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장군 묘역과 연산군 시대 금표비 둘러보기
▲ 아침햇살 ⓒ 2007 한국의산천
상쾌하고 맑은 공기, 길가에서 푸드덕 거리고 날아가는 꿩, 새들의 지저귐 그리고 아침 햇살이 나뭇가지를 간지럽히고 있다.
연산군시대 금표비 (燕山君時代禁標碑)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大慈洞)에 있는 조선시대의 석비.
지정번호 경기문화재자료 제88호
소재지 경기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10-2
시대 조선시대
크기 높이 147㎝
1995년 8월 7일 경기도문화재자료 제88호로 지정되었다.
금표비는 대자동 간촌(間村) 마을에 있는 금천군(錦川君)의 묘 입구에 자리잡고 있으며 높이 147㎝, 가로 55㎝, 두께 23㎝이다. 조선 제10대 왕인 연산군(재위 1494∼1506)이 자신의 유흥지에 일반인의 출입을 금하기 위해 세운 비이다.
이 석비는 금천군 이변의 묘역을 보수할 때 출토되었는데, 상단과 하단의 왼쪽 일부가 떨어져 있으며, 땅속에 오랫동안 묻혀 있어서 황토빛이 뚜렷이 남아 있다.
비 앞면에는 '금표내범입자 논기훼제서율처참(禁標內犯入者 論棄毁制書律處斬)'이라고 새겨져 있는데, 이 금표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은 왕명을 어긴 것으로 보아 처벌한다는 내용의 비문이다.
1504년(연산군 10) 고양군이 왕의 유흥지가 되었다가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다시 고양군으로 복귀되었는데, 비문의 내용으로 보아 이 금표비는 연산군 때 유흥지를 만들면서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금표 구역은 지금의 경기도 고양시, 파주시, 양주군, 포천군, 남양주시, 광주군, 구리시, 김포시 등이었다.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에는 1504∼1506년에 이르는 금표의 내용이 자세히 수록되어 있다.
이 비석은 금석문으로 희귀 할뿐 아니라 문헌의 사실을 고증해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연산군은 1494년 왕위에 오른 뒤 성균관 유생을 내쫓고 선종의 본산인 흥천사도 마긋간으로 바꾸었으며 한글 사용을 엄단하는 등의 일을 저질렀다. 이러한 일 때문에 중종반정으로 임금의 자리에서 쫓겨나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되었다가 그해 세상을 떠났다.
최영장군 묘역 가는 길
중남미 문화원을 나와서 이정표를 보고 마을길을 접어들어가니 좁은 길에 주차장이 없었다. 겨우 주차를 시키고 약 1km 정도 걷기좋은 산길로 걸어들어간다.
▲ 최영장군 묘역 가는 산길.ⓒ 2007 한국의산천
綠耳霜蹄(녹이상제) 살지게 먹여 시냇물에 싯겨고,
龍泉雪鍔(용천설악) 들게 갈아 두러메고,
丈夫(장부)의 爲國忠節(위국충절)을 세워 볼까 하노라.
최영은 공민왕 때 홍건적으로 물리치고, 우왕 때 왜구를 물리치는 등 빛나는 공로를 세웠고, 명나라가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려고 할 때 최영은 팔도도통사로 정명군(征明軍)을 일으키는 등 고려 왕조의 최후를 지키는 자랑스런 기상을 보여 주었다.
준마(綠耳霜蹄)와 보검(龍泉雪鍔)을 소재로 해서 조국을 위해 용감하게 싸우겠다는 무인의 호기와 변함없이 충성을 다하겠다는 장군의 기상이 담긴 호기가(豪氣歌)이다. 하루에 천리나 달린다는 준마를 타고, 용천검을 갖춘 대장부의 늠름한 기상과 무인으로서의 기개는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도 나타난다.
처형을 당하는 순간에도 '내가 사는 동안 한 번이라도 내 욕심을 채우려 하였다면 내 무덤에 풀이 날 것이고, 그렇지 않았다면 풀이 나지 않을 것이오.'라고 할 정도로 꿋꿋했으며, 장군이 죽은 뒤 정말 그의 무덤에는 풀이 한 포기도 나지 않아 그 무덤을 가리켜 적분(赤墳: 붉은 무덤)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 아침 햇살 가득 맑은 공기와 새소리 가득한 호젓한 산길.ⓒ 2007 한국의산천
▲ 최영장군 묘역 가는 산길.ⓒ 2007 한국의산천
▲ 최영장군 묘역 가는 산길.ⓒ 2007 한국의산천
▲ 최영장군 묘역 ⓒ 2007 한국의산천
최영(崔瑩 :1316~1388) 장군
고려의 명장, 충신. 1359년 홍건적이 서경을 함락하자 이방실 등과 함께 이를 물리쳤다.
1361년에도 홍건적이 창궐하여 개경까지 점령하자 이를 격퇴하여 전리판서에 올랐다.
이후에도 흥왕상의 변, 제주 호목의 난을 진압했으며 1376년 왜구가 삼남지방을 휩쓸자 홍산에서 적을 대파했다.
1388년 명나라의 철령위 설치로 요동정벌을 계획하고 출정했으나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좌절되었다.
▲ 최영장군 묘역 ⓒ 2007 한국의산천
최영장군은 양광도도순문사(楊廣道都巡問使) 휘하에서 수차 왜구를 토벌, 우달치(于達赤:司門人)가 되었으며 1352년(공민왕 1) 조일신(趙日新)의 난을 평정하고, 호군(護軍)에 올랐다.
1354년 대호군(大護軍) 때 원(元)나라의 요청으로 중국에서 장사성(張士誠)의 난군을 토벌하고 귀국, 서북면병마부사(西北面兵馬副使)가 되어 원나라에 속했던 압록강 서쪽의 8참(站)을 수복했다.
1358년 양광·전라도 왜적체복사(楊廣全羅道倭賊體覆使) 때 오예포(吾乂浦)에 침입한 왜선 400여 척을 격파했으며 1359년 4만의 홍건적(紅巾賊)이 서경(西京:平壤)을 함락하자 1360년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 이방실(李芳實) 등과 함께 이를 물리치고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 등을 지냈다.
1361년 홍건적이 창궐, 개경(開京)까지 점령하자 안우(安祐)·이방실 등과 함께 이를 격퇴, 훈(勳) 1등에 도형벽상공신(圖形壁上功臣)에 책록되고 전리판서(典理判書)에 올랐다.
1363년 흥왕사(興王寺)의 변(金鏞의 난)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 진충분의좌명공신(盡忠奮義佐命功臣) 1등이 되고 찬성사(贊成事)에 이르렀다. 1364년 원나라에 있던 최유(崔濡)가 덕흥군(德興君)을 왕으로 추대, 군사 1만으로 쳐들어오자 서북면도순위사(西北面都巡慰使)로서 의주(義州)에서 섬멸했으며, 이어 박백야(朴伯也)가 연주(延州)에 침입하자 부하 장수를 시켜 격퇴했다.
1365년 강화(江華)에서 왜구와 싸우던 중, 신돈(辛旽)의 모함으로 계림윤(鷄林尹)에 좌천되고 훈작(勳爵)도 삭탈당하고 유배되었다가 1371년 신돈이 처형되자 복직,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등을 지냈다.
1374년 제주(濟州)의 이른바 호목(胡牧)의 난에는 양광·전라·경상도 도통사로 난을 평정,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올랐다. 1376년(우왕 2) 왜구가 삼남지방을 휩쓸고 원수(元帥) 박원계(朴元桂)가 참패당하자, 최영이 홍산(鴻山)에서 적을 대파, 철원부원군(鐵原府院君)에 봉해졌다.
1377년 서강(西江)에, 1378년 승천부에 쳐들어온 왜구를 이성계 등과 섬멸, 안사공신(安社公臣)의 호를 받았으며, 1380년 해도도통사(海道都統使)로서 왜구 때문에 서울을 철원(鐵原)으로 옮기려던 계획을 철회시켰다.
1381년 영삼사사(領三司事) 등을 지내고 벼슬을 사퇴했다가 88년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이 되었는데, 이 때 명나라가 철령위(鐵嶺衛)를 설치, 북변 일대를 요동(遼東)에 귀속시키려 하자 요동정벌을 계획,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가 되어 정벌군을 이끌고 출정했으나, 이성계 등의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으로 요동정벌이 좌절되었다.
이성계군이 개성에 난입하자 이를 맞아 싸우다가 체포되어 고봉(高峰:高陽) 등지에 유배되었다가 개경(開京)에서 참형(斬刑)되었다.
▲ 최영장군 묘역.ⓒ 2007 한국의산천
최영 장군은 고려말 장군으로 100전 100승 우리나라 최고 장군 중 한분이다.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말로도 유명했던 최영 장군은 나라에 대한 충심도 대단한 사람이었다.
결국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인해 귀향을 가고 죽음을 당하지만 인품과 청렴함도 대단한 분이었다. 요즘도 무속인들이 가장 많이 모신다는 최영 장군이다.
아침햇살이 숲사이로 이리저리 유희를 즐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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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족불욕(知足不辱)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지지불태(知止不殆)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가이장구(可以長久) 오래도록 편안할 것이다. - 노자 도덕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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