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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문학음악

독립문 홍예 앞에 서있는 두개의 돌기둥 영은문

by 한국의산천 2008. 3. 3.

독립문 돌기둥 앞에 세워져 있는 2개의 돌기둥의 정체는? 

[2008· 3 · 3 · 황사가 심한 월요일 · 한국의산천] 

 

서울 서대문 독립문앞에는 2개의 커다란 돌기둥이 세워져 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3학년때부터 서대문 로타리에 세워져 있는 독립문 안에 들어 가서 놀면서도 그 두개의 돌기둥이 단순히 독립문 앞에 세워 그 위상을 높이는 장식석의 일부로만 알고 지냈습니다.

 

독립문이 서있던 자리는 중국의 조사(詔使 ·사신)을 영접하는 문(영은문)이 있었고 그 영은문을 부셔버리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런데 며칠전부터 '매천야록(허경진 譯)'을 읽으며 그 두개의 기둥은 독립문과는 별개인, 영은문을 세웠던 주초석임을 사진을 보고 확실히 알았습니다. 즉 사찰의 일주문처럼 세웠던 영은문의 기둥을 바치는 돌기둥이었습니다.    

 

▲ 독립문 앞에 남아있는 영은문의 주초석 2개 (남쪽면)ⓒ 2008 한국의산천

 

우리 선조들은 부끄러운 역사의 흔적을 없애더라도 완전히 없애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부끄러운 역사도 역사이기에 그것을 보고 다시 각성하고 자주국가를 만들려는 그러한 뜻이 아닐까요?

 

인조가 삼배구고두례를 하며  청나라에 항복하고 그 굴욕적인 내용을 적은 삼전도비가 현재 송파구에 남아있듯이...  

청나라의 요청으로 어쩔 수 없이 삼전도비(아래 참고) 비문을 쓴 대제학 이경석은 "글을 배운 것이 천추의 한"이라며 피눈물을 흘렸다고 하며, 더없는 명문이나 치욕의 내용이라 세세히 읽어 보는 이가 없고, 비 앞을 지날 때는 다들 고개를 돌렸다고 한다.  

 

 

▲ 독립문 전경(북쪽면) 원래의 위치에서 약 70m 이전 현재 자리로 옮겼다 ⓒ 2008 한국의산천

 

영은문 철거와 삼전도비 훼손에 관한 문헌.

 

'매천야록' 권2 황현 著

을미년(1895·고종32년) 개국 504년 (청 광서 21년, 일본 명치 28년) 영은문을 헐고 삼전도비를 쓰러트리다.

 

영은문(迎恩門)을 허물고 삼전도비(三田渡碑)를 넘어뜨렸다. 영은문은 서울의 서대문밖 몇 리 지점에 있었는데 명나라 때에는 연조문(延詔門)이라 불렀고, 순치(順治, 청 세조의 연호) 이후에는 영은문이라 개칭했다.  중국의 사신을 맞이하는 곳이었다.

 

삼전도비는 한강 삼전도에 있었는데 정축년(1637, 인조 15) 남한산성에서 내려온 뒤에 청나라 사람들이 억지로 우리나라에 그 전공을 기록하도록 한 것으로 옛 정승 이경석(李景奭)이 그 비문을 지었는데, 이른바 '천자가 십만 군사로 동쪽을 정벌하다(天子東征十萬其師)'라는 것이다. 몽고 문자로 쓰여졌기 때문에 우리 나라 사람들 중에 그것을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에 이르러 청국과의 단절이 분명해지고 사대(事大)의 의절이 모두 폐지된 까닭에 여기에 이런 조치를 취한 것이다.

 

김가진은 김상룡의 후손으로 팔을 걷어붙이며 이렇게 말했다.

" 이제야 족히 여러 왕대에 걸쳐 당한 굴욕을 씻고 사사로운 원수도 갚게되었으니 , 개화의 이익이 어떠한가?"

 

이중화(李重華), '경성기략(京城記略)' 권4 (신문관, 1918)

동(仝) 32년 춘정월(춘정월) 서력기원(서력기원) 1895년 2월에 영은문(迎恩門)을 훼거(毁去)하다.

 

호레이스 알렌(Horace Allen), "Chronological Index(외교사연표)", (1904)

1895년 2월 북경로(Pekin Pass, 의주로) 근처에 있는 중국의 기념아치가 해체되었다. 

 

매천야록

구한말 3대 문장가 가운데 한 명인 매천(梅泉) 황현(黃玹)이 1864년(고종 1)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집정으로부터 1910년(순종 4년)까지 47 년간의 역사를 비판적 지식인의 관점에서 서술한 필사본 편년체 역사책으로 이 시기는 안으로는 개화와 척사가 갈등하면서 밖으로는 외세의 침략과 망국의 길로 접어든 시기였다. 어지러운 시대의 중심에 서 있으며 몸소 느낀 현실을 지식인의 안목으로 6권 7책을 기록한 책이다.  

 

외세의 침입과 함께 개화와 척사가 날카롭게 대립하고, 집권층은 사심으로 가득하여 부패는 극에 이르렀으며,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그 분노가 거침없이 분출하던 어지러운 시대의 한복판을 온몸으로 통과하며 민족의 존망을 걱정하는 지식인의 관점으로 동시대의 역사를 헤아렸다.

 

세도정권의 부패상,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반목, 청일전쟁,갑오개혁,동학농민운동,러일전쟁, 친일파의 매국 행적, 의병 활동 고종과 순종의 무능력, 북간도와 미국.멕시코.러시아로 이민 간 동포들의 고생과 활약 격동기 역사, 독립협회와 민권 의식, 강제적인 을사조약에서 한일합방까지 등..정국과 사회상 및 내정·외교의 중요한 사실을 거의 시대순으로 빠짐 없이 기록하였다.

 

황현 (1855~1910)

조선 말기 순국지사이며, 시인, 문장가.자는 운경.호는 매천.본관은 장수.세종조 때의 명정승 황희의 후손이다.

과거에 장원하였으나 타락한 정치현실에 회의를 품고 구례의 만수동으로 낙향,평생 관직에 나가지 않고 직필을 휘두르며 역사비평과 시작에만 전념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나서 망명을 시도했으나 실패되었다. 황현의 눈에 비친 조선은 "미치광이로 들끓는 도깨비 나라"에 불과했다. 지도층은 사심으로 가득 차 있었고 부패는 극에 달했으니, 이런 현실이 그의 눈에는 도깨비 나라의 미친 짓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의 붓은 매섭고 비장하기 그지없었다. 그러기에 그의 붓 아래에서는 온전한 사람이 없다는 말까지 나왔다.

1910년 합방 소식이 전해지자 끝내 그는 국록을 먹은 적은 없지만 망국의 책임을 홀로 걸머진 채 절명시와 유서를 남기고 자결로 생을 마감했다.  

저술로는 '매천집', '매천야록','동비기략' 등이 있다.

 

 

 

▲ 영은문(참고 황현의 매천야록에서·허경진 譯) ⓒ 2008 한국의산천 

 

현재 남아있는 기초석이 5m에 이르고 전체 높이는 11.5m의 높은 문이었다. 영은문은 두 개의 장초석(長礎石)위에 두리 기둥을 세운 1칸 규모로, 지붕에는 청기와를 얹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주초석을 남기고 영은문을 헐고 바로 그 뒤에 독립문을 세웠음을 알수있다. (뒤로 보이는 곳이 서대문형무소 자리)

 

1539년 (중종 34)년 4월 영조문(迎詔門)을 영은문(迎恩門)으로 개칭 : 명나라 사신이 머무는 모화관(慕華館) 앞의 문 이름을 명나라가 영은문으로 바꿀 것을 요구하였다.

 

영은문(迎恩門)

명(明)의 사신을 영접하던 건물인 모화루(慕華樓)를 지금의 위치인 서대문밖에 처음 세운 것은 태종(太宗)7년(1407)이다. 세종(世宗) 12년(1430)에는 모화관(慕華館)으로 개칭하고 그 앞에 홍살문(紅箭門)을 세웠다.

중종(中宗)31년(1536) 김안로의 주청으로 격이 낮은 홍살문을 헐고 청기와를 얹은 영조문(迎詔門)을 세운 것이 영은문(迎恩門)의 전신이다. 중종(中宗) 34년(1539)에 명나라의 사신으로 온 설정총(薛廷寵)이 이르기를 "사신이 올 때에는 조칙(詔勅)이나 상사(賞賜)등을 가지고 온다. 그러므로 다만 영조(迎詔)라 하는 것은 타당한 것 같지 않다"라고 말하고, '영은문(迎恩門)'이란 이름을 써서 이를 걸도록 한 것이다. 

 

중국은 조선의 처녀들까지 조공으로 바치게 강요하였고 조공으로 뽑힌 처녀들은 이곳에서 마지막으로 가족들과 이별을 했는데 부모형제들의 울부짖는 소리로 영은문 주위는 온통 울음바다가 되었다고 전합니다. 아픈 역사의 현장입니다.

 

▲ 독립문과 그 앞에 서있는 영은문 주초석 ⓒ 2008 한국의산천

역사는 반복되는 것이다. 무딘 붓이 총명을 이긴다 (鈍筆勝聰).

기록, 기록하기...

▲ 참고 문헌: 매천야록 황현지음· 허경진 譯 서해문집 刊 ⓒ 2008 한국의산천

 

황현 (黃玹 1855∼1910)

조선 말기 순국지사·시인. 전라남도 광양(光陽) 출생. 자는 운경(雲卿), 호는 매천(梅泉). 본관은 장수(長水).

1888년(고종 25) 생원회시에 장원급제하였으나 조정의 부패를 개탄하고 귀향, 시문짓기와 역사연구·경세학 공부에 열중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나서 망명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10년 국권이 피탈되자 국록을 받은적은 없으나 융희4년 8월3일 군청에서 마을로 합방령이 반포되자 그날밤 약을 먹고 절명시(絶命詩) 4편을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저서로 '매천집', '매천야록(梅泉野錄)', '동비기략(東匪紀略)' 등이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매천야록(梅泉野錄)은 1864년(고종1년)부터 1910년(순종4년)까지 47년간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하며 서술한 책으로 구한말 외세의 침략과 개화와 척사가 갈등하며 망국의 길로 접어든 시기에 그 중심에 살며, 황현의 눈에 비친 조선은 '미치광이로 들끓는 도개비나라'에 불과 했다. 지도층은 사심으로 가득차있고 부패는 극에 달했으며 강제로 체결된 을사조약과 한일합방에 이르기까지 온전한 것이 없었으니 말이다.  

 

절명시(絶命詩) 4편

 

1편

어지러운 세상 부대끼면서 흰머리가 되기까지

몇 번이나 목숨을 버리려 했지만 여태 그러지 못했구나

오늘은 참으로 어찌할 수 없게 되어

가물거리는 촛불만 푸른 하늘 비추네

 

2편 생략 ..

3편 생략.. 

 

4편

새와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렸네

무궁화 이 나라가 이젠 망해버렸네

가을 등불 아래 책덮고 지난 역사 생각해보니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 어렵기만 하구나 (허경진 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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