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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문화문학음악

이매창

by 한국의산천 2008. 1. 1.

이매창의 못다한 사랑

2008년 다시 답사를 준비하며...

변산의 개암사 월명암, 그리고 우동리... 지금 그곳 우동리 선계폭포에는? [

답사일 2005.7월2~3일 한국의산천] 

 

선계폭포: 신선들의 세상이라 선계폭포인가?      

서울 - 서해안고속도로 - 줄포IC - 반계 유형원 유적지 - 우동리 선계폭포 - 개암사 - 서림공원 - 매창공원 - 부안IC - 서울 ( 서천경유 왕복 620km)

서울방향에서 부안으로 갈때는 부안IC에서 나와야 매창공원이 가깝다.

그날 앞이 안보일정도의 폭우속에 이정표를 지나쳐서 줄포IC까지...2005년 7월 3일 부안은 시간당 20mm. 하루 100mm의 집중폭우가 퍼부었다.

 

 

▲ 줄포IC에서 나와서.비가 와도 너무 온다.답사를 예정대로 할 수 있을런지...시간당 20mm. 하루 100mm의 집중폭우가 퍼부었다ⓒ한국의산천

 

부안읍은 아름다운 변산반도의 관문이다.

바다와 산을 끼고 70 km 의 변산일주도로를 달려본 사람이라면 다시 그곳에 오기를 꿈꾸는 그런 아름다운 곳이다.

채석강 , 적벽강, 수차가 돌아가는 줄포염전 전나무 숲의 내소사 개암사등...
 

부안에는 향기롭고 조금 쓸쓸한 인물이 살다 갔다 .400 년전의 여인이다 .

거문고를 잘타고 글 솜씨가 뛰어나 개성의 황진이와 쌍벽을 이룬다는 기생 매창이다 .

성황당 기슭, 산책하기 좋은 서림공원에 매창(梅窓,1573 -1610)의 넋을 기린 비가 있으며 부안읍내에는 그가 잠들어있는 매창공원이 자리하고 있다. 


매창은 부안에서 태어나 아전의 딸로 태어나 기생이 되었다 .

지금 우리는 백호 임제가 지나다 들러 서러워 했다는 황해도 장단의 황진이 무덤에는 갈 수는 없어도, 다행히 매창의 무덤에는 갈 수 있다.

매창은 살아서 몇 명의 문사와 벼슬아치의 연인이었지만 , 죽어서는 뭇 사람의 연인이 되었다.

외진 고을의 일개 기생으로 그녀가 당대의 문사들과 어울릴 수 있는 감각과 시재를 가졌다는 것이 놀랍다 .

집안도 잊혀지고 후손도 없는 그녀의 무덤이 부안 성황당산 아래 오늘까지 보존된 것은  그 때문이다 . 

 

▲ 개암사 입구 대로애 서있는 멋진 가로수 ⓒ 2008 한국의산천 

▲ 부안읍내에 위치한 매창공원(매창뜸) ⓒ 2008 한국의산천

이매창 (李梅窓)

개성의 황진이와 더불어 조선의 여류시인으로 쌍벽을 이루던 이매창.

그 이름을 알게 된것은 1998년도 변산반도 산행일주 때였다. 산행대장으로서 변산의 모든것을 수집하고 자료를 정리하던중에 부안의 이매창이라는 이름이 눈에 띠었다.

 

산행은 무리없이 변산의 모든산은 다 연결지어 매주마다 이어져 나갔다. 그러나 변산까지의 교통왕복시간만 거의 8시간을 소요하는 거리로 인하여 변산의 관문인 부안 읍내를 7~8회(답사와 정기산행)에 걸쳐 매번 지나치기만 하였다. 

외변산의 정점이 월명암이라면 내변산의 정점은 이매창이라고 서슴치 않고 말하고 싶다. 


부안읍 봉덕리에 있는 매창의 묘(지방기념물 제65호)

매창공원의 규모는 그리 크지않다. 주택단지의 놀이터정도의 규모 약 1,000 여평정도 크기로 세월이 지나 그의 비석의 글들이 이지러졌으므로 1917년에 부안 시인들의 모임인 부풍시사(扶風詩社)에서 높이 4척의 비석을 다시 세우고 '명원이매창지묘(名媛李梅窓之墓)'라고 새겼다. 

 

부풍시사에서 매창의 무덤을 돌보기 전까지는 마을의 나뭇꾼들이 서로 벌초를 해오며 무덤을 돌보았다고 한다. 가극단이나 유랑극단이 부안 읍내에 들어와 공연을 할 때에도 그들은 먼저 매창의 무덤을 찾고 한바탕 굿을 벌이며 시인을 기렸다.  바로 곁 입구에는 명창 이중선의 묘가 있다. 지금도 음력 4월이면 부안 사람들은 그의 제사를 모시고 있다. 그의 묘는 1983년 8월 지방기념물 제65호로 지정되었다.  

 

허난설헌과 함께 조선시대 대표적인 여류 시인으로 평가받는 매창은 1573년(선조 6년) 부안현의 아전이던 이탕종(李湯從)의 서녀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해가 계유년이었기에 계생(癸生), 또는 계랑(癸娘)이라 하였으며, 향금(香今)이라는 이름도 있었다.
  
계생은 아버지에게서 한문을 배웠으며, 시문과 거문고를 익히며 기생이 되었는데, 이로 보아 어머니가 기생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기생이 되어 그는 천향(天香)이라는 자(字)와 매창(梅窓)이라는 호(號)를 갖게 되었다.

조선시대 여성들에게는 이름이 없었다. 당호(堂號)를 가진 귀족 여성, 이름만 있는 기생들이 있었다. 이러한 시대에 이름, 자, 호까지 지니며 살았던 것이다.    

▲ 매창이 죽을 때까지 몸과 마음을 다바쳐 사랑한 남자는 촌은 유희경 한사람뿐이었다. ⓒ 2008 한국의산천

 

매창이 촌은을 처음 만난 것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인 1590년 또는 1591년으로 추정된다.  당시 매창은 18~ 19세, 촌은은 28세 연상인 46~ 47세였다. 비록 빼어난 미색은 아니지만 다재다능하며 심지가 굳은 매창으로 하여금 첫눈에 반하게 만든 촌은은 어떤 사내였던가. 

 

촌은 유희경도 매창과 마찬가지로 천민이었다. 비록 신분은 같은 천민이지만 상대는 중앙문단에서도 알아주는 유명한 시인 유희경이 아닌가. 감격에 겨운 매창도 이에 화답하여 두 사람의 정은 갈수록 깊어져 갔다. 하지만 촌은은 서울에 집도 있고 처자식도 있는 몸. 비록 알아주는 남자를 위해 치마끈은 풀었지만 유부남과 독신녀의 사랑은 예나 지금이나 힘겹고 괴로운 법이다.

 

매창은 그렇게 깊은 정을 주고 떠난 촌은을 천리보다도 더 먼 꿈길에서나 그리워할 수밖에 없었다. 

유명한 시조 ‘이화우 흩날릴 제’도 한 번 간 뒤 돌아올 줄 모르는 야속한 님 유희경을 그리워하며 읊은 것이다.

이렇게 천리를 두고 그리운 마음만 오거니가거니 하는 중에 임진왜란이 벌어졌다. 왜란이 일어나자 유희경은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우기에 바빠 매창에게 소식을 전할 겨를이 없었다. 

 

변산반도의 시작은 부안이다. 그러나 변산여행마감은 월명암에 오르지 않고 변산을 말하지 말라. 변산반도에 가거들랑 성황산에 올라 변산주변을 둘러보고 찾기 쉽지않은 매창공원에 들러 막걸리 한잔이라도 부으며 가난하고 천대받으며 짧은 생을 살다간 천재 시인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았으면...  

 

▲ 매창공원 가운데에 매창의 묘가있고 그 주변은 시비와 꽃나무로 둘러싸여있다.  

매창묘는 2001년에 새단장을 하였다.

매창의 출생과 관련하여 다양한 기록들이 있으나 매창집의 발문에 따르면 매창은 1573년에 출생해서 38세를 살고 1610년에 세상을 떠난것으로 나와있다. 

 

허난설헌과 함께 조선시대 대표적인 여류 시인으로 평가받는 매창은 1573년(선조 6년) 부안현의 아전이던 이탕종(李湯從)의 서녀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해가 계유년이었기에 계생(癸生), 또는 계랑(癸娘)이라 하였으며, 향금(香今)이라는 이름도 있었다.

 

부안의 진산 상소산 기슭의 서림공원에 오르면 매창의 시심과 문학정신을 기리는 시비 (詩碑)가 있다. 서림공원은 본래 부안현감의 관사인 선화당의 후원 일부라고 하며 매창이 관아에 들어오면 자주 거닐던 곳이라고 전한다.

또 매창시비 오른쪽에는 ‘금대(琴臺)’ 라고 새겨진 커다란 바위가 있으니 매창이 자주 앉아 거문고를 뜯던 곳이고, 매창시비 왼 쪽에는 혜천(惠泉)이라는 샘터가 있으니 또한 매창이 즐겨 마시던 샘이라고 한다. (참고: 매창공원은 읍내 한가운데에 있다)

 

계생은 아버지에게서 한문을 배웠으며, 시문과 거문고를 익히며 기생이 되었는데, 이로 보아 어머니가 기생이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이야기다. 기생이 되어 그는 천향(天香)이라는 자(字)와 매창(梅窓)이라는 호(號)를 갖게 되었다. 조선시대 여성들에게는 이름이 없었다. 당호(堂號)를 가진 귀족 여성, 이름만 있는 기생들이 있었다. 이러한 시대에 이름, 자, 호까지 지니며 살았던 것이다.

 

시집 매창집은 매창이 직접 편찬한 것이 아니고 매창이 죽은 이후 아전들의 입을 통해 전해 내려오던 것을 매창이 죽은 후 60여년 후에 매창이 생전에 자주 찾아 마음을 다스리곤했던 개암사에서 목판본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원하는 이가 너무 많아 절의 재정이 바닥날 지경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목판을 불살랐다는 이야기가 전해올 만큼, 부안 사람들은 그녀의 시를 아끼고 사랑했던 것이다.

▲ 규장각본 가곡원류에 실려있는 이화우 ⓒ 2008 한국의산천 
 

梨花雨 흣날릴 제 울며 잡고 離別한 님 
秋風落葉에 져도 나를 생각는가 
千里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쾌라. 
 

 

이화우(梨花雨)에서 추풍낙엽으로 이어지는 시간적 이별이 일순간 천리 공간을 뛰어넘어 그리운 임에게로 향하고 있다.

매창이 유희경과 이별하고 지은 이 시조는 <가곡원류>에 실려 전하는데 이별가로서 이보다 더한 절창(絶唱)이 또 없을 듯하다.

 

매창(梅窓)과 촌은(村隱) 유희경과 허균의 이야기 
 

유희경은 매창을 처음 만난 날 그에게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曾聞南國癸娘名 (남국의 계랑 이름 일찍이 알려져서)
詩韻歌詞動洛城 (글 재주 노래 솜씨 서울에까지 울렸어라)
今日相看眞面目 (오늘에사 참모습을 대하고 보니)
却疑神女下三淸 (선녀가 떨쳐입고 내려온 듯하여라)

-贈癸娘  허경진 역-
 
40대 중반의 대시인 유희경과의 사랑은 18세의 매창으로 하여금 그의 시세계를 한 차원 높은 곳으로 끌어 올리게 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무렵 그들이 사랑을 주고받은 많은 시들이 전한다.

이 고장 출신의 시인 신석정은 이매창, 유희경, 직소폭포를 가리켜 부안삼절(扶安三絶)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유희경이 서울로 돌아가고 이어 임진왜란이 일어나 이들의 재회는 기약이 없게 되었다. 유희경은 전쟁을 맞아 의병을 일으키는 등 바쁜 틈에 매창을 다시 만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진정 마음이 통했던 연인을 떠나보낸 매창은 깊은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 이후 쓰인 그의 시들은 님에 대한 그리움을 넘어서 서러움과 한(恨)을 드러내고 있다.

 

春冷補寒衣 (봄날이 차서 엷은 옷을 꿰매는데)
紗窓日照時 (사창에는 햇빛이 비치고 있네)
低頭信手處 (머리 숙여 손길 가는 대로 맡긴 채)
珠淚滴針絲 (구슬같은 눈물이 실과 바늘 적시누나)

- 自恨, 허경진 역-
 
유희경 역시 매창을 그리워하기는 마찬가지였다.  

娘家在浪州 (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
我家住京口 (나의 집은 서울에 있어)
相思不相見 (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못보고)
腸斷梧桐雨 (오동나무에 비뿌릴 젠 애가 끊겨라)

-懷癸娘,  허경진 역-   

▲ 홍길동의 저자 허균의 추모글( 편지)

 

1607년 유희경을 다시 만난 기록이 있지만 매창은 그와 헤어진 뒤 10여년을 마음의 정을 주는 사람이 없이 유희경을 그리며 살았다. 그가 마음을 준 두 번째 남자는 이웃 고을 김제에 군수로 내려온 이귀(李貴)였다. 그는 명문 집안 출신으로 글재주까지 뛰어났는데 매창이 그에게 마음이 끌렸음을 보여주는 허균(1569~1618)의 기록이 있다.
  
허균은 1601년 6월 충청도와 전라도의 세금을 거둬들이는 해운판관이 되어 호남에 내려와 부안에 들렀다. 매창이 허균을 만났을 때 이귀는 이미 파직되어 김제를 떠난 지 서너 달 뒤였다.

 

신축년(1601) 7월 임자(23일). 부안에 이르렀다.  비가 몹시 내렸으므로, 객사에 머물렀다. 고홍달이 와서 뵈었다. 기생 계생은 이귀의 정인이었는데, 거문고를 끼고 와서 시를 읊었다. 얼굴이 비록 아름답지는 못했지만, 재주와 정취가 있어서, 함께 얘기를 나눌만 하였다. 하루 종일 술을 나누어 마시며, 서로 시를 주고받았다. 저녁이 되자 자기의 조카딸을 나의 침실로 보내주었으니, 경원하며 꺼리었기 때문이었다. - 허균의 <조관기행> 중에서

 

허균은 여자 관계에 있어서도 유교의 굴레를 벗어 던진 사람이었다. 허균은 일찍이 '남녀의 정욕은 본능이고, 예법에 따라 행하는 것은 성인이다. 나는 본능을 좇고 감히 성인을 따르지 아니하리라.' 라고 하였고, 여행할 때마다 잠자리를 같이 한 기생들의 이름을 그의 기행문에 버젓이 적어놓기도 하였다. 부안에 오기 전인 1599년 황해도사(종5품)로 있을 때만 해도 서울에서 창기들을 데려다 놀면서 물의를 일으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그가 매창과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고 정신적인 교감만 가진 것은 비록 천한 기생이지만 똑같은 인간으로서 대우를 하였고 더구나 매창의 시를 좋아하였기 때문이었다. 

 

허균은 다음과 같이 매창을 보았다.
계생은 부안의 기생이라. 시에 밝고 글을 알고 노래와 거문고를 잘 한다. 그러나 절개가 굳어서 색을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그 재주를 사랑하고 정의가 막역하여 농을 할 정도로 서로 터놓고 얘기도 하지만 지나치지 아니하였으므로 오래도록 우정이 가시지 아니하였다.

허균은 이 해 12월 형조정랑이 되어 서울로 올라왔고, 이듬해에 병조정랑, 사복시정 등을 지냈으며, 1604년 수안 군수로 있던 중 파직당했다.

당시 수안의 악명 높은 토호 이방헌이란 자를 치죄하자 그의 아들이 황해 감사에 뇌물을 써서 감사가 허균을 추궁토록 했던 것이다. 1606년에 의홍위대호군(종3품 임시벼슬)이 되어 중국 사신을 접대하였다. 이듬해 삼척부사에 부임하였으나 부처를 섬긴다는 이유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또다시 파직당했다. 허균은 불경을 읽는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떳떳하게 내세웠다. 다음은 파직의 소식을 듣고 쓴 시이다.

 

오랫동안 불경을 읽어 온 것은 내 마음 머물 곳 없었음이어라.
여지껏 아내를 내버리지 못했거든 고기를 금하기는 더욱 어려웠어라.
내 분수 벼슬과는 이미 멀어졌으니 파면장이 왔다고 내 어찌 근심할 건가.
인생은 또한 천명에 따라 사는 것 돌아가 부처 섬길 꿈이나 꾸리라

. -문파관작(聞破官作)-

 

파직에 이어 허균은 홍문관 월과(月課)에서 아홉 번을 연이어 장원을 하였는데 이 덕으로 12월에 정3품 공주 목사가 되었다. 그러나 그를 아끼던 선조가 죽고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충청도 암행어사의 장계에 의해 8월에 다시 공주목사에서 파직되었다. 성품이 경박하고 무절제하다는 죄였다. 파직당한 허균은 부안 우반동에 있는 정사암에 와서 쉬었다.

 

부안현 바닷가에 변산이 있고, 산 남쪽에 우반(愚磻)이라는 골짜기가 있다. 그곳 출신인 부사 김청(金淸)이 그 중 아름다운 곳을 골라 암자를 짓고는 정사암(靜思菴)이라고 이름지었다. 늘그막에 즐기며 쉴 곳을 마련해 둔 것이다.


나는 일찍이 왕명을 받고 호남을 다니며 정사암의 아름다운 경치는 실컷 들었지만, 여지껏 구경해 본 적은 없었다. 나는 평소부터 영화와 이욕을 즐기지 않았는지라 늘 자연으로 돌아가고픈 마음이 있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었다.
  
올해에 공주목사에서 파직되어 남쪽으로 돌아갈 뜻을 정하고, 장차 우반이란 곳에 묻혀 살려고 하였다. 그러자 진사에 급제한 김공의 아들이 나에게 말했다.

"저의 아버지께서 지으신 정사암이 너무 외따로 있어, 제가 지키기 어렵습니다. 공께서 다시 수리하시고 지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기뻤다. 즉시 고달부와 이재영 등을 데리고, 말고삐를 가즈런히 하여 그곳에 가보았다. 포구에서 비스듬히 나있는 작은 길을 따라서 골짜기에 들어가자 시냇물이 구슬 부딪히는 소리를 내며 졸졸 흘러 우거진 풀덤불 속으로 쏟아졌다. 시내를 따라 몇 리 들어갔더니 산이 열리고 넓은 들판이 펼쳐졌다. 좌우로 가파른 봉우리들이 마치 학이 나는 것처럼 치솟았고, 동쪽 등성이론 수많은 소나무와 전나무들이 하늘을 찌를 듯 서있었다.
- 중략 -

시냇물을 따라 동쪽으로 걸어 올라가다가, 늙은 당나무를 지나서 정사암에 이르렀다. 암자는 겨우 네 칸 남짓 되었는데, 낭떠러지 바위 위에 지어졌다. 앞으로는 맑은 연못이 내려다 보였고, 세 봉우리가 우뚝 마주 서 있었다. 폭포가 푸른 바위벽 아래로 깊숙하게 쏟아지는데, 마치 흰 무지개가 뻗은 것 같았다.
- 하략- <중수정사암기(重修靜思菴記)>

 

매창은 허균을 다시 만나 함께 노닐며 그의 영향을 받아 참선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허균은 12월에 정3품 승문원 판교의 교지를 받고 다시 서울로 올라갔다.


 이 무렵 매창과 가깝게 지낸 사또가 있었는데 그가 떠난 후 고을 사람들은 그를 기리는 비석을 세웠다. 매창이 그를 그리며 비석 옆에서 거문고를 뜯으며 <산자고>(山  )의 노래를 불렀는데 이를 두고 '매창이 눈물을 흘리며 허균을 원망했다'는 소문이 났다. 다음은 이 소식을 접한 허균이 매창에게 보낸 편지이다. 

 

계랑에게
계랑이 달을 보면서 거문고를 뜯으며 '산자고새'의 노래를 불렀다니, 
어찌 그윽하고 한적한 곳에서 부르지 않고 
부윤의 비석 앞에서 불러 남들의 놀림거리가 되셨소. 
석 자 비석 앞에서 시를 더럽혔다니, 이는 낭의 잘못이오. 
그 놀림이 곧 나에게 돌아왔으니 정말 억울하외다. 
요즘도 참선을 하시는지. 그리움이 몹시 사무칩니다.

-기유년(1609) 정월 허균-
 
매창을 잊지 못하는 허균은 또 편지를 보냈다. 다음 편지에서 매창에 대해 연인이 아닌 진정한 친구로서의 우정을 간직한 허균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계랑에게
봉래산의 가을빛이 한창 짙어가니, 돌아가고픈 생각이 문득문득 난다오. 내가 자연으로 돌아가겠단 약속을 저버렸다고 계랑은 반드시 웃을 거외다. 우리가 처음 만난 당시에 만약 조금치라도 다른 생각이 있었더라면, 나와 그대의 사귐이 어찌 10년 동안이나 친하게 이어질 수 있었겠소.

이젠 진회해(秦淮海)를 아시는지. 선관(禪觀)을 지니는 것이 몸과 마음에 유익하다오. 언제라야 이 마음을 다 털어 놓을 수 있으리까. 편지 종이를 대할 때마다 서글퍼진다오. 기유년(1609) 9월 허균  

이듬해(1610) 여름 허균은 매창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허균은 이를 슬퍼하며 두 편의 시를 지었다. 다음은 그 중 하나이다.

 

哀桂娘(매창의 죽음을 슬퍼하며)


妙句土甚擒錦 아름다운 글귀는 비단을 펴는 듯하고
淸歌解駐雲 맑은 노래는 머문 구름도 풀어 헤치네
兪桃來下界 복숭아를 훔쳐서 인간세계로 내려오더니
藥去人群 불사약을 훔쳐서 인간무리를 두고 떠났네
燈暗芙蓉帳 부용꽃 수놓은 휘장엔 등불이 어둡기만 하고
香殘翡翠裙 비취색 치마엔 향내 아직 남아있는데
明年小挑發 이듬해 작은 복사꽃 필 때쯤이면
誰過薛濤墳 누가 설도의 무덤을 찾으리

 

매창은 부안읍 남쪽에 있는 봉덕리 공동묘지에 그와 동고동락했던 거문고와 함께 묻혔다.

그 뒤 지금까지 사람들은 이곳을 매창이뜸이라고 부른다.(지금의 매창공원)   

 

신분이 기생이었던 그에게 술에 취한 손님들이 덤벼들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매창은 아무에게나 몸을 맡기지 않았으며, 시를 지어 무색하게 하기도 하였다.

 

'贈醉客(취한 손님에게 드림)'이라는 제목의 오언절구는 이러한 경우를 당해 쓴 시이다.

 

醉客執羅衫 (취한 손님이 명주저고리 옷자락을 잡으니)
羅衫隨手裂 (손길을 따라 명주저고리 소리를 내며 찢어졌어라)
不惜一羅衫 (명주저고리 하나쯤이야 아까울게 없지만)
但恐恩情絶 (임이 주신 은정까지도 찢어졌을까 그게 두려워라)

  - 허경진 역 -  

 

지봉 이수광은 매창의 이러한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계랑은 부안의 천한 기생인데, 스스로 매창이라 호를 지었다. 언젠가 지나가던 나그네가 그의 소문을 듣고는, 시를 지어서 집적대었다. 계랑이 곧 그 운을 받아서 응답하였다.

 

平生 學食東家 (떠돌며 밥얻어 먹기를 평생 부끄럽게 여기고) 
獨愛寒梅映月斜 (차가운 매화가지에 비치는 달을 홀로 사랑했었지)
時人不識幽閑意 (고요히 살려는 나의 뜻 세상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指點行人枉自多 (제멋대로 손가락질하며 잘못 알고 있어라)
라고 했더니

그 사람은 서운해 하면서 가버렸다.

계랑은 평소에 거문고와 시에 뛰어났으므로 죽을 때에도 거문고를 함께 묻었다고 한다.

매창은 1590년 무렵 부안을 찾아온 시인 촌은 유희경과 만나 사귀었다. 매창도 유희경을 처음 만났을 때 시인으로 이름이 높던 그를 이미 알고 있었던 듯하다. <촌은집>에 이런 기록이 있다.

 

그가 젊었을 때 부안에 놀러갔었는데, 그 고을에 계생이라는 이름난 기생이 있었다. 계생은 그가 서울에서 이름난 시인이라는 말을 듣고는 '유희경과 백대붕 가운데 어느 분이십니까?'라고 물었다. 그와 백대붕의 이름이 먼 곳까지도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때까지 기생을 가까이 하지 않았지만 이 때 비로소 파계하였다. 그리고 서로 풍류로써 즐겼는데 매창도 시를 잘 지어 '매창집'을 남겼다.   

 

 

월명암

매창이 지은 시는 몇백수는 되었다는데 직접 문집을 남기지는 못했다. 그녀가 죽고난 58 년이 지난 1668년 개암사에서 목판으로 "매창집"을 엮어냈다. 매창의 시를 보면 변산을 두루 돌아다녔음을 알 수 있다. 서해의 낙조를 가장 잘 볼 수 있다는 월명암 낙조대에도 올랐다 . 그녀가 월명암에 올라 쓴 시가 있다   

 

'월명암에 올라서(登月明庵)'
築蘭若倚半空  (하늘에 기대어 절간을 지었기에)
一聲淸磬徹蒼穹 (풍경소리 맑게 울려 하늘을 꿰뚫네)
客心 若登도率  (나그네 마음도 도솔천에나 올라온 듯)
讀罷黃庭禮赤松 ('황정경'을 읽고나서 적송자를 뵈오리다.)

 

황정경은 도가의 경전이고 적송자는 중국 고대 신농씨 시대에 비를 다스리던 신선이다. 외로움과 시름으로 가득 찬 애절한 시편들을 남긴 그녀지만 ,기생이라는 신분때문에 오히려 누릴 수 있던 자유로움이 엿보이기도 한다 .
 

월명암은 변산면소재지(지서리)에서 5km정도 떨어진 변산에서 두 번째로 높은 봉우리 쌍선봉(雙仙峰:498m) 아래에 자리잡아 있다.
경관이 수려하다. 월명암 뜰에 서면 변산의 수많은 봉우리를 발아래 깔고 있는 듯이 느껴지고, 암자 뒤 낙조대(落照臺)에 올라 서쪽을 바라보면 점점이 늘어선 고군산군도의 뭍섬들이 아름답다. 

 

이 절의 이름이 월명(月明)인 것도 그 일대에서 목격되는 달 뜨는 정경 월명무애(月明霧靄)가 있어 경치가 기막히기 때문이다. 월명암은 본래 정유재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호남의 명승(名僧) 진묵대사(震默大師·1562∼1633)가 중건하였다. 그 뒤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 암자에선 허다한 고승들이 배출됐다. 선가(禪家)에선 대둔산 태고암, 백양산 운문암과 함께 도인을 많이 키워낸 3대 성지로 손꼽힌다. 

 

가파른 산길을 올라 월명암에 닿으면 변산의 군봉들이 발아래에 와닿고 월명암 뒤 산정상에 있는 낙조대에 오르면 고군산군도의 뭍섬들이 보인다.

 적송자는 신선의 이름으로 신농 때의 우사(雨師)다. 서쪽으로 10만억 불국토를 지나면 그곳에 서방정토가있다 하였는데 통일 신라 시대의 고승들도 이곳에 와서 더 이상 서쪽으로 갈 생각을 접어두고 이 곳에 서천법계를 열었던 것이다.   

▲ 큰 비가 오는 날에만 볼수있는 선계폭포의 장엄한 위용 ⓒ2008 한국의산천    

 

보안면 우신마을에서 북쪽으로 1km 지점에 변산 4대 사찰중 하나였던 선계사가 있었던 선계안 분지가 있다. 비가오면 분지에서 물이 흘러 선계바위에서 물이 떨어져 폭포를이루니 이것이 바로 선계폭포이다.


이 폭포는 이성계가 성계골에 머물면서 도를 닦고 수련을 하였다는 설에 의하여 성계폭포라 부르는 이도 있으나 정확한 근거는 없습니다. 주변 호수의 맑은물과 경관이 수려하며 반계 유형원선생의 유적지 및 부안김씨 종중 고문서가 있다.(부안군청 참고)

 

선계폭포
이곳은 문학에도 박식한 기생 이매창과 홍길동의 작자 허균이 서로의 교분을 두텁게 하던 장소로 홍길동전이 이곳 정사암 터에서 변산을 무대로 삼아 집필하였다고 하며 홍길동에서 나온 이상향 율도국이 낚시로 유명한 위도라는 설도 있다.

그리고 이곳의 약수는 남성의 기를 일으키는 효험이 있다고 하며 많은 사람이 찾아오는곳이기도 하다. 산중턱 반계 유형원의 유적지에서도 비스듬히 바라보면 잘 보인다.  

 

▲ 선계폭포가 궁금하여 가까이 다가 갔으나 물줄기에 의한 바람이 너무 세서 가까이 다가설수없었다. ⓒ2008 한국의산천    

▲ 반계선생의 유적지 주변은 산불로 인해 다 타버렸지만 다행스럽게 이 가옥은 그대로났았다.ⓒ 2008 한국의산천

 

부안 보안면 우동"실학의 메카 반계골"
실학의 선구자 유형원(효종,현종1622~1673)님. 다산 정약용과 더불어 실학에 있어 빠뜨릴 수 없는 실학의 아버지인 그의 집터 및 그를 기리는 비가 있는 곳. 원래 우동이란 이름은 우반동에서 비롯되었으나 일제 때 우동으로 바뀌었다. 

저서로는 토지, 군대 및 국정 전반에 관한 문제를 서술한 '반계수록'(전26권)이 있으며 이것은 훗날 실학사에 큰 영향을 주었다. 생가 터는 지리학상으로 명당으로 손꼽히는 명당터이다.  

 

전북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는 조선 후기 실학의 선구자로 일컬어지는 교산 허균과 반계 유형원이 반세기 시차를 두고 살면서 ‘홍길동전’과 ‘반계수록’ 26권을 저술했던 명소다. 

허균은 소설로, 유형원은 논리로 당시 사회의 모순과 아픔에 대한 해결책을 만들면서 우리나라 실학을 태동시켰다. 지금도 중수정사암기(重修靜思菴記)에서 허균이 묘사한 것처럼 ‘선계폭포 아래로 시냇물이 바다로 흐르는’ 등 자연환경이 그대로다. 

허균이 우동리를 떠난 지 41년 뒤, 반계 유형원은 1652년부터 당시 사회가 안고 있는 모순을 개혁하고 부국부민을 바탕으로 한 이상적인 국가 건설의 이론서인 ‘반계수록’을 썼다. 이들의 개혁사상은 성호 이익, 다산 정약용에게 이어짐으로써 이후 근세 우리나라의 정신적 기틀을 마련했다.   

▲ 반계유형원 유적지(부안 보안면 우동)에서 본 곰소만. ⓒ2008 한국의산천   

반계 유형원 유적지는 큰길에서 산비탈을 약 20분정도 걸어올라가야 한다. 

돌보는이가 없어서인지 건물은 잡초더미속에 방치되어있었다.

여기서 바라보는 경치는 그야말로 거칠것이 없는 일망무제다.

▲ 이매창이 자주 찾았던 능가산 개암사의 일주문 ⓒ 2008 한국의산천 

개암사는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에 있는 사찰로, 변산팔경에 '개암고적'에 해당한다.내소사 대웅보전과 아주 흡사한 대웅전(보물 제292호)이 있는 이 일대는 예전에 유서 깊은 왕궁터였다.

 

대로변에서 개암사까지 약 3km.그 흔한 음식점,가게 하나없는 조용한 곳이다.  백제 부흥운동을 벌이며 최후의 격전을 벌인 주류성이 있었다고 전해지는 울금산(우금산) 그 아래 개암사가 자리하고 있다.  내소사는 많은 관광객으로 늘 번잡하지만 이곳 개암사는 그리 크지않은 절에 항상 고요함을 유지한다. 울금바위 앞에 앉아있는 개암사. 다녀오면 그 조용함과 깨끗함이 잔상으로 오래남는 곳이다.

 

개암사는 부안에서 보안을 향해 내려가다, 봉은 큰 길가에서 개암저수지를 휘돌아 올라가면 울금바위 아래 자리잡고 있다. 이 절은 백제무왕 35년(634년)에 묘련왕사가 변한에 있는 궁전을 절로 고쳐 지을 때 묘암의 궁전을 묘암사, 개암의 궁전을 개암사라 부른데서 비롯되었다.


40 여년 후인 통일신라 문무왕 16년(676년)에 원효대사와 의상대사가 이곳에 들어와 절을 다시 지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고려 충숙왕(1313년)때에는 원감국사가 순천 송광사에서 이곳으로 들어와 중창하면서 황금전, 청련각, 청허루등 30여동을 지어 큰 사찰이 되었다고 한다.


현재는 대웅보전, 응진전, 월성대, 요사채가 있어 한적한 편이다. 대웅전 오른쪽 새로 지은 요사를 둘러싼 대나무가지 울타리와 갈대는 입구의 단풍길과 함께 개암사의 고요한 멋을 더해준다.  

 

보물 제292호로 지정된 이절의 대웅전은 정면3간, 측면3간의 팔작지붕으로 조선시대 초기의 건축양식을 보여주고 있는데, 내소사에 있는 대웅보전과 쌍둥이 건물이 아닐까 싶을정도로 아주 닮아있다.    

 

▲ 운무속에 가려진 울금바위ⓒ 2008 한국의산천
울금바위를 중심으로 뻗은 울금산성(주류성)에서 백제유민들이 나당 연합군을 맞이해 최후의 항전을 벌였다고 하니, 그 숙연함도 괜한 것은 아닌 듯 싶다.

 

울금바위에는 세 개의 굴이 있는데 가장 큰 굴은 백제말기 신라군과 전투할 때 백제군 복신장군의 지휘소였다 하여 복신굴이라고도 하고 또 원효대사의 수도처였다고 하여 원효방이라고도 불린다. 안쪽에는 옥천이라 불리는 석간수가 흐른다. 뒤쪽으로 기어올라 바위 정상에 오르면 맑은 날이면 호남평야와 서해바다가 한 눈에 바라보인다.  

 

 

▲ 관광객으로 번잡한 내소사와는 달리 절같이(?) 조용한 능가산 개암사
그가 죽은 후 45년 후(1655)에 그의 무덤 앞에 비석이 세워졌고, 그로부터 다시 13년 후에 그가 지은 수 백편의 시들 중 고을 사람들에 의해 전해 외던 시 58편을 부안 고을 아전들이 모아 목판에 새겨 '매창집'을 개암사에서 간행하였다. 당시 세계 어느 나라를 둘러보아도 한 여인의 시집이 이러한 단행본으로 나온 예는 없다. 시집이 나오자 하도 사람들이 이 시집을 찍어달라고 하여 개암사의 재원이 바닥나기도 했다고 전한다.   

 

 

누군들 이루지 못한 사랑의 기억이 없으랴 .

비 내리는 개암사에서 나그네는 그저 옛사람의 못이룬 사랑으로 인하여 가슴이 져밀뿐이다.  

나그네는 그저 못다이룬 사랑의 기억만 가지고 가라.

다시 답사를 준비하며...-한국의산천-

 

수덕여관 고암 이응로 1 >>> https://koreasan.tistory.com/13438952

 

수덕여관 고암 이응노

2008년 1월 1일 새해 첫날 올해 첫 산행지와 첫 답사지. 복원된 수덕여관과 홍성 용봉산 [글,사진 한국의산천 우관동] 눈이 그립고 계속 미뤄진 답사지가 있기에 새해 아침 서산쪽으로 방향을 잡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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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덕여관 고암 이응노 2 >>> https://koreasan.tistory.com/13438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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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족불욕(知足不辱)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지지불태(知止不殆)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가이장구(可以長久) 오래도록 편안할 것이다.  - 노자 도덕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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