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델의 안종섭 선배와 말이없고 늘 빙그레 웃으시기만 하는 종득이 형(제일 아래 사진 참고)이 오셨기에 가까운 호프집에서 산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종득이 형에 대한 기사가 있기에 올려봅니다.
아직도 열정적으로 산행을 하는 선배님들을 보면 후배로서 내 스스로가 참으로 왜소해짐을 느낀다. 멋진 老兵들...
"술잔을 높이 우정은 더 높이”
◇ 우향 레이벡 크랙을 오르는 김한경씨와 김형욱씨.
“술잔을 높이, 우정은 더 높이, 요델! 요델! 나가자!” 할머니 집에 당도한 요델의 전사들은 오래된 리더 나경봉의 선창에 따라 함께 소리쳤다. 깡마른 외모와 달리 그의 목소리는 우렁차고 당당했다. 푸르렀던 시절이 다시 떠오른 것인지 그의 외침은 북아시아의 거친 땅을 떠나 베링 해를 건너 황량한 대지와 더불어 사는 법을 깨우친 마지막 인디언 부족이 자연을 향해 올렸던 기도문을 떠올리게 했다.
당신이 선조들에게 가르쳐 준 지혜를 나 또한 배우게 하시고 나뭇잎과 돌 틈에 감춰둔 교훈을 깨닫게 하소서. 다른 형제들보다 더 위대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과 싸울 수 있도록 힘을 주소서. 나로 하여금 똑바른 눈으로 당신에게 갈 수 있도록 준비시켜 주소서. 그리하여 저 노을이 지듯 내 목숨이 다할 때 내 혼이 부끄럼 없이 당신 품안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나를 이끌어 주소서.
존재 하는 것은 결국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것인가. 구전으로 전해오는 한 인디언 부족의 역사를 세상에 남긴 폴라 언더우드의 기록과도 같이. 요델이 즐겨 부른 선인봉의 노래도 가슴으로 읊조릴수 있는 산친구들의 이야기가 되어간다.40여 년 전 선인봉은 마치 개척시대와도 같은 활극의 무대였다. 기존 루트라곤 기존 A,B,C코스 이외에 측면길과 박쥐길 정도가 있었을 뿐이었다. 그 곳은 철학과 사색과 놀이와 친교를 실천할 수 있는 장이었다.
때로 저 앞에 죽음이 놓여 있다면 마치 그것을 숙명으로까지 받아들이는 엄숙함과 진지한 열정이 그 공간에 숨쉬고 있었다. 1963년 백인섭·강길건·조상규·윤종호·정지혜 등에 의해 알파인 클럽 요델이 태어난 이후 선인봉의 여백은 양지길·허리길·표범길·측면Y길 등의 이름으로 채워져 갔다. 그 중 요델버트레스는 1975년도에 최종적으로 마무리된 길이다.
그 길은 백인섭씨가 전성기를 보내고 프랑스 유학을 떠난 이후 후배들의 힘으로 이룬 합작품이었다.
- 1968년에 시작해 75년 6월에 최종 완성
1968년에 처음 개척 등반에 시동을 건 사람들은 나경봉·이범훈·박창희 등이었다.
그리고 그 뒤 송준호·오세진·박창희·홍경의 등에 의해서 선이 이어졌고, 이범훈·조홍식·박경립·강구영·김영호·박경식 등에 의해서 완성을 볼 수 있었다. 처음 루트가 만들어진 해는 1971년이었다. 이때 보고서를 작성하여 한국산악회 연보에 싣기 위해 제출했으나 수록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당시 편집위원장이었던 손경석씨의 제안에 의해 요델버트레스란 이름이 지어졌다. 지금의 등반선은 비슷한 시기에 루트 개척을 시작한 연세대학교 산악회의 배첼러 길과 중복되는 부분을 수정하여 1975년 6월 12일에 완성했다.
8년간의 시간이 말하듯 요델버트레스에 얽힌 일화는 그냥 흘려보낼 수 없는 숱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다시 줄을 묶는 오늘의 몸짓은 그때와 같을 수는 없지만 결국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길 바라는 마음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경봉이 형님은 오늘 밑에 계시는 게 어때요.”
“야! 그래두 임마, 내가 강단은 있잖아. 가야지.” 선배를 배려하는 후배 김한경의 말을 따를 만큼 나경봉은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등은 척추 손상으로 오래 전부터 굽어 있으나 눈빛만은 형형했다. 마치 현실 저편을 바라보는 듯한 시선이 삼형제로 통했던 엄홍석과 송준호와 어울리던 시절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지 짐작되었다.
와라락 품에 안겨야 할 것 같은 요델버트레스의 넓은 공간에 단단한 몸을 지닌 도종득씨가 선등으로 간다. 세련된 몸짓은 아닐지라도 그의 움직임은 듬직했고 난감한 벽을 헤쳐갈 수 있을 듯한 의지가 엿보였다. 헬멧을 쓰지도 않았고 시스템이 능숙하지도 않다. 안전하고 확실한. 그런 말 보단 불확실할지언정 용감한. 그래서 마음을 아프게 하는 단어가 생각났다. 문득 등산은 합리적이어야 하며 스포츠화 되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도종득씨의 뒤로 김한경이 붙었다. 스키 타다가 무릎 인대가 파열된 몸으로 이곳을 다시 오른다는 것은 모험에 가까운 일이다. “똑똑한 놈은 다 죽고 지금은 장애인들이 남아서 등반을 하고 있다”는 농담이 우습게 들리지 않았다. 느리고 불안하지만 그래도 잘 오른다.
그가 첫마디 위로 사라지자 밑에서 사람 소리가 들려왔다. 이마에 흐른 땀이 채 식기도 전에 달려온 오늘의 마지막 전사 김영욱씨였다. 어디서일까, 문득 그를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지나간 시간을 꿰맞춰 보니 우리는 만난 적이 있는 사이였다. 알프스 샤모니의 터줏대감이었으며 한국산악인들과 친분이 두터웠던 띠띠네 집, 샤모니아드 볼랑(여인숙)에서 우리는 잠시 마주친 적이 있었다. 1985년 여름이었다. 그는 요델 클럽의 백인섭씨와 함께 있었고 나는 한국산악회 알프스 훈련대의 이름으로 그 곳에 갔었다. 아주 건장한 청년으로 기억되던 그의 얼굴은 21년이 지난 지금 귀밑이 하얗게 변해가는 초로의 신사가 되어 있었다. 한마디가 끝나고 두 번째 마디를 향해 오르자 요델 팀 외에 사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나경봉씨가 레이백 크랙을 꺽은 후 더 이상의 등반은 민폐라며 하강할 할 것을 선언한다.
오랜 등반의 경험을 통해서만이 그런 판단이 내려질 수 있는 것. 그는 오늘 더 이상 손님이 될 수 없었다. 누구보다 선인봉을 요델 클럽 회원들은 사랑했다. 요델이라는 이름이 세상에 태어나게 한 장본인 백인섭씨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대부분의 회원들이 한결같이 선인봉을 즐겨 올랐다. 나경봉 역시 예외일 수 없었다. 그는 딱 한 번 인수봉에 오른 이후로 다시 가본 일이 없다.
북한산을 어떻게 가는지, 인수봉에 어떤 루트가 있는지도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선인봉만을 사랑한 그가 결벽증처럼 지키는 일은 설악산 노루목에 묻힌 산친구의 무덤을 찾아가는 일이다.
일년에 세 번 그 곳엘 간다. 첫번째는 친구 송준호가 세상을 떠난 1월2일에, 두번째는 백인상이 죽은 4월에, 그리고 엄홍석이 죽은 여름에 세 번째로 찾아간다. 거기서 형제보다 진한 우정을 나눈 친구 엄홍석과 신현주, 그리고 송준호와 영혼의 만남을 갖는다.
◇ 테라스로 진입하기 위해 슬랩을 오르는 도종득씨의 등반을 지켜보는 일행들.
- 토왕성폭에서 사라져간 송준호
엄홍석은 신현주와 함께 가장 먼저 세상을 떠났다.1969년 여름 등반 때였다. 이들의 죽음을 슬퍼한 나머지 송준호는 오세진과 함께 그해 가을 천화대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암릉을 초 등반하고 홍석과 현주의 이름을 따서 ‘석주길’이라 명명하였다. 이성적이고도 치밀한 성격을 지닌 송준호는 이때부터 감정에 흐르는 등반을 펼치지 않았나 싶다.
1947년생인 송준호는 이미 중학교 시절인 1962년경에 나경봉·엄홍석과 함께 셋이서 암벽등반을 익혔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3학년 때 백인섭씨를 만났다. 이들은 요델산악회의 입회를 제의받았지만 거부하다가 그 이듬해 대학에 입학한 후 표범길 등반에 성공하고 나서 스스로 요델에 합류했다. 송준호는 곧 등반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그의 집은 늘 등반장비를 제작하는 작업장과 같았다. 그때 이미 카라비너와 하켄, 그리고 해머와 아이스하켄과 같은 장비를 직접 만들어 쓸 정도로 장비 제작 능력이 있었다.
1971년 1월. 그는 8개 발톱이 달린 아이젠을 신고 피켈 한 자루와 직접 제작한 아이스하켄을 사용하여 오세진씨와 함께 설악산 잦은바위골(표범골)의 50m폭을 끝낸 후 100m폭을 10시간 만에 완등하는 성과를 올렸다. 스텝 커팅 방식으로 한발 한발 올라야 하는 당시의 환경으로서는 대단한 기록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듬해인 1972년 12월. 앞 프런트가 달린 12발짜리 모래내 금강 아이젠을 입수한 송준호는 다시 잦은바위골을 찾아 50m폭을 15분 만에 오른 후 100m폭을 30분 만에 오르는 기염을 토한다. 송준호의 등반 대상지는 자연스럽게 국내 최대 빙벽인 토왕성 빙폭으로 눈길을 돌리게 되었다.
1972년 12월 30일, 송준호는 잦은바위골을 떠나 설악동을 거쳐 곧 바로 토왕성폭으로 갔다.
그리고 하단을 우회하여 중단으로 진출했다. 거기서 상단 등반을 위한 장비를 남겨두고 하산했다. 그날 저녁 송준호는 서울의 백인섭씨에게 등반하기에 적합하다는 토왕성폭의 결빙 상태를 알리는 전보를 띄운 후 석주의 영전에 보내는 한 통의 편지를 남긴다. 그는 단독등반을 결심했다. 그의 사전 준비는 치밀했고 잦은바위골에서 입증된 등반 능력도 당시의 수준을 몇 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상단을 출발하기도 전에 지원을 맡은 대원의 슬립과 함께 실족이란 불운에 실려 제대로 등반을 해보기도 전에 끝이 났다. 그의 몸은 하단까지 멈추지 않고 120m를 미끄러져 떨어졌다. 그리하여 등반이 끝나면 석주의 영전에 가겠다는 편지처럼 엄홍석과 신현주가 잠든 노루목에 함께 잠들고 말았다.
하얀 빙벽위에 울던 표범 송준호 클릭 >>>> https://koreasan.tistory.com/13784103
- 유독 선인봉을 좋아한 요델산악회
너무도 많은 산친구들이 요델이란 이름으로 사라져갔다. 그들이 남긴 이야기는 결국 앞서 살았거나 동시대를 살던 별들의 궤적이었다. 꼽아보니 50명이 채 안되는 회원 중 세상을 떠난 사람이 10명이 넘는다. 그러나 단 한 명도 선인봉에서는 목숨을 잃지 않았다.
붉은 진달래가 피어나고 연녹색 기운이 돋아나는 이 계절. 하나의 홀드에 집중하는 몸짓을 다시 기억해 낸 이들의 모습에서 팍팍했던 마음이 열린다. “앗!” 잔잔한 버트레스의 바다에 둘째마디 우향 레이백을 건너는 김형욱의 외마디 소리가 들렸다. 그에게 눈과 같은 안경알이 빠져나간 것이다. 어깨의 인대가 문제가 있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그의 시력은 거의 제로에 가까워졌으므로 등반은 감각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의 걱정은 침니를 건너가는 김한경의 신음소리와 함께 비장한 합창을 연출해냈다.
보이지 않고 당길 수 없으며 굽혀지지도 않는 무릎으로 여기에 온 사실만으로도 요델의 눈물겨운 노래는 다시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다. 도종득의 발걸음은 계속 위를 향하고 있다. 상단을 남기고 김한경이 대기하고 앞을 분간할 수 없는 김영욱이 도종득의 발걸음을 따라 오른다.
그러나 전진은 더 이상 할 수가 없다. 해는 정상 뒤로 넘어가고 오늘 등반은 오버행 바위를 숙제로 남기고 끝을 낸다. 지체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하강하기로 결정한다. 북풍이 불어오는 가운데 김한경과 내가 한조, 도종득씨와 김영욱이 한조가 되어 하강을 시작했다. 엉킨 로프를 풀어가며 내려가는데 발밑에 반짝이는 물건이 눈에 띄었다. 김형욱이 떨어뜨린 안경알이었다.
날은 저물어 이미 하산 이후의 모든 계획들이 어긋나기 시작했다.
결국 약속이나 한 듯이 정상적인 시간에 집으로 돌아가기를 포기하고 만다.
외상술 마시던 친구들의 이름을 줄줄 외웠으나 한번도 재촉해보지 못하고 잠든 할머니 가게터를 지나 자식들이 사는 할머니 집으로 빨려 들어간다.“석주길에서 들쥐를 삼킨 뱀을 잡았어. 근데 그 뱀을 나보고 들고 있으래. 한번은 할머니 가게에서 중턱산악회 사람들과 한판 붙었지. 내가 먼저 ‘죽통’을 날렸어. 그랬더니 그제서야 인상이 형이 그놈 쓸만하네 하더군. 그때부터 원산폭격이 사라지고 인간 대접 받았어.” 김한경의 무용담이 이어지고 격앙된 산꾼들의 우렁찬 목소리가 우리의 ‘망구’였던 할머니집의 소박한 공간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다시 오래된 리더 나경봉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술잔을 높이, 우정은 더 높이….”
◇ 도종득씨가 하단부가 끝나는 테라스로 진입하는 김한경씨를 확보하고 있다.
▲ 도봉산 선인봉. 왼쪽으로 우람하게 솟은 요델버트레스의 위용 ⓒ 에코마운틴 한국의산천
버트레스 (buttress)란 원래 고대 건축 용어에서 나온 말이나, 등산에서는 바위의 모양이 가슴을 내미는듯한 형상으로 높이 우람하게 서있는 큰 바위면을 말한다.
- 도봉산 선인봉 요델버트레스 등반가이드
요델버트레스 길은 요델 클럽의 나경봉·이범훈·박창희 등과 송준호·오세진·박창희·홍경의·이범훈·조홍식·박경립·강구영·김영호·박경식 등에 의해 개척된 선인봉의 대표적 바위길 중 하나다. 개척 기간은 1968년 4월경부터 시등하여 1971년에 작업을 마쳤으나 이후에 루트를 수정 보완하여 1975년 6월 12일에 완성시켰다.
등반 길이는 248m이며 8마디에서 10마디까지 나누어 등반을 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오른 쪽에서 왼쪽으로 이동하며 선인봉의 정상으로 향하는 흐름을 보이지만 요즘은 하단부 등반이 끝나는 테라스까지 오른 후 인공등반으로 오르는 상단부 크랙은 생략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단부는 쌍볼트가 잘 설치된 반면 상단부 구간은 고정으로 박혀 있던 볼트와 하켄 등이 손실되어 확보 상태가 불량한 편이다. 따라서 하단부의 하강 조건은 양호한 편이지만 상단에선 후면으로 하강하거나 다른 루트로 내려가는 것이 좋다. 요델버트레스의 자유등반 등급은 첫 마디를 건너는 슬랩의 경우 5.11a로 매겨져 있고, 넷째마디 침니 아래로 가는 슬랩 부분이 5.10d로 평가되어 있다. 등반 출발은 선인봉 석굴암의 오른편에서 크랙으로 연결되는 요델길을 보며 오른쪽으로 에돌아 10여m의 작은 바위골을 올라 참나무가 있는 테라스에서 시작한다.
- 첫마디(35m) 참나무가 있는 테라스에서 반원의 바위턱을 잡고 왼쪽에 설치된 볼트에 확보한 후 왼쪽으로 바위등을 건너간다. 이후의 짧은 슬랩을 직상하여 좌향 크랙을 타고 오른다.
- 둘째 마디(25m) 좌측의 벙어리 크랙으로 건너간 후 볼트를 지나 왼쪽의 테라스로 진입한다.
- 셋째 마디(28m) 우향 크랙을 레이백으로 오른 후 쌍볼트에서 확보한다.
- 넷째 마디(15m) 짧은 슬랩을 오른 후 좌측으로 팬듈럼 하여 약간 하향 횡단한 후 슬랩을 올라 볼트에서 확보한다. 팬듈럼을 하지 않고 슬랩을 그대로 직상하여 오를 수도 있다.
- 다섯 마디(25m) 짧은 슬랩을 오른 후 돌출된 바위와 크랙을 지나 왼쪽의 넓은 테라스로 진입한다.
- 여섯 마디(35m) 왼쪽 끝으로 나가서 오른쪽 방향을 잡아 슬랩을 오른 후 크랙 위까지 오른다.
- 일곱 마디(38m) 짧은 레이백 크랙을 지나 작은 테라스로 오른 후 혹점이 있는 긴 슬랩을 올라 볼트에서 확보한다.
- 여덟 마디(25m) 짧은 슬랩을 오른 후 좌측 크랙으로 진입한 후 고정 하켄이 설치된 오버행을 오른다.
- 아홉 마디(22m) 오른쪽의 수평 크랙을 트래버스한 후 잡목 지대를 지나서 종료 지점으로 오른다.
▲ 설악산 노루목 여관촌. 오른쪽 가로등 뒤편으로 산악인 묘지가 보인다 ⓒ 2008 한국의산천
설악을 자주 찾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설악에 들면 꼭 찾는곳이 있다. 노루목 산악인 묘지
노루목 산악인의 묘지를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곳 주변분들도 잘 모릅니다. 위치는 설악산 관광단지 C지구 노루목 모텔 오른쪽 가로등 옆 개울 건너, 사진의 오른쪽 건물 바로 뒤편에 산악인 묘지가 자리하고 있다. 10동지묘 왼쪽에 송준호님의 묘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설악산을 찾는 일이 있으시면 먼저가신 선배 산악인들에게 간단하게 막걸리 한잔, 묵념이라도 바치고 간다면 그 영혼들도 기뻐할것입니다.
하얀 빙벽위에 울던 송준호 >>> https://koreasan.tistory.com/13784103
북한산 산악인 추모비 >>> https://koreasan.tistory.com/15608050
산악인 애송 詩 설악산 얘기 - 진교준 - >>> https://koreasan.tistory.com/13784952
지족불욕(知足不辱)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지지불태(知止不殆)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가이장구(可以長久) 오래도록 편안할 것이다. - 노자 도덕경에서
'MTB등산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을의 아침 풍경 (0) | 2008.10.25 |
---|---|
도심의 가을 (0) | 2008.10.24 |
소래산 (0) | 2008.10.19 |
인천대공원 국화축제 (0) | 2008.10.19 |
가을 하늘은 공활하다 (0) | 2008.10.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