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비밀
‘나혜석 자화상’의 미스터리한 눈빛
해원(解寃)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입력2019-09-12 10:00:01
신동아 2019년 09월 호
‘나혜석 자화상’의 미스터리한 눈빛
우울한 저 눈빛. 불안하고 절망적이다. 정월 나혜석(晶月 羅蕙錫·1896~1948)의 자화상은 보는 이를 망연(茫然)하게 한다.
그의 삶 자체가 비극적이었다고 해도, 이토록 서글픈 표정의 그림이 또 어디 있을까. 대체 저 지친 눈빛의 정체는 무엇인가.
▲ 1928년 작으로 추정되는 나혜석의 자화상,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소장.
2015년 4월 어느 날, 한 통의 부고가 세상에 날아들었다. 한 신문은 이렇게 썼다.
“한국은행 독립의 토대를 닦은 것으로 평가받는 김건(金建) 전 한은 총재가 숙환으로 별세했다. 고인은 한국 최초 여성화가 고 나혜석 씨의 막내아들로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후 1951년 한은에 입행한 뒤 (중략) 1988년 17대 한은 총재로 임명돼 4년간 한은을 이끌었다. (중략) ‘한국은행 독립을 위한 100만인 서명운동’을 펼치는 등 한은 독립성 확보를 위해 애썼고(후략)”
부고를 접한 사람들은 대부분 “뭐? 나혜석의 아들이라고?”라는 반응을 보였다. 한국은행 총재였다는 사실보다 나혜석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더 세간의 관심을 끈 것이다.
그런데 김건 전 총재는 생전에 자신이 나혜석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외부에 발설하지 않았다. 심지어 부정하는 경우까지 있었다고 한다. 너무나 선구적이고 전위적이었기에 끝내 삶을 비극적으로 마감해야 했던, 그래서 여전히 문제적인 예술가 나혜석. 세상에는 여전히 그를 가부장적으로 가두어 보려는 시선이 존재한다. 그렇기에 막내아들 김건은 어머니 나혜석을 드러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김건 전 총재가 세상을 떠나고 7개월이 흐른 2015년 11월. 김건 전 총재의 부인, 그러니까 나혜석의 막내며느리 이광일 씨가 ‘나혜석 자화상’을 수원시에 기증했다. 나혜석이 그린 ‘김우영 초상’도 함께 기증했다. “어머니의 자화상과 아버지 초상을 기증하라”는 김건 전 총재의 유언에 따른 것이다. 어머니 나혜석의 존재를 평생 감추고 또 감췄던 막내아들이었기에, 기증 소식은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 후 작품을 소장 전시하고 있는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으로 많은 사람의 발길이 몰리고 있다. 김건 전 총재는 왜 어머니의 존재를 세상에 드러낸 것일까.
비극적인 너무나 비극적인
▲ 무용수들, 1927-28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한국데이터산업진흥원]
한국 최초의 여성화가 나혜석. 그 이름은 여전히 문제적이고 비극적이다. 그래서일까. 나혜석이란 이름은 한편으로 신비롭기까지 하다. 1913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나혜석은 1918년 도쿄 사립여자미술학교를 졸업했다.
한국에 돌아온 나혜석은 1921년 3월 서울의 경성일보 내청각(來靑閣)에서 유화 전시회를 열었다. 서울에서 열린 우리나라 최초의 개인전이었다. 이틀 동안 관람객 5000여 명이 찾았다.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인파였다.
뛰어난 문재(文才)를 바탕으로 일본 유학 시절 이미 가부장제의 이중성을 신랄하게 고발하는 글을 발표해 세간의 이목을 끌었기에, 나혜석의 지명도는 가히 압도적인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그의 개인전에 수많은 사람이 몰린 것이다. 나혜석의 존재감은 빛을 발했고 신문과 잡지는 그의 글과 그림을 앞다퉈 소개했다.
파격적인 행보는 계속됐다. 나혜석은 1920년 김우영(金雨英·1886~1958)과 결혼했다. 김우영은 전처와 사별하고 딸이 하나 있는 10살 연상 변호사였다.
당시 나혜석은 결혼 조건으로 미술 활동을 방해하지 말 것, 시어머니와 전처 딸과는 별거하게 해줄 것 등을 요구했다.
나혜석은 1927년 6월부터 1929년 3월까지 1년 9개월에 걸쳐 남편과 함께 유럽과 미국을 여행했다. 당시 1녀 2남이던 자녀를 모두 부산 시가에 맡기고 세계일주 여행을 떠난 것이다.
여행 도중 파리에서 남편의 친구이자 기미독립운동 33인 중 한 사람이던 최린(崔麟)을 만난 나혜석은 곧바로 깊은 연애에 빠졌다. 불륜이었다. 이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그는 1930년 남편으로부터 이혼당한 채 빈손으로 쫓겨났다.
이 사건 이후 세상의 시선이 변해갔다. 나혜석의 근대의식과 예술혼을 찬양하던 언론과 사람들은 나혜석을 부도덕한 여인으로 몰아갔다. 나혜석은 이에 맞서 1934년 ‘이혼고백서’를 발표해 또 한 번 이슈의 중심이 됐다. 자신의 약혼·결혼·이혼 과정, 최린과의 관계에 대한 내용을 밝히고 한국 남성의 이중성을 신랄하게 비판했으나 세상에 맞서기엔 역부족이었다.
나혜석은 경제적으로 궁핍해졌고 사람들로부터 소외됐다. 이혼 후 잠시 고향인 수원에서 심신을 치유하며 글과 그림 작업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삶은 더욱 피폐해졌고 세상 사람의 야유와 외면 속에 충남 예산 수덕사, 경남 합천 해인사 등지를 전전했다.
일엽과의 만남
나혜석이 수덕사로 일엽(一葉) 스님을 찾아간 것은 1937년 말이다. 나혜석과 동갑내기인 일엽 스님은 당시 신여성의 선두에서 나혜석과 함께 여성해방을 외쳤으나, 모든 것을 내려놓고 1933년 수덕사로 출가한 상태였다. 나혜석은 불가에 귀의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수덕사 초입 수덕여관에서 생활했다. 글을 쓰고 종종 해인사, 마곡사, 통도사 등지를 순례하면서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하지만 중풍에 정신이상 증세까지 보이면서 심신은 점점 파탄에 이르렀다. 그래도 서울과 수원으로 종종 가족이나 지인들을 찾아갔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시종 냉대였다. 오빠로부터도 외면당했다. 자식이 보고 싶을 때 쇠약해진 몸을 이끌고 대전으로 향했으나 전남편 김우영으로부터 수모를 당하기 일쑤였다.
나혜석은 비극의 바닥으로 빠져들었다. 동공은 풀어지고 손은 떨렸다. 뇌졸중이 심해 잘 걷지도 못했다. 49세 되던 1944년 10월, 끝내 나혜석은 서울 인왕산 아래 청운양로원에 들어갔다. 나혜석의 올케가 남편(나혜석의 오빠)의 반대로 그녀를 거둘 수 없게 되자 최후 수단으로 양로원에 들여보낸 것이다. 자칫 객사(客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나혜석은 그러나 거의 불구가 된 몸을 이끌고 자꾸만 밖으로 나갔다. 1945년에는 한때 수덕사 인근 허름한 주막에서 주모로 일하기도 했다.
그 후 경기도 안양의 한 보육원에 잠시 머물렀던 나혜석은 1948년 말 서울 원효로 노상에서 쓰러진 채 발견됐다. 행려병자로 처리돼 서울 용산구에 있는 시립병원 자제원(慈濟院)의 무연고 병실로 옮겨졌다. 그해 12월 10일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53세였다.
자제원은 훗날 서울시립남부병원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1977년 다시 서울시립강남병원으로 통합됐다. 자제원이 있던 곳은 지금의 용산경찰서 자리다.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로, 가부장적 관습에 맞서며 한 시대를 풍미한 선구적 여성의 마지막은 이렇게 절망적이었다.
한없이 음울한 눈빛
▲ 나혜석(왼쪽)이 일본인 실업가 야나기하라 기쓰베(오른쪽) 부부와 함께 촬영한 사진. 부부 사이에 미상의 남자가 있다. [위키피디아]
‘나혜석 자화상’은 어둡고 무겁다. 눈빛과 표정은 처연하고 우울하며 고독과 좌절감이 가득하다. 보는 이가 그 시선을 마주하기조차 두렵다. 인물은 배경으로부터 부각되지 않는다. 배경 속으로 빨려 들어갈 뿐이다. 그렇지만 깊은 고민 속에서 무언가 우리에게 말을 건네고 싶어 한다.
나혜석은 세계여행 도중 파리에 체류할 때인 1928년 이 ‘자화상’을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때 남편 김우영의 초상도 함께 그렸다. ‘김우영 초상’을 두고 미완성작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나혜석은 파리에서 왜 이렇게 우울한 자화상을 그린 것일까. 이 시기는 그가 이혼의 파탄으로 접어들기 전이다. 파탄은커녕 새로운 세상에 대한 도전과 의욕이 충만하던 시절이었다.
물론 파리에서 나혜석은 최린과 위태로운 밀회를 즐기고 있었다. 이것이 남편 김우영과의 이혼으로 이어졌고 끝내 비극과 파탄의 도화선이 됐지만 자화상을 그릴 때는 아직 그것이 들통나지 않았을 때다. 그때 그린 작품치고는 너무나 우울하고 불안하다. 눈빛이 전혀 희망적이지 않다.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다가올 미래에 대한 예술가의 운명적인 예감인가. 아니면 지금까지 알려진 자화상 제작 연도에 오류가 있는 걸까. 사실 나혜석이 이 작품을 1928년에 그렸다는 물증이 있는 건 아니다. 작품에 제작 연대가 기록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그때 그린 것으로 전해올 따름이다. 어쨌든 자화상 속 나혜석의 망연한 눈빛은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다.
미스터리는 또 있다. ‘자화상’ 속 얼굴과 나혜석의 당시 사진을 비교해보면, 이 작품 주인공 얼굴이 나혜석으로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그 얼굴은 한국인 얼굴이 아니다. 무척이나 이국적이다. 이를 두고 모딜리아니풍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1928년 파리에서 모딜리아니 화풍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인데, 일리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이 또한 추론일 뿐, 물증이 있는 것은 아니다. 나혜석의 기록이나 증언도 없다.
자화상의 얼굴이 중성적이라는 견해도 있다.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니라는 말이다. 중성적이어서 더 슬퍼 보이는 걸까. 중성이라고 하면 피해자인 여성도, 가해자인 남성도 아니다. 성의 구분이나 차별을 뛰어넘겠다는 나혜석의 의도가 반영된 것일 수 있다. 나혜석은 이 그림을 통해 남녀 구분 없는 세상을 꿈꾸었던 것일까.
“나는 네 에미였느니라”
▲ 수원화성문, 연도미상, 개인 소장. [한국데이터산업진흥원]
“서양과 일본, 남성에 의해 이중 삼중으로 타자화된 나혜석 자신의 현실을 직시하는 것 같다” “나혜석은 이중적 타자인 한국의 여성이라는 위치를 벗어나기 위해 성과 민족성이 모호한 자화상을 그렸다”(이문정, ‘한국 근대여성미술가의 작품에 나타는 여성성 연구’, 이화여대 석사논문, 2004년)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이 같은 해석에 따르면, 남성 여성이라는 이분법적 구별과 한국의 가부장제를 통째로 극복하고자 했던 나혜석의 철학을 이국적 중성적 마스크로 구현한 것이다. 실천적 예술가다운 탁월하고 절묘한 선택이 아닐 수 없다.
행려병자로 삶을 마감한 나혜석의 최후는 매우 상징적이다. 나혜석은 몸과 마음이 다 지쳐 망가졌을 때,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의 가치관과 자존감을 버리지 않았다. 그래서 끝내 행려병자로 처절하게 막을 내린 것이다. 행려병자로서의 죽음은 기존 가치관이나 일상과의 타협을 거부한 하나의 상징이다.
나혜석은 1녀 3남을 두었다. 딸, 아들, 아들, 아들이다. 큰아들은 어려서 죽었고 둘째 아들 김진은 서울대 법대 교수, 막내아들 김건은 한국은행 총재를 지냈다. 나혜석은 1935년 이렇게 외쳤다. 이혼당한 지 5년 뒤, ‘이혼고백서’를 발표한 이듬해로 막내아들 김건이 일곱 살이던 때다.
“사남매 아이들아, 어미를 원망치 말고 사회제도와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라.
네 어미는 과도기에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였더니라.”(‘신생활에 들면서’, ‘삼천리’ 1935년 2월호)
일곱 살짜리 어린 아들이 어머니의 외침을 제대로 알아듣기나 했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훗날 성장하며 김건은 어머니의 자화상을 볼 때마다 그 목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견디기 힘든 과정이었으리라.
어머니의 불륜과 이혼, 아버지의 어머니 학대, 어머니의 누추한 최후, 가족 친지와 세상 사람들의 수군거림…. 김건 전 총재가 어머니 나혜석의 존재를 외면하고 부정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죽어서야 이뤄진 귀향
▲ 경기 수원 나혜석거리에 있는 나혜석 동상. [이광표 제공]
나혜석은 1928년 이미 이런 상황을 예감한 것 같다. 그것이 저 망연한 눈빛의 정체다. 훗날 자신의 삶을 한 장의 그림으로, 한 컷의 눈빛과 표정으로 기록하다니. 예술가의 운명적인 직관이라고 생각하니 섬찟하게 다가온다. 그렇기에 저 눈빛이 더 슬프다. 물론 이 또한 추정일 뿐이다. 눈빛의 미스터리, 중성적 얼굴의 미스터리는 풀고 싶지만 잘 풀리지 않는다. 그런데 풀리지 않기에 더 매력적이다. 100년 전 시대를 앞서간 나혜석을 만나는 일이 그리 간단치 않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나혜석은 자화상에서 자식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이제 내가 에미라는 사실을 자신 있게 밝혀도 되느니라. 비록 죽음은 누추했으나, 나의 삶은 당당했다”고. “나의 아들아, 나를 바라보라. 내가 여기 있다”고.
막내아들과 막내며느리가 기증한 ‘나혜석 자화상’과 ‘김우영 초상’은 수원시립아이파크 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미술관 바로 옆은 수원 화성(華城) 행궁이다. 수원에서 가장 운치 있는 곳, 거기서 길 하나 건너면 행궁마을이 있다.
사방으로 골목이 예쁘게 펼쳐진 고즈넉한 마을이다. 이리저리 얽힌 골목길을 걷다 보면 ‘정월 나혜석 생가터’ 표석이 눈에 들어온다. 나혜석이 태어난 곳, 그사이 집은 사라졌고 터만 남았다. 요즘엔 이 골목길을 나혜석 옛길이라 부른다.
나혜석에게 수원 시민들이 가진 관심의 표현이다. 사람들은 골목길 담장 곳곳에 나혜석의 그림들을 그려 놓았다. 나혜석을 기억하려는 글과 그림도 있다. “남녀 불평등한 사회구조에 맞섰던 예술가. 꽃보다 더 붉은 영혼을 지닌 예술가”라는 안내판이 사람들을 맞이한다.
나혜석 생가터에서 미술관까지는 걸어서 불과 5분 정도. 젊은 시절, 나혜석은 이 길을 오가며 평등 세상을 꿈꾸었을 것이다. 하지만 꿈은 이뤄지지 못했다.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과 행려병자 나혜석의 간극….
막내아들 김건은 생의 마지막 순간, 어머니 자화상을 세상에 기증하라고 유언을 남겼다. 이는 중대 발설이었다. 그건 어머니를 인정하겠다는 것이다.
어머니 나혜석과 막내아들 김건의 화해는 두 사람이 모두 세상을 떠난 뒤에야 이뤄졌다. 나혜석 가족사의 해원(解寃)이기도 했고, 나혜석과 세상의 화해이기도 했다. 나혜석은 비로소 고향으로 돌아왔고, 세상 사람들은 김건 전 한국은행 총재가 나혜석의 아들임을 알게 됐다.
‘나혜석 자화상’은 미술관 독립 공간에 ‘김우영 초상’과 함께 전시돼 있다. 한때는 사랑하는 남편이었으나, 이혼 이후 자신을 파탄으로 몰아넣은 사내와 함께 있다니, 이 상황을 나혜석은 어떻게 생각할까. 두 사람의 화해는 과연 가능한 것인가. 자화상의 눈빛은 우리에게 끝없이 질문을 던진다.
◆ 나혜석은 1녀 3남을 두었다. 딸, 아들, 아들, 아들이다.
큰아들은 어려서 죽었고 둘째 아들 김진은 서울대 법대 교수, 막내아들 김건은 한국은행 총재를 지냈다.
김건 전 한국은행 총재 별세
등록 :2015-04-19 19:38수정 :2015-04-19 19:41
김건 전 한국은행 총재.
김건 전 한국은행 총재가 숙환으로 17일 별세했다. 향년 86.
고인은 1929년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1896~1948년)의 막내(셋째) 아들로 부산에서 태어나 서울대 정치학과를 나왔다.
88년 한국은행 17대 총재에 부임한 그는 6월항쟁 이후 민주화 바람 속에서 금융 민주화에 기여했다. 특히 97년 한국은행법 개정 때, 한은 총재가 금통위 의장을 맡도록 개정되는 기틀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유족으로는 부인 이광일씨와 아들 재민(동의대 교수)·성민(KAIST 경영대 교수) 황민(연세대 원주의대 교수)씨가 있다.
‘나혜석 자화상’의 미스터리한 눈빛
이광표
●1965년 충남 예산 출생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졸업
●고려대 대학원 문화유산학협동과정 졸업(박사)
●전 동아일보 논설위원
●저서 : ‘그림에 나를 담다’
신동아 2019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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