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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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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재연 장수와 수자기 (帥字旗)

by 한국의산천 2008. 3. 4.

춘삼월 함박눈 내리는 날 이천에 있는 어재연 생가 둘러보기

'매천야록'을 읽던 中 신미양요 당시 목숨을 바쳐 조국을 지켜낸 '어재연 장군'의 생가를 찾아서 

[2008. 3. 4일 春雪이 내리는 화요일·한국의산천]   

 

어재연(魚在淵) 장군은 누구인가? 

먼저 신미양요에 대해 잠시 알아보겠습니다.

어재연 장군은 근세 조선 말기(고종8년) 구미 열강에 의해 조국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있을때 서해안을 지키다 강화도 덕포진에서 장렬히 전사한 장군이다.

장군의 본관은 함종(咸從)이며 자는 성우(聖禹)로 1823년 2월 이천시 율면 산성1리에서 어용인(魚用仁)의 아들로 태어났다.

1862년 관계에 진출하여 대구영장이 되고 광양현감, 평양중군, 풍천·장단· 회령부사 등을 거쳐 신미양요(辛未洋擾)가 일어나자 강화영(江華營) 진무중군(鎭撫中軍)이 되어 침공해 온 미국함대의 병력을 막게 되었다.

1871년에 일어난 신미양요는 당시 급변하는 세계사의 흐름을 외면한 대원군(大院君)의 쇄국정책을 배경으로 우방 미국과 최초의 무력충돌을 일으킨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무기의 열세를 이기지 못하고 조선군 350명과 함께 전투의 주역인 어재연장군과 어재순(魚在淳) 형제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그들의 살신보국(殺身報國)의 정신은 나라사랑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

▲ 1871년 신미양요 때 미 해군이 빼앗아 미 군함에 걸려있는 '어재연 장군기'. 일명 '수자기(帥字旗) (출처:Chosun.com)

 

수자기는 조선시대 각 군영이 훈련을 할 때 지휘권의 상징으로 내걸던 삼베로 만든 장수의 깃발이다.

어재연 장군기는 1871년 신미양요 때 강화도 광성진 지휘 장수였던 진무중군(鎭撫中軍) 어재연(魚在淵)장군이 사용했던 깃발로

미군이 그 당시 가져간 수자기는 가로,세로 길이가 각각 4.5m나 된다.(그 당시 우리나라는 국기가 없기에 장군기를 국기로 대신 게양했다)

 

미군측의 기록을 보면 당시 포대에 꽂혀있던 수자기를 조선군 포수 네댓명이 몸으로 꽁꽁 묶어 지키고 있었다고 한다.

1871년(고종 8) 미국이 1866년의 제너럴셔먼호(號) 사건을 빌미로 조선을 개항시키려고 무력 침략한 사건(신미양요)으로 이 전쟁에서 우리에게 막대한 피해를 안긴 미국 해군은 조선군의 대포 등 상당수의 전리품을 함대에 싣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수(帥)자기였다. 

 

[매천야록 내용] 미국 군함의 침입을 막다가 어재연 전사하다.
신미년(1871 고종8년) 여름에 미국인들이 강화도를 침범했는데, 전병사 어재연(魚在淵)이 순무중군(巡撫中軍)으로 나가 싸우다가 패해 죽었다.

어재연은 군사를 이끌고 광성보로 들어가 배수진을 치고도 척후병을 세우지 않았다. 적군은 안개가 낀 틈을 타 엄습했으며, 보(堡)를 넘어 난입했다.

어재연은 칼을 빼들고 맞서 싸웠지만 칼이 부러졌다. 그래서 연환(鉛丸:납탄)을 움켜지고 던졌는데, 맞은자들은 그자리에서 쓰러졌다. 그러나 연환마저도 다 떨어지자 적들이 그를 창으로 마구 찔렀다. 그가 반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그 자리에서 죽자 적들이 그의 머리를 베어갔다. 어재연은 죽었지만 적들은 또 다른 방비가 있는 줄 알고 곧 달아났다.


패보가 전해지자 조정과 민간에서는 깜짝 놀랐다. 조정에서는 그를 병조판서에 추증하고 시호를 충장(忠壯)이라고 했다. 그의 상여가 돌아오자 모두 조정을 비우고 나가 맞았는데, 이를 맞이하는 수레와 말이 수십리나 이어졌다.

어느 노인이 말했다.
"순조 계유년(1813 순조13년) 충장공 정시(鄭蓍) 이후 처음있는 일이다."

어재연의 아우 어재순도 백의 종군 했다가 형과 함께 죽었다. 그도 이조참의에 추증 되었다. [매천야록 1권 상]

▲ 신미양요에 참가한 1370톤급 USS Monocacy (출처:위키백과) ⓒ 2008 한국의산천 

 

신미양요 (미국에서는 가장 전투기간이 짧은 전쟁으로 기록하고 있다)

1871년 4월 3일, 미국함대가 조선(고종 8년)에게 통상조약체결을 강요하기 위해 강화도를 침략해 벌어진 전투이다.

 

신미양요의 발단이 된 것은 1866년(고종3년) 7월,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오며  통상을 요구하던 미국선박 제너럴셔먼 호의 화재사건이었다.

당시 화재로 미국인 23명이 사망하자, 미국은 조선에 강력히 항의하고, 손해배상과 통상관계를 요구했다. 조선이 이러한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자, 미국은 조선 원정을 결정했다. 당시 아시아함대 사령관이었던 존 로저스(John Rodgers) 해군소장은 군함 5척에 수병 1천2백여 명과 대포 85개를 적재한 후 조선으로 향했다.

 

48시간 동안 계속된 이 전투에서 전사한 조선군은 350여명, 미국해군은 항해 중 숨을 거둔 맥키 중위를 포함해 단지 4명의 수병만이 전사했을 뿐이다. 미국의 목적은 조선을 개항 하는데 있었는데 조선의 결사항전 의지를 알고 조선을 개항 시키려는 의지를 접고 7월 3일 함대를 철수 시킨다.  

▲ 사진 출처: shinmiyangyo.org ⓒ 2008 한국의산천  

신미양요가 일어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1866년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을 타고 평양부중에까지 들어와 통상을 요구하다가 격분한 민중들에 의해 불살라진데 있었다.

 

셔어먼호의 행방을 탐문하다가 사건의 윤곽을 알게된 미국의 브란트대통령은 청국주재 미국공사 로우에게 셔어먼호사건에 대한 책임문책과 조선과의 통상체결의 임무를 명하였으며 이에 로우공사가 직접 아시아함대 사령관 로저스제독이 지휘하는 기함 콜로라도호와 군함 4척에 1천 1백 30명의 병력을 이끌고 1871년 4월 3일 남양 앞바다에 나타나 통상할 것을 요구하니 이것이 신미양요의 시작이다.

 

그러나 우리측 정부로부터 아무런 답변이 없자 미국측에서는 소함정 4척을 보내 강화도 손돌목을 지나 광성진(廣城鎭) 앞으로 들어서다가 허가없이 들어서는 이들을 저지하려고 맹렬히 쏘아대는 조선군의 포격을 받고 퇴각해 간 일이 생겼다.

평화적인 교섭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로저스 제독은 마침내 명령을 내려 4월 23일 615명의 병력을 몰래 초지포(草芝浦)에 상륙시켜 기회를 엿보다가, 이튿날인 4월 24일 바다로부터 쏘아대는 함포사격의 지원을 받으며 일제히 어재연장군이 포진하고 있는 광성포대를 습격하니 쌍방간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어재연장군과 그의 동생 어재순이 끝까지 용감하게 싸우다 전사하였고, 광성별장 박치성(朴致誠)은 어재연장군의 용감한 죽음을 보고 스스로 목을 찔러 전사하였으며, 천총 김현경(金鉉景), 초관 유풍노(柳豊魯), 군관 이현학(李玄鶴)등 수백명의 조선군 장졸이 침입자들을 막다가 전사하였다.

 

당시의 집권자인 대원군의 서양오랑캐에 대한 적개심을 크게 불러일으켜 그의 쇄국정치를 더욱 강화케하는 결과를 낳았다. 어린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은1866년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 이후 1871년 4월에 전국에 척화비를 세운다.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니,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고 비석 표면에 새겼다.

 

그 후 나라에서는 죽음으로서 나라를 지킨 어재연 장군의 공적을 높이 평가하여 충장공(忠壯公)이란 시호를 내리고 병조판서겸 지삼군부사(知三軍府事)라는 높은 벼슬을 더해 주었다. 지금도 강화도에 있는 광성진은 역사의 현장으로서 잘 보존되고 있다. 

▲ 미국에서 임대형식으로 136년만에 돌아와 용산 전쟁 기념관에 전시중인 수자기 ⓒ 2008 한국의산천

1866년 (신미양요·고종8년))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을 타고 평양부중에까지 들어와 통상을 한편 정부가 1871년 신미양요 때 미군에 빼앗긴 어재연 (魚在淵)장군기'수자기'[장수를 나타내는 '수(帥)'자가 쓰인 가로 세로 각각 4.5m의 대형 깃발 : 당시 미국 메릴랜드주 애나폴리스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보관]의 반환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하고 지난 2007년 10월 22일 136년 만에 임대형식으로 국내에 들여와 용산 전쟁 기념과 현관에 전시중이다. 

▲ 광성보 ⓒ 2008 한국의산천

광성보는 고려가 몽고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강화도로 도읍을 옮겨 흙과 돌을 섞어 쌓은 축성이다. 조선 광해군 때 다시 보충하여 효종9년(1658)에 광성보를 설치하였으며, 숙종(1679)때 완전한 돌성으로 만들었다. 광성보는 정문인 안해루가 있고, 신미양요때 순국한 어재연, 어재순 장군의 쌍충비각, 신미순국 무명용사비, 신미순의총이 있다.

▲ 홍이포 ⓒ 2008 한국의산천

광성돈대에 있는 홍이포는 포구에서 화약과 포탄을 장전한 다음 포 뒤쪽 구멍에 점화하여 사격하는 포구장전식화포로 사정거리는 300m이며 조선 영조때부터 주조하여 사용하던 것이다.

화약의 폭발하는 힘으로 포탄은 날아가지만 포탄 자체는 폭발하지 않아 위력은 약한 편이다. 그나마 비오는 날에는 발사가 안된다고 합니다.그 당시 미군은 사정거리 700m포와 명중률이 좋은 레밍턴 소총을 사용하였다.

 

경기도 이천군 율면 산성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무신 어재연(魚在淵:1823∼1871)의 생가.

▲ 이재연  마을 앞 도로에 있는 생가터 이정표ⓒ 2008 한국의산천

중부고속도로 일죽IC에서 나가 왼쪽 남동 방향 306번 도로를 타고 생극 방향으로 가다보면 중간 지점 율면에 있다.

▲ 춘설이 내리는 경기도 이천시 율면 산성1리 소재 어재연(1823~1871) 장군의 생가 ⓒ 2008. 3. 4. 한국의산천

지정번호:중요민속자료 제127호 (지정연도:1984년 1월 10일.시대:조선시대 )
소재지:경기 이천군 율면 산성리 74
크기:안채 7칸, 사랑채 4칸  

▲ 어재연(1823~1871) 장군의 생가 ⓒ 2008 한국의산천

고종 때의 무관으로 미국 로저스 제독이 지휘하는 군함과 광성진에서 전투를 벌이던 중 전사한 어재연(1823∼1871)장군의 생가이다. 안채는 현종 1년(1660년)에 건립 되었고 사랑채와 헛간채, 광채는 19세기 말의 건물로 추정된다.야산에 북서향으로 앉아있으며 앞에 넓은 마당을 두고 사랑채와 안채·광채가 모여 튼 ㅁ자형의 배치구조를 이루고 있다.  

광채 옆에 있는 대문을 통하여 들어서면 오른쪽 앞으로 낮은 담이 뻗어있어 안채가 자리한 안마당이 훤히 들여다 보이지 않는다. 그 담의 한 곳을 터서 안채로 통하는 출입구로 사용하였다. 안채는 7칸 규모의 ㄱ 자형 구조로 부엌·안방·대청·건넌방이 일렬로 배치되었고

안방 앞에서 꺽이어 부억과 광이 있다.구조는 3량(樑)으로 간단하지만 대들보와 기둥의 치목 수법이 우수하다.   

대문의 왼쪽에 위치하는 一자형의 사랑채는 부엌·대청·사랑방으로 되어있다. 대청은 안마당쪽을 막아놓고 바깥마당과 동쪽벽을 터 놓았다. 사랑채는 6칸 규모의 초가집으로 사랑부엌은 안마당에서만 출입을 할 수 있다. 광채의 뒷모서리에서 뒤로 큼지막하게 돌려진 토담은 집안을 둘러싸고 있다. 전체적으로 여유있게 배치되어 있으며 원형의 변형 없이 비교적 잘 보존된 집이다.  

 

▲ 어재연 장군 생가 'ㄱ'자형 안채 ⓒ 2008 한국의산천    

▲ 어재연 장군 생가 전면과 툇마루 ⓒ 2008 한국의산천  

▲ 어재연 장군 생가 툇마루에서 바라 본 전망 ⓒ 2008 한국의산천 

어재연 장군 생가 앞에 사당 충장사가 자리하고 있다.  

▲ 어재연 장군 사당 충장사 입구 ⓒ 2008 한국의산천   

▲ 어재연 장군 사당 충장사 입구 ⓒ 2008 한국의산천

1973년 생가 앞 언덕위에 장군의 넋을 기리는 사당을 지어 충장사로 이름을 지었고 그 앞에는 어재연 어재순 두 형제를 뜻하는 연못 2개를 만들어 정비하였다.

▲ 어재연 장군 사당 충장사 입구 ⓒ 2008 한국의산천   

▲ 어재연 장군 어재순을 모신 사당 관리사 쌍충재 ⓒ 2008 한국의산천   

▲ 어재연 장군 생가 뒷담 풍경 ⓒ 2008 한국의산천

나즈막하게 둘러쳐진 생가 뒷담은 정겹고, 이재연 장군의 충정을 축복하듯 그 위로 춘설이 포근하게 내리고 있다.  

 

지족불욕(知足不辱)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지지불태(知止不殆)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가이장구(可以長久) 오래도록 편안할 것이다.  

- 노자 도덕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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