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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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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운서원 (紫雲書院)

by 한국의산천 2007. 5. 13.

자운서원 (紫雲書院)    답사 2007년 5월 13일(일요일). [한국의산천]

행주산성 - 중남미 문화원 - 최영장군묘 - 연산군시대 금표비 - 용미리 석불 - 윤관장군묘 - 자운서원 - 파산서원 - 퍄평윤씨 용연 - 화석정 - 반구정   

 

조선시대 서울의 서북쪽인 파주와 고양에는 이이,성혼,송익필,정철 등과 같은 서인(西人: 아래에 별도로 설명)의 수장들이 살았다. 이이는 파벌을 도모한 적은 없지만 서인들로 부터 종주(宗主)로 모셔진 인물이다.

 

그는 파평 율곡리 출신이다. 과거를 아홉번이나 연거푸 장원한 천재적인 이이선생은 외가인 강릉에서 태어나 6살까지 그곳에서 지내다가 , 그 후 아버지의 고향인 이 동네로 옮겨와 성장했다.   

이곳 파평 율곡리는 밤나무가 많은 동네인데 그 동네 이름을 따서 이이는 율곡(栗: 밤나무 율, 谷: 골짜기 곡)이라는 호를 붙였다. 

 

▲ 자운서원 ⓒ 2007 한국의산천

 

자운서원 (紫雲書院)  소재지;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  산5-1번지시대  조선
 
1973년 7월 10일 경기도기념물 제45호로 지정되었다. 1615년(광해군 7년) 지방 유림의 공의로 율곡 이이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하여 창건되어 1650년(효종 원년) 자운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1713년(숙종 39)  김장생, 박세채를 추가로 배향하여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을 담당하다가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1969년 지방 유림의 기금과 국비보조로 복원하여 1975년과 1976년에 보수하였다. 높은 대지 위에 사당을 앉히고 사괴석 담장을 둘러 삼문 앞 계단으로 오르도록 설계하였다.

 

사당은 6칸으로 익공계(翼工系) 형식 팔작지붕이며 이이 좌우에 김장생과 박세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그외 신문(神門)과 동서 협문은 양측면을 박공으로 마감한 솟을대문 모양이며, 묘정비가 세워져 있다. 좌우 능선에 이이와 부모의 묘소가 있다. 매년 8월 중정에 향사를 지낸다.

 

▲ 안내도ⓒ 2007 한국의산천

 

▲ 율곡 이이 신도비 ⓒ 2007 한국의산천 

 

이 신도비는 선생이 돌아가신지 47년이 지난 1631년 (인조9년) 4월에 건립된 것으로 이항복 선생이 글을 짓고 신익성 선생이 글씨를 썼으며 전액은 김상룡이 썼다.

비의 재질은 대리석이며 앞뒤면에 걸쳐 글씨를 썼으며 규모는 높이 233 cm 너비 109cm 두께 39cm이다.  

 

  ▲ 이이 선생 신도비 ⓒ 2007 한국의산천

 

향토유적 제 6호 이 신도비는 조산 중기의 대학자이며 경세가인 율곡 이이1536~1584) 선생의 일대기를 기록한 비이다.

선생의 아명은 현룡(見龍) 자는 숙헌(淑獻),호는 율곡(栗谷),석담,우재. 본관은 덕수로서 아버지 이원수와 어머니 신사임당 사이에서 출생했다.   

1564년 (명종14년) 생원시 식년문과에 장원한 이후 호조,예조,이조좌랑,지평 등을 거쳐 부교리,청주목사,직제학,대사간,대제학,형조판서,우참찬,이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선생은 조선 유학계에 이황과 쌍벽을 이루는 대표적 학자로 기호학파 (※ 아래에 별도로 설명합니다)를 형성했고 특히 학문을 민생문제에 직결시키는 경세적인 입장을 취했으며 당쟁의 조정,10만대군의 양성 및 대동법, 사창(社倉) 실시등에 노력하였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며 문묘와 선조묘정에 배향되었고 자운서원외 전국 20여개 서원,사우에 배향되었다.  

 

 

▲ 신도비 안내문ⓒ 2007 한국의산천 

 

파주와 고양은 서인(西人)들의 땅이다. 서인들은 대부분 그곳에서 살다가 죽어서도 그곳에서 묻혔다.

그들을 기호학파라고도 하는데, 기호(畿湖)란 황해도 아랫부분에서부터 서울 경기 충청남도 북쪽까지를 말한다.  

동인과 서인 파벌의 형성은?

벼슬아치들이 동과 서로 갈라진 때는 조선 14대 왕인 선조집정기의 일이다. 당시에 을해년(乙亥年)에 벌어진 일이라 하여 을해당론이라고 부르는 사건이 있었다. 요직인 이조정랑 자리를 놓고 심의겸과 김효원이라는 인물이 다퉜다. 

 

이조전랑은 이조와 병조의 정랑과 좌랑을 합하여 부르던 말로서 내외 문, 무관을 천거하는 임무를 맡아 보았다. 이조정랑은 5품 당하관 벼슬에 지나지 않지만 붕당정치가 여론을 모아 당의 입장을 결정하는 언론 활동 중심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이조 전랑의 자리는 매우 중요했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 붕당 정치가 격화되면서 이조 전랑은 중하급 관원들에 대한 인사권과 자기 후임자를 추천할 수 있는 권리를 이용하여 막강한 전횡을 할수있는 하였던 자리이다. 

 

우여곡절 끝에 이 자리를 김효원이 맡았지만 김효원의 뒤를 이어 천거된 인물이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이었다. 이에 김효원이 반대를 하고 나섰고 서로의 싸움은 감정이 섞이고 비난을 퍼부으며 급기야는 패가 갈려 파벌을 이루게 된다.  

 

동인 (東人)김효원은 서울의 건천동에 살았다 그래서 김효원 을 지지하던 김우옹, 류성룡, 이산해, 정유길,정지연,우성전,이발, 그리고 허균의 아바지 허엽등을 동인(東人)이라 부른다.  

서인(西人) 심의겸은 서쪽인 정릉방에 살았기에 그를 지지하던 빅순, 김계휘, 정철, 윤두수,구사맹, 홍성민,신응시 등은 서인이라 불렀다.  

 

 

▲ 자운서원 ⓒ 2007 한국의산천  

 

율곡 이이는 벼슬을 하다가 49살에 병이 난지 이틀만에 타계하였기에 이황처럼 후학을 양성할 시간이 넉넉치 못했다. 그래서 이이의 자운서원은 이황의 도산서원처럼 번성하지는 못했다.

 

▲ 자운서원 안의 연못 ⓒ 2007 한국의산천

 

▲ 율곡선생내외 묘와 가족묘로 들어가는 가족묘 입구의 문 ⓒ 2007 한국의산천

 

▲ 묘역 배치도 ⓒ 2007 한국의산천

 

▲ 가족 묘역 ⓒ 2007 한국의산천

 

▲ 푸름름으로 가득한 자운서원 ⓒ 2007 한국의산천

 

▲ 자운서원의 신록 ⓒ 2007 한국의산천

 

▲ 연못 ⓒ 2007 한국의산천 

 

▲ 잔디 광장 ⓒ 2007 한국의산천

 

▲ 율곡 기념관내에있는 율곡 이이선생 자화상 ⓒ 2007 한국의산천

 

 

▲ 신사임당 자화상 ⓒ 2007 한국의산천 

 

신사임당 1504(연산군 10)∼1551(명종 6).
조선시대 시· 글씨· 그림에 능한 대표적인 여류 예술가이자 현모양처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으며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에 묘가 있다. 조선시대의 대표적 학자이며 경세가인 이이(李珥)의 어머니이다.
 
사임당은 당호이며 그 외에 시임당(媤任堂), 임사재(妊思齋) 라고 하였다. 당호의 뜻은 중국 고대 주나라의 문왕의 어머니인 태임(太任)을 본받는다는 것으로서, 태임을 최고의 여성상으로 꼽았음을 알 수 있다.
 
본관은 평산(平山). 아버지는 명화(命和)이며, 어머니는 용인이씨(龍仁李氏)로 사온(思溫)의 딸이다. 외가인 강릉 북평촌(北坪村)에서 태어나 성장하였으며 19세에 덕수이씨(德水李氏)인 원수(元秀)와 결혼하였다.  


결혼 몇달 후 아버지가 죽자 친정에서 3년 상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왔다. 이후 시가인 선조때부터 터전인 파주 율곡리에서 기거하기도 하였으며 때때로 친정인 강릉에 가서 홀로 사는 어머니의 말동무를 해드렷으며 이런 와중에 셋째 아들인 율곡 선생을 강릉에서 낳았다.  
 
38세에 시집살림을 주관하기 위해 아주 서울로 떠나왔으며, 수진방(壽進坊:지금의 수송동(壽松洞)과 청진동(淸進洞))에서 살다가 48세에 삼청동으로 이사하였다. 이해 여름 남편이 수운판관 (水運判官)이 되어 아들들과 함께 평안도에 갔을 때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 기념관 내부 ⓒ 2007 한국의산천

 

신사임당 그의 재능은 7세에 안견 (安堅)의 그림을 스스로 사숙(私淑)하였던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 그녀는 통찰력과 판단력이 뛰어나고 예민한 감수성을 지녀 예술가로서 대성할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거문고 타는 소리를 듣고 감회가 일어나 눈물을 지었다든지 또는 강릉의 친정어머니를 생각하며 눈물로 밤을 지새운 것 등은 그녀의 섬세한 감정이 남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녀의 그림, 글씨, 시는 매우 섬세하고 아름다운데, 그림은 풀벌레,  포도,  화조,  어죽(魚竹),  매화,  난초,  산수 등이 주된 화제(畵題)이다. 마치 생동하는 듯한 섬세한 사실화여서 풀벌레 그림을 마당에 내놓아 여름 볕에 말리려 하자, 닭이 와서 살아 있는 풀벌레인 줄 알고 쪼아 종이가 뚫어질 뻔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녀의 그림에 후세의 시인, 학자들이 발문을 붙였는데 한결같이 절찬하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림으로 채색화· 묵화 등 약 40폭 정도가 전해지고 있는데 아직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그림도 수십 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글씨로는 초서 여섯폭과 해서 한폭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 몇 조각의 글씨에서 그녀의 고상한 정신과 기백을 볼 수 있다. 

 

1868년(고종 5) 강릉부사로 간 윤종의(尹宗儀)는 사임당의 글씨를 영원히 후세에 남기고자 그 글씨를 판각하여 오죽헌에 보관하면서 발문을 적었는데, 그는 거기서 사임당의 글씨를 “정성들여 그은 획이 그윽하고 고상하고 정결하고 고요하여 부인께서 더욱더 저 태임의 덕을 본뜬 것임을 알 수 있다.”고 격찬하였다. 

 

 

▲ 기념관 내부 ⓒ 2007 한국의산천

 

사임당의 자녀들 중 그의 훈도와 감화를 제일 많이 받은 사람은 셋째 아들 이(珥)이다. 이이는 그의 어머니 사임당의 행장기를 저술하였는데, 그는 여기에서 사임당의 예술적 재능, 우아한 천품, 정결한 지조, 순효(純孝)한 성품 등을 소상히 밝혔다. 

사임당은 실로 현모로서 아들 이이는 백대의 스승으로, 아들 이우(李瑀)와 큰딸 이매창(李梅窓)은 자신의 재주를 계승한 예술가로 키웠다. 작품으로는 〈자리도 紫鯉圖〉, 〈산수도 山水圖〉, 〈초충도 草蟲圖〉, 〈노안도 蘆雁圖〉, 〈연로도 蓮鷺圖〉, 〈요안조압도 蓼岸鳥鴨圖〉와 6폭 초서병풍 등이 있다

 

 

▲ 기념관 내부 ⓒ 2007 한국의산천

 

 

▲ 기념관을 둘러보는 학생들..ⓒ 2007 한국의산천

 

 

▲ 자운서원의 정문인 자운문 ⓒ 2007 한국의산천  

 

▲ 다음 답사지인 파산서원으로 가는 길에 만난 멋진 자전거 팀 ⓒ 2007 한국의산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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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족불욕(知足不辱)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지지불태(知止不殆)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가이장구(可以長久) 오래도록 편안할 것이다.  - 노자 도덕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