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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MTB등산여행

남한산성 삼전도비 삼배구고

by 한국의산천 2007. 5. 20.

삼전도碑(비)를 찾아서 (석촌동)   

 (현제는 송파 호수 옆으로 이전되었다)

민족의 자존심과 백성을 위한 성군의 굴복 통한의 역사가 서려있는 남한산성 그리고 삼전도 

※ 삼전도(三田渡)는 조선 시대 한강 상류에 있던 나루이다. 오늘날의 위치로는 서울 송파구 일대

 

송파로 이전한 삼전도비 >>> https://koreasan.tistory.com/15605426

 

답사 2007년 5월 20일(일요일) 한국의산천

답사코스 : 석촌동 백제초기적석총 - 삼전도 碑 -남한산성

 

얼마전 출간된 중견 작가 김훈의 남한산성이 서점가에서 매우 관심을 끌고 있다.

 

▲ 삼전도비가 있는 동네의 어린이 공원ⓒ 2007 한국의산천

 

삼전도비는 서울 송파구 석촌동 289-3의 골목에 있어 찾기가 쉽지는 않다. 지하철 석촌역에 내려 석촌동 백제고분군을 돌아보고 주민들에게 묻는 것이 좋다. 고분군에서 5분 거리이다.  

 ▲ 동네 안에 자리한 작은 어린이 놀이터 안에 있다. ⓒ 2007 한국의산천

 

▲ ⓒ 2007 한국의산천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 또는 줄여서 삼배구고(三拜九叩)      삼배구고 (三拜九叩: 세번을 절하고 아홉번을 조아린다) 삼전도비,참으로 가슴아픈 우리역사를 웅변해주는 또하나의 남겨진 엄연한 유물이다.


인류의 역사이래 나라가 힘이 없으면 언제나 시련과 환란을 초래하기 마련, 삼전도비 역시 바로 그러한 우리의 암울한 역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1637년 음력1월30일 남한산성에서 항거하던 인조(1623 ~ 1649)가 삼전도에서 마침내
청태종 홍타이시에게 신하를 뜻하는 푸른색 관복을 입고 항복의 예를 올리게 된다. 인조는 삼전도에서 평민의 옷을 입고 청 태종에게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 세 번 절하면서 그때마다 세 번씩 머리를 땅에 조아리는 것)를 하며 항복해야했다. 그러나 청 태종의 트집으로, 인조는 피투성이가 될 정도로 몇십번 머리를 땅에 부딪쳐야했다.

 

또한 청태종은 자신의 승전을 기념하는 비를 세우라고 조선에 명하게 되고 비석은 당시 대제학이던 이경석이 비문을 짓고 참판 오준이 글자를 썼으며 참판 여이징이 전자(한자 서체의 하나)를 새겼다이것뿐만이 아니라 두 아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인질로 청에 끌려갔고, 환향녀는 이혼문제를 낳았다.    환향녀( 還:돌아올 환, 鄕:시골향 女 : 고향으로 돌아온 여성 - 후에는 화냥녀로 구개음화되었다)  

 

 

▲ 삼전도 비를 다시 정비하게 된 경위 (확대됩니다)ⓒ 2007 한국의산천

 

▲ 포장이 씌어진 삼전도비ⓒ 2007 한국의산천 

얼마 전 삼전도비를 제거하라고 비문에 적색 스프레이를 뿌려 현재 스프레이 페인트 제거 작업중이며 수사중 테이프가 쳐져있다.  오욕의 역사도 분명 역사다.

 

▲ 삼전도비  ⓒ 2007 한국의산천

 

삼전도비
병자호란 때 청나라 태종이 조선 인조의 항복을 받고 자기의 공덕을 자랑하기 위해 지은 전승비
지정번호 사적 제101호
지정연도 1963년 1월 21일
소재지 서울 송파구 석촌동 289-3
시대 조선 인조 17년(1639년)
크기 전체 높이 5.7m. 비신높이 3.95m. 너비 1.4m. 무게 32t
종류 전승비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01호로 지정되었다. 전체 높이 5.7m. 높이 3.95m. 너비 1.4m. 무게 32t. 재료는 비신은 대리석이며 귀부는 화강암이다.
원래의 비명은 삼전도청태종공덕비( 三田渡淸太宗 功德碑)이다. 1639년(인조 17) 청나라 의 강요에 따라 이조판서 이경석 이 글을 짓고, 글씨는 오준(吳竣), 전(篆)은 여이징이 썼다.
 

 

내용은 청나라가 조선에 출병 한 이유, 조선이 항복한 사실, 항복한 뒤 청태종이 피해를 끼치지 않고 곧 회군 한 사실이다.
비의 앞면에는 한문, 뒷면에는 만주문(滿洲文), 몽골문으로 번역되어, 한 비 안에 3개국 문자가 들어 있는 특이한 비석이다. 또한 비 머리의 이수 ,받침돌의 귀부 조각도 정교하여 조선 후기의 가장 우수한 조각의 하나로 꼽힌다.

 

원래 석촌호 주변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나, 그 치욕적인 의미 때문에 청일전쟁 때 매몰되었다. 1895년(고종 32)에 다시 세워지고, 1956년 문교부 (지금의 교육부)가 국치의 기록이라 해서 다시 땅 속에 묻었다가, 다시 지금의 위치에 세우는 등 수난을 당하였다. 서울시는 후세들에게 패배와 치욕의 사실을 그대로 보여 교훈이 되도록 비 일대에 500평 규모의 소공원을 조성, 여기에 당시의 모습을 그린 부조비를 세워 1983년 5월 문을 열었다.

 

병자호란 때 청군(淸軍)의 침입에 패배한 조선이 삼전도에서 강화를 맺은 뒤 청나라 태종(太宗)의 요구에 따라 그의 공덕을 새긴 비이다. 원래의 명칭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이다.  청나라는 만주에 살던 여진족(女眞族)이 세운 나라이다. 여진족은 본래 조선에 조공을 받치던 부족이었다. 그런데 임진왜란으로 인해 조선과 명(明)나라가 큰 피해를 입자 이를 틈타 누르하치는 여러 부족을 통합하여 세력을 키운 뒤 국호를 후금(後金)이라 하였다. 이에 조선은 광해군 11년(1619) 명나라의 군사동원 요청에 따라 만주 지역에 파병하여 후금의 군사와 대치하기도 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조선과 후금 사이에 긴장이 점차 고조되었고, 이에 세력을 더욱 키운 후금은 마침내 인조 5년(1627) 조선에 쳐들어와 정묘호란을 일으켰다. 그 뒤 조선과 후금은 화약(和約)을 맺었으나 양국의 관계는 원만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인조 14년(1636) 후금이 국호를 청(淸)으로 바꾸면서 조선에게 신하의 예를 갖출 것을 강요하자 마침내 양국관계는 단절되었다.  그 해 12월 청 태종은 십만의 군사를 직접 이끌고 조선에 쳐들어와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당시 인조는 신하들과 함께 한강 이남의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피신하여 청군과 대치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또 비축했던 식량조차 바닥이 나자 인조는 부득이 이듬해 1월 30일에 항전을 그치고 청군이 머물고 있던 한강 남쪽의 삼전도 나루로 나와 굴욕적 강화협정을 맺었다. 

 

병자호란이 수습된 뒤 청 태종은 자신의 공덕비를 세우라고 조선에 요구하였다. 이에 조선은 장유(張維), 조희일(趙希逸)이 지은 비문을 청에 보냈으나 번번이 거부되었고, 결국 인조의 특명으로 도승지 겸 예문관 제학이던 이경석(李景奭, 1595∼1671)이 지은 비문이 받아들여졌다. 이에 공조(工曹)는 삼전도의 제단터를 높여 증축하고 인조 17년(1639) 12월 8일 비석을 세웠다. 글씨는 오준(吳竣, 1587∼1666)이 썼고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란 전서(篆書) 제목은 여이징(呂爾徵, 1588∼1656)이 썼다. 

 

비석은 대리석 계통인데 오랜 세월에도 불구하고 명문이 잘 남아있다. 비석의 앞면 왼쪽을 몽고문자, 오른쪽을 만주글자, 그리고 뒷면을 한자로 새긴 희귀한 예이다.     

 

 청 태종이 인조로부터 항복을 받은 자리에 자신을 칭송하는 비석을 세우기를 요구했으니 그 누구도 비문을 짓기를 꺼렸다. 그때 물망에 오른 이는 모두 넷으로 장유, 석루(石樓) 이경전, 죽음(竹陰) 조희일, 그리고 이경석이었다. 이에 장유는 상소를 올려 자신을 빼 줄 것을 요청했으며 병석에 있던 이경전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으며 조희일은 일부러 졸렬한 글을 지어 제외되었다. 장유는 상소를 올리긴 했지만 글을 짓지 않을 수 없어 이경석의 글과 함께 채택이 되어 청으로 보내졌으나 청에서 이경석의 글을 채택한 것이다. 청 태종을 칭송하는 글을 짓는다는 것이 사대부로서는 치욕적인 일이긴 하지만 당시 상황으로는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이었으니 오히려 이경석은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한 것이다.

 

   

▲ 삼전도비 이수부분 ⓒ 2007 한국의산천

 

 

비석 위쪽의 이수(螭首)에는 여의주(如意珠)를 중심으로 두 마리의 용이 화려하게 새겨졌다. 귀부(龜趺)는 17세기 석비의 전형을 보여주는데, 몸체에 비해 머리가 지나치게 크고 비석을 받치는 비좌(碑座)를 연잎 모양으로 새겼다. 삼전도비는 조선이 청에 항복하게 된 경위와 청 태종의 침략을 '공덕'이라 찬미한 굴욕적 내용이지만, 반면 자주국방의 중요성을 후세에 일깨워주는 소중한 역사적 교훈이 된다. 또 비문에 새겨진 만주·몽골문자는 조선시대 외국어 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이기도 하다.  병자호란 (丙子胡亂) 1636년(인조 14) 12월∼1637년 1월에 청나라의 제2차 침구(侵寇)로 일어난 조선·청나라의
싸움. 조선과 후금은 형제지국의 맹약을 하고 양국관계는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1632년 후금은 만주 전역을 석권하고 명나라 북경을 공격하면서, 양국관계를 형제지국에서 군신지의(君臣之義)로 고칠 것과 황금·백금 1만 냥, 전마(戰馬) 3,000필 등 세폐(歲幣)와 정병(精兵) 3만을 요구하였다. 또한 1636년 2월 용골대(龍骨大)·마부태(馬夫太) 등을 보내어 조선의 신사(臣事)를 강요하였으나, 인조는 후금사신의 접견마저 거절하고 8도에 선전유문(宣戰諭文)을 내려, 후금과 결전(決戰)할 의사를 굳혔다.
1636년 4월 후금의 태종은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청(淸)이라고 고쳤으며, 조선이 강경한 자세를 보이자 왕자·대신·척화론자(斥和論者)를 인질로 보내 사죄하지 않으면 공격하겠다고 위협하였다. 그러나 조선은 주화론자(主和論者)보다는 척화론자가 강하여 청나라의 요구를 계속 묵살하였다. 12월 2일 이런 조선의 도전적 태도에 분개한 청나라 태종은, 청·몽골·한인(漢人)으로 편성한 10만 대군을 스스로 거느리고 수도 선양(瀋陽)을 떠나, 9일 압록강을 건너 쳐들어왔다.
의주부윤 임경업(林慶業)은 백마산성(白馬山城:義州)을 굳게 지켜 청군의 침입에 대비하였으나, 선봉장 마부대는 이 길을 피하여 서울로 진격하였다.
13일에서야 조정에서는 청나라 군의 침입사실을 알았고, 14일 적은 개성(開城)을 통과하였다. 조정에서는 급히 판윤 김경징(金慶徵)을 검찰사로, 강화유수 장신(張紳)을 주사대장(舟師大將)으로, 심기원(沈器遠)을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삼아 강화·서울을 수비하게 하였다. 또 원임대신(原任大臣) 윤방(尹昉)과 김상용(金尙容)으로 하여금 종묘사직의 신주(神主)와, 세자비·원손(元孫)·봉림대군(鳳林大君)·인평대군(麟坪大君)을 비롯한 종실(宗室) 등을 강화로 피난하게 하였다.
14일 밤 인조도 강화로 피난하려 하였으나 이미 청나라 군에 의해 길이 막혀,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백관을 거느리고 남한산성으로 피하였다. 

 

인조는 훈련대장 신경진(申景禛) 등에게 성을 굳게 지킬 것을 명하고, 8도에 근왕병(勤王兵)을 모집하도록 격문(檄文)을 발하였으며, 명나라에 급사(急使)를 보내어 지원을 청하였다. 그러나 16일 청나라 선봉군이 남한산성을 포위하였고, 1637년 1월 1일 태종이 도착하여 남한산성 아래 탄천(炭川)에 20만 청나라 군을 집결시켜, 성은 완전히 고립되었다. 성내에는 군사 1만 3000명이 절약해야 겨우 50일 정도 지탱할 수 있는 식량이 있었고, 의병과 명나라 원병은 기대할 수 없었으므로 청나라 군과의 결전은 불가능하였다. 또한 성 밖에는 청나라 군이 무고한 백성들을 죽이고 노략질하기를 일삼으며, 어미는 진중(陣中)에 잡아놓고 그 아이들은 추운 길바닥에 버려 거의 모두 굶어죽고 얼어죽었다. 특히 병자년은 혹독한 추위가 오래 계속되어, 노숙(露宿)한 장수·군사들은 추위와 굶주림에 기진하여 병들고 얼어죽는 자가 늘어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내에서는 최명길(崔鳴吉) 등 주화파(主和派)와 김상헌(金相憲) 등 주전파(主戰派) 사이에 논쟁이 거듭되다가, 강화론이 우세하여 마침내 성문을 열고 항복하기로 하였다.

 

 

 

청나라 태종은 조선의 항복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우선 인조가 친히 성 밖으로 나와 항복하되, 양국관계를 악화시킨 주모자 2, 3명을 잡아 인도할 것을 요구하였다. 때마침 강화도가 적에게 함락된 소식을 들어, 어쩔 수 없이 최명길 등을 적진에 보내어 항복조건을 교섭하게 하였다. 1월 28일 이에 청군은 용골대,마부대를 보내 다음과 같은 강화조약 조항을 제시하였다. 

 

1. 청나라에게 군신(君臣)의 예(禮)를 지킬 것,
2. 명나라의 연호를 폐하고 관계를 끊으며, 명나라에서 받은 고명(誥命)·책인(册印)을 내놓을 것,
3. 조선 왕의 장자·제2자 및 여러 대신의 자제를 선양에 인질로 보낼 것,
4. 성절(聖節:중국황제의 생일), 정조(正朝), 동지(冬至), 천추(千秋:중국 황후·황태자의 생일), 경조(慶弔) 등의 사절(使節)은 명나라 예에 따를 것,
5.  명나라를 칠 때 출병(出兵)을 요구하면 어기지 말 것,
6.  청나라 군이 돌아갈 때 병선(兵船) 50척을 보낼 것,
7.  내외 제신(諸臣)과 혼연을 맺어 화호(和好)를 굳게 할 것,
8.  성(城)을 신축하거나 성벽을 수축하지 말 것,
9. 기묘년(己卯年:1639)부터 일정한 세폐(歲幣)를 보낼 것 등이다.
 1월 30일 인조는 세자 등 호행(扈行) 500명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와, 삼전도(三田渡)에 설치된 수항단(受降壇)에서 태종에게 굴욕적인 항례(降禮)를 한 뒤, 한강을 건너 환도하였다.
청나라는 맹약(盟約)에 따라 소현세자, 빈궁(嬪宮), 봉림대군 등을 인질로 하고, 척화의 주모자 홍익한·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 등 삼학사를 잡아, 2월 15일 철군하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조선은 완전히 명나라와는 관계를 끊고 청나라에 복속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관계는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에 패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전후에는 많은 고아들의 수양(收養)문제와, 수만에 이르는(어느 기록에는 50만) 납치당한 이들의 속환(贖還)문제가 대두되었다. 특히 청나라 군은 납치한 양민을 전리품으로 보고, 속가(贖價)를 많이 받을 수 있는 종실,양반의 부녀를 되도록 많이 잡아가려 하였으나, 대부분 잡혀간 이들은 속가를 마련할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속가는 싼 경우 1인당 25∼30냥이고 대개 150∼250냥이었고, 신분에 따라서 비싼 경우 1,500냥에 이르렀다. 속환은 개인·국가 모두 그 재원을 마련하는 것이 큰 일이었다. 여기에 순절(殉節)하지 못하고 살아돌아온 것은 조상에 대해 죄가 된다 하여, 속환 사녀(士女)의 이혼문제가 사회·정치문제로 대두하였다. 

 

1645년 10년의 볼모생활 끝에 세자와 봉림대군은 환국하였으나, 세자는 2개월 만에 죽었다. 인조의 뒤를 이은 효종(봉림대군)은 볼모생활의 굴욕을 되새기며, 북벌(北伐)계획을 추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 남한산성 올라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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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민족의 자존심과 백성을 위한 성군의 굴복 통한의 역사가 서려있는 남한산성 답사 2007년 5월 20일(일요일). 한국의산천 답사코스 : 석촌동 백제초기적석총 - 삼전도 碑 -남한산성 ▲ 산성과 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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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족불욕(知足不辱)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지지불태(知止不殆)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가이장구(可以長久) 오래도록 편안하다.  - 노자 도덕경에서

 

대한민국 구석구석 즐겁고 행복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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