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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세계에 너무 일찍 도착한 선각자 나혜석!

by 한국의산천 2020. 12. 16.

나혜석 막내(셋째)아들 

김건 전 한국은행 총재 별세

등록 :2015-04-19 19:38수정 :2015-04-19 19:41

김건 전 한국은행 총재.
김건 전 한국은행 총재가 숙환으로 17일 별세했다. 향년 86.
고인은 1929년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1896~1948년)의 막내(셋째) 아들로 부산에서 태어나 서울대 정치학과를 나왔다.


88년 한국은행 17대 총재에 부임한 그는 6월항쟁 이후 민주화 바람 속에서 금융 민주화에 기여했다. 특히 97년 한국은행법 개정 때, 한은 총재가 금통위 의장을 맡도록 개정되는 기틀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유족으로는 부인 이광일씨와 아들 재민(동의대 교수)·성민(KAIST 경영대 교수) 황민(연세대 원주의대 교수)씨가 있다.

 

시인 부부가 예술가에게 보내는 편지 (12)

낡은 세계에 너무 일찍 도착한 선각자 나혜석! 上

시대와 불화한다는 것

 

글 : 장석주 시인

 

당신 이름 뒤엔 적어도 세 개쯤의 느낌표를 붙이고 싶어요.
당신은 서양화가이자 작가를 넘어…
‘현모양처라는 이데올로기’에 저항하며
여성 주체로 꿋꿋이 섰으나 사회적 따돌림으로
이 땅의 여성 중 가장 슬픈 운명으로 전락한 사람이었지요.
아, 당신은 이 낡은 세계에 너무 일찍 도착한 선각자였습니다.

 

우리 생은 얼마만큼의 불운과 절망을 품고 있는 것일까요? 그걸 투명하게 수량화할 수는 없겠지요. 다만 우리가 작은 불운은 큰 불운에게, 작은 절망은 큰 절망에게 삼켜진다는 사실을 알 뿐. 당신이 시대와의 불화 속에서 얼마나 큰 절망을 견뎌냈는지를 나는 짐작조차 못 합니다.

 

좋은 집안에서 명민한 머리를 타고난 당신이 나락으로 떨어진 것은 믿을 수 없는 사태지요. 근대의 들머리에 일본 유학을 다녀온 서양화가, 당대의 빼어난 패션 아이콘, 날 선 필봉을 휘두른 자유주의 사상가요 문필가로 알려진 당신은 이혼과 더불어 바닥이 없는 나락으로 추락합니다. 낡은 도덕에 고착된 사회는 물론이거니와 가족에게서 따돌림을 당한 채 당신은 행려병자로 떠돌다가 거리에서 생을 마친 비운의 주인공이 되고 말지요.

 

당신 이름 나혜석(羅蕙錫, 1896~1948) 뒤엔 적어도 세 개쯤의 느낌표를 붙이고 싶어요. 당신은 서양화가이자 작가를 넘어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가사 노동의 가치를 설파하며 여권 운동에 나선 사람, “여자도 사람이다. 그다음에 여자다. 그러면 여자라는 것보다 먼저 사람이다”라는 여성 인권에 대한 또렷한 인식을 보여준 사람, 1927년 외교관 남편과 함께 시베리아를 거쳐 프랑스·영국·스페인·미국 등지를 여행하며 여성 선각자로서 깨어 있던 사람, 신문·잡지에 자유연애, 생활 개선에 관한 글들을 쓰며 최소한 100년은 앞선 페미니스트로 산 사람. ‘현모양처라는 이데올로기’에 저항하며 여성 주체로 꿋꿋이 섰으나 사회적 따돌림으로 이 땅의 여성 중 가장 슬픈 운명으로 전락한 사람이었지요.

아, 당신은 이 낡은 세계에 너무 일찍 도착한 선각자였습니다.

 

1941년 어느 날, 화가 이승만의 집 문 앞에 걸인 여인이 나타났어요.
“저, 나혜석이에요.”
여인은 제 이름을 밝혔지만 화가는 믿을 수가 없었지요.
“그럴 리가 있나요. 정말 나혜석 맞아요?”

 

그토록 저명한 명사로 화사한 아름다움을 뽐내던 여인은 간데없고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얼굴에 누더기를 걸친 걸인 몰골이라니!

 

여인은 10여 년 전에 맡긴 외국 판화 여섯 점을 찾아 치마폭에 싸 들고 사라졌습니다. 친구 김일엽이 거처하던 예산의 수덕사에 얹혀 지내다가 노자 한 푼 없이 뛰쳐나와 거리를 떠도는데, 이때부터 정신착란 증세와 신체 마비 현상을 겪지요.

 

당신은 모성애에 이끌려 충남도청 산업국장인 전남편과 아이들이 사는 대전에 모습을 나타내지만, 경찰에 의해 내쳐졌지요. 반신불수로 이곳저곳 양로원을 떠돌던 당신은 1946년 12월 눈보라 치는 어느 날 거리에 쓰러져 시립 자제원(市立 慈濟院, 현재의 서울시립남부병원)에 옮겨집니다. 당시의 관보에 따르면 사망 연월일이 1948년 12월 10일이나 확인할 길은 없지요. 당신은 자식들에게 “네 애미의 묘를 찾아 꽃 한 송이 꽂아다오”라고 부탁했지만 꽃 한 송이 꽂을 무덤은 이 지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당신은 1896년 4월 28일, 수원군 수원면 신풍리에서 태어났어요. 증조부는 호조참판을 지내고, 아버지 나기정(羅基貞)은 시흥군수를 거쳐 용인군수를 지냈지요. 딸로는 첫째였던 당신은 성격이 활달하고 두뇌는 명석했습니다. 1910년 바로 아래 여동생과 함께 서울로 올라와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다니는 동안 기숙사 생활을 했고요. 당신은 여학교 시절에 이미 문학과 미술에 재능을 보이고, 졸업할 때 성적은 평균 99점으로 수석이었어요. 일본 도쿄공대에 유학 중인 오빠의 권유로 도쿄여자미술학교 유화과에 입학한 당신은 유학생 동인지인 《학지광》에 근대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는 글을 내놓고, 유학생들로 조선여자친목회를 조직해 《여자계》라는 잡지 발간에 앞장섰습니다.

21세 때 첫사랑 남자를 폐결핵으로 잃은 당신은 와세다대학 학생이던 춘원 이광수와 급속히 가까워지지만 춘원이 기혼인 데다 도쿄 의학전문학교 학생이던 허영숙과 열애 중이라 다들 당신을 뜯어말렸지요. 첫 부인과 사별한 변호사이자 당대 명사인 김우영(金雨英)과 결혼한 것은 1920년, 당신 나이 24세 때였어요. “일생을 두고 지금과 같이 나를 사랑해주시오”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마시오” “시어머니와 전실 딸과는 별거케 해주시오”라는 당신이 내세운 결혼 조건을 김우영이 군말 없이 받아들이고, 그 전해에 김활란·신마실·황에스터·박인덕·김마리아 등과 이화학당 지하실에서 비밀집회를 갖다가 붙잡혀 옥살이를 할 때 김우영의 도움으로 면소처분을 받고 석방된 인연 때문이었지요.

이듬해 당신의 첫 개인전이 《경성일보》사의 후원으로 《경성일보》 전시장인 내청각(來靑閣)에서 열렸는데, “조선 유일무이한 여성화가”의 ‘양화전람회’는 크게 주목을 받았습니다. 《매일신보》는 기사에서 전람회가 “인산인해를 이루도록 대성황”이었고, 이튿날엔 관람자가 4000~5000명에 달했다고 전했지요. 가부장제 유교 이념이 조선 여성에게 강요한 ‘정신의 코르셋’을 벗어던진 당신은 베를린에 가 있는 남편과 떨어져 혼자 파리에 머무는 동안 당시 천도교 교령으로 널리 알려진 사회 명사인 최린(崔麟)이 파리에 왔을 때 안내를 맡았어요. 통역을 동반하고 식당과 극장을 가고, 유람선을 타고, 카페를 드나들다가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겠지요.

 

“나는 공(公)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내 남편과 이혼은 아니 하렵니다” “과연 당신이 할 말이오. 나는 그 말에 만족하오”. 여성의 권리와 주체적 삶을 주장하는 당신은 “사람이 배고프면 밥 먹고 색이 일면 색을 쓰는 게 뭐가 이상한가”라며 가부장제가 강요하는 통념에 맞서지만, 당신은 주류 사회의 관습과 통념을 거스르고 너무 앞질러 간 데 따른 면죄부를 얻지는 못했습니다. 당신의 염문이 돌고 돌아 김우영 일가의 귀에도 들어가고, 결국 1931년에 강제 이혼을 당하지요.

 

1934년 당신은 이혼 전말기 ‘이혼고백서’를 월간지 《삼천리》에 2회에 걸쳐 전문을 연재하고, 최린에게 이혼보상비 청구 소송을 제기하면서 장안은 온통 당신 얘기로 시끄러웠습니다. 당신은 선망받는 신여성에서 하루아침에 비난과 멸시를 받는 ‘화냥년’으로 전락하는데, 그 전락은 여성 정조에 대한 가부장제 사회의 낡은 이데올로기가 정치적 올바름과 예술적 재능을 두루 갖춘 한 여성을 어떻게 파멸시키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지요.

 

여성으로 태어난 불행을 내재화할 때조차 꿋꿋함을 잃지 않고, “아이들아, 애미를 원망치 말고 사회제도와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라. 네 애미는 과도기의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이었더니라”는 당신의 말은 그대로 유언이 되었습니다.

 

아아, 인생무상!
금생에서 겪은 영욕은 다 잊으시고 그 피안에서
늘 평안하시길 빕니다.

2020년 12월호

장석주 시인
전업 작가. 파주에 살며, 음악과 산책을 좋아한다. 주로 글을 쓰거나 인문학 강연을 한다. 197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철학자의 사물들》 《이상과 모던뽀이들》 《마흔의 서재》 《일상의 인문학》 《호젓한 시간의 만에서》 등과, 아내인 박연준 시인과 함께 《우리는 서로 조심하라고 말하며 걸었다》 《내 아침 인사 대신 읽어 보오》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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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러스거나 마이너스인 삶

 

글 : 박연준 시인

 

문득 서늘해집니다.
남성이라면 하지 않아도 되었을 존재 증명,
존재의 평등할 권리를 당신으로부터 작금의 여성들까지,
이토록 오래 주창해야 하다니요.
“나는 사람으로 태어난 것을 후회합니다”라고 당신은 말했지만,
기억하세요. 당신을 괴롭힌 시대와
남성중심사회의 사람들은 잊히지만, 당신은 아니에요.
당신 이름 ‘나혜석’은 비석처럼 남아 있습니다.

 

자화상, 1928 추정, 캔버스에 유채, 88x75cm,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소장. © 뉴시스

 

먼저 당신 이름 석 자를 불러보고 싶습니다.
나혜석. 단단하게 빛나는 비석처럼 다가오는 이름입니다.

 

당신이 떠난 뒤 약 7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당신 이후, 이 땅에 글을 쓰고 예술을 하는 많은 여성이 태어났습니다. 당신 이후, 여성의 지위는 조금씩 올랐다고도 하고 아직 갈 길이 멀다고도 하지만, 당신 이후, 많은 게 바뀌었습니다. 어제 글을 한 편 썼습니다. ‘여류’라는 수식어를 (아직도) 붙여 말하길 좋아하는 사람들에 대해 쓴 글이지요. 여류 시인, 여류 작가, 여류 문학, 여류 인사…. 당신이 살던 시대에는 더했겠지요? 그냥 화가가 아니라 당신을 ‘여류’ 화가라 부르는 사람들이 많았겠지요?

 

“여성이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추앙되거나 깎여 내려지는 경우는 많다. 여배우, 여의사, 슈퍼우먼, 슈퍼맘이란 말을 보자. 얼핏 보면 추앙의 의미로 보이지만 사회가 규정해놓은 여성상에서 ‘벗어나 있는’ 존재를 칭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말로도 보인다. 수식어는 대상을 구체적으로 규정하려 한다. 이름 붙이고 낙인을 찍고 평가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 평가! 그렇다, 평가가 포함되어 있다. 남자 의사, 남자 작가, 남자 외교관, 남자 대통령이라고 하지 않는 이유는 인간의 기본값을 ‘남자’로 둔 이 사회의 사고방식 때문이다. 그리고 언어는 사회의 사고방식을 반영한다. ‘여류’라는 말엔 여성을 세상(남성)의 아류로 전락시키려는 함의가 들어 있다.”

 

요 며칠 당신이 남긴 글을 읽으며 당신 삶에 대해 깊이 생각해봐서일까요. 생각 끝에 당신이 서 있습니다. 흔히 문화 비평을 할 때 평론가들이 여성을 ‘대상화’하지 말라고 지적하잖아요? 사전에서 대상(對象)이란 말을 찾아보니 “어떤 일의 상대 또는 목표나 목적이 되는 것”이라고 나오더군요. 여성은 누군가의 상대, 누군가의 목표나 목적으로서 칭송받거나 비판받는 존재로 취급받으며 살아왔습니다.

 

어릴 때 여자 어른들에겐 자기 이름이 없었습니다. 누구의 어머니, 누구의 딸, 누구의 아내로 불렸지요. 지금은 달라졌다고 하지만 글쎄요. 도돌이표처럼, 수시로 돌아가지 않나요? 누구의 누구로. 자기 옆에 붙은 수많은 수식어들을 돌보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여성들, 여전히 많지 않나요? 그 많은 것을 돌보고 난 뒤, 그럼에도 자기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알려 성공을 거둘 때, 여성 앞에는 작위처럼 ‘슈퍼’라는 수식어가 붙습니다. 뛰어난 남자에겐 슈퍼맨이란 칭호를 붙이진 않지요. 그들에게 슈퍼맨은 그저 영화 캐릭터입니다. 남성의 뛰어남, 그건 익숙한 일이니까요. 그들은 역사적으로 오랜 시간 동안 ‘훌륭하게 살도록’ 주문받아 왔으니까요.

 

여성으로 산다는 건 플러스나 마이너스 부호를 달고 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언제나 평가받아 왔기 때문이지요. 부호 없이, 그냥 나 자신. 나 이외의 무엇으로도 평가받지 않을 권리가 우리에겐 필요합니다.

 


경기 수원시 팔달구 인계동 나혜석 거리에 있는 나혜석 동상. © 뉴시스


“남자는 칼자루를 쥔 셈이요, 여자는 칼날을 쥔 셈이니 남자 하는 데 따라 여자에게만 상처를 줄 뿐이지. 고약한 제도야. 지금은 계급 전쟁 시대지만 미구에 남녀 전쟁이 날 것이야. 그리고 다시 여존남비시대가 오면 그 사회제도는 여성 중심이 될 것이야. 무엇이든지 고정해 있지 않고 순환하니까.” 1)

 

1933년 2월 28일자 《조선일보》에 당신이 발표한 글을 읽으며 전율했습니다. 곧 여성이 중심이 되는 사회가 올 거라는 당신의 예언에 두근거렸습니다. 이미 지금을 살아가는 여성들은 달라졌습니다. 옛날엔 당신과 같은 분이 적었기에 당신 홀로 외로운 투쟁을 해야 했지만, 여성들조차 여성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지금 여성들은 서로 연대합니다. 불평등에 대해 논쟁하고, 글을 쓰고, 행동을 바꾸려고 합니다. 용기를 내 발언하고, 서로의 발언을 지지합니다. 여성 서사가 주가 되는 시와 소설, 영화를 만들고 향유합니다. ‘벡델 테스트’라는 걸 만들어, 영화 속에서 여성이 꼭두각시처럼 사용되고 버려지는 일을 비판합니다.

 

이 모든 건 우리에 앞서, 당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성을 종 아니면 사유재산 정도로 여기던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아무것도 아니요, 오직 취미다”라고 일갈한 당신 덕분입니다. 조선 사회의 인심을 탓하며 “여성을 보통 약자라 하나 결국 강자이며, 여성을 작다 하나 위대한 것은 여성”이라고 만천하에 외친 당신 덕분입니다.

 

“조선은 어떠한가? 조금만 변한 행동을 하면 곧 말살시켜 재기치 못하게 하나니 고금의 예를 보아라. 천재는 당시 풍속 습관의 만족을 갖지 못할 뿐 아니라 차대(次代, 다음 때)를 추측할 수 있고 창작해낼 수 있나니 변동을 행하는 자를 어찌 경솔히 볼까보냐. 가공할 것은 천재의 싹을 분질러놓는 것이외다. 그러므로 조선 사회에는 금후로는 제1선에 나서 활동하는 사람도 필요하거니와 제2선, 제3선에 처하여 유망한 청년으로 역경에 처하였을 때 그 길을 틔워주는 원조자가 있어야 할 것이요, 사물의 원인 동기를 심찰하여 쓸데없는 도덕과 법률로써 재판하여 큰 죄인을 만들지 않는 이해자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2)

 

‘이혼고백장’이란 제목으로 당신이 쓴 글의 일부입니다. 당신은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고, 수중에 돈 한 푼 없이 쫓겨나듯 이혼을 당했습니다. 그 심정이 얼마나 답답하고 원통했으면, 이혼고백장이란 형식의 전대 없는 글을 쓰게 했을까요? 솔직하고 자기성찰이 담긴, 이 문제적 글이 당신을 조선 사회에서 더 고립된 존재로 만들었다는 건 사실이지요. 천재의 싹을 분질러놓는 게 이 나라의 취미일까요?

 

문득 서늘해집니다. 남성이라면 하지 않아도 되었을 존재 증명, 존재의 평등할 권리를 당신으로부터 작금의 여성들까지, 이토록 오래 주창해야 하다니요. 미래의 여성들은 우리와 또 다른 시간을 맞이하겠지요? “나는 사람으로 태어난 것을 후회합니다”라고 당신은 말했지만, 기억하세요. 당신을 괴롭힌 시대와 남성중심사회의 사람들은 잊히지만, 당신은 아니에요. 당신 이름 ‘나혜석’은 비석처럼 남아 있습니다. 지금, 여기서, 우리는 여전히 당신을 생각합니다. 당신이란 존재에 감사드립니다.

1)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 나혜석, 민음사, 9쪽.
2)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 나혜석, 민음사, 201쪽.

2020년 12월호

 

박연준 시인
파주에 살며, 일주일에 세 번 발레를 배운다. 창문, 숲, 기러기를 좋아한다. 2004년 ‘중앙신인문학상’을 통해 등단했다.
시집으로 《속눈썹이 지르는 비명》 《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 《베누스 푸디카》 《밤, 비, 뱀》이 있고, 산문집 《소란》 《밤은 길고 괴롭습니다》 《인생은 이상하게 흐른다》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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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족불욕(知足不辱)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지지불태(知止不殆)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가이장구(可以長久) 오래도록 편안할 것이다.  - 노자 도덕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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