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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MTB등산여행

잘 짜여진 단단한 성 남한산성

by 한국의산천 2014. 5. 10.

한번도 점령당하지 않고 깨지지 않은 남한산성 [2014 · 5 · 10 · 하늘 파란 토요일]

   택리지의 기록처럼 남한산성은 광주, 성남이요 성남하면 남한산성이 떠오르는 곳이다. 그렇다 성의 남쪽에 자리한 도시이기에 성남시라고 명명되었다.

남한 산성(사적 제 57호) 은 북쪽의 개성, 남쪽의 수원, 서쪽의 강화, 동쪽의 광주 등을 지키는 4대 외곽 가운데 동쪽에 자리한 성으로 북한산성과 함게 도성을 지키는 남부의 산성이다. 흔히 남한산성을 위락지 또는 유원지 정도로 생각하지만 남한산성은 우리민족의 자존심이고 가슴아픈 사연을 지닌 곳이다.그리고 생각보다 크고, 높고, 가파른 산이다.

 

조선 후기 지리서 "택리지"를 보면 여주 다음으로 광주가 소개되고 있다. 

  여주 서쪽은 광주(廣州)로 석성산에서 나온 한 가지가 북쭉으로 한강 남쪽에 가서 고을이 형성되었으며 읍은 만 길 산꼭대기에 있다. 옛 백제 시조였던 온조왕이 도읍하였던 곳으로, 안쪽은 낮고 얕으나 바깥쪽은 높고 험하다. 성안은 험하지 않지만, 성 바깥 산 밑은 살기를 띠었다. 또 중요한 진(鎭)이므로 만약 사변이라도 있으면 반드시 전투가 벌어질 지형이다.

 

이런 대목도 나온다.

(남한산성은)"한강 남쪽에 있고 중심지는 만 길이나 되는 산꼭대기 위에 있다. 옛날 백제 시조 온조왕의 옛 도읍이었던 곳이다. 안쪽은 평평하고 얕으나 바깥쪽은 높고 험하다. 청나라 군사들이 처음 왔을 때 병기라고는 날(刀)도 대보지 못하였고, 병자호란때도 성을 끝내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인조가 성에서 내려온 것은 양식이 부족하고 강화가 함락 되었기 때문이다". - 택리지에서-  

 

 

 

  남한산성은 조선시대뿐 아니라 삼국시대부터 천연의 요새로 중요한 역할을 하던 곳이다. 백제의 시조인 온조의 왕성이었다는 기록이 있고, 나당전쟁이 한창이던 신라 문무왕 12년에 한산주에 쌓은 주장성이라는 기록도 있다. 고려시대에는 몽고의 침입을 격퇴한 곳이기도 하고 일제강점기엔 항일운동의 거점이 되기도한 곳이다.

 

  그러나 남한산성은 병자호란으로 기억되는 곳이다. 조선 인조 14년 청나라가 침략해오자 왕은 이곳으로 피신하여 항전하였으나, 왕자들이 피신해있는 강화도가 함락되고 폐색이 짙어지자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에 나가 치욕적인 항복을 하였기 때문이다.

 

   '병자호란', '인조', '삼전도의 치욕'... 하지만 정작 남한산성은 패배를 알지 못하는곳이다. 성 외부는 급경사를 이루어 적의 접근이 어렵고, 내부는 경사가 완만하여 넓은 경작지와 물을 갖춘 천혜의 전략적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병자호란 당시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청군에 함락되지 않고 47일이나 항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오랜기간동안 우여곡절을 가진 성의 역사처럼 성곽의 형태 또한 단순하지 않아서 하나의 폐곡선으로 이루어진것이 아니라 본성, 본암성, 한봉성, 신남성과, 5개의 옹성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구조이다.

 

  인조4년에 중앙부의 가장 큰 폐곡선인 본성이 완성되었고, 병자호란 이후 방어력을 높이기 위하여 동쪽의 봉암성, 한봉성 등을 비롯하여 여러차레 증축을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남한산성(南漢山城) 

성과 성벽 건축물 지정종목 : 사적 제13호 
제작시기 : 1395년(태조 4) 건립, 1704년(숙종 30) 중수
소재지 : 경기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남한산성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남한산에 있는 산성으로,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57호로 지정되었다. 북한산성(北漢山城)과 더불어 서울을 남북으로 지키는 산성 중의 하나로, 신라 문무왕 때 쌓은 주장성(晝長城)의 옛터를 활용하여 1624년(인조 2)부터 오늘의 남한산성 축성 공사가 시작되어 인조4년(1626년)에 완공한데 이어, 산성 내에는 행궁을 비롯한 인화관, 연무관 등이 차례로 들어서 수 백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문화유산으로 자리잡았다. 이러한 문화유산은 1894년에 산성 승번제도가 폐지되고, 일본군에 의하여 화약과 무기가 많다는 이유로 1907년 8월 초하루 아침에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그 이후 주인을 잃은 민족의 문화유산들은 돌보는 사람 없이 방치되다가 하나 둘 역사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고 말았다. 그렇지만 남한산성 주변에는 수많은 문화유산들이 여전히 자리잡고 있다. 그 중에는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는 것에서 터만 남아있거나 문헌상으로 확인되는 것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하다. 최근 들어 복원공사가 한참인 남한산성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석축으로 쌓은 남한산성의 둘레는 약 9km이다. 자연석을 써 큰돌을 아래로, 작은 돌을 위로 쌓았다. 동서남북에 각각 4개의 문과 문루, 8개의 암문을 내었으며 동서남북 4곳에 장대가 있었다. 성 안에는 수어청을 두고 관아과 창고, 행궁을 건립했다. 유사시에 거처할 행궁은 73칸, 하궐 154칸으로, 모두 227칸을 이 때 지었다.

80개의 우물, 45개의 샘을 만들고 광주읍의 행정처도 산성 안으로 옮겼다. 이쯤되면 남한산성의 중요성과 성안이 유치 가능 인구도 짐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산성이 축조되고 처음으로 시행(인조 17년, 1639)된 기동 훈련에 참가한 인원만 해도 1만 2,700명이었다. 그러나 성곽에 남아 있는 건물은 불과 몇 안 되었지만 근래에 행궁을 예전 모습 그대로 새로이 복원하였다   

 

  동,남문과 서장대, 현절사, 문무관, 장경사, 지수당, 영월정, 침괘정, 이서 장군사당, 숭렬전, 보, 루, 돈대 등이 남아있다. 그 중 4대문과 수어장대, 서문 중간쯤의 일부 성곽은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 남문 주차장 옆에 정리된 공덕비,비석군 지대를 지나서 남문으로 갑니다 ⓒ 2014 한국의산천

 

남한산성 비석군 성내의 비석 30기를 한곳으로 모아 놓은 곳으로 영의정을 지낸 심상규등의 비석들이 있다.

 

 

 

 

▲ 남한산성의 남문 ⓒ 2014 한국의산천

 

  남한산성에는 동, 서, 남, 북에 4개의 대문이 있는데, 남문은 남한산성에 있는 4대문중 가장 크고 웅장한 중심문으로 현재에도 출입이 가장 많은곳이다. 선조때의 기록을 보면 동문, 남문, 수구문의 세문을 수축하였다는 내용이 있는것으로 보아 남문은 인조2년(1624년) 수축되기 이전부터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남한산성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될 것이 확실하다.


문화재청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의 자문기구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가 남한산성을 실사해 `등재 권고` 판정을 내렸다고 2014년 4월 29일 밝혔다.

등재 권고가 되면 이변이 없는 한 당해 열리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등재가 확정된다. 따라서 남한산성은 6월 15~25일 카타르 수도 도하에서 개최되는 제38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등재될 전망이다. 남한산성이 등재되면 한국은 모두 11건의 세계유산을 보유하게 된다.

남한산성은 동아시아에서 도시계획과 축성술이 상호 교류한 증거로서 군사유산이면서 지형을 이용한 축성술과 방어전술의 시대별 층위가 결집된 초대형 포곡식 산성(계곡을 감싸고 축성된 산성)이라는 점 등이 세계유산으로 가치를 인정받았다고 문화재청은 설명했다. 효과적인 법적 보호 체계와 보존 정책으로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는 것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동문

산성의 남동쪽에 위치하며 좌익문이라 한다.

성문의 폭은 3.1m, 높이는 4m이다. 다른 문에 비하여 동문은 가장 낮은 지대에 축조되어 있고 계단을 구축하여 우마차의 통행은 불가능하였다. 

 

 

 

 

 

 

 

 

◀ 서문

산성의 북동쪽 모서리 부분의 해발 450m 지점에 위치하며 우익문이라 한다.

서문은 인조 15년(1637) 인조가 세자와 함께 이 문을 통해 청나라 진영으로 들어가 화의를 맺고 항복했던 문이다.

문의 폭은 1.46m이고 높이는 2.1m이다. 

 

 

 

 

 

 

 

 

◀ 남문
 

성의 서남쪽 해발 370m 지점에 위치한다.

산성수축(인조 2년│1624) 이전부터 이미 존재하였고 지화문이라 하며 4대문 중 유일하게 현판이 남아있는 문이다.

성문은 홍예문과 문루로 구분되며, 홍예문은 높이 4.75m 너비 3.35m 길이 8.6m로 원상이 잘 보존되어 있다.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건축 양식이 잘 갖추어져 있다.

남문은 4대문 중 가장 크고 웅장한 중심문으로 현재에도 관광객의 출입이 가장 많은 곳이다.

 

 

 

 

 

◀ 북문
 

북문은 해발 367m 지점으로 인조 2년(1624년)에 신축된 성문이다.

전승문이라 칭하며, 문의 폭은 3.25m, 높이는 3.65m이다.

 

 

 

 

 

 

 

 

 

▲ 하늘은 파랗고 시나브로 짙어져가는 오월의 숲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히는 날 집사람과 함께 남한산성에 오르다 ⓒ 2014 한국의산천 

 

 

▲ 남한산성 개념도. 성벽따라 한바퀴 약 9km의 숲길을 걸었다 ⓒ 2014 한국의산천  

오늘 코스는 남문 (지화문)에서 시계바늘 방향으로 돌아서 서문, 북문, 동문을 지나서 다시 남문으로 돌아오는 원점회기 코스로 약 9km의 적당한 오르막과 내리막의 걷기 좋은 숲길입니다.   

 

 

▲ 집사람과 함께 오월의 신록을 가득히 느끼며 역사의 숲길을 걷다 ⓒ 2014 한국의산천    

 

  남한산성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단어는 '병자호란', '인조', '삼전도의 치욕'이다. 하지만 정작 남한산성은 패배를 알지 못하는곳이다. 성 외부는 급경사를 이루어 적의 접근이 어렵고, 내부는 경사가 완만하여 넓은 경작지와 물을 갖춘 천혜의 전략적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병자호란 당시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청군에 함락되지 않고 47일이나 항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오랜기간동안 우여곡절을 가진 성의 역사처럼 성곽의 형태 또한 단순하지 않아서 하나의 폐곡선으로 이루어진것이 아니라 본성, 본암성, 한봉성, 신남성과, 5개의 옹성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구조이다.

 

 

 

<남한지(南漢志)>에 따르면, 원래 심기원(沈器遠)이 축성을 맡았으나 그의 부친상으로 인하여 이서(李曙)가 총융사(摠戎使)가 되어 공사를 시작하여, 1626년 7월에 끝마쳤다. 공사의 부역(賦役)은 주로 승려가 맡아 하였다. 4문(門)과 8암문(暗門)이 있으며 성안에는 관아(官衙)와 창고 등, 국가의 유사시에 대비하여 모든 시설을 갖추었고,

승군의 사역과 보호를 위하여 장경사(長慶寺)를 비롯한 7개의 사찰이 새로 건립되었으나 현존하는 사찰은 장경사뿐이다. 그 뒤 순조 때에 이르기까지 각종의 시설이 정비되었다. 

 

  대외적으로는 후금의 위협이 커지고 대내적으로는 이괄(李适)의 난 등으로 어려웠던 조선 인조대에 남한산성은 현재의 모습으로 대대적인 개수를 하였다. 이 때의 공사는 각성(覺性)을 도총섭(都摠攝)으로 삼아 팔도의 승군을 동원하여 진행되었다. 이후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 인조가 이곳으로 피란하였는데, 이 때 수어사인 이시백(李時白)은 서성을, 총융대장 이서는 북성, 호위대장(扈衛大將) 구굉(具宏)은 남성, 도감대장(都監大將) 신경진(申景所)은 동성 망월대, 원두표(元斗杓)는 북문을 지켰다.

 

 

▲ 남한산성의 남문 (지화문) ⓒ 2013 한국의산천

 

 남문은 정조 3년(1779) 성곽을 보수할 때 개축하고 지화문(至和門)이라 하였다. 1976년 문루를 복원하였고 2009년 정조의 글자를 집자하여 전면에 현판을 설치하였다. 인조가 처음 남한산성을 들어 올 때 바로 이문을 통해서 들어왔다.

 

 

 

  남한산성은 신라 문무왕(661∼681, 재위)이 쌓은 주장성(일명 일장산성)의 옛터를 활용하여 몇 차례 축조가 있었으나 조선 인조 2년(1624) 크게 고쳐 쌓은 성으로, 후금국의 위협과 이괄의 난이 동기가 되어 총융사 이서에게 명하여 2년만에 공사를 마쳤다. 축성에는 각성(覺性)이 도총섭이 되어 8도의 승군을 동원하였다.

  성의 대대적인 중축과 함께 승병을 주둔시켜 성 수비에 필요한 훈련을 하였다. 이를 위해 전부터 있던 망월, 옥정사 외에 국청, 천주, 개원, 동림, 남단, 한흥, 장경의 7개 사찰을 창건하였으나 현재는 장경사만이 남아 있다. 성내의 시설은 인조 때부터 순조 때까지 계속되었으며, 유사시 임금이 거처할 행궁은 상궐 73칸 반, 하궐 154칸이었다.
현재 동·서·남·북문에는 문루가 있고, 동·서·남·북의 4장대 중에서는 서장대만이 남아 있다.

 

 

 

 

 

능선 아래로 이어져 있는 길도 겹친 산줄기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길은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며, 마음의 길을 마음 밖으로 밀어내어 세상의 길과 맞닿게 해서 마음과 세상이 한줄로 이어지는 자리에서 삶의 길은 열린다.

 

 

▲ 오랫만에 파란 하늘과 북한산과 도봉산 그리고 불암산까지 보이는 쾌청한 날씨였습니다 ⓒ 2014 한국의산천

 

 

▲ 수어장대 ⓒ 2014 한국의산천

  이 건물은 조선 인조 2년(1624)에 남한산성 축성과 함께 축조된 동·서·남·북의 4장대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장대로 산성 내 최고봉인 일장산(해발 453m)에 위치하고 있어 성내와 인근의 양주, 양평, 용인, 고양 및 서울, 인천까지도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일장산은 서울특별시와 하남시에 걸쳐 있는 산으로서, 남한산성이 있는 청량산의 옛 이름이다.

당초에는 단층누각으로 축조하고 서장대라 불리었으며 남한산성의 수어를 맡았던 수어청(전, 좌, 우, 중, 후의 5관이 소속되었음) 중 우영장이 진을 치고 있었던 곳이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 때에는 인조가 친히 군사들을 지휘, 격려하며 청태종의 13만 대군과 대항하여 45일간을 항전하던 곳으로 영조 27년(1751)에는 유수 이기진이 왕명으로 서장대 위에 2층 누각을 건립하고 외부 편액은 수어장대, 내부편액은 무망루라 이름하였다.

 

 


▲ 무망루 편액 ⓒ 2014 한국의산천


  무망루라 함은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인조의 아들인 효종이 볼모로 심양(현 봉천)에 잡혀 갔다가 8년 만에 귀국하여 항상 청국에 대한 복수심으로 북벌을 꾀하다 승하한 원한을 후세에 전하고 그 비통함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후 영조, 정조가 효종의 능소인 여주 영릉에 참배하고 돌아가는 길에 이곳 장대에 들러 하룻밤을 지내면서 병자호란 때의 치욕사를 되새겼다고 전한다.

수어장대 현 건물은 고종 건양 원년(1896) 유수 박기수가 재건하였는데 2익공계 양식에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으며 하층 평면은 정면 3칸과 측면 2칸을 구획하여 고주를 세우고 주위 4면에 퇴칸을 돌렸으며 중앙에는 단을 만들었다. 

 

 

 

 

 

 

 

 

 

 

▲ 오른팔이 아직도 불편하지만 스틱을 사용하니 걷기가 좋았다 ⓒ 2014 한국의산천 

    

 

 

서울을 지키는 외곽에 4대 요새가 있었다. 북쪽의 개성, 남쪽의 수원, 서쪽의 강화, 동쪽의 광주였다. 동쪽의 광주에는 남한산성이 있었다. 

 

  남한산성은 서울에서 동남쪽으로 24 km, 성남시에서 북동쪽으로 6km 떨어져 있는 남한산(광주시 중부면 산성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길이는 9.05km, 높이는 7.3m 이다.

원래 2천여년 전, 고구려 동명왕의 아들 백제의 시조 온조왕 때 쌓은 토성이었으나, 이를 신라 문무왕 때 다시 쌓아 '주장성'을 만들고, 그 옛터를 활용하여 후대에도 여러번 고쳐 쌓다가, 조선조 광해군 때(1621) 본격적으로 축성하였다 한다. 

 

  한강과 더불어 남한산성은 삼국의 패권을 결정짓는 주요 거점이었다. 백제가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한 이후 백제인들에게 있어서 남한산성은 성스러운 대상이자 진산으로 여겨졌다. 남한산성안에 백제의 시조인 온조대왕을 모신 사당인숭열전이 자리잡고 있는 연유도 이와 무관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조선시대 남한산성은 국방의 보루로서 그 역할을 유감없이 발휘한 장소였다. 특히 조선왕조 16대 임금인 인조는 한산성의 축성과 몽진,항전이라는 역사의 회오리를 이곳 산성에서 맞고 보낸 바 있다.오늘날의 남한산성은 인조 2년(1624)부터 축성되어 인조 4년(1626)에 완공 되었으며, 산성 내에는 행궁을 비롯한 숭열전, 청량당, 지수당, 연무관 등이 들어서 수 백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문화유산으로 자리 잡았다

 

남한산성內 인구 4천여 명 유지

 

  인조는 산성 수축을 마친 후 1626년 11월 현재의 하남시에 있던 광주의 치소(治所)를 산성 안으로 옮기고 광주 주민 및 주변 지역의 주민들을 대대적으로 모집해 산성으로 이주시켰다.

  당시 남한산성에 모집한 호구 수는 모두 300호 정도였는데 이들에게는 국가에서 부과하는 신역(身役)과 전세(田稅)를 면제해 주었다. 그러자 산성 안의 인구가 1천여 호에 이르게 됐고, 이후 산성 안의 주민 수는 19세기 말까지 4천여 인구가 안정적으로 유지됐다고 한다.

 

 

 

  현재 남한산성에는 정조의 방문과 관련된 유적 두 가지가 남아있다. 첫째는 수어장대 아래 언덕 위에 세워진 병암남성신수비(屛岩南城新修碑)다. 이 비는 정조가 방문하기 전 남한산성 성곽을 보수한 내용을 기록한 것인데, 공사비로 돈 1만 냥과 쌀 900석이 투입되었으며 공사를 마친 후 성 서쪽에서 돌을 구해다가 새겼다고 한다. 비문은 서명응이 지었고 글씨는 광주부윤 이명중이 썼다. 둘째는 남한산성 동문 밖에 세워져 있는 '기해주필' 비인데, 정조의 명령에 의해 서명응이 세운 것이다.

 

 

병암남성신수비(屛岩南城新修碑) ⓒ 2014 한국의산천    선조들의 건축실명제의 한 단면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금석문이다. 정조3년 1779년까지 약 50여 일간에 걸쳐 수어사 서명응의 지휘아래 남한산성을 대대적으로 보수한 사실을 기록하였다.

 

인조반정이 병자호란을 부르다 

성리학적 윤리관에 기초해 명분과 의리를 내세운 인조반정은 광해군 때의 중립외교정책을 패륜으로 비판하면서 친명배금정책을 낳았다. 이러한 정책은 결국 정묘호란(丁卯胡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을 불러와 임진왜란 이후 이제 막 수습되어 가던 국가의 기반과 경제를 다시금 파탄 상태로 몰아넣는 계기가 되었다.

 

 

▲ 칸에게 치욕과 수모를 당한 서문 ⓒ 2014 한국의산천  

 

  살을 에는듯한 북풍한설 몰아치는 정월. 城안의 말 먹이는 동이난지 오래며, 한마리 두마리 허연 콧바람을 내뿜으며 허덕이다 쓰러지고, 성을 지키는 병졸은 가마때기 한장 없이 눈보라를 맞으며 통나무 쓰러지듯 하나 둘 스러져갔다. 지금으로부터 372년전 이곳 남한산성에서 벌어진 광경이다.  

 

  1월30일, 왕은 남염의(藍染衣)를 입고 흰말을 타고는 이곳 서문을 통해 성을 나가야 했다. 서문은 작고 낮아서 말을 타고서는 도저히 지나 갈 수 없는 문이다. 또한 서문을 지나서 내려가는 길은 좁고 매우 가파른 길이기에 말을 타고 내려 갈수없는 곳이다. 

 

  삼전도에 다다라 칸에게 삼배구고두례를 행하고 칸과 함께 술을 마셨다. 그런데 술상이 파할 무렵 칸은 두 마리의 개에게 상에 차려져 있던 고기를 베어서 던져 주었다고 하니 그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밭 한 가운데에 우두커니 앉아있던 왕에게 도성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칸의 명령이 떨어진 것은 해거름이었다. 

 

소파진(所波津)으로 한강을 건넌 왕을 향해 사로잡힌 백성들은 울부짖었다.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시나이까(吾君 吾君, 捨我而去乎)?"라고 말이다.

 

 

 

병자호란에 대해서

 
  인조 14년(1636) 12월 9일 청 태종은 12만 병력을 거느리고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넜다. 휘하의 예친왕(豫親王) 다탁(多鐸)은 선봉 마부대(馬夫大)의 기병부대에게 의주 백마산성을 우회해 곧바로 서울로 남하시켰다. 14일에 개성 유수가 청군이 개성을 통과했다고 보고하자 인조는 다시 강화도로 파천하기로 결정했으나 이미 길이 끊긴 상황이었다.

 

  인조는 할 수 없이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갔는데 <인조실록>은 "성 안 백성 중 부자·형제·부부가 서로를 잃고 통곡하는 소리가 하늘을 뒤흔들었다"고 전해 주고 있다. 게다가 남한산성은 겨울 농성 장소가 아니었다. 1만3000여 병력과 1만4000여 석의 양곡이 있었으나 혹한은 청나라 군사보다 무서운 적이었다. 추위에 강한 청군이 눈 덮인 산성을 포위했으나 구원군은 오지 않았다. 얼어 죽는 군사들이 속출하는 가운데 인조 15년(1637) 1월 26일 강화도가 나흘 전에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인조는 그달 30일 신하를 뜻하는 푸른 남염의(藍染衣)를 입고 소현세자를 비롯한 백관을 거느리고 삼전도(三田渡)로 나가 황옥(黃屋)을 펼치고 앉아 있는 청 태종에게 항복했다.

 

 

 

지금으로 부터 378년전 병자년(1636년·인조14년) 그 해 겨울,

갈 수 없는 길과 가야 하는 길은 둘이 아닌 하나로 포개져 있었다.

죽어서 살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 

 

1636년,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예조판서 김상헌은 선전후화론(先戰後和論)를 강력히 주장하였고, 이조판서 최명길은 선화후전론(先和後戰論)을 내세우면서 서로의 대립각을 세웠다. 

 

김상헌의 목소리에 울음기가 섞여 들었다.
- 전하, 죽음이 가볍지 어찌 삶이 가볍겠습니까? 명길이 말하는 생이란 곧 죽음입니다. 명길은 삶과 죽음을 구분하지 못하고, 삶을 죽음과 뒤섞어 삶을 욕되게 하는 자입니다. 신은 가벼운 죽음으로 무거운 삶을 지탱하려 하옵니다.

 

최명길의 목소리에도 울음기가 섞여 들었다.
- 전하, 죽음은 가볍지 않사옵니다.만백성과 더불어 죽음을 각오하지 마소서. 죽음으로서 삶을 지탱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 죽을지언정, 굴복은 있을수 없다" 청음 김상헌과 " 굴복을 할지라도, 살아야만 한다" 지천 최명길. 두분의 개인적인 안위를 위해 그렇게 행동하지는 않았다. 나라와 백성을 위해 충신 두분 말의 표현은 달랐어도 마음에 담은 애국심 그뜻은 같지 않았을까 ?  


마침내 최명길의 화청정책이 받아 들여져서 1937년 1월 30일 인조임금은 삼전도에서 청나라 칸앞에 무릅을 꿇게된다. 항복 문서를 작성하고 이후로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기는 약 200여년간 청의 완전한 속국이 되었다. 한반도 안에서 성을 쌓거나 성을 보수 할 수 없었으며 군사시설을 만들수도 없었으며 수많은 공물과 여자와 포로를 바치고 살아야만 했다.

 

 

 

가노라 三角山(삼각산)아 다시 보쟈 漢江水(한강수)야
故國山川(고국 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時節(시절)이 하 殊常(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김상헌 청구영언-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끝가지 척화 항전(斥和抗戰)을 주장하던 우국지사 김상헌이 패전 후 청나라로 잡혀가면서 부른 노래로, 비분 강개한 심정이 응어리져서 나타난 작품이다.

이 길이 마지막 길이 될지도 모르는 지은이로서는 다시 한 번 불러보지 않을 수 없는 이름일 것이다. 조국에 대한 뜨거운 사랑
이 절규 또한 우리 민족 모두의 아픈 가슴이었으리라. 임진,병자 양 난은 민족의 치욕이요 고난이었다.

 

 

▲ 북문 (전승문) ⓒ 2014 한국의산천

남한산성 북쪽 해발 365m 지점에 있는 북문으로, 이 문을 통해 세곡을 운반하였다. 인조 2년(1624)에 신축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정조 3년(1799) 성곽을 개보수할 때 개축한 후 전승문(戰勝門)이라 이름 붙였다. 현재 편액은 걸려 있지 않다.

 

 

 

 

▲ 산세를 따라 굽이치며 옹골차게 이어져 나가는 남한산성 ⓒ 2014 한국의산천  

 

 

 

  걷는 일은 어떠한 경우에도 포기하지 않는 인내심을 필요로 하는 일이어서 즐거운 상황에서든 복잡하게 일이 꼬인 상황에서든 서두르지 않고 적응하는 법을 익혀야 한다. 길을 걷는 사람은 기회를 만들어 가는 예술가이다. 

 

 

 

길위의 만찬

   먹기위해 잠시 멈추는 일은 언제나 축복의 순간이자 훌륭히 전진한데에 대한 일종의 보상이다. 식사는 시간을 멈춘 명상의 순간으로서 일상의 습관을 떨쳐내기 위한 돌파구가 된다.

    식사에서 최고는 음식의 맛이 아니라 타인의 존재를 음미한다는 사실이다. 버터를 바른 빵조각 몇개를 나누어 먹더라도 식탁을 함께 나누고 관계를 축하하며 들뜨면서도 평화로운 사회관계의 정점을 누린다.   

 

 

 

 

 

 

 

 

 

 

 

 

 

 

▲ 장경사 일주문 ⓒ 2014 한국의산천

 

 

▲ 장경사 ⓒ 2014 한국의산천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남한산성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조계사(曹溪寺)의 말사. 경기도문화재자료 제15호.
1983년 9월 19일 경기도문화재자료 제15호로 지정되었다. 1624년(인조 2) 남한산성의 축성이 시작되자 인조 3년에 승도청(僧徒廳)을 두고 각성(覺性)을 도총섭(都摠攝)으로 삼아 전국 8도의 승군(僧軍)을 동원하여 사역을 돕게 하였다. 승군의 숙식을 위하여 전부터 있던 망월사(望月寺)·옥정사(玉井寺) 외에 1638년(인조 16) 개원사(開元寺)·한흥사(漢興寺)·국청사(國淸寺)·천주사(天柱寺)·동림사(東林寺)·남단사(南壇寺) 등 새로운 사찰을 창건하였는데 그때 함께 창건되어 오늘날까지 유일하게 남아 있는 사찰이다.

  축성 뒤에도 승군을 주둔시켜 수성(守城)에 필요한 승군의 훈련뿐 아니라 전국의 승군을 훈련시키는 한편 고종 때까지 250년 동안 전국에서 뽑은 270명의 승려들을 교체하며 항상 번승(番僧)을 상주입번(常駐立番)하게 하였다.

 

 

 

 

▲ 대웅전 내부에 있는 장경사 동종 ⓒ 2014 한국의산천  

  2014년 5월 9일 경기도 문화재위원회가 도지정문화재로 확정해 9일 공고한 남한산성 장경사 동종(강희 21년명 장경사 동종).
남한산성 장경사 동종은 남한산성을 보수한 1624년부터 축성과 관리를 담당한 10대 사찰 중 하나인 장경사가 1682년 중량 300근(180㎏)을 들여 만든 중간크기의 종으로 대웅전 안에 보관 관리되고 있는 동종이다.

 

 

 

 

 

 

 

 

 

정조가 방문한 남한산성

 

병암남성신수비(屛岩南城新修碑), 기해주필

  정조가 남한산성을 방문하여 남긴 유적이다. 정조는 1779년(정조 3)에 도성을 벗어나 남한산성과 이천, 여주를 방문했다. 7박 8일에 이르는 장거리 여행이었는데, 여행의 목적지는 여주에 있는 효종의 영릉이었다. 효종은 선왕인 인조가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당한 치욕을 갚기 위해 북벌을 추진하다가 1659년에 승하했다. 그런데 1779년은 그로부터 2주갑 즉 120주년이 되는 해였으므로, 이를 기념하기 위한 여행이었다. 그러나 정조의 여행지는 남한산성에 집중되어 있었다.

 

  정조가 그 해 새해에 자신의 스승이자 측근 신하인 서명응을 수어사에 임명했다. 당시 남한산성은 수어사의 관할 하에 있었는데, 정조는 서명응을 이곳에 파견하여 남한산성의 제반 여건을 정비하고자 했다. 서명응은 이곳에 부임하자마자 남한산성을 대대적으로 수리했다. 성곽을 보수하는 공사는 1779년 3월에 시작되었는데, 6월 18일에 공사가 마무리되자 정조는 유공자를 포상했다. 이 때 광주부윤 이명중은 품계가 올라갔고, 서명응은 호랑이 가죽을 선물 받았다. 국왕이 신하에게 주는 최상의 상품이었다.

 

  정조가 남한산성을 방문한 첫날은 8월 3일이었다. 이날 정조는 수어사 서명응의 안내를 받으면서 남문을 통해 입성했는데, 융복 위에 황금 장식이 달린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쓴 장수의 모습이었다. 정조는 남한산성에 있는 행궁의 정당에 올라 수어사, 광주부윤, 수어청 교련관을 불러 남한산성과 광주부의 현황을 물었다. 병자호란 때 인조가 서있던 바로 그 자리에서였다. 정조의 질문은 광주부의 인구, 남한산성의 군사훈련과 재정 상황에 집중되었다.

 

  정조가 남한산성을 다시 방문한 것은 8월 7일이었다. 이날 정조는 다시 수어사와 광주부윤을 만나 남한산성과 광주부의 현황을 물었는데, 방문지에 대한 사전 지식이 많았던 국왕의 질문이 매우 구체적이라 관리들을 긴장하게 했다. 8월 8일에 정조는 남한산성 연병관에서 문무과 별시를 보았는데, 국왕과 시험관들의 복장은 모두 융복이었다. 이날 정조는 승군들이 진을 펼치는 것을 보았고, 서양에서 전래된 홍이포 계열 화포의 발사 시험을 관람했다. 8월 9일에 정조는 남한산성 서장대에서 주, 야간 군사훈련을 참관했다. 이날 정조는 산성 내의 서성, 남성, 북성을 차례로 돌면서 성벽의 보수 상황을 점검하고 병자호란 당시의 쓰라린 역사를 회고했다. 정조는 백성들의 채무를 탕감하는 특별 조치도 시행했다. 정조가 20년간 쌓인 채권 문서를 가져와 백성들 앞에서 불태우게 하자 이를 지켜보던 백성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8월 10일에 정조는 남한산성을 출발하여 창덕궁으로 돌아왔다.

 

  여행을 마친 정조는 서명응에게 두 가지 임무를 부여했다. 하나는 책자를 만드는 임무였는데, 국왕의 행차를 수행한 장수 및 군사들의 이름과 숫자, 이동 경로를 상세히 기록한 "배종록(陪從錄)"을 작성하고 남한산성에 관한 고사를 정리한 "남한산성지(南漢山城誌)"를 편찬하라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기념비를 만들라는 것이었는데, 남한산성의 동문과 남문 밖에 기해년(1779)에 국왕이 방문했음을 알리는 '기해주필(己亥駐禘)' 비석을 세우게 했다.

 

  정조는 7박 8일 가운데 4박 5일을 남한산성에 머물렀다. 여주의 영릉을 방문하기 위해 이동한 시간을 제외하면 사실상 대부분의 시간을 남한산성에서 보낸 것이다. 정조가 남한산성을 방문한 것은 서울을 방어하는 남쪽 거점인 남한산성의 관리 상태를 확인하고 군사 조련을 점검함으로써 혹시나 있을지 모를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현재 남한산성에는 정조의 방문과 관련된 유적 두 가지가 남아있다. 첫째는 수어장대 아래 언덕 위에 세워진 병암남성신수비(屛岩南城新修碑)다. 이 비는 정조가 방문하기 전 남한산성 성곽을 보수한 내용을 기록한 것인데, 공사비로 돈 1만 냥과 쌀 900석이 투입되었으며 공사를 마친 후 성 서쪽에서 돌을 구해다가 새겼다고 한다. 비문은 서명응이 지었고 글씨는 광주부윤 이명중이 썼다. 둘째는 남한산성 동문 밖에 세워져 있는 '기해주필' 비인데, 정조의 명령에 의해 서명응이 세운 것이다. (글: 김문식 / 단국대 사학과 교수)

 

 

 

 

 

남한산성, 그 해 겨울과 봄

- 김훈의 <남한산성>, 2007

  

기병을 앞세운 청의 군사들이 압록강을 건넜다. 조선의 장병들이 집결한 안주安州1)를 그냥 지나쳐 그들은 다시 청천강을 건넜다. 조정의 신료들이 대동강이 얼었는지를 가늠하는 사이, 적들은 개성에 이르러 임진강을 바로 목전에 두고 있었다. 한겨울 대륙에서 몰아치는 북서풍은 그칠 줄 몰랐다. 개성에서 서울, 말로 달리면 고작 하루 길이었다. 대륙의 초원에서 가을동안 살이 오른 말들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달렸다. 모질게 불어 닥치는 바람 앞에 강물은 흐름을 멈춘 채, 소리죽여 엎드렸다. 그들은 깊숙이 들어왔다. 강화도로 향하던 어가행렬은 급히 말머리를 돌렸다. 도성의 수구문을 빠져나간 임금은 송파나루를 건너 남한산성으로 올랐다. 이틀 뒤, 용골태의 병사들도 송파강을 건넜다. 삼전도 들녘에 하얀 눈 먼지가 일었다. 십만 아니 십오만 이라고도 했다. 멀리서는 병사들의 수를 헤아릴 수 없었고, 겁에 질린 두려움은 땅이 흔들리는 소리를 더욱 크게 들었다. 짓밟히고 있었다. 그 해 겨울은 일찍 찾아와서 오래도록 머물렀다. 강물은 꼼짝없이 얼어붙었고, 경계는 소리도 없이 허물어지고 있었다.

  

옛터가 먼 병자년의 겨울을 흔들어 깨워, 나는 세계악에 짓밟히는 내 약소한 조국의 운명 앞에 무참하였다. 그 갇힌 성에서는 삶과 죽음, 절망과 희망이 한 덩어리로 엉켜 있었고, 치욕과 자존은 다르지 않았다. 말로써 정의를 다툴 수 없고, 글로써 세상을 읽을 수 없으며, 살아 있는 동안의 몸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시간들을 다 받아 내지 못할진대, 땅 위로 뻗은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으리. 2)

  

<남한산성>을 시작하며, 김훈은 이렇게 역사를 회고했다. 역사는 작가의 손에서 다시 쓰였지만, 김훈은 ‘소설 <남한산성>은 역사로서 평가될 이야기가 아니다.’고 말한다. 기억해야 할 것과 기억할만한 것들이 새로 걸러지고, 외면의 풍경이 내면의 상처 속에서 기억을 불러내는 작업이 그의 글쓰기다. 창작이 고통스럽다는 말은 그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자유로움은 늘 외로움이라는 그림자를 동반한다. 그 길 위에 김훈은 특유의 건조하고 메마른 문체로 짙은 허무를 드리운다. 때문에 양지를 지향하는 박물관의 승전보보다는 음지에 웅크린 고통들을 쫓아가는 그의 소설은 아프다. 김훈의 <남한산성>은 적으로부터 지키기 위한 성이지만, 지키려는 자들을 가두는 성이기도 했다. 그해 겨울, 이곳 남한산성에는 가야하는 길 위에 갈 수 없는 길이 하나로 포개져 있었다.

  

길은 이어졌다. 1636년 병자년의 겨울, 인조의 어가가 산성으로 올랐던 길은 청량산의 야트막한 경사를 따라 오르막이었다. 산성역에서 십리 길이었다. 성 밖에서 성 안으로 드는 길은 막힘이 없었다. 성문은 활짝 열려 있었지만, 피난길에 황망한 행렬을 맞이했던 남문은 이제 소란스러운 큰길에서 한 발짝 빗겨 서 있다. 아래쪽 산을 뚫어 이은 터널로 지나치는 자동차들은 무심했다. 성안으로 들어서고 처음 만난 로터리에서 길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동서남북의 사대문으로 연결되는 성의 중심이다. 성안마을은 사방으로 봉우리들에 둘러싸여 오목한 분지 위에 앉아 있다. 청량산에 기댄 서문 쪽에서 동문 방향으로 흐르는 개천을 따라 길이 이어졌고, 군사훈련을 주로 하던 연무관 앞에까지 이러저러한 음식점과 상가들이 붙어있다. 주민들이 ‘종로’라고 부르는 이 교차로에는 예전에 산성 안의 시간을 알리던 종이 있었다고 한다. 해가 오후로 기울기 시작하면서 산성 안의 명암이 엇갈렸다. 임금의 처소였던 행궁은 바로 저만치에서 청량산의 그늘 속으로 이제 막 파묻히고 있었다. 그 해, 임금은 남한산성에 있었다.

  

김상헌은 급한 전갈을 받고 채찍을 휘둘러 말을 다그쳤다. 송파강에 이르러 해가 저물었다. 강은 얼어서 두어 척의 나룻배는 강가에 묶여 있었다. 청병은 아직 오지 않았는데, 소문이 먼저 닿아 있었다. 송파 나루에 사공이 아직 남아 있었다. 나라가 망해가는 살얼음판 위에서도 살 길은 있었다. 사공이 강을 건넸다. 지난밤에 임금의 행렬도 그 길을 찾아 강을 건넜었다. 사공은 피난을 떠나지도, 김상헌을 따라 산성에 오르지도 않았다. 청병 또한 얼어붙은 송파강을 건너야 할 것이었다. 사공은 그 길에서 목숨을 연명할 궁리를 찾고자 했지만, 살아서 강을 되돌아갈 수 없었다. 사공의 목이 뒤돌아서던 김상헌의 칼을 피하지 못했다. 김상헌의 칼에는 이유가 있었지만, 사공이 어찌 자기죽음의 까닭을 짐작했겠는가. 그래도 사공의 몸은 김상헌의 칼을 저항 없이 받았다. 삶에 이유를 묻지 않았듯이 죽음을 맞던 그는 몸부림치지 않았다. 성으로 오르는 눈길 위에는 한 사람의 발자국만 남았다.

  

성안의 시간은 빛과 그림자에 실려 있었다. 아침에는 서장대 뒤쪽 소나무 숲이 밝았고, 저녁에는 동장대 쪽 성벽이 붉었다. 빛들은 차갑고 가벼웠다. 아침에는 소나무 껍질의 고랑 속이 맑아 보였고, 저녁에는 성벽에 낀 얼음이 노을에 번쩍였다. 해가 중천에서 기울기 시작하면 밝음의 자리와 어둠의 자리가 엇갈리면서 북장대 쪽 골짜기에 어둠이 고였다. 행궁 마당에는 생선가시 같은 비질 자국이 선명했고, 저녁의 빛들이 가시 무늬 속에서 사위었다. 오목한 성 안은 시간의 그림자가 자, 축, 인, 묘의 눈금을 따라가다가 하지에 짧아지고 동지에 길어지는 해시계처럼 보였다. 동지 언저리의 그림자는 길었다. 저녁이면 늙은 신료들이 긴 그림자를 끌면서 행궁마당을 지나 처소로 돌아갔다.3)

  

텅 빈 묘당에 말들이 남았다. 말들은 내행전의 차가운 마룻바닥에 엎드린 대신들의 등 위에서 부딪혔다. 이조판서 최명길이 세상 밖으로 나아가는 길을 말하면, 예조판서 김상헌은 그 길에 죽음보다 더한 치욕이 있음을 말했고, 영의정 김류의 말은 시종일관 두리뭉실하고 갈팡질팡했다. 묘당 안에서 늙은 신료들의 말은 살점이 없는 뼈다귀들처럼 부딪치며 울었고, 울다가 부러졌고, 산산조각이 나서 길을 잃곤 했다. 길을 잃어버린 말들이 행궁 아래 마을로 내려오면, 백성들의 입에서 떠돌다가 얼어붙은 성벽에 부딪혀 갈래갈래 찢겼다. 더러는 관리들의 입을 타고 가파른 산등성이에 붙은 성첩으로 오르기도 했다. 서장대 밖 멀리 삼전도에서 불어온 매서운 바람으로 군병들의 몸이 바싹 얼었지만, 메마르고 갈라진 말들은 병졸들의 마음을 녹이지 못했다. 굳게 닫힌 성안에서 바짝 움츠려든 나라의 운명은 ‘겨우내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는 말 속에서 진물이 터지고, 고름이 흘렀다. 겨울 산성은 골바람 속에서 유난히 떨었고, 동지를 지낸 겨울밤은 짧아질 줄 몰랐다. 원병은 오지 않았다. 임금은 구원의 발길조차 미치지 못하는 남한산성에 있었다.

  

행궁을 돌아 수어장대로 오르는 길, 제법 가파른 청량산 자락에 붙어 소나무들은 단단히 땅을 움켜쥐고 바람을 견디고 있었다. 성첩에 오르자 성벽은 가파른 능선을 따라 산성의 서문까지 굽이졌다. 성루에서는 송파나루가 있었던 삼전도가 원경 속에서 한 눈에 잡혀들었다. 저 땅을 가득 매웠던 청군들의 막사와 창날에 부딪쳐 날카롭게 찔러들던 빛들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사열을 받듯 겹겹이 줄을 맞춰 도열해 있는 아파트들과 빌딩들의 유리창에서 되돌아오는 빛들로 펼쳐진 풍경은 가슴이 시렸다. 강 건너는 서울이다. 높은 곳에서 바라본 물길은 건너온 길과 건너가지 못하는 길 사이를 갈라놓고 있었지만, 그것은 또한 사선의 경계였다. 물길은 역사 속의 송파강으로 흐르지 않았다.

  

인조의 피난행렬이 건넜던 송파나루, 청태종을 엎드려 건넸던 물길은 사라졌다. 지난 1971년 ‘한강공유수면매립사업’이 추진되면서 잠실과 송파 일대의 땅은 뒤집어졌다. 송파강은 매립됐고, 끊긴 물줄기는 두 개의 호수로 남아 ‘석촌호수’로 불리게 되었다. 이름 그대로 한강에 ‘뜬섬’이었던 부리도浮里島도 당시에 함께 없어졌는데, 물길의 본류였던 송파강은 섬의 남쪽으로 흘렀고, 섬의 북쪽으로는 여의도 샛강 같은 물길이 이어지곤 했었다. 하지만 물길이 사라지고, 땅을 매립한다고 해서 치욕의 역사가 묻히는 것은 아니었다. 삼전도비는 마법의 성이 지어진 그 호수공원 어디쯤에서 초라한 역사를 기억하며 세월을 견디고 있을 것이다.

  

서문의 홍예는 좁고 낮았다. 수행을 거느릴 수 없을 만큼 좁았고, 말을 탈 수 없을 만치 낮았다. 새벽 일찍 행궁을 나선 인조의 행렬은 가파른 청량산을 올라 산성의 서문으로 빠졌다. 깃발도 어가도 없었다. 나팔을 부는 취타수도 보이지 않았고, 낮은 울음들이 뒤를 따랐다. 산성의 성벽은 강건했어도, 굶주림과 추위에 지친 울음들은 메마르고 가벼웠다. 성에 남겨진 군병들과 백성들은 모두 엎드려 그 모습을 보지 못하도록 하였다. 임금도 돌아보지 않았다. 강화가 함락되었다고 했다. 함께 떠나보냈던 종묘와 사직도 불에 타고 짓밟혔을 테다. 운명의 길은 급한 내리막이었다. 서문 밖에서 삼전도로 나가는 길은 느리게 그러면서도 질기게 달라붙어 걸음은 쉽게 떼어지지 않았다. 삼전도에 이르러 조선의 임금은 아홉 단으로 쌓은 청의 황제 앞에 엎드렸다. 엎드려 술을 받고, 세 번을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찧었다. 세자가 뒤를 따랐다.

  

또 다시 겨울이다. 강을 건너 대륙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심상치 않다. 동북공정4)을 앞세운 청의 후예들이 역사를 다시 쓰려하고 있다. 고구려와 발해의 기억이 묻힌 땅을 헤집으며, 그들은 시간과 공간의 영토를 확장해가고 있다. 삼전도비는 아직 그 자리에 있다. 옛날 송파나루 자리, 석촌 호수 한 모퉁이를 겨우 차지하고 청태종의 단이 높이 쌓였던 그 자리에 버티고 서있다. 거북이 모양으로 조각된 받침 위에 비문은 사람의 키를 훨씬 넘겨서 한참을 올려다보아야 했다. 몸돌은 치욕을 잊으려고 몸부림을 친 듯 바람에 닳았고, 상처를 씻으려 강물에 잠긴 탓에 비에 새겨졌던 글씨는 온전히 알아볼 수 없었다. 돌에는 강물의 흔적이 깊이 배였고, 글을 쓰고 글자를 새겼던 이름들과 함께 오명으로 기억되었다. 비석은 청일전쟁 직후, 청의 힘이 약해지자 강물에 버려졌다가 일제강점기에 다시 세워졌지만, 1956년 또 다시 땅에 묻혔다. 그런데 1963년 홍수로 모습을 다시 드러내면서, 제101호 사적으로 지정되어 지금의 자리에 세워졌다. 한때 젊은 사학자의 울분에 훼손되기도 했지만, 강에 버리고 땅에 묻히고서도 잊혀지지 않는 것이 역사였다. 한강의 강물은 이제 삼전도 옛 송파나루에서 비껴 흐르고 있지만, 돌에 새긴 오욕보다 뼈에 새겨진 아픔은 더 오래 기억되는 것이 아니던가. 죽음보다 더 오래 삶이 이어지고, 그 삶 속에 핏줄처럼 흘러가는 것이 역사가 아니던가. 김훈은 이렇게 말한다.


  

신생의 길은 죽음 속으로 뻗어 있었다. 임금은 서문으로 나와서 삼전도에서 투항했다. 길은 땅 위로 뻗어 있으므로 나는 삼전도로 가는 임금의 발걸음을 연민하지 않는다. 밖으로 싸우기보다 안에서 싸우기가 더욱 모질어서 글 읽는 자들은 갇힌 성 안에서 싸우고 또 싸웠고, 말들이 창궐해서 주린 성에 넘쳤다.

나는 아무 편도 아니다. 나는 다만 고통 받는 자들의 편이다.5)

  

봄이 오고 있었다. 어김없이 봄은 다시 오고 있었다. 송파강의 얼음이 녹으면서 강물이 풀렸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해가 저물어, 인조는 도성으로 환궁했다. 건너왔던 강들을 건너 제 나라로 돌아가는 청태종과 인질로 끌려가는 세자를 임금은 배웅했다. 목을 맸던 김상헌은 죽지 못했다. 얼음에 갇혔던 강물이 버려진 주검들을 삼켰고, 망가진 달구지들과 화포들이 물 밑으로 가라앉았다. 성안의 대장간 화덕에도 불이 지펴졌다. 임금의 교지를 품고 멀리 삼도를 돌았던 대장장이가 돌아온 것이다. 날쇠는 뒷마당에 묻어 두었던 장독의 똥물을 건져 밭에 뿌렸다. 난리 통에도 똥물은 잘 곰삭아 있었다. 얼음 위로 어가행렬을 건네고, 김상헌의 칼을 맞았던 사공의 주검이 겨우내 하얀 눈을 봉분으로 뒤집어쓰고 있다가 풀린 강물 속으로 사라졌다. 김상헌의 부탁으로 사공의 딸은 날쇠가 거두었다. 성으로 다시 들어오던 그날, 사공의 딸 나루가 초경을 했다. 먼 상류 쪽에서 강물은 산자락을 돌아서 흘러오고 있었다.

  

‘남한산성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작가는 소설의 마지막을 그렇게 썼다가 지웠다.

 

 

▲ 장경사에서 내려오는 길에 보이는 동문과 종로거리 그리고 행궁 ⓒ 2014 한국의산천 

 

 

▲ 순교자의 땅 남한산성순교성지 ⓒ 2014 한국의산천 

  천주교인들이 말과 행동으로 굳건한 믿음 보이며 신앙 증거하고 하느님께 모든 것 맡긴 채 당당한 죽음을 맞은곳

경기도 광주 지역은 삼국시대 이래 지리적 요충지로서 1595년(조선 선조 28) 남한산성이 축조되었다. 1626년(인조 4) 광주 유수(留守)의 치소와 마을이 성 안으로 이전되면서 천주교가 박해당할 때마다 신도들이 이곳에서 순교하였다.

  1791년(정조 15) 조선시대 최초의 천주교도 박해사건인 신해박해(辛亥迫害) 때부터 신도들이 남한산성에 투옥되었다고 전하며, 1801년(순조 1) 신유박해(辛酉迫害) 때는 이곳에서 첫 순교자가 나왔다. 이후 1839년(헌종 5)의 기해박해(己亥迫害)와 1866년(고종 3)의 병인박해(丙寅迫害) 등을 거치면서 약 300명의 신도들이 참수(斬首)·옥사(獄死)·장사(杖死) 등의 형태로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동문 ⓒ 2014 한국의산천 

 

 

 

 

 

 

 

 

 

 

 

남한산성 행궁

 

행궁 (行宮)

행궁은 조선시대 임금이 도성 밖으로 행차했을 때 임시로 정무를 집행하기 위해 머무르던 별궁(別宮). 이궁(離宮)이라고도 한다. 고려 및 조선 시대의 역대 임금들은 본궁 이외에 전국에 행궁을 세우고 지방순행시 처소로 사용하거나 전란 발생시 피난처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특히 고려 시대에는 삼경설(三京說) ·삼소설(三蘇說) 등 지리도참사상의 영향으로 많은 행궁들이 세워졌다.

 

고려 시대의 행궁으로는 문종 때의 좌우궁(左右宮), 예종 때의 용언궁(龍堰宮), 인종 때의 대화궁(大花宮), 의종 때의 수덕궁(壽德宮) 등이 있으며, 조선 시대의 행궁으로는 세조 때의 온양행궁(溫陽行宮), 인조 때의 광주행궁(廣州行宮)·강화행궁(江華行宮), 숙종 때 남한산성의 행궁, 정조 때의 수원의 화성행궁(水原行宮) 등이 있다.

 

조선의 행궁은 모두 23곳이 있었는데, 남한산성 행궁은 그중 유일하게 역대 왕들의 신주를 모신 종묘와 왕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사직을 갖춘 곳이다. 종묘와 사직은 곧 나라를 뜻하니, 왕이 이 곳에 오는 것은 나라 전체가 옮겨오는 것과 같다.

  

 

▲ 107년만에 복원된 행궁과 행궁의 정문인 한남루 ⓒ 2014 한국의산천  

 

온갖 영욕의 세월을 극복하고 인류의 세계유산으로 다시 태어날 준비를 마친 남한산성 행궁

경기도는 남한산성의 세계유산 등재를 위해 33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남한산성 세계유산 등재 추진위원회를 공식 출범시킬 계획이다. 2014년 6월에 등재여부가 최종 판가름 될 예정이다. 

 

  한남루를 지나 안쪽 문으로 들어서면 하궐이다. 하궐의 중심은 왕이 정무를 보던 외행전. 외행전 오른쪽 건물은 조선시대 남한산성을 관할하던 광주유수부의 관아인 일장각이다.

  외행전 뒤 계단으로 올라가 문을 지나면 왕의 침전인 내행전이 있는 상궐이다. 내행전 부속 건물인 좌우 행각 중 오른쪽 행각 바깥에 광주유수의 집무실인 좌승당이 있다.

남한산성 행궁의 종묘인 좌전은 내행전 뒤에 숨어 있는 후원 담장 너머 오른쪽에 따로 담장을 두르고 서 있다. 서울의 종묘처럼 정전과 영녕전을 갖췄는데 규모는 훨씬 작다

 

 

▲ 1882년 촬영된 남한산성 행궁의 정문인 한남루 ⓒ 2014 한국의산천 

주춧돌만 남아 있던 남한산성 행궁이10년 공사후 복원이 되었다

 

연간 320만 명이 찾는 남한산성은 1906년 일제는 남한산성의 승군들을 토벙한다는 명분아래 성곽내에 있었던 사찰 20여곳을 모두 없애면서 행궁마져도 파괴해 버렸던것을 그동안 105년동안 기다리다 10년에 걸쳐서 완공을 본것이다.

 

  경기도는 2012년 10여년에 걸친 남한산성 행궁권역 복원을 축하하기 위한 낙성연(落成宴)을 가졌다. 낙성연은 조선시대에 건축물의 완공을 축하하는 잔치를 뜻한다.

일본은 1907년 우리나라의 군대 해산령을 내리고 남한산성 성안의 무기고와 화약고를 파괴했다. 당시 행궁을 비롯한 사찰과 문화재 등이 훼손된 것으로 추정된다.

경기도는 2002년 상궐(침전)의 내행전 등의 복원을 시작으로 2004년 좌전, 2010년 하궐(정전)의 외행전 등을 복원했다. 2012년 하궐 단청과 남한산성 안내 전시시설까지 복원 공사를 완료했다. 10여년에 걸쳐 총 215억 원이 투입됐다.

 

  낙성식은 조선 정조 시대 때 발간된 수원 화성 성곽 축조에 관한 경위와 제도, 의식 등을 기록한 ‘화성성역의궤’ 등의 고증을 바탕으로 전통 낙성연을 재현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경기도지사, 경기도의회 의장, 광주시장 등과 주민들이 현판 제막식 및 낙성연에 참가했다. 

남한산성은 2010년 1월 10일 유네스코가 지정하는 세계문화유산 잠정 목록에 등재됐다. 2011년 2월8일 문화재청으로부터 국내 13곳의 세계유산 잠정목록 가운데 우선 등재 추진 대상으로 선정됐다.

 

 

▲ 행궁 안에 있는 어좌(왕의 자리)와 일월오봉병 ⓒ 2014 한국의산천

 

일월오봉병

어좌의 배경으로는 ' 일월오봉병 '이 있다. 일월오봉병은 하늘에 걸려 있는 붉은 해와 흰 달, 청록색의 다섯 봉우리의 산,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두 줄기의 폭포, 붉은 수간(樹幹)에 녹색의 무성한 잎을 가진 소나무, 그리고 파도와 포말이 출렁이는 물을 소재로 하여 그린 그림을 말한다.

 

오일월오봉병이란 국왕의 용상뒤에 치는 병풍이다. 국왕은 정전에 앉았거나 멀리 능행을 떠나도, 궁중의 실내용 뿐만 아니라, 왕이 거동하여 임시로 머무는 장소, 예컨대 전시(殿試)를 치르는 과거 시험장 등 야외에도 혹은 죽어서 빈전에 누웠거나 어진이 벽상에 걸렸을 때에도 반드시 일월오봉병을 친다. 이렇듯 일월오봉병은 왕의 주변을 장엄하는 그림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일월오봉병'은 왕이 임하는 장소이면 어떤 곳이든 필요에 따라 설치되었던 장엄용 그림이라 말할 수 있다

 

일월오봉병은 현재 경복궁 근정전을 비롯하여, 창경궁 명정전, 덕수궁 중화전, 창덕궁 인정전 등 각 궁의 정전(正殿)의 어좌(御座) 뒤쪽 뿐만 아니라, 창덕궁의 대조전 대청, 그리고 신선원전 감실(龕室) 등 정전이 아닌 침전이나 선왕을 모시는 영전(靈殿)과 행궁에 설치되어 있다.

 

일월오봉병 

 

일월오봉병을 세심히 보면 하늘 오른편에 붉은해, 왼편에 흰달이 떠있다. 자연현상이전에 원리 곧 음양이다.중앙에 다섯봉우리가 층차를 이루며 웅장하게 솟아있다. 오행을 뜻한다.  

 땅은 폭포가 쏟아져 이룬 못으로 좌우로 나뉘었다. 넉넉한 품새로 만물을 키운다. 그중 인간이 가장 신령하고 도덕적인 존재로 천지인 삼재(三才)를 이룬다. 그러므로 국왕이 병풍의 중앙에 똑바로 앉을때만 비로소 왕(王)자를 이루면서 삼재(三)를 수직으로 관통하는 우주의 질서가 완성되는 것이다.  

 일월오봉병에는 음양오행뿐만 아니라 건태리진손감간곤의 팔괘도 들어있다. 건은 하늘,태는 못, 리는 해, 진은 좌우에 솟은 붉은 소나무, 손은 파도를 출렁이게하는 바람, 감은 달, 간은 산, 곤은 땅이다.

 

삼전도비

서울 송파구 석촌동에는 치욕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는 삼전도비가 있다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나와 항복의식을 행했던 곳이 삼전도다. 삼전도의 도(渡)는 섬이 아니라 나루터다. 한강 북쪽 산성이 북한산성이라면 남한산성은 한강 남쪽 산성이다. 산성에서 싸우다 항복하려고 한강변으로 내려온 것이다

 

병자년(1636년·인조14년) 그해 겨울, 남한산성에는 갈 수 없는 길과 가야 하는 길이 하나로 포개져 있었다. 죽어서 살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 

인조는 결국 백성들의 피해를 줄이고자 항거를 포기하고 청나라에 항복하였다.

 

1636년(인조 14) 12월∼37년 1월에 청(淸)나라의 제2차 침략으로 일어난 조선·청나라와의 전쟁으로 남한산성에서 잠시 버티다가 1월 30일 인조는 세자 등 호행(扈行) 500명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와, 삼전도(三田渡)에 설치된 수항단(受降壇)에서 태종에게 굴욕적인 항례(降禮)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 또는 줄여서 삼배구고(三拜九叩 : 세번을 절하고 아홉번을 조아린다)를 한 뒤, 한강을 건너 환도하였다.

 

 

▲ 온갖 우여곡절을 겪으며 몇번의 이전끝에 현재는 석촌호수 송파대로변에 자리하고 있는 삼전도비 ⓒ 2014 한국의산천

삼전도비는 송파구 석촌동 289-3번지 어린이 놀이터에 있다가 스프레이 테러를 당한 후 다시 원상 복구하여 현재의 위치 석촌호숫가로 자리를 옮겼다.

 

삼전도비(三田渡碑) 일명 삼전도청태종공덕비(三田渡淸太宗功德碑)는 서울특별시 송파구 잠실동 47번지(당시 경기도 삼전도)에 있는 청나라의 전승비이며 송덕비(頌德碑)이다. 병자호란 때 승리한 청나라 태종이 자신의 공덕을 알리기 위해 조선에 요구하여 1639년(인조 17년)에 세워졌다.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로도 부른다.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조선 국왕 인조는 만주족에 패해 머리를 땅바닥에 9번을 찧는 굴욕적인 항복 의식을 치러야 했으며, 삼전도비는 그것을 증언하는 역사적 산물이자 기념비다. 63년 1월 21일에 사적 제101호로 지정되었다.

 

  머리와 받침돌 조각이 정교해 조선 후기의 뛰어난 비 중 하나로 손꼽힌다. 치욕비(삼전도의 욕비(辱碑))라고도 불리며, 비를 만들 당시의 이름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였다. 내용은 청나라가 조선에 출병(出兵)한 이유, 조선이 항복한 사실, 항복한 뒤 청 태종이 피해를 끼치지 않고 곧 회군(回軍)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청나라 조정의 명으로 조선에서 건립하였다.

 

  비의 전체 높이는 5.7m, 비신의 높이는 3.95m, 폭은 1.4m이고 무게는 32t이다. 비문은 1637년 11월 25일 인조 15년 이경석이 지었고, 글씨는 오준(吳竣)이 썼으며, 대청황제공덕비라는 제목은 여이징(呂爾徵)이 썼다. 비석 앞면의 왼쪽에는 몽골글자, 오른쪽에는 만주글자, 뒷면에는 한자로 쓰여져 있다.

 

명칭비의 명칭은 다음과 같다.

만주어: Daicing gurun i Enduringge Han i gung erdemui bei()
몽골어: Dayičing ulus-un Boɤda Qaɤan-u erdem bilig-i daɤurisɤaɤsan bei
중국어: Daqing Huangdi Gongde Bei (大清皇帝功德碑)

 

370년 전 남한산성의 그 겨울은 매우 추웠습니다.  

1637년 1월 30일 조선왕 인조(仁祖)는 성문을 열고 세자와 백관(百官) 등 500여명과 함께 삼전도(三田渡)를 향해 나아갔습니다. 

 

청(淸) 태종 홍타이치의 20만 대군에 포위된 지 45일 만이었다. 삼전도(現 송파)에는 청나라 병사들이 벌써 수항단(受降壇)을 높이 쌓아 놓고 거기서 인조는 평민의 옷을 입고, 황옥(黃屋)을 깔고 앉은 청 태종에게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 세 번 절하면서 그때마다 세 번씩 머리를 땅에 조아리는 것)를 하며 항복해야했다. 그러나 청 태종의 트집으로, 인조는 피투성이가 될 정도로 몇십번 머리를 땅에 부딪쳐야했다. 그렇게 항복의 예(禮)를 올렸습니다.

또한 청태종은 자신의 승전을 기념하는 비를 세우라고 조선에 명하게 되고 비석은 당시 대제학이던 이경석이 비문을 짓고 참판 오준이 글자를 썼으며 참판 여이징이 전자(한자 서체의 하나)를 새겼다

 

조선 왕조가 창업한 지 246년, 임금이 적장 앞에 나가 머리를 조아린 일은 이것이 처음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라가 패(敗)하면 치욕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 병자호란(丙子胡亂)때 60여만명의 남녀가 만주로 끌려갔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이것뿐만이 아니라 두 아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인질로 청에 끌려갔고, (후에 고향으로 돌아온 여성들) 환향녀는 이혼문제를 낳았다. 서서히 화냥녀로 구개음화되었다)


삼전도의 비극을 놓고 훗날 두고두고 이런저런 말이 오갔습니다만, 항복밖에 달리 길이 없었습니다. 20만 대군에 둘러쌓인 성 안에는 1만 3000명의 병사와 40일분의 양식밖에 없었습니다. 그 병사들마저 배를 주리고 추위에 떨며 몸으로 새벽 서리를 받아내야 했다. 그뿐입니까. 성밖에선 청병(淸兵)들이 어미는 진중(陣中)에 붙잡아 두고, 그 어미 앞에서 갓난아이를 언 땅에 굴려 죽이는 짐승 같은 짓을 심심풀이로 해대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항복 하지 않을 수 없었었던 오늘에도 잊지 말아야 할 역사적 사실입니다.

 

 

 

삼전도비

사적: 제101호(1957.2.1) / 규모: 총고 5.7m, 신고3.95m, 신폭1.4m, 재료 대리석

삼전도비는 이곳 지명을 딴 것으로 원명은 대청황제 공덕비이다. 병자호란시(1636) 청태종이 조선을 침략하고 이 사실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비로, 처음에는 삼전도에 세워졌으나 1895년(고종32) 청.일전쟁 후에 메몰된 것을 다시 세웠다가 한강변이 침식됨으로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 

 

비문을 쓴 대제학 이경석은 "글을 배운 것이 천추의 한"이라며 피눈물을 흘렸다고 하며, 더없는 명문이나 치욕의 내용이라 세세히 읽어 보는 이가 없고, 비 앞을 지날 때는 다들 고개를 돌렸다고 한다. 

 

영의정 이경석(李景奭, 1595년 11월 18일 ~ 1671년 9월 24일)

  이경석은 조선 중기의 문신, 작가, 성리학자이자 서예가로, 자는 상보(尙輔), 호는 백헌(白軒)이다. 본관은 전주이며 시호는 문충(文忠), 충청도 제천 출신이다.

1623년의 알성문과와 1626년의 중시문과에 급제하여 영중추부사에 이르렀고 정묘호란 후 승지를 거쳐 대사간(大司諫)에 제수되었다. 1637년 12월 당시 도승지 겸 예문관 제학으로 병자호란에서 인조가 항복하게 되면서 「삼전도비문(三田渡碑文)」을 지어 올렸다. 인조 반정 공신들의 전횡에 맞서 산림학자들을 적극 천거하여 등용하게 했다. 글을 잘 지었고 저서로는 <백헌집(白軒集)>등이있고 삼전도비외 여러 작품을 남겼다.

 

누가 그에게 돌을 던지랴?

  삼전도비를 쓰고서 "글을 배운 것이 천추의 한"이라며 피눈물을 흘렸다고 하지만 그 당시로는 누구라도 임금의 명을 받아 써야만 할수밖에 없었다. 지나치게 자학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또한 인조의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는 청나라 풍습이었으니,  인조의 정비 인렬왕후(仁烈王后)의 국상을 조문 왔던 용골대 등도 삼배구고두를 하였었다. 묘소는 청계산의 서남쪽 구릉인 성남시 분당구 석운동 51 속칭 대감능골에 있다.

 

그분을 생각하면 다음과 같은 고사성어가 떠오른다.

낭중지추(囊中之錐). 다시말해 주머니 속에 송곳을 넣어두면 반드시 삐져나오듯이 걸출한 인재는 드러나기 마련이라고...

 

 

▲ 삼전도비 답사 ⓒ 2014 한국의산천

기억 저편 역사 병자호란은 옛 이야기가 아니다.  

 

삼전도(三田渡)는 조선 시대 한강 상류에 있던 나루이다. 오늘날의 위치로는 서울 송파구 일대를 말한다.

1636년(인조 14) 12월∼37년 1월에 청(淸)나라의 제2차 침략으로 일어난 조선·청나라와의 전쟁으로 남한산성에서 잠시 버티다가 1월 30일 인조는 세자 등 호행(扈行) 500명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와, 삼전도(三田渡)에 설치된 수항단(受降壇)에서 태종에게 굴욕적인 항례(降禮)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 또는 줄여서 삼배구고(三拜九叩) 를 한 뒤, 한강을 건너 환도하였다.

  

삼배구고 (三拜九叩: 세번을 절하고 아홉번을 조아린다)
 인류의 역사는 나라가 힘이 없으면 언제나 시련과 환란을 초래하기 마련, 삼전도비 역시 바로 그러한 우리의 암울한 역사를 현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1637년 음력1월30일 남한산성에서 항거하던 인조(1623 ~ 1649)가 삼전도에서 마침내 청태종 홍타이시에게 신하를 뜻하는 푸른색 관복을 입고 항복의 예를 올리게 된다. 인조는 수항단에서 청 태종에게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 세 번 절하면서 그때마다 세 번씩 머리를 땅에 조아리는 것)를 하며 항복의 예를 해야했다. 그러나 청 태종의 트집으로, 인조는 몇번이나 머리를 땅에 부딪쳐야했다.
삼전도비는 병자호란 때 청에 패배해 굴욕적인 강화협정을 맺고, 청태조의 요구에 따라 그의 공덕을 적은 비석이다

 

원래는 한강변 삼밭나루터의 항복을 했던 곳에 세워졌다가, 1895년 청일 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하여 조공 관계가 단절되자 강물에 수장시켰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인 1913년에 일제가 다시 세워놓았고, 1945년 광복 직후에 주민들이 땅 속에 묻어버렸다.

1963년에 홍수로 다시 모습이 드러났고, 여러 차례 이전을 거듭하다가 1983년에 송파구 석촌동 289-3번지에 옮겼다.이후 고증을 거쳐 2010년 4월 25일에 비석이 서 있던 원래 위치인 석촌호수 수중에서 30여m 떨어진 현재의 송파구 잠실동 47번지의 석촌호수 서호 언덕으로 옮겼다.

 

 

▲ 지구는 둥글다. 그러므로 그 지구를 태연한 마음으로 한 바퀴 돌고나면 우리는 어느 날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리하여 또 다른 여행을 준비하게 될 것이다.

 

소설 <남한산성>의 작가 '김훈'은 남한산성에서의 독자들과 만남에서 이렇게 말했다.

소설의 마지막에 '남한산성에는 아무일도 없었다'라고 썻다가 지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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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자존심과 백성을 위한 성군의 굴복 통한의 역사가 서려있는 남한산성 답사 2007년 5월 20일(일요일). [한국의산천 ] 답사코스 : 석촌동 백제초기적석총 - 삼전도 碑 -남한산성 ▲ 산성과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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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산성 삼전도비 >>> https://koreasan.tistory.com/1155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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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전도碑(비)를 찾아서 (석촌동) (현제는 송파 호수 옆으로 이전되었다) 민족의 자존심과 백성을 위한 성군의 굴복 통한의 역사가 서려있는 남한산성 그리고 삼전도 ※ 삼전도(三田渡)는 조선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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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족불욕(知足不辱)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지지불태(知止不殆)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가이장구(可以長久) 오래도록 편안하다.  - 노자 도덕경에서

 

대한민국 구석구석 즐겁고 행복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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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호흡 몰아쉬며 바람저편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자유 발의자유 정신의자유를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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