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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문화문학음악

수덕여관 고암 이응노

by 한국의산천 2008. 1. 1.

2008년 1월 1일 첫 산행지와 첫 답사지.

복원된 수덕여관과 홍성 용봉산 [글,사진 한국의산천 우관동]

 

눈이 그립고 계속 미뤄진 답사지가 있기에 새해 아침 아내와 함께 서산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산행지는 용봉산,

유적 답사지는 이번에 복원된 고암 이응로선생께서 매입하여 머무르신 고택 수덕여관.

 

참고

수덕여관 못다한 이야기  >>> https://koreasan.tistory.com/13438954

 

수덕여관 못다한 이야기

수덕여관 못다한 이야기 [글,사진, 기사참고 우관동] 부제: 신시대를 연 선각자. 질곡의 세월을 모질게 살아간 아름다운 여성이야기 아래의 글과 이어지는 글입니다. 새털같이 수많은 날을 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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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눈 덮힌 용봉산 보기 >>> https://koreasan.tistory.com/13445587

 

용봉산

2008년 1월 1일 올해 첫 산행지와 첫 답사지. 홍성 용봉산과 복원된 수덕여관 [글,사진 한국의산천 우관동] 눈이 그립고 또한 계속 미뤄진 답사지가 있기에 새해 아침 서산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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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덕여관에는 일련의 시나리오처럼 연결되는 인물이 슬픈 추억처럼 남아있는 곳이다.

일엽스님 그리고 나혜석, 박귀희여사(이응로 화백의 본부인)과 이응노화백, 일엽스님과 일본인 사이에 난 김태신(일당스님).현재 모든이는 타계하시고 일당스님(85세)만이 김천 직지사(중암)에 계십니다( 2008. 1월 1일 직지사 종무소와 전화통화, 확인-한국의산천-)

 

2007년 12월 31일 수덕사에 전화를 걸고 기상 상태를 확인했다.(현재의 날씨는 현지 확인이 제일 정확하다)

눈이 많이 쌓이고 12월 31일 밤 현재도 눈이 내리고 있다는 내용을 전달 받았다.그리고 준비를 했다.

차량은 사륜구동이지만 체인준비. 그리고 윈드재킷, 스페츠, 아이젠, 장갑, 손난로, 보온병에 뜨거운 커피, 간식, 떡 등등... 

 

 

▲ 서해안 고속도로 해미IC에서 나와 덕산 방향 수덕사로 이동중에 만나는 터널 ⓒ 2008. 1. 1일 한국의산천 우관동

 

서산 가야산과 삼준산으로 이어지는 능선 아래 있는 터널이다. 살얼음이 있기에 서행운전을 하여야 한다.

아침 5시에 출발 서해대교에서 일출 사진을 촬영하려 했으나 눈발이 거세지기에 일출보기를 단념하고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충남 예산은 칠장산에서 이어지는 금북정맥 산줄기가 지나며 널찍한 내포평야에 터를 잡은 고을이다.

서쪽으로는 금북정맥의 맹주인 가야산(678m)과 덕숭산(495m),성왕산이 불쑥 솟아 있으나 전체적으로는 부드러운 산세를 보이며 내포지방의 여느 고을과 마찬가지로 비산비야의 들판이 넉넉하다. 

 

서해안고속도로 해미 나들목으로 나와 45번 국도를 타고 덕산방면으로 20분쯤 달리면 덕숭산 기슭에 자리잡은 수덕사가 반긴다.

일주문 근처의 수덕여관은 우리 미술의 우수성을 세계 속에 드높인 고암 이응노(1904~1989) 화백 사적지. 고암은 이 여관을 구입한 1944년부터 프랑스로 건너가기 전인 1959년까지 이곳에 머물면서 작품 활동을 했다.

수덕여관 앞의 바위조각은 1969년 동백림 사건으로 귀국했을 때 삼라만상의 성함과 쇠함을 추상화하여 표현한 작품이다.

 

    ▲ 덕산방향에서 육괴정 고개를 넘어 미끄러운 길을 조심스럽게 내려오면 수덕사 입구가 나온다. ⓒ 2008 한국의산천 

  ▲ 수덕사 일주문 (일주문 바로 왼편에 수덕여관이 자리하고 있다) ⓒ 2008 한국의산천

 ▲ 2007. 10. 5일 새로 복원 준공된 수덕여관  ⓒ 2008 한국의산천

 

남북 분단, 부부의 情, 부자의 情, 이 모든것이 세월은 가도 아픔은 남아....     

고암이 1944년 구입해 1959년 프랑스로 가기 전까지 거처하며 수덕사 일대 풍경을 화폭에 옮긴 곳으로 유명한 수덕여관(도지정 기념물)이 복원되었다.(전시공간 또는 템풀스테이 장소로 활용될 예정이다)   

 

이응노 화백의 본부인 박귀희(朴貴嬉) 여사는 2001년 2월 24일 밤 10시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에 있는 장조카 집에서 한많은 세상을 떠나셨다. 수덕여관은 많은 우여곡절 끝에 수덕사로 소유권이 이전되었다. 

초가집의 그윽한 운치나 객수가 아니더라도, 수덕여관에 녹아 있는 이런 애절한 사연을 알고난 뒤라면 누구나 잠 못 이루고 뒤척거리는 밤을 보내게 된다

 

 

▲ 연초에 수덕여관을 찾았을때는 보수중이었다.(2007. 1. 28일 촬영) ⓒ 2008 한국의산천

 

수덕여관과 이응노 화백 

아주 오래전...고교시절 가벼운 차림으로 텐트와 배낭하나 달랑 메고 영등포에서 장항선을 타고 예산 수덕사로 향했다.  수덕사 역에서 버스를 타고 먼지가 풀풀나는 비포장 길을 털털거리고 달려 수덕사에 도착했다.

 

그러니깐 그때가...여름 방학이 끝나갈 무렵, 수덕여관에 방을 잡았다. 그곳에서 하룻밤을 자는데 혼자 잠자기가 적적하여 그 집에 있는 10살 정도의 아이의 방학 숙제도 해주고 같이 잠을 잤다. 

 

연로한 분이 계셨는데 어찌나 친절하시던지 하룻밤 방값만 계산을 한 후 밥값도 안받고 그냥 이틀을 머물고 왔다.

그곳에서 이틀을 머무른 후 집으로 돌아오고, 그후 그 아이의 큰 누나 쯤 되는 "정"某 씨와 펜팔을 하게 되었다. (나 보다 두살 아래...)

 군대를 다녀오고 오랜 시간이 흘러 그곳이 그 유명한 수덕 여관이란 것을 알았다. 

다리를 건너 들어가면 그곳에는 일엽스님의 이야기가 있고 그와 동갑내기인 나혜석의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며 한국 화단에 큰 족적을 남긴 이응노 화백과 망부가를 부른 박귀희 여사의 이야기가 가슴 짠하게 베어있는 곳이다.  

 

 

수덕여관에는 일련의 시나리오처럼 연결되는 인물이 슬픈 추억처럼 남아있는 곳이다.

일엽스님 그리고 나혜석, 박귀희(이응로 화백의 전처)과 이응로화백, 일엽스님과 일본인 사이에 난 김태신(일당스님).현재 모든이는 타계하시고 일당스님(85세)만이 김천 직지사(중암)에 계십니다( 2008. 1월 1일 직지사 종무소와 전화통화, 확인-한국의산천

 ▲ 눈이 약 30cm 정도 쌓여있다 ⓒ 2008 한국의산천

 

이 수덕교를 통하여 수덕 여관으로 들어간다. 당시 수덕 여관 전면은 지금처럼 허리춤 높이의 쪽 마루와 난간이 있었고 안에는 방이 여럿 있었는데 대문에서 들어가서 왼쪽 두번째방에 주인이 기거하고 있었다. 당시 이곳에서는 산채정식이 유명하였다.

 

▲ 2008년 1월 1일 이른 아침 눈까지 내려 어두운 상태. 노출 �추기가 어려웠다. ⓒ 2008 한국의산천 

 

▲ 지금의 옥호는 이응노선생께서 쓰신 수덕여관을 달았다. ⓒ 2008 한국의산천   

 

▲ 너무 이른시간이라 대문이 닫혀있어 옆 마당쪽으로 돌아드니 이응노선생님께서 마침 화분의 꽃을 손보고 계셨다. ⓒ 2008 한국의산천  

깜짝 놀랐다 살아계신듯한 모습의 포스터가 그대로 생화 화분과 겹쳐져서 생생한 화면이 만들어졌다.  

이응노 선생은 1989년 1월 19일 85세의 고령으로 프랑스 파리에서 갑작스러운 호흡장애로 타계하셨다.

 

이응노(李應魯) 1904∼1989. [충청남도 홍성출생. 화가. 본관은 전의(全義), 호는 죽사(竹史), 고암(顧菴)] 

1924년 서울로 올라와 김규진(金圭鎭)에게 묵화를 사사하여 그해부터 조선미술전람회에 묵죽(墨竹)을 비롯하여 묵매(墨梅),묵란(墨蘭) 등 사군자의 그림으로 거듭 입선하고, 1938년부터는 수묵담채의 사실적 풍경화를 그리기 시작하였다.


1944년까지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 계속 입선과 특선에 오르며 전통화단에 뚜렷이 진출하였다.
1938년 새로운 그림수업을 위하여 일본에 건너가 동경에 머무르면서 가와바타화학교(川端畵學校)와 혼고회화연구소(本鄕繪畵硏究所)에서 일본화법과 양화의 기초를 익히며 그림의 기량을 넓혔다. 그러면서 1939년부터 1944년까지 동경의 일본화원전에 참가, 입선과 특선을 하는 작품활동을 보였다.
 

1945년 815광복 직전에 귀국하여 배렴(裵濂),장우성(張遇聖),김영기(金永基),이유태(李惟台),조중현(趙重顯) 등과 전통회화의 새로운 방향을 탐구한다는 모임으로 '단구미술원'을 조직하여 1946년부터 동인전을 가졌고, 조선미술가협회 상임위원이 되기도 하였다.


1957년 조선일보사 주최 제1회 현대작가미술전에 참가하고, 다음해에도 초대를 받는 등 현대적인 작가상을 스스로 확립하다가, 1958년 국제적 도전으로 부부관계였던 제자 화가 박인경(朴仁京)과 더불어 독일을 거쳐 프랑스의 파리에 정착, 그간의 수묵화 한계를 과감히 벗어난 서구 미학의 콜라즈(collage)로 파격적인 변신을 나타내었다.
 

서울에서 가져간 화선지 외에 버려진 모든 종이를 재질삼아 콜라즈로 형상시키고 바탕도 무엇이든 이용한 그 실험적인 조형행위는 먹물 또는 은근한 색상 부여로 동양적인 정신성과 은밀한 형상창조로 이내 국제적 평가와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 작품들은 1965년 무렵까지 ‘콩포지시옹(Composotion)’이라는 단일명제가 붙여졌다. 파리와 독일·스위스·덴마크 등지의 여러 화랑 및 미술관에서 그 작품들이 초대전시되었다.


그뒤의 약 10년간을 작가 스스로 ‘사의적 추상시기(寫意的抽象時期)’, 그리고 그에 이은 1980년대 초기까지를 ‘서예적 추상시기(書藝的抽象時期 : 흔히 문자추상이라 한다.)’로 작화(作畵) 의도와 조형적 표상성의 창조적 변화와 집중성을 나타내었다. 그 모두가 동양적 표현정신과 밀착된 특질로서 국제적 위상을 실현시켰다.


그러나 6·25 때 월북한 아들 관계로 베를린에서 북한 공작원과 만난 것이 〈반공법〉에 위반되어 1967년 서울로 유인된 뒤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투옥되었다가 1969년 특별사면되어 파리로 돌아갔다.


그러나 1977년에도 파리에서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영화배우 윤정희부부의 북한납치미수사건의 배후로 몰려 곤욕을 치른 뒤, 남한과의 관계를 단절하다가 1983년 프랑스에 귀화하였다. 그리고 1981년부터는 남한의 민주화투쟁을 주제로 삼은 '시위 군중' 소재의 대대적인 수묵화 연작에 주로 열중하였다  

 

 

▲ 대문에서 들어가사 오른쪽 제일 끝방 ⓒ 2008 한국의산천   

 

객수(客愁)에 잠 못 이루며 뒤척이던 어느 겨울 밤, 문득 방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니 탐스런 함박눈이 펑펑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굵은 함박 눈이 하얗게 내려앉은 좁은 마당과 봉긋한 초가지붕은 어느새 둥덩산같이 솟아올랐다.

 

매화꽃 같은 눈송이가 하염없이 휘날리는 밤의 정취에 몰입한 나머지 겨울날의 살을 에는 듯한 한기(寒氣)조차 느낄 겨를이 없었다. 객수로 뒤척이던 차에 눈 구경까지 하느라 수덕여관에서의 그날 밤은 거의 뜬눈으로 지새우고 말았다. 그 뒤로는 수덕사를 생각할라치면 절 자체보다도 수덕여관이 먼저 떠오르곤 한다. 

 

수덕여관은 그 독특한 외형으로 인해 길손의 마음을 잡아끈다. 위압적인 콘크리트 구조물의 여느 여관들과는 달리 초가지붕을 얹고 있어 옛날의 객줏집이나 시골의 민가를 보는 듯하다. 해방된 뒤로 여태까지 문짝 하나 허투루 고쳐 달지 않고 고집스럽게 옛 모습을 지켜왔다고 한다. 더구나 이곳에는 고암 이응노(1905~1992) 화백의 미망인인 박귀희씨(89세)의 애절한 망부(望夫)의 사연이 아로새겨져 있어 사람들의 가슴을 찡하게 만든다.
  

충남 예산 출신인 고암은 세계 화단의 주목을 받았던 현대 한국화의 거장이다. 그는 그림에 대한 소질을 타고났으나 화업(畵業)을 천하게 여기는 양반집의 가풍으로 인해 제대로 그림 공부를 할 수가 없었다. 17세때에 집을 뛰쳐나온 고암은 각처를 두루 돌아다니며 그림 공부를 하였는데 한때는 해강 김규진의 문하에 있기도 했다. 마침내 제10회 선전(鮮展)에서 '소낙비가 쏟아지는 날의 대밭'이라는 작품으로 특선을 하였고, 그 뒤에 일본으로 건너가 본격적으로 그림 공부를 하였다.

해방이 되자 고향으로 돌아온 고암은 수덕여관을 사서 그곳에 잠시 머물렀다. 그러나 여관은 부인 박귀희씨가 맡아 운영하였고, 고암은 그림을 그리러 다닌다는 구실로 집을 떠나 있는 날이 더 많았다. 그리고 며칠 만에 돌아와서는 여관 손님처럼 머물다가 다시 훌쩍 떠나곤 했다. 

 

당시 이미 화단의 주목을 받고 있던 고암은 서울로 올라가 미술대 교수로 재직하였다. 고향에 본부인을 둔 채 서울 생활을 하던 그는 이화여대 제자였던 박인경씨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1957년 고암은 자신의 예술세계를 더 넓은 무대에서 펼쳐보기 위해 박인경씨와 함께 프랑스 파리로 건너갔다. 그때부터 박귀희여사의 기약없는 기다림과 망부의 세월이 시작된다.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난 1968년에 박씨 할머니는 고암과 짧은 재회의 시간을 갖게 된다. 고암이 이른바 '동백림(동베를린 공작단) 사건'에 연루되어 국내에서 옥살이를 하게 된 것이다. 친자식이 없었던 고암은 양자 둘을 두었는데, 그 중 장남이 6·25 때에 납북되었다.

파리에 머무르던 고암은 장남이 북한에 살아 있음을 알고 양아들을 만나기 위해 윤이상과 함께 북한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 그 일이 동백림사건의 빌미가 되었던 것이다. 대전교도소와 전주교도소에서 옥살이하는 고암을 남모르게 옥바라지 해준 사람은 그에게 버림받은 본부인 박씨였다. 1년여 뒤에 출옥한 고암은 수덕여관에 잠시 머무르며 요양을 하다가 다시 파리로 훌쩍 떠나버렸다. 


 

 

 

▲  다리 옆에 있는 암각화 ⓒ 2008.  한국의산천
 
그때 고암은 수덕여관 옆의 우물가 양옆에 있는 두개의 넓다란 바위에 독특한 문자추상화를 새겨 놓았다. "1969년 이응노 그림"이라는 사인까지 새겨진 이 암각화(岩刻畵)는 한글의 자모음들이 서로 엉키는 듯하면서도 조화를 이루며 아름답게 풀려가는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이런 문자추상은 동양적인 전통과 정신을 서구적으로 변형시킨 동도서기(東道西器)의 한 시도였다. 수덕여관의 뒤뜰에 있는 암각화는 고암의 동도서기식 문자추상화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손꼽힌다.

 

전처 박씨 할머니는 이 암각화를 바라보며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하지만 고암은 1992년 회고전이 열리고 있던 파리에서 끝내 다시 고국 땅을 밟지 못한 채 세상을 뜨고 말았다. 고암은 영영 돌아올 수 없는 사람이 되었지만 박씨 할머니는 그와 함께 보냈던 날의 추억을 간직하기 위해 이 여관을 옛 모습대로 지켜왔다고 한다.

 

초가집의 그윽한 운치나 객수가 아니더라도, 수덕여관에 녹아 있는 이런 애절한 사연을 알고난 뒤라면 누구나 잠 못 이루고 뒤척거리는 밤을 보내게 된다. [출처 " 예술의전당]

 

 ▲ 아름다운 한글전시회가 이응노 화백이 생전에 작품활동을 했던 수덕여관이 복원되면서 수덕사 선(禪) 미술관에서 열렸다. ⓒ 2008 한국의산천   

 

서울 평창동에 있던 미술관이 대전으로 이전되며 만년동에 이응노 미술관이 건립되었다.고암 이응노(1904~1989) 화백이 한때 옥고를 치른 한밭벌 대전시 서구 만년동 대전시립미술관 옆에서 독립된 '이응노미술관'으로 문을 열었다. 작품 200여점을 부인 박인경(83)여사로부터 기증받아 수장하고 있다. 이 화백의 부인 박인경 여사가 명예관장을 맡고 있다.

 

▲ 아름다운 한글 심응섭 글씨 모양전 작품 ⓒ 2008 한국의산천   

 

 

▲ 아름다운 한글 심응섭 글씨 모양전 작품ⓒ 2008 한국의산천     

 

 ▲ 아름다운 한글 심응섭 글씨 모양전 작품 ⓒ 2008 한국의산천     

 

▲ 아름다운 한글 심응섭 글씨 모양전 작품 ⓒ 2008 한국의산천    

 

▲집사람과 새벽 4시에 일어나 5시에 길을 나섰다.ⓒ 2008 한국의산천    

 

▲ 나는 우리가 쓰는 말과 문자, 흰옷을 입는 기상 등 깨끗하고 고상하고 착한 우리 민족성을 그리고 싶습니다-이응노- ⓒ2008 한국의산천 

 

▲ 수덕여관 뒤뜰 ⓒ 2008 한국의산천   

 

▲ 수덕여관 측면(동쪽)ⓒ 2008 한국의산천

동트기 직전이라 눈바람이 매우 차가웠다.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개인가보다.     

 

 ▲ 전면에서 바라 본 수덕여관 측면 ⓒ 2008 한국의산천   

 

▲ 고암 이응노 선생 기념비  ⓒ 2008.  한국의산천      

수덕여관 앞 수덕교 옆에 세워진 기념표석    

 

▲ 아침 7시 계속해서 눈이 내리고 있다. 분단으로 인한 아픈 현실을 싸리빗자루로 쓸어낼 수는 없는것일까? ⓒ 2008 한국의산천     

 

▲ 사선을 그으며 내리는 눈과 바람 ⓒ 2008 한국의산천    

 

▲ 수덕여관과 앞에 보이는 암각화 ⓒ 2008 한국의산천   

 

 ▲  우물 옆에 있는 암각화 ⓒ 2008.  한국의산천

한글을 형상화한 암각화는 고암의 동도서기식 문자추상화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손꼽힌다.  

 

▲  다리 옆에 있는 암각화 ⓒ 2008.  한국의산천

이응노화백도 이승을 떠나고 전부인인 박귀희여사도 쓸쓸히 이승을 떠났다. 몸은 죽어 떠났으나 박 여사의 남편사랑은 수덕여관 앞에 말없이 남아 있는 문자추상 암각화처럼 깊고 뚜렷하다.  

 ▲ 용봉산으로 등산가기위해 나오는 뒷걸음에 다시 바라 본 수덕여관. 눈발이 날리고 있다.ⓒ 2008. 한국의산천 

 

지금도 지나간 슬픈 추억처럼 눈발이 날린다.

고암은 1992년 회고전이 열리고 있던 파리에서 끝내 다시 고국 땅을 밟지 못한 채 세상을 뜨고 말았다. 고암은 영영 돌아올 수 없는 사람이 되었지만 지금은 고인이 되신 전처인 박씨 할머니는 그와 함께 보냈던 날의 추억을 간직하기 위해 이 여관을 옛 모습대로 지켜왔다고 한다.

 

초가집의 그윽한 운치나 객수가 아니더라도, 수덕여관에 녹아 있는 이런 애절한 사연을 알고난 뒤라면 누구나 잠 못 이루고 뒤척거리는 밤을 보내게 된다.

다시 그 옛모습 그대로 지어진 수덕여관을 보니 기약없이 기다리는 망부의 애닮은 한이 절절히 되살아 난다.

남북 분단, 부부의 情, 부자의 情, 이 모든것이 세월은 가도 아픔은 남아....     

 

▲ 아내와 함께 ⓒ 2008 한국의산천 

수덕여관을 돌아본 후 숙연한 마음을 갖고 집사람과 함께 계속해서 눈쌓인 용봉산으로 이동합니다. 

 

수덕여관의 못다한 이야기 >>> https://koreasan.tistory.com/15605233

 

수덕여관의 못다한 이야기

수덕여관의 못다한 이야기 그래 초가집의 그윽한 운치나 객수(客愁)가 아니더라도, 수덕여관에 녹아 있는 이런 애절한 사연을 알고난 뒤라면 누구나 잠 못 이루고 뒤척거리는 밤을 보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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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족불욕(知足不辱)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지지불태(知止不殆)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가이장구(可以長久) 오래도록 편안할 것이다.  - 노자 도덕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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