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바퀴에 스치는 바람 스물일곱번째 이야기 1편
강화 나들길 6코스
화남생가 가는 길 (화남 고재형 선생의 심도기행)
숲이 우거진 산길을 오르고 너른 평야를 지나며
역사와 새로운 문화를 만나는 즐거움
거친호흡 몰아쉬며 자징거 바퀴를 굴리고 발길 닿는 곳마다
새롭게 펼쳐지는 풍경은 기쁨이더이다.
강화를 들기에 앞서
고재형 선생의 문집 <심도기행>에 7언절구로 수록된 256 수의 한시의 뜻을 알고 가면 더욱 의미있는 여행이 될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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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도기행 강화 나들길 6코스
역사와 문화 숨결 따라 걷는 길
강화에는 아름다운 나들길이 있다.
나들이 가듯 걷는, 들고 나는 길이란 의미의 강화나들길이다.
바로 이 나들길이 화남 고재형 선생께서 강화일대를 다녔던 길과 그 분의 문집 ‘심도기행’을 바탕으로
끊어진 길을 잇고 잊혀진 길을 찾아 현재의 둘레길과 역사탐방의 길로 조성한것이다. ‘심도’는 강화의 별칭이다.
그래서 강화나들길 곳곳에 화남의 시가 새겨진 표지석들이 서있다.
강화나들길을 따라 달려 나가니 수려한 자연과 새로운 풍경이 펼쳐진다.
강도가 겪어 온 기나긴 수난의 역사를 돌아보고, 아름다운 자연을 감상하는 시간
불어오는 봄 바람속에 한 낮의 햇살은 따사롭다.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길 위에서 만나는 생기 가득한 자연.그리고 텅빈듯한 폐사지
들판을 가르는 길게 이어진 길, 한적하고 고즈넉한 길이 나를 반긴다. 너무 좋은 날이다.
1906년 어느 봄날 환갑을 맞은 한 선비가 강화도 순례길에 올랐다.
강화도 곳곳을 누비며 마을을 주제로 256편의 한시를 짓고, 마을 유래와 풍광, 인물, 생활상을 기록한 '심도기행'(沁都紀行)이라는 문집을 남겼다.
그 선비가 불은면 두운리 두두미 마을에서 태어난 화남(華南) 고재형(高在亨, 1846~1916)선생이다.
화남 고재형 선생께서는 고향땅인 강화의 구석구석을 돌며 마을 유래와 수려한 자연과 사라져가는 풍속, 주민의 생활상을 소재로 시를 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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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면(仁政面)
1. 두두미동(斗頭尾洞)
- 화남 고재형(華南 高在亨, 1846~1916)
斗頭我步帶春風(두두아보대춘풍)
봄바람 맞으며 두두미를 걷노라니
一府山川兩眼中(일부산천양안중)
온 마을의 산과 내가 한 눈에 들어오네.
明月綠楊諸具榻(명월녹양제구탑)
밝은 달 푸른 버들 여러 구(具)씨 탁상에서
滿杯麯味使人雄(만배국미사인웅)
잔 가득한 술 맛이 힘을 내게 하는구나.
두두미동(斗頭尾洞)은 강화부 관아로부터 남쪽으로 20리 떨어진 곳에 있으며 인정면(仁政面)에 속한다. 우리 집안이 대대로 살아 온 곳이다.
병오년(1906) 봄에 내가 비록 병이 있는 몸이지만 강화부 전체의 산천을 다시 관람하면서 고적을 살펴보기 위해 길을 떠났다.
옛날부터 전해오는 이야기를 따라 걸음을 옮겼으니, 두두미를 출발하여 다시 두두미로 돌아오려는 계획이었다.
오랫동안 사귄 친구 구(具) 씨 집에서 술을 몇 잔 마신 후에 서쪽을 향하여 길을 떠났다.
○ 구씨 친구는 능성(綾城)의 세족(世族)으로, 문과(文科)를 거쳐 한림 전랑과 대각을 역임한 강암공(江菴公) 구강(具綱)4)의 후손이다.
1) 인정면(仁政面)은 두두미동을 비롯하여 백운동, 삼동암동, 서문동, 마장동, 석성동 등이 속해 있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불은면에 통합되었다.
2) 두두미동(斗頭尾洞)은 현재의 두운1리이다. 두두미동의 ʻ두ʼ자와 백운동의 ʻ운ʼ자를 합하여 1914년부터 두운리라 하였다. 두도미라고도 한다.
3) 저자 고재형(高在亨 1846∼1916)은 제주고씨로 1888년(고종25)에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3등에 합격하였으며 관직에 나아가지는 못했다.
아버지 고창환(高昶煥)은 행용양위부호군(行龍驤衛副護軍)을 지냈다. 대대로 강화군 불은면 두운리 두두미 마을에 살았다.
강암공은 판안동공(判安東公) 구성량(具成亮))의 아들이다.
화남 고재형
1888년(고종 25) 식년시(式年試)에 급제한 화남은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고향의 선비로 살았다.
화남이 강화순례에 나선 1906년은 을사늑약 이듬해로 일제에 의해 외교권을 빼앗기고 구한말 대한제국의 운명이 저물어가던 암울한 시기였다
세상사 시름을 내려 놓고자 길을 나선 것일까?
환갑의 고재형 선생은 섬의 구석 구석을 돌아보고 들은 감상을 7언 절구 한시로 남긴다.
그 256수가 화남의 '심도 기행'이라는 기행문집으로 전해 내려온다. '심도(沁島)'는 강화의 옛 이름이다.
지금도 고재형 선생의 생가 옆에 구씨 일가가 살고 계신다
이 참에 심도기행의 발문도 보고가자
심도기행 발문(跋文)
무릇 읍지(邑誌)는 예로부터 있어 왔다.
그 고을의 사적을 기록하여 후세에 남김으로써 무궁토록 잊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다.
하물며 강도(江都)는 선비의 고향으로 고려의 도읍지였고, 학문이 번성한 곳이 아니었던가.
심덕부 선생의 충의를 좋아하고, 김상용 선생의 대의를 흠모하였는데,
그 유풍이 점차 사라지는 것을 이 고을의 선비로서 어찌 개탄해마지 않겠는가.
생각하건대 나의 할아버지뻘 되는 화남(華南) 선생은 이러한 걱정을 더욱 심하게 하셨던 것 같다.
1906년 병오년 봄에 강화부 산천을 일람하고 돌아와 그 대략을 기록하고 나에게 그것을 익히게 하였다.
내가 그것을 몇 년에 걸쳐 읽어보니 강화부 산천의 유래와 사적을 직접 눈으로 보는 듯하였다.
이에 책을 더럽힌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붓을 들어 책의 끝에 적는다.
1909년(융희3, 기유) 겨울
구창서(具彰書) 근지(謹誌)
▲ 나들길 코스는 약 18km + 원점회기 약 13km = 총 31km
봄은 짧고 바로 여름이 온듯한 토요일
반바지에 반팔을 입고 차에 자전거를 싣고 강화도를 향해 떠났다
오늘 코스는 강화 나들길 6코스
출발지는 강화 풍물시장
주차는 강화 인삼센타에 하고 라이딩 시작
247. 오두동(鰲頭洞)
- 화남 고재형(華南 高在亨, 1846~1916)
一村花樹列成庄 꽃나무로 동산 이룬 오두리 마을에선,
於讀於耕日月長 글 읽기와 농사일로 세월을 보내네.
最愛此中丹桂籍 그중에서 소중한 일은 과거에 급제한 일이니,
永承雨露放餘光 나라 은혜 길이 이어 큰 빛을 발하리.
○ 불은면 오두리 터진개 서북쪽 안산이 마을이다.
오두동(鰲頭洞)에는 제주 고씨(濟州高氏)가 많이 살고 있는데,나와 같이 영곡공(靈谷公)과 관란재공(觀瀾齋公)의 후손이다.
▲오두돈대를 지나며
유난히도 외세의 침략이 많았던 강화도. 부국강병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생각한다.
56. 진보돈대 (鎭堡墩堡)
百里封彊地勢雄 (백리봉강지세웅)
백리 강도는 지세가 웅장하고
山靑水白四環中 (산청수백사환중)
푸른 산 맑은 물이 사방에 둘러 있네
十三鎭與諸墩堡(십삼진여제돈보)
열세개의 진보와 수많은 돈대는
制勝當年凜凜風 (제승당년늠늠풍)
승리하던 당시의 늠름한 풍모네
심도기행(沁都紀行)
- 화남 고재형(華南 高在亨, 1846~1916)
강화 53돈대 둘러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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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화 인삼센타에 주차를 하고
뒤편에 있는 강화 풍물센타에서 출발
▲ 강화 풍물시장 주차장 입구로 나와서 들판쪽으로 나들길 출발점에서.
▲ 건너야 할 수문 뚝위로 물이 넘쳐 흐른다
강화 풍물시장에서 이곳에 다달으니 뚝이 물에 잠겨서 더 진행후 U턴 하여 건너편 위치로 다시왔다
※ 중요
나들길 이정표 보기
▲ 이정표
이정표 기둥면에는 진행 방향의 화살표와 남은 거리가 표시되어있다
화살표 방향은 면마다 다르며 면의 정면에서 보았을때의 방향을 따르면 된다
리본은 거의 50m? 정도로 담장 또는 나뭇가지에 매달려 나타나며
길목 입구를 나타내는곳은 양쪽으로 붙어있기에 그 사이로 진행해야 한다
갈래길에는 이정목이 서있으며 직진 길에서 리본이 안보이면 다시 돌아나와 확인을 한 후 진행한다.
이번 초행길에 주변의 리본과 이정표를 세심하게 잘 살핀 덕분에 다행스럽게 알바는 전혀하지 않았다.
▲ 폐업을 한 강화스파랜드 언덕을 오른다
▲ 계단을 올라 산길로 접어든다
▲ 조금 끌바를 하면 시원하게 다운 힐을 할수있는 싱글 코스가 나온다
▲ 바람이 불면 송홧가루가 안개처럼 날리는 날이다
詩 '윤사월'이 떠오르는 그런 봄날
윤사월(閏四月)
- 박 목 월
송홧(松花) 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산지기 외딴 집
눈 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 대고
엿듣고 있다
▲ 싱글코스의 시원한 딴힐코스
▲ 사거리에서 선원사 방향으로 좌틀하여 좁은 길을 따라 내려간다.
▲ 차가 다닐수있을 정도의 나무그늘 속 시원한 비단길 같은 임도를 따라 내려간다
내려가면서 이정표를 잘 보아야 선원사지 방향으로 간다
※ 지나쳐서 아래편 도로까지 간다해도 도로에서 우회전하여 약 100m 정도 가면 선원사지 입구이다.
▲ 산길을 따르니 선원사지 상부에 다다른다
45. 선원사(禪源寺126)*)
- 화남 고재형(華南 高在亨, 1846~1916)
禪源古寺問阿誰 선원사 옛 절을 누구에게 물어보나,
流水桃花處處疑 시냇물에 복사꽃 떠오는 곳곳마다 의심 가네.
寂矣半千龕月影 적막토다 오백불상 달그림자 속에 들고,
黃金銷盡碧蘿垂 황금불상 다 녹아서 푸른 덩굴 드리웠네.
○ 선원사(禪源寺)는 지금의 선원리(仙源里)에 있다. 고려 고종 때 술사(術士)의 말을 따라서 절을 지었다.
최우(崔瑀)127)가 매우 장엄하고 화려하게 꾸몄으므로 ʻ반천선감(半千禪龕)ʼ128)이라고도 하였다. ʻ
선(禪)ʼ을 ʻ선(仙)ʼ으로 바꿔 지명이 되었으므로 당시에 무엇을 숭상하였는가를 알 수가 있다.
지금은 폐지되었으며 여전히 옛 터가 전해지지만 넝쿨 숲만이 무성할 뿐이다.
126) 고려시대 강화도읍기 당시 최고집권자 최우(崔瑀)가 강화도에 세운 절. 무인정권과 관련이 있던 정혜결사의 송광사 스님들이 주로 주석하였다.
충렬왕이 피난을 하기도 했으며, 실록을 보관하는 등 국가적 비중이 컸던 절이다.
127) 최우(?∼1249) 고려 무신정권의 집권자. 본관은 우봉(牛峰). 뒤에 이(怡)로 개명하였다. 아버지는 충헌(忠獻)
128) 오백 개의 감실(龕室)이 있는 선찰(禪刹)이란 의미로, 이는 오백나한전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 선원사 입구에서 도로를 가로질러서 직진 후 좌회전 한다
▲ 선원사지에서 내려와 돌아보니 건너편으로 지나온 산릉이 보인다
그리운 것은 다 산뒤에 있다.
- 김 용 택
이별은 손끝에 있고
서러움은 먼데서 온다.
강 언덕 풀잎들이 돋아나며
아침 햇살에 핏줄이 일어난다.
마른 풀잎들은 더 깊이 숨을 쉬고
아침 산그늘 속에
산벗꽃은 피어서 희다.
누가 알랴, 사람마다
누구도 닿지 않는 고독이 있다는 것을
돌아앉는 산들은 외롭고
마주보는 산은 흰 이마가 서럽다.
아픈데서 피지 않는 꽃이 어디 있으랴
슬픔은 손끝에 닿지만
고통은 천천히 꽃처럼 피어난다.
저문 산 아래
쓸쓸히 서 있는 사람아
뒤로 오는 연인이 더 다정하듯이
그리운 것들은 다 산뒤에 있다.
▲ 점집을 지나서 작은 언덕을 넘어가면 심안수 댁이 나온다
▲ 남산대 표지석을 지나서 직진
▲ 선원사에서 오다가 "T" 字 삼거리에서 좁은 비포장 골목길로 직진 또는 우회전해서 바로 좌회전하면 나들길로 이어진다
이곳이 남산동이다
아름다운 싯귀가 나들길 곳곳에서 길을 안내한다.
화남 고재형 선생 심도기행 시(詩) '남산동'
남산동(南山洞)
- 화남 고재형(1846 ~1916)
欲尋花樹到南山 (욕심화수도남산)
우리 일가 찾으려고 남산동에 이르니
山下列茅流水間 (산하열모유수간)
산 아래 시냇물 사이 초가집이 늘어섰네
沈益安兄須共酌 (심익안형수공작)
심 형과 안 형이 술잔을 나누며
舒談終日却忘還 (서담종일각망환)
종일토록 한가하게 얘기하며 돌아가길 잊었네
○ 남산동(南山洞)은 고려 때에 신지동(神智洞)에 가궐(假闕)을 창설하였을 때 이곳을 남산이라고 하였다.
나의 친척들이 이곳에 많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서 화수(花樹)로 말을 한 것이다.
풍산(豊山)을 본관으로 하는 청천(聽泉) 후손 심씨(沈氏)와 강진(康津)의 세족 안씨(安氏)들이 이 이웃에 살았기 때문에 방문해서 회포를 풀었다.
▲ 집앞을 지나서 호수와 탑이 군데 군데 보이는 쪽으로 좌회전하여 언덕으로 올라간다
▲ 남산대 월하공원
월하공원. 남산촌은 옛날 신지촌 남쪽 산자락에 남산대가 있던 마을이라는데서 유래되었다고 전한다
▲ 이곳 사거리에서 직진
▲ 노거수 느티나무 앞의 펜스(그물망)를 따라 약 100m 지나서 그물망(펜스)을 따라 좌회전한다
▲ 노거수 느티나무를 지나서 바로 좌회전한다
▲ 느티나무를 지나서 좌회전하여 하얀집과 황토방 앞마당을 지나서 좁은 숲길로 진행한다
▲ 갈래길에서 이정표를 잘 보며 왼쪽 오름길로 진행한다
(왼쪽 내려가는 길은 나들길 아님)
▲ 묘가 나오면 묘의 왼쪽길을 타고 과수원을 지나서 마을로 진입한다
▲ 이길 끝에는 다리가 나오며'T'字形 다리 끝에서 우회전하고 바로 좌회전하여 또 들판을 직진한다
▲ 상동암천
혈구산과 덕정상에서 시작된 물이 삼동암리와 만월평의 대청수로를 통해 화도돈대 쪽으로 흐른다. 삼동암천이다.
선원면과 불은면에 걸쳐 있는 넓은 평야 사이의 이 물길을 흔히 대청개라고 한다.
강화는 이처럼 관개수로가 많고 정비가 잘되어 늘 풍년을 이루는 곳이다
▲ 긴 농로 끝에 나타나는 이정표
이곳 아래길을 따라서 50m 진행 후 바로 왼쪽 언덕으로 올라선다
▲ 그러면 좁은 뚝방길을 따라 이동
▲ 이곳이 고능리 아침가리 장수수마을
나들길은 비포장 도로를 택해서 이곳을 우회하여 지나간다
▲ 뚝 방길 끝에서 도로를 건너서 직진
▲ 이곳에서도 도로를 건너서 직진
▲ 한옥 끝에서 한옥과 주목나무 밭 사이로 좌회전하여 산길을 오른다
▲ 한옥을 끼고 좌회전하여 잠시 언덕을 오르면 양호한 임도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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