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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MTB등산여행

석파정 부암동 대원군 별장

by 한국의산천 2008. 2. 17.

석파정(石坡亭

현재 출입금지: 출입구가 가림막으로 완전 봉쇄되어있음) 

서울 종로구 부암동 산 16-1번지 인왕산 넓은 산자락에는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26호인 석파정(石坡亭)이 자리하고 있다.

[답사·촬영.2008. 2. 17일 일요일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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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파정 전경 ⓒ 2008 한국의산천

자하문고개에서 상명대학교 방향으로 내려가면 자하문 밖 한길에서 서쪽으로 조금 들어간 부암동 산 16-1번지 넓은 터전에는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26호인 석파정(石坡亭)이 자리하고 있다. 주위의 수려한 경관과 함께 정교 화려한 정자와 건물이 어울려 조선말기의 대표적인 별장으로 수려한 산수와 계곡을 배경으로 거암(巨巖)과 오래된 장송(長松)이 많아 세검정 자하문 밖으로 통칭될 정도로 한양 도성의 경승지로 꼽혔던 곳이다. 
석파정은 철종 때 영의정을 지낸 김흥근(金興根)의 별장이었다. 바위에 삼계동(三溪洞)이란 글자를 새겨 놓아 삼계동정사(三溪洞精舍)라 하였는데, 흥선대원군이 집권한 후 별장을 차지하면서 바위산이었으므로 대원군이 아호를 석파(石坡)라 하고 정자이름을 석파정(石坡亭)이라 하였다.

경내에는 안태각(安泰閣), 낙안당(樂安堂), 망원정(望遠亭), 유수성중관풍루(流水聲中觀楓樓) 등 7동의 주요 건물이 남아 있으며, 뜰에는 오래 된 소나무들이 차일처럼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사랑채는 1958년 종로구 홍지동으로 옮겨져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23호로 지정되었다.  

▲ 석파정 전면 ⓒ 2008 한국의산천

석파정의 원래 소유자는 안동김씨의 세도가 김흥근이었다. 아버지 김명순(金明淳)이 순조의 장인인 영안부원군 김조순(金祖淳)과 사촌간이며, 일찍이 벼슬에 올라 예조판서와 경상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성격이 격하고 방자한 면이 있어 한 때 탄핵을 받아 광양으로 유배당하기까지 하였다. 그 후 대원군이 집권의 야욕을 보이자 조의석상(朝議席上)에서 공개적으로 그를 비난함으로서 대원군의 미움을 사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대원군이 집권한 후 많은 토지를 빼앗겼다.

특히 그가 소유했던 석파정은 장안에서 경치가 좋은 곳으로 이름이 나 있어서 대원군이 팔기를 청하였으나 끝내 팔지 않았다. 이에 대원군이 한가지 꾀를 내어 그에게 하룻동안 석파정을 빌려 줄 것을 간청하여 허락받았는데, 대원군은 그의 아들 고종을 대동하고 다녀 갔다. 국법에 임금이 와서 묵고 간 곳에는 신하가 감히 다시 찾을 수 없게 되어 있었으므로 결국 석파정은 대원군의 차지가 되어버렸다. 

▲ 석파정 전면 ⓒ 2008 한국의산천

조선말의 우국지사 황현(黃玹, 1855∼1910)의 '매천야록' 권1에는 석파정의 내력이 적혀 있다. 고종이 즉위하자 김흥근은 흥선 대원군이 정치를 간섭하지 못하게 하였다. 하지만, 곧 대권을 손에 넣은 흥선대원군은 김흥근을 미워하며 그의 재산을 빼앗기 시작했다. 삼계동에 있는 김흥근의 별장은 한성에서 가장 유명한 정원이었는데, 하루는 흥선대원군이 그 별장을 팔 것을 간청하였으나 김흥근이 듣지 않자 하루만 빌려 놀게 해달라고 하였다. 서울의 옛 풍습에 따라 정원을 가진 사람으로서 빌려주지 않을 수 없어 김흥근이 억지 승락을 하자 흥선대원군은 고종이 행차하도록 권하고 자신도 따라갔다. 그 후 국왕이 거처한 곳을 신하가 감히 거처할 수 없는 곳으로 생각하고 김흥근이 다시는 삼계동에 가지 않게 되자 결국 이 별장은 운현궁의 소유물이 되고 말았다고 한다. 그 후 석파정은 흥선대원군의 후손인 이희(李熹), 이준(李埈), 이우의 별장으로 세습되며 사용되어오다가 6·25 전쟁 후에는 천주교가 경영하는 코롬바고아원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 '소수운렴암(巢水雲簾菴, 물 속에 깃들여 있으면서 구름으로 발을 친 암자)' 권상하(權尙夏, 1641∼1721)의 글씨 ⓒ 2008 한국의산천 

 

▲노송(老松, 서울특별시 지정보호수 제60호, 1968. 7. 3) ⓒ 2008 한국의산천

▲ 노송 아래에 있는 커다란 맷돌 ⓒ 2008 한국의산천

 

▲ 三溪洞 각자가 새겨진 바위 ⓒ 2008 한국의산천

사랑채와 '三溪洞'이 새겨진 바위 사이에 위치했던 건물은 서예가 소전(素筌) 손재형(孫在馨)이 1958년 종로구 홍지동 125번지로 옮겨갔는데, 그 후 1974년 '대원군별장'이라는 별도의 이름으로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3호로 지정되었다. (아래 웹페이지 석파랑 참고)

▲ 왼쪽이 사랑채 오른쪽이 안채이다 ⓒ 2008 한국의산천 

석파정 입구를 들어서면 왼편으로는 인왕산의 자연 암석을 타고 흐르는 계곡이 있으며, 이 계곡의 물이 흘러들어 연못을 이루는 곳 바위 면에 '소수운렴암(巢水雲簾菴, 물 속에 깃들여 있으면서 구름으로 발을 친 암자)'이라고 쓴 권상하(權尙夏, 1641∼1721)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 계곡을 왼편으로 끼고 경사진 언덕을 조금 올라가면 석파정 건물들이 나타난다.

▲ 사랑채 후원 ⓒ 2008 한국의산천

석파정에는 현재 전면 오른쪽인 동쪽에는 안채, 그 서쪽에는 사랑채, 안채 뒤 언덕 위에는 별채 등 건물들이 있다. 사랑채 서쪽 뜰에는 잘생긴 노송(老松, 서울특별시 지정보호수 제60호, 1968. 7. 3)이 옆으로 가지를 길게 펼치며 차일 치듯 드리워져 있고, 그 뒤 언덕 위 바위에 '三溪洞'이라 새겨져 있으며, 노송이 있는 곳에서 서쪽으로 더 들어가면 계곡 속에 정자가 있다. 안채 맞은 편 언덕 위에는 망원정(望遠亭) 터가 남아 있고, 사랑채와 '三溪洞'이 새겨진 바위 사이에 위치했던 건물은 서예가 소전(素筌) 손재형(孫在馨)이 1958년 종로구 홍지동 125번지로 옮겨갔는데, 그 후 1974년 '대원군별장'이라는 별도의 이름으로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3호로 지정되었다.
남향〔癸坐丁向〕하며 'ㅁ'자형 평면으로 구성된 안채는 건물 서남쪽 모퉁이에 낸 대문간을 통해 동북쪽으로 한번 꺾여 안마당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 안마당에서 봐서 안채는 동서 방향으로 5칸, 남북 방향으로 4칸 규모로 조영되어 있고, 안마당 동남쪽에는 동쪽 밖으로 통하는 편문이 나있다.


사랑채는 안채 서쪽에 역(逆)'ㄱ'자형 평면을 이루며 위치하였는데, 세벌대 화강석 기단 위에 정면 4칸, 측면 2칸 반 규모로 지은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왼쪽 끝 칸 전면에 누마루 1칸이 돌출되었는데, 뒤로 이어지는 2칸 반 모두 누마루이며 아래 부분은 벽을 막고 문을 내어 광으로 쓰고 있다. 정면에 유리문을 내어 원형에서 변형된 모습을 하고 있다.
안채 언덕 뒤에 있는 별채는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난 문을 통해 왼편으로 담을 끼고 계단을 오르다가 별채 문을 지나면 그 오른쪽 앞에 자리잡고 있다. 화강석 기단 위에 선 정면 6칸, 측면 2칸, 홑처마, 팔작지붕의 5량가 건물로, 이곳에 서면 앞으로 멀리 인왕산과 북악의 경치가 한눈에 들어온다.


사랑채에서 서쪽으로 조금 들어가면 나오는 유수성중관풍루(流水聲中觀風樓) 는 작은 계곡과 계곡 사이에 세워졌는데, 사방 3칸 규모의 사모지붕 건물이다. 좌우 툇칸 기둥 간격이 매우 좁고, 사각기둥의 부재가 매우 가늘어서 마치 사방 1칸 정자 같이 보인다. 가운데 칸은 모두 개방되었으나, 툇칸은 모두 창호무늬처럼 꾸며 공간이 투과되게 하였다. 기둥 위에는 자그마한 익공을 결구하여 건물 전체가 하나의 공예품처럼 느껴지게 조영되었다. 지붕은 기와를 씌우지 않고 동판을 얹었으며, 장대석으로 만든 누대(樓臺)의 한 면에는 정자로 들어갈 수 있도록 '之'자 모양을 하며 세 번 꺾인 돌다리를 계곡 위에 설치했다. 건물 바닥은 그 아래에 사면으로 쌓은 전벽돌 아취 벽 위에 길게 걸친 화강석으로 되어 있다.
이 정자는 홍지동으로 이건된 '대원군별장'과 함께 조선말 유입된 청(淸)나라식 건축의 한 유형을 보여주며, 이 일대의 계곡과 소나무를 중심으로 조성된 정원은 전통적인 산수정원에 인공미(人工美)를 가미한 예를 보여준다.  

 

▲ 누대로 오르는 길 ⓒ 2008 한국의산천

석파장은 크게 4채의 집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랑채와 안채, 누대와 정자로 구분 할 수 가 있다.  

▲ 건물 제일 뒤 높은 곳에 자리한 누대 ⓒ 2008 한국의산천 

▲ 누대에서 내려 본 왼쪽이 안채 오른쪽이 사랑채 ⓒ 2008 한국의산천 

사랑채와 안채 사이로 누대로 오르는 통로가 있으며 아치 모양의 문을 만들고 채색 벽돌과 학 모양 벽돌로 장식하고 있다. 지붕들이 중첩하고 있는 그 가운데로 아치 모양의 문이 예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 석파정 전경 ⓒ 2008 한국의산천 

▲ 석파정 전경 ⓒ 2008 한국의산천

멀리 왼쪽으로 인왕산이 정상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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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 한국의산천

과거의 사실이 햇빛을 받으면 역사가 되고 달빛을 받으면 신화가 된다.

역사란 긴 세월에 걸쳐서 쌓여진 금맥(金脈)이다. 그 금맥은 미래를 내다볼수있는 황금사다리가 되어준다.

과거가 없는 현재가 없고 역사가 없는 미래를 생각 할 수는 없다. 역사를 단순히 지나간 일로 치부할 때 미래는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조상의 역사와 문화유산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역사를 바로 알고 우리 후손에게 물려 줄때에 우리의 미래는 빛날것이다.[한국의산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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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족불욕(知足不辱)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지지불태(知止不殆)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가이장구(可以長久) 오래도록 편안할 것이다.  - 노자 도덕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