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석정 (花石亭)
답사 2007년 5월 13일(일요일). [한국의산천]
화석정
자운서원에서 약 8km 정도 떨어진 임진강이 내려보이는 산위에 위치하고 있다. 정자 뒤로는 임진강이 유유히 흐르며 임진강의 동쪽부터 서쪽 강의 끝까지 한눈에 내려보이는 경치 좋은 곳이다.
▲ 남과 북을 가로지르며 흐르는 임진강 ⓒ 2007 한국의산천
▲ 율곡리 임진강변에 위치한 조선시대의 정자. 화석정 ⓒ 2007 한국의산천
화석정 경기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 산100-1. 경기도유형문화재 제61호. 시대 조선시대
크기 정면 3칸, 측면 2칸
분류 누각
이 정자는 율곡이 작시, 연구와 묵상을 하던 곳이다.
1974년 9월 26일 경기도유형문화재 제61호로 지정되었다. 임진강가 벼랑 위에 자리잡고 있는 정자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겹처마의 초익공형태로 조선시대 양식을 따른 건물이다.
원래 고려 말 대유학자인 길재(吉再의 유지(遺址)였던 자리라고 전해지나 자세한 문헌 기록은 없다. 그후 1443년(세종 25) 율곡 이이(李珥)의 5대 조부인 강평공 이명신이 세운 것을 1478년(성종 9) 율곡의 증조부 이의석이 보수하고 몽암(夢庵) 이숙함이 화석정이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이숙함의 정자에 대한 기록에 의하면 당나라때 재상 이덕유의 별장인 평천장의 기문을 따서 정자 이름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 후 이이가 다시 중수하여 여가가 날 때마다 이곳을 찾았고 관직을 물러난 후에는 이곳에서 제자들과 함께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당시 그의 학문에 반한 중국의 칙사 황홍헌이 이곳을 찾아와 시를 읊고 자연을 즐겼다는 이야기도 있다. 현재의 정자는 1966년 경기도 파주시 유림들이 다시 복원하고 1973년 정부가 실시한 율곡 선생 및 신사임당 유적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단청되고 주위도 정화되었다.
▲ 율곡 선생의 고향 마을에 있는 화석정 ⓒ 2007 한국의산천
화석정은 풍광좋은 임진강을 내려보고 있으며, 임진왜란때에 선조임금은 칠흙같은 어둠속에서 이 화석정에 불을 놓아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었다고 한다. 그 뒤 80년만에 복원했으나 한국전쟁때 소실되어 파주 유림들이 다시 지었다.
▲ 박정희 前 대통령의 글씨인 "화석정" 현판 ⓒ 2007 한국의산천
화석정 누각의 정면에는 前 대통령인 박정희가 쓴 현판이 걸려 있다.
▲ 화석정詩 ⓒ 2007 한국의산천
화석정에는 율곡이 이른바 ‘八歲賦詩’(팔세부시:8살때 지은 시)를 지은 곳이라는 만큼이나 유명한 일화가 전한다.
율곡은 花石亭(화석정)을 고치면서 관솔을 썼고, 이곳에서 默想(묵상)을 할 때면 항상 기름걸레로 기둥과 바닥을 닦도록 하였다. 임진왜란 8년 전, 나라가 어려울 때 열어보라는 봉서를 남기고 서거하였다. 당시엔 그 뜻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임진년(壬辰年) 4월 그믐날, 퍼붓는 비를 맞으며 선조의 몽진(蒙塵) 행렬이 임진강에 도달한다. 비바람 때문에 등불을 밝힐 수 없어 지척을 분간할 길이 없었다. 이때 도승지 이항복(李恒福)은 율곡의 유언을 떠올리며 화석정에 불을 놓는다.
관솔에 기름을 먹여두었기 때문에 억수 같은 비에도 훨훨 타올라 선조일행이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었다고 전한다. 율곡의 예지력을 보여주는 또 한편의 일화가 있다.
이항복에게 ‘슬프지 않은 울음에는 고춧가루 싼 주머니가 좋다.’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남긴 것이 8년 전.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하자 명나라에 원병을 청하는 딱한 처지에 놓였다.
이여송이 이끄는 4만 원군이 도착하였으나 그들은 싸울 의지가 없었다. 이때 접빈사로 나선 이항복은 외교 관례상 감읍(感泣)하는 표정을 지어야 할 처지였으나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 때 이항복의 뇌리에는 율곡 선생의 가르침이 전광석화처럼 스쳤다. 일부러 고춧가루를 싼 수건을 넣고 가니 저절로 눈물이 났다. 상대방의 눈에는 감격해 맞이하는 모습으로 보일 뿐이었다.
율곡의 가르침을 뒤늦게 깨달은 회한의 눈물까지 겹쳤으니 말이다. 자운서원에 있는 율곡이이 신도비는 이이 선생이 돌아가신지 47년이 지난 1631년 (인조9년) 4월에 건립된 것으로 이항복 선생이 글을 짓고 신익성 선생이 글씨를 썼으며 전액은 김상룡이 썼다.
▲ 전경이 매우 좋은 화석정 ⓒ 2007 한국의산천
율곡 이이 선생은 파평 율곡리 출신이다. 과거를 아홉번이나 연거푸 장원한 천재적인 이이선생은 외가인 강릉에서 태어나 6살까지 그곳에서 지내다가 , 그 후 아버지의 고향인 이 동네로 옮겨와 성장했다.
이곳 파평 율곡리는 밤나무가 많은 동네인데 그 동네 이름을 따서 이이는 율곡(栗: 밤나무 율, 谷: 골짜기 곡)이라는 호를 붙였다.
▲ 임진강이 흘러가는 서쪽으로도 풍광이 매우 좋다.ⓒ 2007 한국의산천
율곡 이이(1536~1584)조산 중기의 대학자이며 경세가이며 아명은 현룡(見龍) 자는 숙헌(淑獻),호는 율곡(栗谷),석담,우재. 본관은 덕수로서 아버지 이원수와 어머니 신사임당 사이에서 출생했다.
1564년 (명종14년) 생원시 식년문과에 장원한 이후 호조,예조,이조좌랑,지평 등을 거쳐 부교리,청주목사,직제학,대사간,대제학,형조판서,우참찬,이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선생은 조선 유학계에 이황과 쌍벽을 이루는 대표적 학자로 기호학파를 형성했고 특히 학문을 민생문제에 직결시키는 경세적인 입장을 취했으며 당쟁의 조정,10만대군의 양성 및 대동법, 사창(社倉) 실시등에 노력하였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며 문묘와 선조묘정에 배향되었고 자운서원외 전국 20여개 서원,사우에 배향되었다.
▲ 화석정 ⓒ 2007 한국의산천
▲ 화석정에서 바라 본 북녘땅 ⓒ 2007 한국의산천
▲ 화석정 안에서의 풍경 ⓒ 2007 한국의산천
▲ 화석정 ⓒ 2007 한국의산천
▲ 화석정 ⓒ 2007 한국의산천
▲ 화석정 ⓒ 2007 한국의산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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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족불욕(知足不辱)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지지불태(知止不殆)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가이장구(可以長久) 오래도록 편안할 것이다. - 노자 도덕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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