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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MTB등산여행

반구정(伴鷗亭) 앙지대(仰止臺)

by 한국의산천 2007. 5. 14.

반구정(伴鷗亭)    [2007년 5월 13일(일요일). 한국의산천]  

 

 청백리(淸白吏)의 얼이 깃든 곳 반구정  방촌 황희 ( 厖村 黃喜, 1363~1452) 

 

본관장수(長水) 호방촌 별칭자 구부(懼夫), 초명 수로(壽老) 출생지 황해도 개성(開城) 주요저서 <방촌집>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으로 서른살이 되던 해에 고려가 멸망하자, 선비는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70여명의 고려 유신(遺臣)들과 함께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가 버렸다.

두문동의 고려 유신들은 외부와 일체 연락을 끊고 풀 뿌리와 나무 껍질로 연명하며 고려왕조에 대한 지조를 지키려고 했다.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가 갖은 방법으로 이들을 설득했으나 끝까지 아무도 나오지 않았는데, 흔히 말하는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는 말이 여기서 유래된 것이다. 

결국 태조는 두문동을 포위하고 협박하기에 이르고, 몰살당할 위기에 처한 고려 유신들은 충절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세상을 등지고 백성을 외면하는 것 역시 배운 사람의 도리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그 중 가장 나이가 어린 황희가 조선 조정에 홀로 출사(出仕)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성계의 간청으로 다시 벼슬길에 올라 18년간 영의정에 재임하면서 세종의 가장 신임받는 재상으로 명성이 높았다. 

인품이 원만하고 청렴하여 모든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으며, 시문에도 뛰어나 몇 수의 시조 작품도 전해진다.  

 

청백리 (淸白吏) 란?
관직수행 능력과 청렴, 근검, 도덕, 경효, 인의 등의 덕목을 겸비한 조선시대의 이상적인 관료상으로, 임금의 재가를 얻어 의정부에서 뽑아 관직자에게 주어진 호칭이다. 

 

청백리가 되면 후손들에게 선조의 음덕을 입어 벼슬길에 나갈 수 있는 특전도 주어졌다.총 219명이 배출되었으며, 대표적 인물로는 황 희,맹사성, 이원익, 이현보,이황,김장생,이항복 등이 있다.  

 

  ▲ 반구정 ⓒ 2007 한국의산천

 

반구정(伴鷗亭) 

 

소재지 경기 파주시 문산읍 사목리 190 경기문화재자료 제12호.  황희(黃喜:1363∼1452)가 1449년(세종 31) 87세의 나이로 18년간 재임하던 영의정을 사임하고 관직에서 물러난 후 갈매기를 벗삼아 여생을 보낸 곳이다.

1983년 9월 19일 경기도문화재자료 제12호로 지정되었다. 1449년(세종 31) 황희(黃喜)가 87세의 나이로 18년간 재임하던 영의정을 사임하고 관직에서 물러난 후 갈매기를 벗삼아 여생을 보낸 곳이다. 임진강 기슭에 세워진 정자로 낙하진에 인접해 있어 원래는 낙하정(洛河亭)이라고 하였다.   

이곳은 전국 8도의 사림들이 선현을 추모하는 승적(勝蹟)으로 수호하여 내려오던 곳이었는데 6·25전쟁 때 불타버렸다. 그후 황희의 후손들이 복구하였으며, 1967년 6월 옛 모습으로 다시 개축하였다. 문산의 임진강변에 자리하여 앞에는 널찍한 모래톱이 있다. 맑은 날 정자에 오르면 멀리 개성의 송악산을 볼 수 있다.

 

 

▲ 앙지대 ⓒ 2007 한국의산천

 

앙지대(仰止臺) 앙지대는 반구정이 있던 원래 위치에 세워진 정자다. 1915년 반구정을 현위치로 옮겨 지으면서 현위치에 육각정을 짓고 앙지대라고 이름하였다. 

 

앙지문 상랑문에 '오직 선(善)만을 보배로 여기고 딴 마음이 없는 한 신하가 있어 온 백성이 우뚝하게 솟은 산처럼 모두 쳐다본다. 아름답구나! 이 앙지대라는 이름은 시경의 호인(好仁)아라는 뜻으로 취했다" 라고 적고 있다.  

반구정 옆에는 황희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영당이 있다. 1452년(문종 2) 황희가 89세로 세상을 떠나자 세종의 묘정(廟庭)에 배향하고, 1455년(세조 1)에 유림들이 그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반구정 옆에 앙지대와 사당을 짓고 영정을 봉안한 곳이다.

영당은 6·25전쟁 때 전소된 것을 1962년 후손들이 복원하였다.

 

▲ 반구정에서 손이 닿을 듯 내려 보이는 임진강 ⓒ 2007 한국의산천

 

나라 안에서 일곱번째로 긴 임진강은 함경남도 마호비령에서 부터 시작되어 물살이 어느강보다 빠르고 그 강가에 톱날처럼 깎인 바위가 늘어서 있어서 경치가 유달리 아름답다. 그래서 당고(唐皐)라는 옛 시인은 "뱃놀이는 임진에만 알맞다"고 말하였다.  조선 500년 동안 어질고 슬기로우며 청렴결백했던 명정승 황희 (黃喜) 선생은 임진강가의 반구정에서 인생을 마무리하였으며, 율곡 이이 역시 이곳에 묻혔다.  

이곳 가까이에 있는 임진 나루는 서울에서 개성으로 가는 중요한 길목의 나루였기에 임진진을 두었으며 병자호란때에는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이 강을 건너 청나라의 볼모로 끌려간 슬픈 역사를 가진 곳이기도 하다. 

 

 

▲ 청정문(淸政門)의 현판이 붙어있는 문 ⓒ 2007 한국의산천

 

▲ 방촌영당과 월헌사 ⓒ 2007 한국의산천

 

입구에 들어서면 방촌 황희 선생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방촌 영당과 월헌사가 있다.

 

▲ 방촌 황희선생의 동상 ⓒ 2007 한국의산천

 

방촌 황희 ( 厖村 黃喜, 1363~1452)

고려말 조선초의 대표적인 정승이자 청백리로 개성(開城) 가조리 출생으로 초명은 수로(壽老). 호는 방촌(厖 村). 본관은 장수(長水). 자 구부(懼夫). 시호 익성(翼成)이다.
 1363년 (공민왕 12년) 개성 가조리에서 출생하였는데 어머니 용궁김씨가 그를 잉태했던 열달 동안 송악산 용암 폭포에 물이 흐르지 않다가 그가 태어나자 비로소 전과 같이 물이 쏟아져 내렸다고 전한다.  

 

1376년(우왕 2) 음보로 복안궁녹사(福安宮錄事)가 되었다가 1383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1389년(창왕 1) 문과에 급제, 이듬해 성균관학관(成均館學官)이 되었다.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 은거했으나, 이성계(李成桂)의 간청으로 1394년(태조 3) 성균관학관으로 세자우정자(世子右正字)를 겸임, 그 후 직예문춘추관(直藝文春秋館), 사헌감찰(司憲監察), 우습유(右拾遺), 경기도도사(京畿道都使)를 역임했다. 

 

1400년(정종 2) 형조, 예조, 이조 등의 정랑(正郞)을 거쳐 1404년(태종 4) 우사간대부(右司諫大夫)가 되었다가 이듬해 지신사(知申事)에 올랐으며, 1408년 민무휼(閔無恤) 등의 횡포를 제거, 그 후 형조, 병조, 예조, 이조의 판서를 역임하였다.

 

1416년 이조판서로 세자 폐출(廢黜)을 반대하여 공조판서로 전임되었으며, 이어 한성부판사(漢城府判事)가 되었다. 1418년 충녕대군(忠寧大君:世宗)이 세자로 책봉되자 이를 반대하여 서인(庶人)이 되고 교하(交河)로 유배, 다시 남원(南原)에 이배(移配)되었으나 1422년(세종 4) 풀려나와 좌참찬에 기용되고, 강원도 관찰사·예조판서·우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1427년 좌의정에 올랐고 1430년 투옥된 태석균(太石鈞)의 감형을 사사로이 사헌부에 부탁한 일로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으나, 이듬해 복직, 영의정에 올랐다.

 

1449년 벼슬에서 물러날 때까지 18년간 영의정에 재임하면서 농사의 개량, 예법의 개정, 천첩(賤妾) 소생의 천역(賤役) 면제 등 업적을 남겨 세종의 가장 신임받는 재상으로 명성이 높았다. 또한, 인품이 원만하고 청렴하여 모든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으며, 시문에도 뛰어나 몇 수의 시조 작품도 전해진다.

 

파주의 방촌영당(厖村影堂), 상주(尙州)의 옥동서원(玉洞書院) 등에 제향되고, 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방촌집(厖村集)>이 있다.

 

 ▲ 사각의 정자 반구정  ⓒ 2007 한국의산천

 

황희 정승의 일화 (황희 정승의 일화는 기념관에 전시되어있습니다)  

황희의 사람됨을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다. 어느 여름날, 시골길을 지나던 황희는 잠시 그늘에 앉아 쉬고 있었다. 때마침 한 농부가 누런 소와 검은 소 두마리를 데리고 일을 하고 있었다. 이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황희는 뙤약볕에서 고생하는 농부가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 잠시 쉬었다 하라며 말을 건냈다.

 

농부와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던 중 황희는 별 뜻 없이 이렇게 물었다. "두마리의 소 중에서 어떤 놈이 더 일을 잘 하오?" 그러자 농부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황희의 옷소매를 끌고 밭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데리고 가는 것이었다. 황희는 뜬금없는 농부의 태도에 어리둥절했지만, 무슨 곡절이 있겠거니 하고 농부를 따라갔다. 밭에서 다소 떨어진 곳에 이르자, 농부는 황희의 귀에다 대고 작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누런 놈은 일도 곧잘 하고 시키는 대로 말도 고분고분 잘 듣는데, 검은 놈은 꾀가 많아 다루기가 힘들답니다." 

 

무슨 중요한 얘기를 하려는 줄 알고 따라온 황희는 어이가 없어 다시 물었다. "아니 노인장, 그게 무슨 비밀이라고 된다고 일부러 여기까지 와서 말씀하시오?" 

 

그러자 농부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무리 미물이라 할지라도 저를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을 안답니다. 내가 만일 아까 그 놈들 근처에서 이 얘기를 했다면 그 놈들이 다 들었을 것 아닙니까? 어떻게 사람의 말을 짐승이 알아들으랴 싶지만, 나는 내 집일을 애써 해 주는 그 놈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소." 

 

농부의 사려 깊은 행동에 감동을 받은 황희는 그의 일생 동안 다른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말 한마디, 행동 하나도 조심했다고 한다. 그냥 가볍게 흘려 버릴 수도 있는 이야기를 인생의 근본으로 삼은 것이다.

 

또한 황희는 공적인 일에는 엄격했으나 개인적으로는 온후하고 자상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와 관련된 일화로, 하루는 어린 종 둘이 다투다가 일을 마치고 돌아오던 황희와 마주쳤다. 민망해진 그 중 하나가 상대방이 잘못해서 싸움이 벌어졌다고 일렀다. 어린 종에게서 자초지종을 다 들은 황희는, "그래, 네 말이 옳구나." 하고 다독거려 주었다. 그러자 다른 종은 주인이 상대의 편을 드는 줄 알고 자신의 변명을 늘어놓았다.  

 

황희는 그 말을 다 듣고 나서, "그렇다면 네 말도 맞구나." 하고 둘을 타일러 돌려 보냈다. 이때 방 안에서 지켜보고 있던 그의 부인이 타박하기를, "아니, 대감께서는 이 놈도 옳다, 저 놈도 옳다 하시니 어찌 그러십니까? 옳고 그름을 확실히 밝혀 주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한 나라의 정승께서 그리도 사리가 분명치 않으시면 어떻게 합니까?" 하고 말했다.   

 

그러자 황희는 "맞소. 부인 말씀도 참으로 맞소." 하고 대답하여, 그만 부인도 어이가 없어 웃고 말았다고 한다.  집에서 부리는 어린 종이라 할지라도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는 황희의 세심한 배려를 엿볼 수 있는 일화라 할 수 있다.

또한 이것은 젊은 시절 깨달은 삶의 자세를 일생 동안 잃지 않고 지켜온 한 인간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외에도 황희의 타인에 대한 배려나 인간적인 면모에 대하여 알 수 있는 일화는 일일이 거론하기 힘들 정도로 많다.  

 

▲ 육각의 정자 앙지대 ⓒ 2007 한국의산천

 

느 날 황희는 집에 온 손님을 맞아 조촐하게 술상을 차려 놓고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어린 아이 몇명이 방문을 열고 들어와서 "할아버지, 할아버지." 하며 황희의 상투와 수염을 잡아당기고 상 위에 놓인 음식까지 마구 집어 먹는 게 아닌가! 그러나 황희는 아이들을 나무라지 않고, "아이고, 이놈들 보게. 오냐, 오냐." 하면서, "손님이 계시니 너희들은 나가 놀아라." 하고 아이들을 달래서 내보내고는 별일 없었다는 듯이 태연하게 대화를 계속했다.  

 

손님은 내심, '정승 집에서 아이들을 버릇없이 키우고 있구나.' 하고 생각하며, "대감께서는 손자들을 굉장히 귀여워하시나 봅니다." 하고 짐짓 비꼬는 투로 말했다. 그러자 황희는 "아까 그 놈들은 우리 집 노비의 자식들인데 나를 아주 잘 따른다네. 결례가 되었다면 미안하이." 하고 대답했다.   

 

황희의 말을 들은 손님은 종의 자식에게까지 친부모처럼 자상한 그의 모습에 진심으로 감복했다고 한다.

하루는 당대 명필 중의 한사람인 이석형(李石亨)이 황희의 집에 들러 담소를 나누고 있었는데, 황희가 책 한권을 꺼내 놓고 새로 표지를 만들었으니 제목을 써 달라고 부탁했다. 이석형은 몇번 거절을 하다가 황희가 하도 정중하게 부탁하는지라 더 이상 거절하지 못하고 제목을 써 주었다. 

그런데 조금 후에 한 아이가 방 안으로 들어와 저 혼자 놀다가 방금 이석형이 제목을 써 준 책 위에 오줌을 싸고 말았다. 이것을 본 황희는 노여운 기색도 없이 아랫사람을 부르지도 않고, 직접 방바닥과 책에 묻은 오줌을 닦았다. 그러고는 아이의 옷을 벗겨 둘둘 말아 아이의 손에 쥐어 주면서, "괜찮아, 괜찮아. 이제 엄마한테 가서 옷을 갈아 입혀 달라고 하거라." 하며 우는 아이를 달래서 내보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이석형이 오히려 안절부절못하면서 어찌할 줄을 모르자, 황희는 미안한 개식으로 이석형에게 사과를 하였다. 그런데 조금 있으니 방문 밖에서 여종이 황망한 목소리로 죄를 청하는 것이 아닌가!

황희의 방에서 오줌을 싼 아이는 제 어미가 일하는 틈에 그 방으로 들어온 종의 아이였던 것이다.

황희는 사죄하는 여종에게 오히려, "철없는 아이가 한 일이니 신경 쓰지 말아라." 하고 따뜻한 말투로 위로해 주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이석형은 황희에 대한 존경심이 더욱 깊어져 그의 앞에서는 항상 머리를 숙이고 예를 다했다고 한다. 

 

 

▲ 반구정에서 바라 본 앙지대 ⓒ 2007 한국의산천

 

실 황희는 천인들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겨 천역(賤役)을 가볍게 해 주려는 방안에 골몰하였고, 면천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고자 노력하기도 했다. 이렇듯 귀천을 따지지 않고 타인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그 시대의 일반적인 양반들의 모습과는 분명히 다르다고 할 수 있다.

 

황희는 당시 노비 출신 중에서도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있으면 관직에 발탁하기도 했는데, 조선이 업격한 신분제 사회였음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파격적인 인사였던 것이다. 실제로 황희는 자기 집에서 부리던 어린 노비가 학문에 자질을 보이자, 그 아이를 면천시키고 경제적 도움까지 주면서 이르기를, "너는 열심히 공부하면 나라의 기둥이 될 수 있으니, 너를 알아보지 못하는 곳으로 가서 학문을 연마하여라. 그리고 지금부터 너와 나는 서로 알지 못하는 사이니, 나중에 혹 만나게 되더라도 절대 아는 체를 하면 아니 된다." 하고 다짐을 하여 내보냈다. 

 

십 수년 후, 그 노비는 과거를 보러 나왔다가 마침 그곳에 시험관으로 나와 있던 황희와 만났다. 반갑고 고마운 마음에서 황희에게 자신을 밝히고 인사를 하려고 하자, 그를 알아본 황희는 시험관에게 잘 보이려고 인사를 하는 것은 받아 줄 수 없다면서 그를 꾸짖고 뿌리쳐 버렸다. 이것은 앞길이 창창한 젊은이의 10년 공부가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한 황희의 깊은 뜻이었던 것이다.

 

다행히 노비 출신의 젊은 선비는 시험에 급제하였으며, 황희는 그를 다로 불러내어 "다시는 나를 아는 체하지 말 것이며, 나도 너를 잊었노라. 그러니 앞으로도 더욱 열심히 정진하여 오로지 나라를 위한 일에 노력을 다하라." 하고 거듭 당부한 후 돌려보냈다고 한다.

 

적으로는 항상 타인을 배려하는 자세로 일과했던 황희였지만 공적인 일에서는 엄격하기가 서릿발 같았다.

그에 대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대호(大虎)'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김종서(金宗瑞)가 북방에 6진을 개척한 공로로 병조판서에 오르자, 어느 날 황희는 김종서를 축하하러 병조에 들었다. 그런데 김종서는 황희를 보고도 그냥 자리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있는 게 아닌가! 

김종서가 미처 자신을 못 본 것인지 보고도 못 본 체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으나, 큰 공을 세우고 돌아온 그의 태도에는 자만하는 빛이 역력했다. 

 

이에 황희는 김종서를 수행하던 병조의 관리들에게 "너희 판서께서 앉아 계신 의자의 다리가 잘못된 것 같다. 한쪽이 기울어졌으니 속히 고쳐 드리도록 해라." 하고 큰 소리로 꾸짖었다.

이 말을 들은 김종서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황급히 일어나서는 황희의 발 앞에 엎드려 "소인이 미처 대감께서 오시는 것을 보지 못하고 큰 실수를 하였습니다. 부디 용서를 바라옵니다." 하고 사죄하였다.  

 

사실 김종서보다 먼저 북방을 살피고 돌아온 사람은 칠순에 가까운 황희였으며 세종에게 6진 개척의 적임자로 김종서를 추천한 것도 바로 황희였다.

황희는 김종서가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할 그릇임을 알고 그를 중용하도록 건의하였으나, 김종서의 성격이 다소 거칠고 자신감이 지나친 것을 경계하기 위해 한바탕 혼을 내 준 것이다.

 

김종서는 훗날 이때의 일에 대하여, "내가 한창 북방을 경영할 때는 오랑캐의 화살이 코앞에 날아와도 두렵지 않았는데, 영상(領相)이 큰소리로 꾸짖었을 때에는 오금이 저리고 등에서 진땀이 다 흘렀다." 하고 회고하였다 한다.

 

▲ 앙지대에서 바라 본 반구정 ⓒ 2007 한국의산천  

 

조선시대의 4대 명재상의 한 사람으로 정승의 지위에 24년간, 그 중 영의정에 18년간 있으면서 농사의 개량과 예법의 개정, 서얼의 천역(賤役) 면제 등 치적을 쌓았으며, 소신이 굳으면서도 원만하고 청렴하여 청백리에 뽑히는 등 숱한 일화를 남겼다.


세종을 보필하며 명정승으로 이름을 떨친 황희는 서얼(庶孼·첩의 자손) 출신에 세종의 왕위 등극을 반대한 인물이었다. 세종은 탄핵 상소가 끊이지 않은 황희를 감쌌고, 황희는 탁월한 사태파악 및 인재 발굴 능력과 함께 국왕과 신료 사이에서 저울추 같은 중용의 정치로 세종에게 보답했다.

 

▲ 앙지대에서 바라 본 임진강과 북녘 땅 ⓒ 2007 한국의산천

 

임진 나루를 건너면 옛 장단 도호부인 장단에 이른다. 장단을 지나서 40리를 가면 고려의 도읍지 였던 개성이 나온다.

개성은 개성인삼과 개성상인의 본고장이다. 남북으로 나뉜지 58년만에 남북한 합작 개성공단이 만들어지고 있다.

 

▲ 고운 모래로 가득한 임진강.ⓒ 2007 한국의산천

 

 ▲ 임진강 너머 북녁을 바라 보는 연인들...ⓒ 2007 한국의산천

 

▲ 반구정 ⓒ 2007 한국의산천

 

▲ 반구정을 답사중인 가족 모습 ⓒ 2007 한국의산천

 

▲ 청정문을 들어서면 넓은 화단과 고택이 펼쳐진다.ⓒ 2007 한국의산천

 

▲ 오월의 햇살과 신록이 시원하게 불어오는 강바람에 춤을 추고 있다.ⓒ 2007 한국의산천

 

 

▲ 왕복 8차선의 자유로 ⓒ 2007 한국의산천

넓은 자유로를 통하여 파주, 문산지역을 잘 다녀왔습니다.   

 

반구정(황희) 앙지대>>> https://koreasan.tistory.com/11502735

파산서원, 경현단(景賢壇) >>> https://koreasan.tistory.com/11502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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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산성 권율장군 >>> https://koreasan.tistory.com/11491148

 

지족불욕(知足不辱)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지지불태(知止不殆)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가이장구(可以長久) 오래도록 편안할 것이다.  - 노자 도덕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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