문(迎恩門) 을 헐고 그 자리에 전국민을 상대로 모금운동을 하여 현재의 독립문을 세웠다. 

금화터널공사로 인한 고가도로가 바로 위로 지나므로 원래 자리에서 70m 정도 떨어진 현위치로 이전했다.

▲ 독립문 전경ⓒ 2008 한국의산천 

 

독립문(獨立門)

위치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941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32호로 지정되었다. 1896년(건양 1) 독립협회(獨立協會)가 한국의 영구 독립을 선언하기 위하여 청(淸)나라 사신을 영접하던 영은문(迎恩門) 자리에 전국민을 상대로 모금운동을 하여 세웠다. 

프랑스의 에투알 개선문을 본떠서 서재필(徐載弼)이 스케치한 것을 근거로 독일공사관의 스위스인 기사가 설계를 하였다. 공역(工役)은 건축기사 심의석(沈宜碩)이 담당하고 노역(勞役)은 주로 중국인 노무자들을 고용하였다.

공사비는 주로 기부금으로 충당, 1897년에 준공하였다. 재료는 주로 화강암을 사용하였는데, 구조는 중앙에 홍예문(虹霓門)이 있고 왼쪽 내부에서 정상으로 통하는 돌층계가 있다. 문 앞에는 구(舊)영은문의 주초(柱礎)였던 두 돌기둥이 있다. 1979년 성산대로를 개설하면서 금화터널이 생기고 고가도로가 지나며 원래 독립문이 있던 자리에서 북서쪽으로 70m 떨어진 곳으로 이전, 복원하고 예전자리에는 독립문지라는 표지판을 묻어놓았다. 

 

 

▲ 독립문 ⓒ 2008 한국의산천 

독립문이 있던 그 자리는 원래 청의 사신을 맞던 영은문이 있던 자리이다. 청일전쟁으로 청이 패하고 조선에서 권리를 잃자 영은문을 헐고 독립문을 세웠다.  

독립문(獨立門)은 독립협회가 중심이 되어 영은문을 무너뜨리고 그 터에 지은 문이다. 화강석을 쌓아 만든 이 문의 중앙에는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이 있고, 홍예 왼쪽 내부에는 정상으로 통하는 돌층계가 있다. 정상에는 돌난간이 둘러져 있으며 홍예문의 가운데 이맛돌에는 조선왕조의 상징인 오얏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그 위의 앞뒤에는 한글과 한자로 '독립문'이라는 글씨와 그 양 옆에 태극기가 새겨져 있으며 문 앞에는 영은문 주초 2개가 남아있다.

▲ 청의 사신을 맞던 영은문 (현재는 영은문을 세웠던 주초 2개가 독립문 앞에 서있다)  ⓒ 2008 한국의산천 

▲ 영은문 주초 2기와 그 뒤에 있는 독립문 전경ⓒ 2008 한국의산천  

 

영은문 철거와 삼전도비 훼손에 관한 문헌.

 

'매천야록' 권2 황현 著

을미년(1895) 개국 504년 (청 광서 21년, 일본 명치 28년) 영은문, 삼전도비의 철회

영은문(迎恩門)을 허물고 삼전도비(三田渡碑)를 넘어뜨렸다. 영은문은 서울의 서대문밖 몇 리 지점에 있었는데 명나라 때에는 연조문(延詔門)이라 불렀고, 순치(順治, 청 세조의 연호) 이후에는 영은문이라 고쳐 불렀으니 중국의 사신을 맞이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삼전도비는 한강 삼전도에 있었는데 정축년(1637, 인조 15) 남한산성에서 내려온 뒤에 청나라 사람들이 억지로 우리나라에 그 전공을 기록하도록 한 것으로 옛 정승 이경석(李景奭)이 그 비문을 지었는데, 이른바 '천자가 십만 군사로 동쪽을 정벌하다(天子東征十萬其師)'라는 것이다. 몽고 문자로 쓰여졌기 때문에 우리 나라 사람들 중에 그것을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에 이르러 청국과의 단절이 분명해지고 사대(事大)의 의절이 모두 폐지된 까닭에 여기에 이런 조치를 취한 것이다.

 

매천야록

구한말 3대 문장가 가운데 한 명인 매천(梅泉) 황현(黃玹)이 1864년(고종 1)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집정으로부터 1910년(순종 4년)까지 47 년간의 역사를 비판적 지식인의 관점에서 서술한 필사본 편년체 역사책으로 이 시기는 안으로는 개화와 척사가 갈등하면서 밖으로는 외세의 침략과 망국의 길로 접어든 시기였다. 어지러운 시대의 중심에 서 있으며 몸소 느낀 현실을 지식인의 안목으로 6권 7책을 기록한 책이다.  

외세의 침입과 함께 개화와 척사가 날카롭게 대립하고, 집권층은 사심으로 가득하여 부패는 극에 이르렀으며,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그 분노가 거침없이 분출하던 어지러운 시대의 한복판을 온몸으로 통과하며 민족의 존망을 걱정하는 지식인의 관점으로 동시대의 역사를 헤아렸다.

세도정권의 부패상,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반목, 청일전쟁,갑오개혁,동학농민운동,러일전쟁, 친일파의 매국 행적, 의병 활동 고종과 순종의 무능력, 북간도와 미국.멕시코.러시아로 이민 간 동포들의 고생과 활약 격동기 역사, 독립협회와 민권 의식, 강제적인 을사조약에서 한일합방까지 등..정국과 사회상 및 내정·외교의 중요한 사실을 거의 시대순으로 빠짐 없이 기록하였다.

 

황현 (1855~1910)

조선 말기 순국지사이며, 시인, 문장가.자는 운경.호는 매천.본관은 장수.세종조 때의 명정승 황희의 후손이다. 과거에 장원하였으나 타락한 정치현실에 회의를 품고 구례의 만수동으로 낙향,평생 관직에 나가지 않고 직필을 휘두르며 역사비평과 시작에만 전념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나서 망명을 시도했으나 실패되었다. 황현의 눈에 비친 조선은 "미치광이로 들끓는 도깨비 나라"에 불과했다. 지도층은 사심으로 가득 차 있었고 부패는 극에 달했으니, 이런 현실이 그의 눈에는 도깨비 나라의 미친 짓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의 붓은 매섭고 비장하기 그지없었다. 그러기에 그의 붓 아래에서는 온전한 사람이 없다는 말까지 나왔다. 1910년 합방 소식이 전해지자 끝내 그는 국록을 먹은 적은 없지만 망국의 책임을 홀로 걸머진 채 절명시와 유서를 남기고 자결로 생을 마감했다.  

저술로는 '매천집', '매천야록','동비기략' 등이 있다.

 

이중화(李重華), <경성기략(京城記略)> 권4 (신문관, 1918)

동(仝) 32년 춘정월(춘정월) 서력기원(서력기원) 1895년 2월에 영은문(迎恩門)을 훼거(毁去)하다.

 

호레이스 알렌(Horace Allen), "Chronological Index(외교사연표)", (1904)

1895년 2월 북경로(Pekin Pass, 의주로) 근처에 있는 중국의 기념아치가 해체되었다.

 

▲ 독립문 측면ⓒ 2008 한국의산천  

▲ 독립문 전경ⓒ 2008 한국의산천  

 

 

자년(1636년·인조14년) 그해 겨울, 남한산성에는 갈 수 없는 길과 가야 하는 길이 하나로 포개져 있었다. 죽어서 살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 

인조는 결국 백성들의 피해를 줄이고자 항거를 포기하고 청나라에 항복하였다.

서울 송파구 석촌동에는 치욕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는 삼전도비가 있다.

▲ 삼전도청태종공덕비(三田渡淸太宗功德碑) 일명 삼전도비 ⓒ 2008 한국의산천


위치 : 서울시 송파구 석촌동 289-3 사적: 제101호(1957.2.1)
규모: 총고 5.7m, 신고3.95m, 신폭1.4m, 재료 대리석

삼전도비는 이곳 지명을 딴 것으로 원명은 대청황제 공덕비이다. 병자호란시(1636) 청태종이 조선을 침략하고 이 사실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비로, 처음에는 삼전도에 세워졌으나 1895년(고종32) 청.일전쟁 후에 메몰된 것을 다시 세웠다가 한강변이 침식됨으로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  

비문을 쓴 대제학 이경석은 "글을 배운 것이 천추의 한"이라며 피눈물을 흘렸다고 하며, 더없는 명문이나 치욕의 내용이라 세세히 읽어 보는 이가 없고, 비 앞을 지날 때는 다들 고개를 돌렸다고 한다. 

▲ 삼전도비 옆에 세워진 부조에 인조가 청태종 앞에 머리를 조아리는 모습이 새겨진 치욕의 현장 모습 ⓒ 2008 한국의산천 

삼전도(三田渡)는 조선 시대 한강 상류에 있던 나루이다. 오늘날의 위치로는 서울 송파구 일대를 말한다.

1636년(인조 14) 12월∼37년 1월에 청(淸)나라의 제2차 침략으로 일어난 조선·청나라와의 전쟁으로 남한산성에서 잠시 버티다가 1월 30일 인조는 세자 등 호행(扈行) 500명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와, 삼전도(三田渡)에 설치된 수항단(受降壇)에서 태종에게 굴욕적인 항례(降禮)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 또는 줄여서 삼배구고(三拜九叩) 를 한 뒤, 한강을 건너 환도하였다.

   

삼배구고 (三拜九叩: 세번을 절하고 아홉번을 조아린다)

인류의 역사는 나라가 힘이 없으면 언제나 시련과 환란을 초래하기 마련, 삼전도비 역시 바로 그러한 우리의 암울한 역사를 현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1637년 음력1월30일 남한산성에서 항거하던 인조(1623 ~ 1649)가 삼전도에서 마침내 청태종 홍타이시에게 신하를 뜻하는 푸른색 관복을 입고 항복의 예를 올리게 된다. 인조는 수항단에서 청 태종에게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 세 번 절하면서 그때마다 세 번씩 머리를 땅에 조아리는 것)를 하며 항복의 예를 해야했다. 그러나 청 태종의 트집으로, 인조는 몇번이나 머리를 땅에 부딪쳐야했다.


삼전도비는 병자호란 때 청에 패배해 굴욕적인 강화협정을 맺고, 청태조의 요구에 따라 그의 공덕을 적은 비석이다

 

진정한 平和를 원한다면 열심히 전쟁 준비를 하여야 한다. 군수물자와 막강한 화력을 준비하여야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

입으로만 평화를 외치며 힘의 균형이 깨지면 절대로 평화를 보장하기 어렵고, 전쟁을 막을 수가 없다. -한국의산천- 

 

독립문과 영은문 >>> https://koreasan.tistory.com/14087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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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불태(知止不殆)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가이장구(可以長久) 오래도록 편안하다.  - 노자 도덕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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