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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스치는 바람

두 바퀴에 스치는 바람 26 강화도 건평항 천상병 귀천공원 가는 길

by 한국의산천 2018. 1. 13.

두 바퀴에 스치는 바람 스물 여섯번째 이야기 [2018 · 1 · 13 · 눈 내리고 흐린 토요일]

강화도 건평항 천상병 시인 기념공원인 귀천공원 가는 길

라이딩 코스 : 김포 대명항~ 초지대교 ~건평항 ~해안도로 ~ 선수리 후포항 ~ 마니산 입구 ~ 대명항 (48km)

 

 

▲ 외포리와 후포항 중간쯤에 자리한 건평항 그리고 그 옆의 작은 녹지공원에 조성된 귀천공원   

내비게이션 검색시 '건평항'으로 검색하시면 됩니다

건평항은 선수리 후포항에서 외포리 방향으로 해안도로를 따라가다보면 나오는곳으로 포구로 10개 남짓한 횟집이 있는 한가로움을 간직한 작은 포구입니다 

 

 

 

183. 건평동(乾坪洞)

 

- 화남 고재형(華南 高在亨, 1846~1916)


名是乾坪卽水坪

이름은 건평이지만 물 많은 수평인가,


滿堰春波灌稻粳

뚝에 가득 봄물 차니 논에 물을 대기 좋다.


且畊且讀諸君子

밭 갈면서 책 읽은 이 모두가 군자이니,


聊得斯中一味淸

그러한 가운데서 맑은 기운을 얻는구나.


○ 평해 황씨(平海黃氏), 함열 남궁씨(咸悅南宮氏), 강진 안씨(康津安氏), 파평 윤씨(坡平尹氏)가 모두 이곳에 살고 있다.

 

 

▲'문단의 마지막 순수시인', '문단의 마지막 기인'으로 불린 천상병 시인

 

국민 애송시 ‘귀천’의 탄생지인 강화군 건평항에 천상병 시인의 기념공원이 조성됐다.

이 공원에는 천상병 동상과 육필 글씨를 새긴 귀천 시비, 안내판 등이 설치됐다. 

나 돌아가리...'귀천'이라는 시가 탄생한지 거의 50년만의 일이다

 

 

 

귀 천 
                 - 천 상 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 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 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서울에서 이렇게 가까이에 바다가 있다는것도 행복이다

 

강화 나들길 4구간 해넘이 길

이 구간은 산길과 평야 그리고 바다를 볼 수있는 건평항 해안을 지나는 해넘이 길이다

이 코스에 또 하나의 명소가 만들어 졌다

건평항 바로 옆 도로가 공원에 천상병 귀천공원이 조성되었다  

 

어제 금요일

오랫동안 산을 다니던 선후배 岳友들과 함께 신년 모임을 갖고

오늘은 늦잠을 자다가 느즈막히 강화도로 출발하였다

29845

 

▲ 건평항에서 선수리 후포항까지는 해안가를 따라 자전거 도로가 잘되어있다

 

 

▲ 김포 대명항에서 라이딩 출발.

매일 반복되는 일상생활에서 일탈을 꿈꿀 때

집에서 적당한 거리도 있으며  아름다운 풍경 바다, 산, 그리고 오랜 역사를 간직한 노천 박물관 강화도가 훌쩍 떠난다. 

대명항에서 자전거를 타고 출~발~!!!

 

 

 

 

▲ 이곳에서부터 건평항까지는 약 20km (원점 회기 라이딩 48km)

 

 

 

 

▲ 건평항으로 가는 도로는 자전거 도로가 따로 없는 구간이 많아 라이딩하기에는 조심해야할 구간이다

 

 

▲ 이 안내판을 보면서 좌회전하여 쭈~욱 가면 건평항이 나온다. 

 

 

▲ 위 사진에서 왼쪽이 건평항이며 오른쪽이 귀천공원이다. 직진하면 건평항 주차장이다

건평항 주차장은 넓으며 무료주차장이다.  

 

 

▲ 이곳 건평항에서 도로를 건너서 마을 가운데를 지나서 언덕을 오르면 이건창 선생의 묘가 있다  

 

 

▲ 고즈넉한 건평항. 겨울이라 그런지 횟집도 문을 닫은것이 많았다

한적한 이곳이 오히려 더욱 운치가 있어서 한참을 머물다 둘러보고 떠나왔네   

 

 

▲ 이곳 건평항은 언제와도 바닷물이 늘 들어차있는곳이다

 

 

 

 

 

 

 

 

 

 

 

 

 

 

▲ 선수리 후포항에서 외포리로 이어지는 바닷가 도로변에 있는 아주 작은 녹지 공원에 조성된 귀천공원

 

국민 애송시 '귀천'의 탄생지인 강화군 건평항에 조성된 천상병 시인의 기념공원인 '천상병 귀천공원'

이 공원에는 천상병 동상과, 육필 글씨를 새긴 귀천 시비, 안내판 등이 설치되어 있다. 

평생 가난에 시달리고 시대와 불화를 겪은 천 시인이 새가 되어 하늘로 돌아가는 형상이다. 

동상 옆에는 국민가곡 '그리운 금강산'을 작곡한 강화도 출신 작곡가 최영섭 선생(88)의 노래비도 서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근대 한국 시문학에서 가장 서정적이고 순수한 작품이라는 평가와 함께

국민애송시로 자리한 천상병 시인의'‘귀천(歸天)'이라는 시를 읊조려보지 않은 사람은 드물 것이다.

 

이 시가 발표된 지 47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국민적 사랑이 식지 않는 것은

각박한 세상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마음의 평안과 감동, 위안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강화군은 이처럼 큰 울림을 주는 걸작을 기리기 위해 강화도 건평항에 '천상병 귀천 공원'을 조성 완료했다.

 

 

천상병 시인은 많은 일화를 가지고 있다

그중 일부를 소개합니다

 

•한창 젊었을적 완전히 폐인 모습으로 살고 있던 천상병 시인.

머리가 하도 덥수룩하여 얼굴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였다.

이를 딱하게 여기던 친구 한명이 그냥 돈을 주면 술을 사먹을까봐 천상병을 데리고 이발소로 가게 된다.

거기서 이발비를 지불하고 천상병이 머리카락을 자르는 걸 본 친구는 안심하고 집으로 가게 된다.

그런데 친구가 나가자마자 천상병은 이발사에게 지금까지 이발한 비용을 제외하고 환불받길 요구한다.

어이 없어진 이발사는 환불을 해주고 천상병은 그 돈으로 술을 사먹었다고 한다.


•대학시절, 교수님 집에서 머무는데 화장대에 멋있어 보이는 병이 있어서 양주인줄 알고 마셨는데,

이상하게 향이 심해서 '역시 좋은 술인 가보다.'라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향수였다고 한다. (출처: 괜찮다 괜찮다 다 괜찮다.)

 

•그가 무연고자로 오해받아 서울시립정신병원에 수감될 당시 지인들이 그가 객사한 것으로 생각하여

그가 남긴 시를 모아 유고시집 《새》를 남기기도 했다.

그런 까닭에 그는 살아서 유고시집을 남기는 진기록을 가졌다.

물론 93년에 확실히(...) 죽은 뒤에도 유고시집 《나 하늘로 돌아가네》가 출간되었다.


•당시 '귀천'에 자주 다니던 사람이 천상병 시인에게 빌린 돈을 언제 갚을거냐고 묻자 천상병 시인이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허허, 내가 죽으면 천국과 지옥의 갈림길에서 포장마차를 하고 있을테니 오거든 갚을 만큼의 공짜술을 주겠네."

어쩌면 먼저 타버린 조의금은 포장마차할 노잣돈으로 가져간걸지도 모르겠다.

이 이야기는 일본인이 쓴 세계 유명인의 명대사란 책자에 나온 적도 있다.

 

 

▲ 동상은 해맑게 웃는 천 시인의 어깨에 새 한 마리가 앉아 있는 모습이다.

 

새 - 천상병


외롭게 살다 외롭게 죽을
내 영혼의 빈 터에
새날이 와, 새가 울고 꽃잎 필 때는,
내가 죽는 날
그 다음 날.

 

산다는 것과
아름다운 것과
사랑한다는 것과의 노래가
한창인 때에
나는 도랑과 나뭇가지에 앉은
한 마리 새.

 
정감에 그득찬 계절,
슬픔과 기쁨의 주일(週日),
알고 모르고 잊고 하는 사이에
새여 너는
낡은 목청을 뽑아라.

 

살아서
좋은 일도 있었다고
나쁜 일도 있었다고
그렇게 우는 한 마리 새.

 

※ 1959년 사상계에 발표된 시이다.

1971년 출간된 천상병 시인의 첫시집이자 살아있는 사람의 유고시집이 된 새(조광출판사)

 

 

 

 

 

천상병 시인은 일제강점기인 1930년 일본의 해안도시 효고현(兵庫縣)에서 태어나

해방과 더불어 고국으로 돌아와 경남 마산에 정착했다.

이후 천 시인은 서울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늘 고향바다를 그리워했다고 한다.

그러나 마산까지 갈 여비가 없어

고향친구인 박재삼 시인과 더불어 서울에서 가까운 강화도를 자주 찾아와

바다에 대한 향수를 달랬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건평나루 주막에서 막걸리를 마시다 쓴 시가 '귀천'이었다.

천 시인은 이 시를 메모지에 적어 박재삼 시인에게 건네주었다 한다.

이 시에는 당시 산기슭과 맞닿아 있던 조그만 건평나루의 풍경이 그대로 녹아있다.

 

 

 

진주조개는 자신이 아픈만큼의 크기만한 진주를 품는다고 합니다

자신의 그런 아픈 고통을 감내하였기에 진주같은 '귀천'이 탄생하였나 봅니다

 

 


문학인이자 시인. 1930년 1월 29일 일본 효고 현 히메지 시(姫路市) 출신.

호는 심온(深溫). 대표작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로 유명한 귀천.

 

문학계에서는 손꼽힐 정도로 대단한 주당이자 기인으로 명성을 떨쳤다. 

1930년 1월 일본 효고 현 히메지 시에서 한국인 부모에게서 태어나 1945년 해방이 되면서 부모님과 함께 귀국

경상남도 마산(現 창원시)에서 라면서 마산중학교에 입학

 

당시 마산중학 국어교사였던 시인 김춘수의 영향으로 시를 쓰기 시작해

1949년 5학년 때는 〈죽순 竹筍〉지에 시 〈공상 空想〉 외 1편을 발표하며 문단에 이름을 올렸다.

1952년 〈문예〉에 〈강물〉·〈갈매기〉등을 추천받았다.

1953년에는 〈문예〉에 평론 〈나는 거부하고 저항할 것이다〉와 〈사실의 한계-허윤석 론〉을,

1955년 〈현대문학〉에 〈한국의 현역대가(現役大家)〉를 발표하는 등 시와 평론을 겸하는 문학활동을 했다.

 

1955년 서울대학교 상과에 입학했다가 4학년 때 중퇴하였고

1966년 독일 동(東)베를린 공작단 사건, 일명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른 후 석방되었다.

이 때 당했던 고문을 계기로 심신이 멍들게 되는 후유증을 앓기도 하였다.

 

1970년에는 무연고자로 오해를 받게 되어 서울시립정신병원에 수용되기도 하였고,

또 이 때 친구의 여동생 목순옥(1935~2010)이 수 년간 간병을 해준 것이 계기가 되어 1972년 결혼하였다.

 

1979년 시집 '주막에서', 1984년 '천상병은 천상 시인이다', 1991년 '요놈 요놈 요 이쁜놈' 등의 시집을 발표하며 활동하였다.

 

간(肝)경화증을 앓다가 1993년 4월 28일 세상을 떠났다.

본래는 종교 상 개신교 신자였으나 말년 즈음에 천주교로 개종하였다. 세례명은 시몬.

 

 

 

 

 

천 시인은 이 시를 쓴 직후인 1967년 소위 동백림(동독 베르린)간첩단사건에 연루되어

6개월간 옥고를 겪고 풀려났으나 고문 후유증으로 폐인이 되다시피 하여

4년여를 행려병자로 떠돌이 생활을 했다.

이처럼 오랫동안 행방이 묘연하자 천 시인이 죽은 것으로 생각한 박재삼 시인이

‘귀천’을 천 시인의 유작으로 '창작과 비평'에 발표함으로써

사장될 위기에서 세상에 빛을 보게 됐다.

이후 국민들의 많은 사랑을 받아오다

47년만에 귀천 탄생지인 건평항에 기념공원이 조성되면서 천 시인을 기리게 된 것이다.

 

 

 

 

 

 

 

 

 

 

 

 

 

 

 

 

 

 

▲ 이건창 선생 묘소는 건평항 식당가에서 도로를 건너서 동네길로 들어서서 언덕을 오르면 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건창 (1852 ~1898)

본관 전주(全州). 자 봉조(鳳朝/鳳藻). 호 영재(寧齋). 인천 강화 출생.

가학인 양명학을 계승하였으며, 강위(姜瑋)에게서 배우기도 하고, 김택영(金澤榮) ·황현(黃玹)과 가까웠다.

1866년(고종 3)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15세의 어린 나이로 인해 등용이 연기되어 1870년에 홍문관에 들어갔다.

1874년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875년 충청도 암행어사로 관찰사 조병식(趙秉式)을 탄핵했다가 벽동에서 유배생활을 한 후 벼슬을 포기하였다.

고종의 간곡한 부름으로 1880년과 1893년에 어사로 나가 관인의 비리를 엄하게 조사하고 민폐를 해결하여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1890년에 한성부소윤, 1891년에 승지에 나아갔지만 관인 생활은 많지 않았다.

특히 1894년 갑오개혁 이후로 관직에 나아가지 않다가 고종의 노여움을 사 고군산도에 2개월 동안 유배되기도 하였다.

 

병인양요 때 조부인 이조판서 이시원(李是遠)의 자결을 목도하였으며 서양과 일본의 침략을 철저히 배격하였다.

1890년에 한성부소윤으로서 국가의 부동산을 외국인에게 넘기지 말 것을 건의한 것이 한 예이다.

양명학자로서 심학(心學)의 의미를 강조하여 정치 ·경제도 그것에 기반을 두고 허명을 배격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이웃나라에서 부강을 구하는 비주체적 개화를 극력 반대하였다.

문학적으로 김택영에 의해 여한9대가(麗韓九大家)의 한 사람으로 꼽혔는데, 권력에 비판적이었으며 민생의 실상과 어려움을 많이 다루었다.

이건창 가문은 전형적인 소론 가문이었으며, 학문적으로는 양명학에 심취하여 강화학파의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다.

 

저서로 문집 《명미당집(明美堂集)》과 조선 중기 이후의 붕당을 개관하고 평가한 《당의통략(黨議通略)》이 있다. (두산백과 참고)

 

 

이건창의 충무공 예찬

 

牙山過忠武公墓

元帥精忠四海知(원수정충사해지)
我來重讀墓前碑(아래중독묘전비)
西風一夕松濤冷(서풍일석송도랭)
猶似閑山破賊時(유사한산파적시)


원수 (元帥) 의 위국충정 온 세상이 다 아니
이곳에 와 묘비문을 거듭 읽어봅니다
저녁에 서풍불어 솔바람 소리 차갑더니
 한산도 왜적 칠 때 그 소리와 같습니다

- 이건창 (李建昌.1852~98) '아산 이충무공 묘를 지나며'

 

구한말 김태영.황현과 함께 3대 시인이던 이건창은 그의 할아버지가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15세에 별시 (別試) 급제한 뒤 벼슬살이도 했지만 그보다는 강화학파의 원조로 이름이 난다.

고종으로부터 해주 관찰사로 발령받자 그것을 거절하고 선유도로 귀양갔다 돌아온다.

그의 양명학은 뒷날 정인보에게 이어지는데 여기 애국시 한 편이 있다.

충무공 예찬으로 기울어진 국운을 비춘다.

 

 

 

 

 

 

 

 

 

 

 

 

 

 

▲ 건평항에서 선수리 후포항 방향으로 가다보면 지중해풍의 이국적인 카페를 만날 수있다

 

 

 

 

 

 

 

 

 

 

 

 

 

 

 

 

 

 

▲ 장화리 못지 않게 일망무제로 전망이 좋은 곳이다

 

 

 

 

 

 

▲ 후포항

오래전에 왔을 때보다 지금은 많이 쇄락해진 느낌이 드는 선수리 후포항

겨울이라 그런 느낌이 드는가보다.

 

 

 

 

 

 

▲ 마니산 등산로 입구

 

 

 

 

 

 

 

[장석주의 사물극장] [29] 천상병과 유고 시집 '새'

장석주 시인·문학평론가 입력 : 2018.01.18 03:10 
 

 

 

천상병(1930~1993)은 불우와 가난에 기죽지 않고

"나는 세계에서/ 제일 행복한 사나이다"라고 노래했다.

"더구나 하나님을 굳게 믿으니/ 이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분이/ 나의 빽이시니/ 무슨 불행이 온단 말인가!" 하고

큰소리치는 시 '행복'을 읽을 때마다 나는 절로 입가에 미소가 떠오른다. 
 

[장석주의 사물극장] [29] 천상병과 유고 시집 '새'
 
  천상병은 일찍이 마산중학교 재학 중인 1949년 '죽순(竹筍)' 11집에 시를 발표하고,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에 다니던 중 '현대문학'에 평론으로 등단했다.

 

정치와 무관하던 그가 뜻밖에도 1967년 '동백림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여섯 달 옥고를 치르고 나왔다.

의정부 수락산 밑에 살며 인사동에 나왔는데, 벗들에게 1000원을 얻어 막걸리 한잔 마시는 것을 인생의 낙으로 삼았다.

1970년 영양실조로 쓰러진 뒤 무연고자로 분류돼 서울시립정신병원에서 치료받았다.

 

다들 몇 달째 코빼기도 내밀지 않고 소식이 끊긴 천상병이 죽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누군가 불쌍한 천상병 유고 시집이나 묶어주자고 갸륵한 뜻을 내고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새'가 나왔다.

이 문단 미담이 신문에 실리자 서울시립정신병원에서 '천상병 시인이 여기에 있다'고 바로 연락이 왔다.

 

문우들이 비단 보자기에 호화 양장본으로 꾸민 시집 10권을 싸 들고 서울시립정신병원으로 병문안을 갔다.

이 '유고 시집'을 일별하고 천상병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천상병의 카랑카랑한 일성은 "내 인세는 어찌 되었노?"였다.

미처 인세 생각을 못 했던 탓에 문우들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멍했다.


죽어서 저승 가는 데도 여비가 들면 어쩌냐고 걱정했던 시인.

커피 한 잔과 갑 속의 두둑한 담배, 막걸리 한 병을 마시고도 버스 요금이 남았다며 행복하다고 말하던 시인.

그는 무소유였지만 가난과 불행에 주눅 들지 않고 늘 늠름했다.

오히려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노라고 말하리라"고 '귀천(歸天)'에서 썼다.

시인의 긍정주의 낙관론은 많은 것을 거머쥐고도 불행감에 허덕이는 우리를 부끄럽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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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족불욕(知足不辱)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지지불태(知止不殆)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가이장구(可以長久) 오래도록 편안하다.  - 노자 도덕경에서

 

대한민국 구석구석 즐겁고 행복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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