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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스치는 바람

두 바퀴에 스치는 바람 25 감악산 출렁다리~연천 호로고루~경순왕릉

by 한국의산천 2016. 10. 5.

두 바퀴에 스치는 바람 스물 다섯번째 이야기. 


신의 정원 조선 왕릉

지상에서 영원으로 聖과 俗이 숨쉬는 공간


경기 연천 경순왕릉 가는 길


라이딩 코스

파주 적성 감악산 출렁다리 주차장 ~ 임진강 ~ 연천 호로고루 ~  경순왕릉 라이딩 (한적한 왕복 2차선 도로 왕복 36km)


태풍이 올라온다하네

그래도 자전거를 가지고 적성 감악산을 찾았다.

최근 파주에 있는 감악산(675m)은 최근 산악 현수교로는 국내에서 가장 긴 다리인 출렁다리가 완공되어 메스컴과 드라마에 자주 등장한다.

이 산악 현수교는 여느 계곡의 현수교와는 달리 주탑이 없이 계곡과 계곡사이에 허공다리처럼 걸쳐져 있다


이곳에서 출발하여 경순왕릉까지 왕복하기


경기 오악중의 하나인 감악산

감악산(675m)은 화악산, 송악산, 관악산, 운악산과 더불어 경기 5악의 하나로 바위로 이루어져 산세가 험하며 전망이 좋은산이다.


국내 최장 산악 현수교 파주 감악산 출렁다리


태풍이 올라온다하네

늘 했던것처럼 비옷을 준비하고 차에 자전거 두대를 싣고 적성 감악산을 찾았다.

최근 파주에 있는 감악산(675m)은 최근 산악 현수교로는 국내에서 가장 긴 다리인 출렁다리가 완공되어 메스컴과 드라마에 자주 등장한다.

이 산악 현수교는 여느 계곡의 현수교와는 달리 주탑이 없이 계곡과 계곡사이에 허공다리처럼 걸쳐져 있다


파주 감악산 출렁다리 

주말에는 복잡할것 같아 평일 시간을 내어 아침 일찍 출발였으나 감악산 두개의 주차장은 이미 만원이다

설마리 고개를 넘어서 내려가다가 사찰 입구를 지나서 북쪽으로 약 500m 정도 가면 주차장이 나온다.



감악산 출렁다리 사진 더 보기 >>> http://blog.daum.net/koreasan/15606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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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서 몸으로 바퀴를 굴려 나아가는 일은 복되다


▲ 주차장에 자전거를 묶어두고 완만한 산길을 걸어서 10분정도 올라가면 출렁다리가 나옵니다 ⓒ 2016 한국의산천


감악산 출렁다리 사진 더 보기 >>> http://blog.daum.net/koreasan/15606483



길다

그리고 높다

걸어가니 흔들린다

잠시 현기증이 난다 

길이 150m, 우리나라에서 가장 길다

산악 현수교 이름이 걸맞게 높이는 건물 12층 높이이며

견딜수있는 하중은 70kg 성인 900명이 한번에 걸어도 끄떡없다는 다리이다.

또한 초속 30m 바람에도 견디고 지진 7.0에도 버틸 수 있는 안전성 있는 다리입니다





경순왕릉을 향하여 고고씽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의 무덤은 경주에 없습니다. 경순왕릉은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 임진강변 산사면에 있습니다.

그것도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입니다. 21세기 들어서 민간인 출입이 자유롭게 된 땅입니다.

이제 비운의 왕 경순왕이 잠들어 계신 경순왕릉을 찾아갑니다  


  천 년 사직이 남가일몽이었고, 태자 가신 지 또다시 천 년이 지났으니, 유구한 영겁으로 보면 천년도 수유던가!

고작 칠십 생애에 희로애락을 싣고 각축하다가 한움큼 부토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이라 생각하니, 의지 없는 나그네의 마음은 암연히 수수롭다.

-정비석 산정무한 中에서-









▲ 신라의 마지막 왕이었던 경순왕이 고려 태조 왕건에게 항복하자 마의(麻衣) 하나 걸치고 금강산으로 들어가 생을 마쳤다는 '마의태자'


신라의 마지막 임금은 제56대 경순왕.
견훤이 경애왕을 살해하고 그의 동생을 왕으로 임명하였으니 그가 바로 경순왕이다

그러나 신라의 합병을 호시탐탐 엿보는 견훤의 위험에서 벗어나고 백성들을 편하게 하며 나라를 되살린다는 명분아래 경순왕은 마침내 왕건에게 천년사직의 신라를 바치고 맏딸 낙랑공주와 혼인하며 고려의 귀족이 되었다.
마의태자는 "아버지, 저는 무릎 꿇지 않겠습니다. 나라의 흥망은 하늘의 뜻인데 어찌 왕건에게 바칩니까." 하며 머리를 깎고 금강산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다시한번 산정무한의 글귀를 찾아본다
 

  태자의 몸으로 마의(麻衣)를 걸치고 스스로 험산에 들어온 것은, 천 년 사직을 망쳐 버린 비통을 한몸에 짊어지려는 고행이었으리라.

울며 소맷귀 부여잡는 낙랑공주의 섬섬옥수를 뿌리치고 돌아서 입산할 때에, 대장부의 흉리가 어떠했을까?

흥망이 재천이라. 천운을 슬퍼한들 무엇하랴만, 사람에게는 스스로 신의가 있으니, 태자가 고행으로 창맹에게 베푸신 도타운 자혜가 천 년 후에 따습다.


  천 년 사직이 남가일몽이었고, 태자 가신 지 또다시 천 년이 지났으니, 유구한 영겁으로 보면 천년도 수유던가! 고작 칠십 생애에 희로애락을 싣고 각축하다가 한움큼 부토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이라 생각하니, 의지 없는 나그네의 마음은 암연히 수수롭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입장료가 없는 왕릉 

경/순/왕/릉/


세월은 가도 아픔은 남아


 경순왕은 제56대 신라의 마지막 왕(927~935 재위) 으로 성은 김(金)이름은 부(傅)이다.

신라 문성왕의 후손으로 927년 경애왕이 후백제 견휜의 습격을 받아 사망 한 후 왕위에 올랐다


  경순왕이 왕위에 오를 당시에는 국가와 후백제, 고려, 신라로 분열되어 있었고 특히, 후백제의 잦은 침략과 각 지방 호족들의 할거로 국가 기능이 마비된 상태였다.

이에 민심도 신흥 고려로 기울어 지자 경순왕은 무고한 백성들이 더 이상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막기위해 신하들과 큰 아들 일(鎰)의 반대를 무릅쓰고 고려 왕건에거 왕위를 물려준 후 왕위에서 물러났다

  이후 태자 일은 금강산으로 들어거 삼배옷(마의)을 입고 풀뿌리와 나무껍질을 먹으면서 살았다하여 후일 마의 (麻衣) 태자라고 부른다

 

  고려에 나라를 귀부한 경순왕은 태자보다 높은 지위인 <정숭공>에 봉해지는 한편 유화궁을 하사받고 경주를 식읍으로 받아 최초의 사심관으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태조 왕건의 딸 낙랑공주와 결혼하여 여러 자녀를 두었으며 귀부한지 43년 후인 978년 (고려 경종 3년) 세상을 떠났다.

 

 비보를 접한 신라유민들이 장사진을 이루며 경주에 장례를 모시고자 하였으나 고려 조정에서 '왕의 구(柩)는 백리 밖으로 나갈수 없다'는 법에 따라 이 곳 장단부 고랑포리 성거산에 왕의 예로 장례를 모셨다.  


경순왕릉 발견. 

경순왕의 사후 오랜 세월이 흐르몀서 잊혀졌던 것을 1747년(조선 영조 23) 후손들이 왕릉 주변에서 묘지석을 발견함으로서 되찾게 되었다.


927년 신라

후백제의 견훤이 경주를 습격하고 포석정에서 연회를 즐기던 신라 제55대 경애왕은 갑작스러운 침탈에 대비하지 못하고 죽는다.

이후 견훤은 직접 왕위에 오르지 않고 비어있는 왕위에 새로운 왕 김부를 앉혔다. 그가 바로 신라의 마지막 임금 경순왕이다.

김부는 화랑 김효종의 아들인데 김효종은 대야성 전투에서 견훤에 대항해 끝까지 저항하다 순국한 용사였다.




경순왕은 고려에 나라를 바친 신라 마지막 왕이다. 그래서 시호도 '공손하게 따른(敬順)' 왕이라 하였나보다

천년사직의 찬란했던 한 왕조를 적국에 바치고 적국에서 옹립왕으로 벼슬살이를 했던 초라했던 왕

천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의 생은 아픔으로 남아있다



  경순왕은 후백제의 침공으로 국권이 상실된 상태에서 침략자인 후백제의 견훤에 의해 옹립된 왕이다.

선왕 경애왕은 후백제로 인질로 잡혀가서 자결했고, 아들은 망국의 한을 곱씹으며 삼베옷을 입고 금강산으로 들어가 버렸다.

민심은 난폭한 견훤보다는 유화적인 왕건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국권이 상실되고 국기가 흩어져 버린 왕에게 왕관이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그저 백성들이 더 이상 전란에 희생되지 않고 침략자에게 핍박 받지 않는 것을 바라는 애절함이 왕좌를 지키는 한 가닥 명분이었을까?

그러나 그 명분도 힘 있는 쪽에 기대지 않으면 유지되기 어려운 상황에서 경순왕은 결국 고려에 항복하고 말았다. 




  신라 경순왕릉이 연천군 장남면 고랑강변 산 사면에 있는 경순왕릉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 김부의 무덤이 이곳에 있는 것은 곡절이 있다. 개경(지금의 개성)에 살던 경순왕이 사망하자 유족들과 가신들은 시신을 경주로 옮기려 했다.

하지만 경순왕이 신라 회복의 구심점이 될까 두려워한 고려조정은 왕족은 도성 100리를 벗어날 수 없다는 규정을 내세워 남하를 막았다.

그래서 시신은 개성에서 경주로 가는 도중에 있는 이곳 연천 장남면에 묻히게 됐다.


  경순왕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린다. 나라를 망하게 한 무능한 군주라는 평가에 대해 전쟁의 참화에서 백성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왕위까지 포기한 어진 임금이라는 주장이 맞선다.


 그나마 망국 최후의 군주 가운데 경순왕에 대한 평가가 가장 낫다는 점이 흥미롭다.

삼국시대 이후로 왕조의 마지막 왕은 모두 6명인데 고구려 보장왕, 백제 의자왕, 신라 경순왕, 고려 공양왕, 조선 순종 등이다. 보장왕과 의자왕은 중국(당)에 끌려가 그곳에 무덤이 있고 공양왕릉은 고양에, 순종릉은 남양주에 있다.


  자발적으로 왕위와 국가를 가져다 바친 사람과 억지로 빼앗긴 사람의 차이일까. 김부는 935년 신라 왕위에서 폐위된 후에도 43년을 더 살았다. 




유럽의 정원 건축가들이 조선의 왕릉을 "신들의 정원"이라고 부를 정도로 자연 경관이 아름답고 탁 트인 공간이 일품이라 말했다.

풍수를 굳이 몰라도 이곳 역시 남쪽 산사면에 임진강을 내려보며 따스한 가을 햇살을 받으며 아늑하게 자리하고 있다.


▲ 신라 경주와는 너무 멀리 떨어진 이곳에 묻힌 신라 마지막 임금 경순왕 ⓒ 2016 한국의산천 


경기 연천군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 바로 아래에 자리한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릉.

능의 주인공은 신라 임금이며, 왕릉은 고려 무덤이다. 비석은 조선 때 세웠다.

능은 오랫동안 잊혀져오다 1747년(영조 23) 조선시대에 후손들이 찾아냈다. 신라의 왕릉 가운데 경주지역을 벗어나 경기도에 있는 유일한 신라왕릉이다.

그 당시 후손들이 영조 임금에게 "제사를 지내게 해달라" 청원을 하면서 비석도 세웠다.


▲ 남북을 가르는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에서 얼마떨어지지 않은 묻혀있는 경순왕릉 ⓒ 2016 한국의산천

고려 태조에 의탁해 살다 객지에 묻힌 경순왕의 무덤 주변에는 평일이라 그런지 가을 바람속에 쓸쓸함이 감돌고 있다.

비석에는 총알 자국이 선명하다. 뒤를 돌아보면 묘 앞 너른 터에 천년의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선선한 가을바람속에 잔듸가 파랗다





[민통선 문화유산 기행]경순왕이 고랑포에 묻힌 이유

입력 2007.03.19. 18:59 수정 2007.03.19. 18:59 댓글 0개

 
"신의 선조인 경순왕의 능묘를 오래전에 잃어버렸습니다. 지금 장단에서 그 지석 및 신도비가 나왔으니…."(조선왕조실록)

1746년 10월14일이었다. 경순왕의 후손인 김응호가 상소를 올렸다. 임진왜란 이후 실전(失傳)된 조상의 무덤을 찾았기 때문이다. 영조는 "비지(碑誌)의 인본(印本)을 확인해보니 경순왕릉이 틀림없다"면서 다시 무덤을 조성했다.

그런데 왜 경순왕은 경주가 아니라 고랑포구가 눈 앞에 보이는 야트마한 산에 묻혔을까. 속전인 계림문헌록을 보자.

"왕의 훙거소식(978년 4월4일)을 듣고 신라유민들이 장사진을 이뤄 경주로 능지를 잡았다. 유거민들 전원이 등에 양식과 침구일체를 지고 다 따라 나서자 송도가 텅빌 정도였다." 그러자 고려 조정은 긴급군신회의를 연 뒤 구실을 찾는다.

"왕의 운구는 100리를 넘지 못한다(王柩不車百里外)."

고려로서는 참으로 '절묘한 구실'을 찾은 것이다. '왕의 대우'를 보장하는 대가로 운구의 임진강 도하를 막은 것이다. 왕의 장례를 옛 신라 도읍인 경주에서 치를 경우 그곳 민심의 향배를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하나 지금은 남방한계선과 불과 50여m 떨어진 궁벽한 곳이지만 지금의 잣대로 경순왕릉과, 그 코앞에 있는 고랑포 포구를 평가하면 안된다.

임진강 상류로 가는 마지막 포구였던 고랑포는 뭍과 바다의 산물이 모이는 집산지였다. 일제 때 화신백화점 분점이 이곳에 있었을 정도다. 고려초에도 고랑포의 위상은 대단했을 것이다. 왕건이 항복한 경순왕을 맞이한 곳이 바로 고랑포일 가능성이 높은 이유다.


"(경순)왕이 백관을 이끌고 서울을 출발했다. 수레와 보배로 장식한 말이 30여리를 이어 구경하는 사람들이 담을 두른 듯했다. 태조가 교외에 나가 위로하고…."

30여리에 달하는 그 대규모 인원이 임진강을 도하해서 개경까지 가려면 이곳 밖에는 통로가 없었다.

또하나 전설에 따르면 향수병에 걸린 경순왕이 고향을 바라보면서 눈물흘렸다고 해서 이름붙은 도라산(都羅山)이 이곳과 멀지 않다. 경순왕은 고향땅을 향해 건너는 황포돛배를 바라보며, 지금도 향수를 달래고 있을 터이다. 〈이우형|국방문화재연구원 연구원〉

- 경향신문,




















역사를 지켜낸 경기도 산성 / 연천 호로고루

 

평양-한성 길목 요충지… 고구려 남진 최전방 사령부
여울목에서 배 타지 않고 임진강 도하 가능



 호로고루는 6세기 중엽부터 고구려가 멸망하는 7세기 후반까지 약 120여년 동안 임진강 유역을 방어하는 고구려의 총 사령부와 같은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곳으로 여겨진다. 이곳에서 출토된 다양한 유물은 당시 호로고루의 위상과 고구려 사람들의 생활상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윤미숙 연천군청 학예연구사 (경기일보 참고)



▲ 호로고루를 비롯한 연천의 3대성은 삼각형의 강안 평지성이라고 하는 전국에서 유례가 없는 독특한 형태의 성곽이다.


  호로고루는 임진강과 호로고루 북동쪽에서 서쪽으로 흘러 임진강에 유입되는 소하천에 의해 형성된 높이 28m의 뾰족한 지형 위에 평지와 연결되는 동쪽 만을 석축해 성을 완성했다.


  성벽의 전체 둘레는 401m 정도이며 그중 남벽은 161.9m, 북벽은 146m 그리고 동벽은 93.1m로 성내부 면적은 6천㎡이다.

임진강과 접하고 있는 높이 약 20m의 주상절리 절벽은 자연 성벽역할을 하며 평지와 연결되는 동쪽 성벽은 여울목이라는 입지와 함께 천혜의 요새를 구축했다.

동벽의 석축 축조 방법을 통해 당시 동아시아 최고의 석축 기술자였던 고구려의 성 축조기술을 확인할 수 있다.




  호로고루는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원당리 임진강 북쪽 현무암 수직단애 위에 위치한 고구려 성이다.

호로고루 성벽위에 오르면 여전히 주변 지세가 한눈에 들어오고 남쪽으로는 감악산과 신라의 칠중성을 마주한다.


  호로고루란 이름은 이 일대 임진강을 일컫는 호로탄이라고 하는 명칭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삼국시대 이래 이 지역은 표하(瓢河), 호로하(瓠瀘河), 호로탄(瓠瀘灘) 등으로 불리어 왔는데 고구려 옛말로 “고을”을 뜻하는 홀(호로)과 “성”을 뜻하는 고루가 합쳐져 호로하 근처에 있는 옛 성이라는 뜻으로 불려진 것으로 이해된다.


<삼국사기>에는 이 호로하 부근에서 벌어진 고구려와 신라, 신라와 당나라의 전투기록이 여러 차례 기록돼 있다.




전략적 요충지 호로고루

  임진강 하류 서해안에서부터 호로고루가 위치한 고랑포 지역까지는 조수간만의 영향을 받는 곳으로 수심이 깊어 배를 타야만 강을 건널 수 있다.

하지만 호로고루 부근에서 만나는 여울목은 수심이 낮아 임진강 하류방면에서 배를 타지 않고 강을 건널 수 있는 곳으로 육로를 통해 평양에서 한성으로 가는 최단거리상의 군사적 요충지에 해당한다.

따라서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를 거쳐 조선 초기까지도 평양과 한성을 이어주는 간선도로로서 호로고루 앞의 여울목을 건너 의정부 방면으로 진격하는 장단도로가 주로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호로고루는 교통의 요지로서 군사적 거점이었을 뿐만 아니라 고려시대에는 지방을 통치하는 행정 치소로서도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도 이 지역은 호로탄이라 하여 장단을 통해 개성으로 들어가는 주요 길목이었으며 일제 강점기에는 이 여울을 따라 우마차가 지날 정도로 육지처럼 활용됐다. 한편 한국전쟁 당시에는 북한군의 주력 전차부대가 개성을 통과해 문산쪽으로 직진하지 않고 우회해 이 여울을 건너 남하하기도 했다.




바람이 분다

황금 들녘을 스치는 선선한 바람이 분다

내 가슴에 스치는 이 가을 바람은 진정한 행복이어라.



  자전거를 타고 저어갈 때, 세상의 길들은 몸 속으로 흘러 들어온다. 강물이 생사가 명멸하는 시간 속을 흐르면서 낡은 시간의 흔적을 물 위에 남기지 않듯이, 자전거를 저어갈 때 25,000분의 1 지도 위에 머리카락처럼 표기된 지방도·우마차로·소로·임도·등산로들은 몸 속으로 흘러 들어오고 몸 밖으로 흘러 나간다.



  흘러 오고 흘러 가는 길 위에서 몸은 한없이 열리고, 열린 몸이 다시 몸을 이끌고 나아간다.

구르는 바퀴 위에서, 몸은 낡은 시간의 몸이 아니고 생사가 명멸하는 현재의 몸이다.


  이끄는 몸과 이끌리는 몸이 현재의 몸 속에서 합쳐지면서 자전거는 앞으로 나아가고, 가려는 몸과 가지 못하는 몸이 화해하는 저녁 무렵의 산 속 오르막길 위에서 자전거는 멈춘다. 그 나아감과 멈춤이 오직 한 몸의 일이어서, 자전거는 땅 위의 일엽편주처럼 외롭고 새롭다.


▲ 정면으로 보이는 감악산 ⓒ 2016 한국의산천  


  자전거를 타고 저어갈 때, 몸은 세상의 길 위로 흘러나간다. 구르는 바퀴 위에서 몸과 길은 순결한 아날로그 방식으로 연결되는데, 몸과 길 사이에 엔진이 없는 것은 자전거의 축복이다. 그러므로 자전거는 몸이 확인할 수 없는 길을 가지 못하고, 몸이 갈 수 없는 길을 갈 수 없지만, 엔진이 갈 수 없는 모든 길을 간다.


 

    ‘신비'라는 말은 머뭇거려지지만, 기진한 삶 속에도 신비는 있다.

  오르막길 체인의 끊어질 듯한 마디마디에서, 기어의 톱니에서, 뒷바퀴 구동축 베어링에서, 생의 신비는 반짝이면서 부서지고 새롭게 태어나서 흐르고 구른다.

땅 위의 모든 길을 다 갈 수 없고 땅 위의 모든 산맥을 다 넘을 수 없다 해도, 살아서 몸으로 바퀴를 굴려 나아가는 일은 복되다. (김훈 자전거 여행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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