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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MTB등산여행

남연군 가야산 (택리지)

by 한국의산천 2007. 5. 18.

山을 오르고 江을 건너며 世上을 느끼고 배운다.

 

<다시 쓰는 택리지>를 읽으며...    

 

 

▲ 다시쓰는 택리지 신정일著 ⓒ2007 한국의산천 

 

충청도는 전라도와 경기도 사이에 있다. 충청도는 충주와 청주에서 첫글자 한자씩 따왔다고 한다. 서쪽은 바다에 닿았고 동쪽의 동북편 모퉁이가 되는 충주,제천,단양 등은 강원도 남쪽에 불쑥 들어가 있으며 그 아랫녘은 백두대간을 경계로 경상도의 접경지역이다. 

 

금북정맥과 금남정맥에 위치하여 전라도와 가깝고, 일부분은 금북정맥 북쪽에 있기 때문에 경기도와 가깝다. 

 

 

▲ 넓게 펼쳐진 내포평야 ⓒ 2007 한국의산천 

 

금북정맥은 칠현산에서 부터 시작되어 안성의 서운산과 천안의 흑성을 지나 국사봉에서 광덕산과 치유령으로 이어진다. 청양 일월산까지 내려온 금북정맥이 오서산, 보개산, 덕숭산쪽으로 북상하며 가야산에서 우뚝 솟은 뒤 기수를 서쪽으로 돌려 태안반도로 향한다  성황산, 백화산을 지나 태안반도로 이어진 금북정맥은 반도의 끝 안홍진에서 서해로 몸을 숨긴다.

 

이중환은 "충청도에서 내포가 가장 좋은 곳이다" 라고 했다. (내륙 깊숙히까지 만이 들어와 있기에 내포라고 부른다)

가야산 앞뒤에 있는 예산, 당진,서산,홍성 등을 열 고을을 일컬어 내포라고 부른다. 지세가 산모퉁이에서 멀이 떨어져 있고 큰 길목이 아니므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두차례의 난리때에도 이곳에는 적군이 쳐들어 오지 않았다 한다. 이중환이 살았던 당시에는 생선과 소금이 매우 흔하고 땅이 기름지고 넓기 때문에 여러 대를 이어가는 사대부 집들이 많았다고 한다.  

 

    

▲ 가야산 정상 원효봉 ⓒ 2007 한국의산천 

 

내포에 우뚝 솟은 산 가야산. 그 가야산 자락 예산군 덕산면 상기리에 있던 가야사는 100여군데의 절터 가운데 가장 큰 절터였다. 이절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에 의해 일부러 불태워졌다고 한다.  

 

 

 

▲ 상기리 저수 지 앞에 있는 안내판 ⓒ 2007 한국의산천  

 

안동김씨의 세도에 밀려 젊은 시절을 파락호(破落戶)로 불우하게 보낸 야심가 흥선군(興宣君)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이 오랜 시절을 공들여 시작한 일이 아버지 남연군(南延君南延君, ?~1822)의 묘를 이곳으로 옮기는 일이었다.

 

흥선군은 당대의 지관인 정만인(鄭萬仁)에게 명당 자리를 부탁하여 가야산 동쪽에 2대에 걸쳐 천자가 나오는 자리를 얻는다. 우선 그는 임시로 경기도 연천에 있던 아버지의 묘소를 탑뒤의 산기슭으로 옮겼다.  그때 마지막으로 옮겼던 사람들에게 상여가 기증되었고, 그 상여가 중요민속자료 31호로 지정되어 남은들에 보존되어있다.   

 

 

▲ 2대에 걸쳐 황제를 배출한 남연군 묘. ⓒ 2007 한국의산천 

 명당으로 이장  7년 후 대원군은 차남 재황(載晃)을 얻었고, 이가 곧 철종의 뒤를 이어 12세에 왕위에 오른 고종이다.

  

그런데 그 명당터에는 가야사라는 절이 있었고, 지관이 점지해준 묘자리에는 금탑이 서 있었다. 흥선군은 재산을 처분한 2만 냥의 반을 주지에게 스님들을 쫓아낸 후 불을 지르게 하였다. 그리하여 절은 폐허가 되고 금탑만 남는데, 탑을 헐기로 한 날 밤에 네 형제가 똑 같은 꿈을 구게 된다. " 나는 탑신이다.

 

"너희들은 어찌하여 나의 자리를 빼았으려 하느냐. 만약 일을 그만두지 못한다면 내 너희를 용서치 않으리라 "

 

겁에 질린 형들은 모두 그만두기를 원했으나 대원군은 " 그렇다면 이 또한 진실로 명당이다". 라고 말한뒤 탑을 부수자 도끼날이 튀었다. 이에 대원군이 " 왜 ..나 라고 왕의 아비가 되지 못한다는 것인가? "라고 소리치자 도끼가 튀지 않았다고 전한다.  

 

정만인의 예언대로 흥선군은 대원군이 되었으며 고종,순종 등의 2대 에 걸쳐 황제를 배출한다. 

 

 

▲ 남은들에 있는 상여 보관소 ⓒ 2007 한국의산천  

 

이 상여를 보존해 오고 있는 마을의 이름을 따서 남은들상여라고 이름을 붙였다.

가까이 가서 창살 사이로 내부를 보았지만 상여는 없고 비어있다. 국립고궁 박물관으로 옮겼다고 한다.  

 

참고사진 

 

 

▲ <남은들>이라는 동네에 보관되어있어 <남은들 상여>라고 부른다. ⓒ 2007 한국의산천 

 

남은들 상여 

 

긴 멜대를 중심으로 한 기본틀 위에 몸체를 조성하고 맨 위에는 햇빛을 가리기 위해 넓은 천을 펼쳤다.

 

몸체에는 봉황, 용무늬 등이 새겨지고 색색의 띠와 술을 늘어뜨려 화려하면서도 엄숙한 분위기를 주고 있는데 망자의 명복을 빌고, 슬픔을 덜어주려는 의미인 듯 싶다. 

 

이장을 하고 난 그 다음 해에 둘째 아들 이재황(李載晃 : 후일, 고종으로 즉위함) 을 낳았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상여의 제작은 1840년과 고종의 탄생년인 1852년 사이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 상여는 그 자체의 가치보다도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상여라는 점에서 유물로서 가치가 있다.

각 부의 조각수법도 당시의 조각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며, 다른 작품에 비하여 어느 정도 제작시기를 추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가치가 있다. 또한 대원군이 세도를 얻기 전에 제작된 것이므로, 왕실에서 사용하던 상여보다는 조촐한 모습이지만 왕실 상여의 제작을 담당하던 ‘귀후서(歸厚署)’에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왕실에서 사용하던 상여인 대여(大輿)의 구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숙종 대의 ‘청풍부원군 상여’와 비교할 만한 가치를 지닌 자료이다.

 

 

▲ 가야사를 불태운 후 가야사 반대방향으로 돌아 앉았다는 미륵. ⓒ 2007 한국의산천 

 

 

▲ 가야산 능선 왼쪽이 가야산의 정상 원효봉이다.  ⓒ 2007 한국의산천 

 

대원군은 가야사를 불태운 후 이곳에 묘를 쓰고 혹시나 누가 이자리를 탐할까봐 많은 강회로 다지고 부어 철옹성을 만들었다. 그렇기에 오페르트 일행이 밤새도록 팠어도 도굴에 실패했다. 

 

이런 사실이 있은 후 대원군은 진노해 "이 괴변은 필시 사류(邪類)에 의한 것이다. 잔존하는 천주학쟁이를 가일층 엄단하라"고 명을 내렸다. 천주교도 1,000여명이 처형을 당한 병인박해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 멀리 옥양봉과 옥양봉에서 벋어나온 능선에 자리한 남연군묘  ⓒ 2007 한국의산천 

 

훗날 대원군은 이건창(李建昌)에게 장례 치를 때의 일을 말하길 " 탑을 쓰러트리니 그속에 백자 두개와 단지 두병 , 그리고 사리 세알이 있았다. 사리는 작은 머리통만 구슬이었는데 매우 맑게 빛났다.  물속에 잠겼지만 푸른 기운이 물속을 꿰뚫고 끊임없이 빛나는 것 같았다." 라고 했다. 그렇지만 그리 좋은 일은 아니었다. 그 후 오래지 않아 조선왕조는 500년의 사직에 막을 내리게 된다.

 

남연군의 묘는 고종 5년 대원군의 쇄국정책에 불만을 품은 독일상인 오페르트에 의해 파헤쳐지는 수난을 당했으며, 천주교도들은 그 일로 인하여 또 한차례 수난을 겪어야 했다.  

 

남연군 묘의 지세는 한마디로 풍수지리가 일컫는 명당의 조건은 모두 다 갖추었다. 뒤로 가야산 서편 봉우리에 두 바위가 문기둥처럼 서 있는 석문봉이 주산이 되고, 오른쪽으로 옥양봉과 만경봉이 덕산을 거치면서 30리에 걸쳐 용머리에서 멎는 지세가 청룡이 되며, 왼쪽으로 백호지세는 가사봉,가영봉을 지나 원화봉으로 이어지는 맥이 금천봉 원봉을 감싼 자리다.

 

이곳은 풍수지리에 문외한인 사람일지라도 묘 뒤편 가야산의 능선들이나 묘 앞으로 시원스럽게 펼쳐진 덕산쪽만 바라 보아도 진정한 명당터라고 느낄만큼 빼어난 곳이다.    

 

 

▲ 남연군 묘 앞 동쪽으로는 막힘없이 시야가 펼쳐진다. ⓒ 2007 한국의산천 

 

행담도와 오페르트 도굴사건   

 

 

▲ 행담도 오션파크에서 바라 본 서해대교 일출. ⓒ 2007 한국의산천 

 

서해대교로 유명한 행담도는 행정 구역상 충남 당진군 신평면 매산리에 속해있으며 이곳 사람들에겐 토끼섬으로 불렸던 곳이다.  굴 바지락 숭어가 특산물이다.

 

지명 중 행(行)자는 간만의 차가 가장 심 한 백중사리때 갯벌의 물이 빠져 육지쪽에서 이 곳 섬으로 걸어간 사실에서 유래한다. 물 가득찰 담(淡)자는 평소에는 물에 잠겨 있는 섬이라는 뜻이다.

 

역사적으로는 1868년 흥선 대원군 시절 남연군묘 도굴사건의 주역인 유태계 독일인인 오페르트가 차이나호를 이끌고 이곳에 북독일 연방의 기를 게양, 정박하고 상륙했던 역사의 섬이기도 하다.

여기서 그들은 그레타호를 옮겨타고 삽교천을 거슬러 올라가 현 예산군 덕산면 구만포에 상륙하여 러시아군병을 자칭하며 가야산 자락 아래 덕산 가동에있는 남연군묘를 도굴하여 통상문제를 흥정하려고 하였으나 덕산 군수와 주민들의 저항으로 도굴이 실패로 끝나고 퇴각하였다.

 

이러한 비행은 국내외의 비난을 받았으며 이 일로 말미암아 흥선대원국의 쇄국 정책은 더욱 강화되었다. 

 

 

나라 안 제일의 명당 터라 알려진 남연군 묘 건너편의 서원산 자락에 보덕사가 있다. 

 

 

▲ 조그만 절 보덕사 ⓒ 2007 한국의산천  

 

보덕사는 남연군 묘를 쓴 후 아들 고종이 보위에 오르자 보은의듯으로 지었으며, 한국 전쟁때 불타버린 것을 1951년 2월 비구니 수옥(水玉)이 중창하였고 , 1962년 다시 중창 하였다.  

 

 

▲ 보덕사의 탑 ⓒ 2007 한국의산천  

 

규모가 그리 크지 않으며 가야사의 옛 절터에서 옮겨 온 깨어진 석등이 남아 번성했던 가야사의 옛모습을 전해주고 있을 뿐이다.        

 

 

▲ 그해 겨울은 따듯했네. 가야산 일락산 오르기   ⓒ 2007 한국의산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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