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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MTB등산여행

하얀 빙벽 위에 울던 표범 송준호

by 한국의산천 2008. 2. 4.

박인식 著 '사람의 산' (1985년 9월 발행) 하얀 빙벽 위에 울던 표범. 송준호 傳  

 

▲ 박인식 著 '사람의 산' ⓒ2008 한국의산천

 

하얀 빙벽 위에 울던 표범 - 송 준호 傳

송준호 1973년 1월 2일 설악산 토왕성 폭포 상단 단독등반 중 추락사

 

1. 

설악은 너무나 많은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솜다리꽃, 박새품, 둥굴레, 함박꽃, 전나무, 아! 자작나무, 설악골, 용소골, 토막골, 잦은바위골, 곰골, 그리고 대청의 바람과 구름 그리고 동해까지…… 거기에다 설악시를 가지고 있고 또 설악가라는 노래까지 가지고 있다.

설악의 노래는 슬픈노래다. 아니, 서럽도록 아름다운 노래다.

“너와 나 다정하게 걷던 계곡길, 저 높은 봉우리에 폭풍우칠 적에….”

그설악의 가을에 산친구는 죽었다. 죽은 친구를 설악에 묻고 뒤돌아보며 뒤돌아보며 부르는 노래가 설악가이다.

“잘 있거라 설악아, 내 어이 잊으리요 꿈 같던 산행을, 잘 있거라 설악아 내 다시 오리니…”

 

 

▲ 2008년 2월 2~3일 전국 빙벽대회가 열린 토왕성폭포 ⓒ 2008 한국의산천  

 

2

외 설악 초입 노루목에 가면 지금은 관광단지 C지구의 호텔과 여관들에 가려 보이지도 않는, 설악의 맞은편 산자락에 사자(死者)의 마을이 있다.

설악을 사랑하다 결국 설악의 품에 안긴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그곳에는 1969년 죽음의 계곡에서 눈사태로 조난한 한국산악회의 열 동지를 비롯해 많은 산사람들의 무덤이 있다.

인가(認可)가 난것은 아니지만 우리나라 유일의 산악인 묘지인 셈이다. 죽어 이름을 남긴다는 인생에서 이름마저 남기지 않은 이름없는 산사람의 조그마한 묘지들이 모인 곳이다.

상석은 고사하고 비석마저 제대로 없는 이 무덤의 주인공들은 거의가 벚꽃처럼 젊은 나이에 산에서 져버렸다.

 

그 중에 엄홍석과 신현주라는 두 남녀의 무덤이 있다. 두 사람은 설악에서 등반사고로 인하여 함께 죽었다. 송준호는 이 두 사람과 같은 절친한 산악회 회원이었고 엄홍석과는 자일 파트너였다. 그는 석과 주의 무덤에 자주 갔다. 

▲ 노루목에 있는 산악인의 묘지. 오래전 토왕성 빙벽을 하러 갈때, 천화대, 석주길, 흑범길을 오르기 전에 설악동에 오면 이곳을 들렸다. 설악동 초입 관광단지 C지구의 호텔과 노루목 모텔 오른쪽 개울 건너 뒤산에 산악인 묘지가 있다.온통 건물로 둘러싸여 입구를 찾기가 쉽지않다.ⓒ 2008 한국의산천

 

3

내 설악과 외설악을 가르는 공룡능은 설악의 주능이다. 이 공룡능에서 흘러내리는 설악골과 잦은바위 사이를 천화대라는 암릉이 헐떡이며 치밀어 오르고 있다.

이 천화대에는 여러 지릉이 있다. 그 중에서 설악골에서 왕관봉과 범봉사이를 올라붙는 성곽 같은 암릉 하나가 특히 눈길을 끈다. 그 암릉을 송준호는 처음으로 올랐다. 그리고 그 능선에 이름을 붙였다. 엄홍석과 신현주의 이름 끝자를 따 '석·주길'이라고.

 

그는 손수 석주길이라 새겨넣은 동판을 제작해 그 암릉과 천화대가 만나는 곳에 붙였고, 그 길은 석주의 영전에 바쳐졌다. 그리하여 석주길이 태어났고, 석주는 그의 마음에 산과 인간이 만든 절대미를 조형했다.

산의 절대적인 추상미에 영혼을 빼앗긴 그는 조형과 석주의 산과 인간의 열정이 탄생시킨 환상에 늘 부담감을 가지고 살았다. 그리고 더욱 완전한 산행을 석주에게 바치기를 원하며 산으로 갔다. 

▲ 천화대 석주길 끝에 붙어있는 석주길 동판 ⓒ 2008 한국의산천

 

4

일제 말기 백령회가 설립되면서 우리나라에 근대 알피니즘이 보급되었다. 하지만 알피니즘의 등정주의나 등로주의의 대상이 될 만한 입지조건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70년대 후반 들어 해외원정으로 그 출구를 마련하기 전까지 알피니즘의 대상은 일부 짧은 암장에서의 기교적인 등반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우리나라의 알피니스트들에게 군계일학 격의 국내 등반 대상지가 된 곳이 딱 한 군데 남아 있었으니, 바로 설악의 토왕폭 빙벽등반이었다. 1970년대 초기의 빙벽장비와 기술로 그것은 바로 불가능이었고 절대였다. 그래서 그것은 한국 알피니스트의 존재 이유가 되기도 했다.

 

70년대 초반까지 히말라야 원정은 정찰대에 지나지 않았고 본대라도 거의 실패의 연속이었다. 때문에 국내에 아직 미등인 채 남아 있는 토왕폭의 아성은 더없이 높아만 갔다. 그것은 히말라야 8,000미터급 거봉 원정보다 더 귀한 등반이라는 예기도 돌았다. 그것은 살아있는 신화였다. 산선배에서 후배로 이어지면 결정(結晶)된 산행미의 실체였다. 그래서 당시의 산사람은 누구나 “토왕폭!”을 되뇌었다.

 

석주의 무덤이 있는 노루목은 토왕폭 맞은편에 자리잡은 산기슭이다. 화채봉에서 발원하여 함지덕, 칠성봉 일대에서 하늘에서 내려 드리운 듯한 얼음기둥이 자라나기 시작하는 겨울철, 노루목 석주의 무덤에 성묘를 하고 뒤돌아 설악을 바라보라. 그 얼음기둥의 머리 부분이 보일 것이다. 이 땅의 어떤 말도, 어떤 해석도 거부하는 그 토왕의 아름다움에 그 산사람의 온몸은 그가 평소 즐겨 부르던 '설악가'와 끝없이 암송하던 듀 프라의 '그 어느날'의 환청에 휩싸일 것이다.

 

그 어느 날 내가 산에서 죽을 때

오랜 산친구 자네에게 부탁하네.

내 피켈을 집어다오.

이 피켈이 치욕 속에 죽는 것을 나는 원치 않는다네.

어딘가 아름다원 페이스에 가져다주게.

그리고 피켈만을 위한 작은 케른을 만들어다오.

그리고 그 위에 나의 피켈을 꽂아주게.  

 

▲ 빙벽장비는 후배들에게 다 분양되었고, 남은 것은 오래 된 워킹용 피켈. ⓒ 2008 한국의산천 

 

동해에서 치솟는 아침 햇살을 받아 토왕의 얼굴이 수정처럼 빛날 때나, 설악이 온통 잿빛으로 가라앉을 무렵의 모습은 차라리 신성을 느끼게 한다. 그는 석주에게 재배하고 나서 토왕폭을 보며 단독등반을 결심했다. 그 빛나는 토왕폭 위에 석주의 피켈을 꽂고 그 곳에 작은 케른을 하나 쌓을 것을, 그리하여 그 토왕폭 초등을 석주에게 마칠 것을 다짐했다.

 

1973년의 새해 첫날밤, 토왕폭 단독등반을 결심한 송준호는 석주에게 편지를 썼다. 둘이 하나가 되어 이 세상 주소로는 찾아갈 수 없는 곳으로 그 엽서를 보샜다. 받는 사람 "석주 귀하", 주소는 "벽에서 노루목", 보내는 사람 "준". 그것은 3차원의 바깥 세계로 보내진 편지였다. 그리고 그는 토왕폭에서 결국 석주의 곁으로 갔다.

 

지금 그는 석주와 함께 노루목에 묻혀 있다. 이들 세 사람앞에 세워진 충혼비에는 "시간과 존재의 불협화음으로 공간을 활보하고 있는 악우(岳友)들이여! 철학적 경이로써 모둠된 그대들의 자취는 훗날 이 인자한 산정을 찾는 이들의 교훈일 것이다. 추억을 침묵으로 승화시킨 사람들, 그 대담한 의지로 회생하리라." 라고 새겨져 있다. 

▲ 노루목 산악인의 묘지. 오설악 초입 관광단지 C지구의 호텔과 노루목 모텔 오른쪽 개울 건너 뒤산에 산악인 묘지가 있다.온통 건물로 둘러싸여 입구를 찾기가 쉽지않다.ⓒ 2008 한국의산천

 

5

송준호, 그는 1947년 9월 20일 서울 전농동에서 태어났다. 외아들이었고 여동생이 둘 있었다.

배제중학교, 광성고등학교를 나왔다. 고2 때 부친이 대우중공업 인천공장 자재부장으로 전근하게 되어 인천으로 옮겨 살았다. 65년 광운전자공과대학에 입학, 3학년을 마치고 69년 육군에 입대했다가 72년 10월에 제대했다. 산과의 인연은 고2 때 맺어졌다.

 

중학교 시절부터 산을 익힌 나경봉씨와 62년 6월 백운대에 올라갔다가 우연히 그 맞은편에 우뚝 솟은 인수봉에서 바위하는 클라이머의 모습을 보았다.

힐끗 쳐다본 그 산쟁의의 오름의지는 그에게 산사람으로서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아!"하는 낮은 탄성을 송준호의 가슴으로부터 뽑아낸 그 클라이머의 실루엣에서 소년 송준호는 자신이 그 바위를 오르고 있는 내일의 모습을 보았다. 그해 여름방학 때 나경봉 씨와 송준호는 도봉산 선인봉으로 가서 박쥐코스를 다른 사람이 오르는 모습을 1주일이나 지켜본 후 그들을 본따 기어이 올라갔다. 그후 고교 졸업까지 둘이서만 그 어깨넘어식의 산행을 계속했다.

 

고3 때 산에서 요델산악회의 백인섭 씨를 만났다. 백인섭씨는 당시 우리나라의 대표적 산쟁이로, 요델산악회를 크게 만든 사람이다. 백씨는 산악회를 이끌 재목감으로 탐이 나는 송준호에게 요델 산악회에 들어오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팀에 소속되어 구속받고 싶지 않다며 입회하지 않았다. 하지만 백씨는 서두르지 않고 꾸준히 접근했다.

 

대학 1학년 때인 65년 겨울, 송준호는 선인봉 표범길을 몹시 오르고 싶어했다. 표범길은 백인섭씨 등의 요델 산악회에 의해 개척된 후 다시 등반한 사람이 없는 최난코스였다. 요델 산악회원도 아닐 뿐만 아니라 코스도 모르는 그로서는 어려운 일이었다. 나경봉 씨와 그는 한 달간이나 계속 관찰했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 해 첫눈이 왔다. 나경봉씨 집으로 전화가 왔다. 송준호가 산에 가자는 것이었다. 나경봉 씨는 무심히 배낭을 꾸려 그를 따라 선인봉으로 야영을 들어갔다. 다음날 송준호는 사진기를 꺼내들고 스타트 지점의 튀어나온 바위에 올라 표범길 일대를 찍어 댔다. 바위에는 약간씩 요철된 곳마다 간밤의 눈이 쌓여 있었다. 인화한 사진을 찾은 송준호는 사진의 눈 쌓인 부분을 연결하여 선을 그었다. 그 선은 기가 막히게도 백인섭 씨가 개척한 표범길과 일치했다. 제2의 선을 그은 것이다. 그는 곧바로 그 제2의 선을 따라 등반에 성공했다.

 

다음해 봄, 그는 결국 요델 산악회에 입회했다. 그후 그의 산행은 요델의 든든한 뿌리 위에서 꽃 피었다. 같이 입회한 나경봉 씨와 엄홍석과 송준호는 의형제를 맺고 여러 등반코스를 개척했다.

1967년 우이암 전면코스, 68년 선인봉 요델 버트레스(일명 준호 버트레스), 68년 동계 설악산 표범골(잦은바위골)을 개척등반했다. 그리고 그해 7월, 설악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암릉에 새 코스를 내고 그 여름 설악산에 조난사한 의형제 엄홍석과 그의 친구 신현주의 영전에 바치는, 그 설악산 석주길을 냈다. 70년 11월 인천 청학산 또띠바위 오버행 인공등반코스 등을 개척등반했으며 71년 1월에는 설악산 표범골 50미터 폭과 100미터 폭 빙벽등반에 성공했고, 72년 1월에는 설악산 용아장성을 동계초등했다. 

▲ 지난해 가을에 오른 노적봉 '한편의 詩를 위한 길' 리지 하강중에 촬영 ⓒ 2008 한국의산천

 

6

그 짧은 기간 내에 그처럼 많은 초등반을 기록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그는 거듭되는 산행이 습관적이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도록 언제나 노력했다. 가령 선인봉 표범길의 언더홀드를 스타트할 때 매번 자세를 바꾸었다. 언드홀드를 붙을 때 왼쪽 슬랩으로 붙는가 하면, 바로 언더홀드로 나가기도 했다고 한다. 

그와 같이 미세한 밸런스를 요구하는 지점은 누구나 경험에 의해 스스로 터득한 방식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그에게는 그곳이 전혀 어렵지 않았다는 말일까.

 

그는 178센티미터의 키에 75킬로그램이라는 좋은 체격에 클라이머로서 천부적인 소질을 보였다. 한 손으로 턱걸이를 여러 번 할 정도로 완력이 좋았다.

남들이 오르기도 급급한 곳에서도 그는 언제나 여유가 있었다. 그 여유는 그에게 눈을 주었다. 더 높은, 더 어려운 곳을 볼 수 있는 눈을.  

도봉산 선인봉 표범길을 오르며 멀리 설악산의 흑범길을, 흑범길을 오르며 천화대를, 천화대를 오르며 석주길을, 석주길을 오르며 천화대에서 뻗어내린 염라길을 보았다. 여름의 용아장성을 오르며 눈 덮인 용아장성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언제나 더 높이, 더 높이 보았다. 표범골의 50미터 폭과 100미터 폭을 그는 하늘 높이 걸린 토왕폭으로 연결시키려는 꿈을 키웠다. 

 

7

공학도 기질을 살려 대부분 암벽장비를 자작해서 사용했다. 60년대 중반만 해도 카라비너는 구경조차 힘들었다. 지금은 거의 사용하지도 않는 미군용 카라비너 대여섯 개만 있어도 암벽등반 베테랑으로 인정받던 때다.

무슨 자랑거리처럼 생각하여 길거리에서도 차고 다녔다. 송준호는 US군용 카라비너의 재질까지 연구하여 카라비너를 제작했다. 개폐스프링은 피아노 선이 사용되었다.

 

스프링이 피아노 선이라니! 그 카라비너가 개폐될 때 튀는 소리가 하나의 소나타가 되어 그의 혼을 온통 뒤흔들었으리라.

아버지가 근무하던 부천공장에서 테스트까지 거쳐 완성된 카라비너는 등반시 한 번도 벌어진 적이 없었다. 해머, 하켄, 일회용 스테인레스 아이스 하켄, 철제 지게배낭, 암벽등반용 사다리도 제작했으며 볼트 하켄까지 제작했다. 일제 볼트 하켄과 점핑세트가 국내에 보급된 것은 그보다 이삼 년 후인 76년이다.

 

등산가로서 송준호의 진면목은 빙벽등반에서 한결 돋보인다. 71년 1월 그는 설악산 잦은바위골의 50미터 폭과 100미터 폭 빙벽등반에 나섰다, 100미터 폭은 후배 오세진씨와 둘이서 붙었다. 오전 9시에 등반을 시작했으나 어둡도록 끝내지 못하고 달빛 속에서 등반을 계속했다. 그는 열 개의 아이스 하켄을 사용한 후 정상 10여미터를 남진 지점까지 도달하여 톱을 오세진 씨에게 넘겨주었다, 나머지 10여미터는 경사가 완만하여 등반하기가 매우 수월한 곳이었다. 용아장성 등반 때도 이런한 배려를 후배에게 자주 베풀었다. 등반을 끝내고 시계를 보니 오후 8시가 넘어 있었다.

 

그는 100미터 폭을 완등하는 데 10여 시간의 사투를 벌인 것이다. 요사이의 빙벽장비와 등반기술로는 납득하기 곤란한 시간이지만, 앞이빨 프론트가 없는 8치 아이젠에다 1미터가 넘는 길고 무거운 피켈 한 자루를 믿고, 바르트 훅이나 핀스크류도 없이 얼음이 온통 갈라지며 떨어져나가는 자작한 아이스하켄만 가지고 종일 스텝 컷팅을 하며 등반해야 한다면 열 시간은 결코 긴 시간이 아니다. 설악산 100미터 폭포의 빙벽을 올랐다고 했을 때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다. 그만큼 시대를 앞서가고 있었다.

 

그해 요델산악회의 최용준 씨가 토왕폭 상단에 도전해 하켄 10여 개를 설치하고 슬립했는데 하켄이 모두 빠져버렸다. 그토록 당시의 빙벽장비들은 부실했다. 그것에 반비례하여 토왕폭의 아성은 드높았고 송준호의 산행의지는 자연적으로 토왕폭을 겨냥하여 거슬러 올라갔다. 그해 가을 설악산 등반을 마치고 석주에 성묘갔던 그는 곁에 있던 홍경의 씨에게 토왕폭을 가리키며 "저길 오르겠다"고 털어놓았다.. 그리고 노루목 성묘를 마치고는 토왕폭 일대를 다음 겨울에 대비하여 정찰등반을 했다.

 

이듬해 12월 그는 다시 설악의 표범골을 찾아갔다. 피켈과 아이스 대거와 12치 아이젠만으로 50미터 폭을 15분 만에 뛰듯이 올랐다. 그야말로 한 마리의 표범이었다. 50미터 폭을 단숨에 넘은 그는 곧장 100미터 폭으로 달려갔다. 지난해 열 시간 소요된 100미터 폭을 불과 30분만에 올라섰다. 검은 표범은 설악의 골골을 향해 울부짖었다.

 

석주야! 토왕으로 간다, 토왕으로 간다. 토왕폭 위에 너를 위한 작은 케룬을 쌓고 그곳에 피켈을 꽂아주마.

 

100미터 폭을 30분 만에 오른 그는 너무나 기뻤다. 그것으로 토왕폭 등반에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된 것이다. 아니, 확신이라 해도 좋을 것같았다. 후등자는 한 시간 사십 분이 소요되었다. 그리고 100미터 폭 등반 중 송준호는 아이젠 밴드가 벗겨졌으나 균형을

잡고 고쳐맸다. 그 일화는 송준호의 이름과 더불어 산악계에 신화로 전해지고 있다.

지금의 장비라면100미터 폭을 30여 분만에 오를 수 있는 산쟁이가 드물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람에게 70년대 초의 긴 피켈과 아이스 대거, 게다가 모래내금강의 12치 아이젠을 주고 오르라면 등반할 엄두조차 내지 못할 것이다.

 

8

1972년 12월 30일, 맑고 바람이 센 날이었다. 기온은 영하 10도 안팎으로 빙벽등반하기에 최적의 날씨였다. 오전 9시 잦은바위골로도 불리는 내설악 표범골의 비박지를 출발한 송준호는 설악동을 거쳐 11시경 토왕골 들목의 비룡산장에 도착했다. 토왕성 폭포하단을 우회해 중단의 완경사 부분에서 피켈만 들고 상단 스타트 지점을 관찰할 수 있는 곳까지 전진했다. 정찰을 마치고 중단의 잡목지대에 장비를 남겨두었다.

 

오후 2시 30분 하산하여 오후 5시 비룡산장으로 되돌아왔다.  이날 저녁 요델산악회의 선배인 서울 백인섭씨에게 토왕폭 상태가 빙벽등반하기에 최적이니 빨리 내려오라는 내용의 전보를 띄웠다.

'피켈, 아이젠, 아이스 하켄 지참, 31일 비행기편으로 오기 바람. 준호'

 

이튿날, 날씨는 맑고 바람은 여전히 강했다. 날씨는 조금 풀려 영하 3도. 새벽 3시에 일어나 설악동으로 가서 백인섭씨와 같은 산악회 후배인 박경립씨에게 전화했으나 연락이 닿지 않았다. (요델산악회에서는 72년에 표범골 등반, 그리고 그 다음해 겨울에 토왕폭 등반을 계획하고 있었다.)

11시 30분 비선대에서 일행 중 나머지 7명과 합류하여 용소골 40미터 폭포에서 빙벽훈련을 마친 후 오후 6시 30분 양폭산장으로 갔다. 이날 저녁 요델 회원 정일주 씨에게 토왕성 빙벽등반의 촬영 및 기록을 위한 지원을 요청하고 토왕폭 단독등반을 결심했다.

 

1973년 새해 아침 날씨 역시 맑았다. 기온은 영하 8도.

송준호와 지원조 두 명은 10시 30분 양폭산장을 출발해 오후1시 30분 비룡폭포에 도착했다. 양초와 기타 등반에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러 설악동에 다녀온 후 비룡산장에서 잤다. 이날 밤 송준호는 '석주에게'라는, 이승에서 저 세상으로 띄우는 편지를 썼다.

 

잘 있었니. 그 동안 나는 안정성있는 생활을 하고 있다.

1년 당겨 바로 내일 벽과의 감격적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네. 아니면 자네 품으로…

등반 날 나를 도와줄 S상대 O.B인 J와 P 두 악우를 소개하겠네(노루목에서). 기억해두고 깊이깊이 사귀어보고 싶은 두 사람일세. 지기(知己)도 아닌데 나를 써포트(Support)해 준다는 것은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닐세. 석주도 고마워 할 거야, 현재 마음의 동요 없이 하나하나 정리하고 있다. 전진, 용감한 후퇴, 서두르지 않고 차분히 한 스텝 한 스텝 가까워진다는 것은 표현하기 어려운 보람이네.

나는 확신한다. 아직 너는 나의 곁에 있다는 것을…..

석주가 있기 때문에 나는 더욱 열심히 한 발 한 발 힘차게 오를 것이다. 정상에서 대화를!

노루목에서 일배하세! 좁은 지면 메우기보다는 서로 힘찬 격려로써 서로를 지켜주면 좋을 걸세. 용아장성처럼…… 후회하지 않을 행동뿐 결코 두려워하지 않겠네. 나의 맘 한없이 메꾸고 싶지만 주고받을 얘기는 토왕성의 하얀 벽 꼭대기에서! 여유를 가져보세. 1월 1일 설날 이러한 일들이 있다는 것은 보람일세. 넘기기 싫은 하루였다네.

  

1973년 1월 2일 여전히 맑은 날씨에 기온은 영하 5도. 오전 8시 40분 송준호와 지원조를 포함한 세 명은 비룡산장을 출발했다. 등반계획은 상단 40미터 지점의 고드름기둥까지를 1피치로 잡고 그 곳에서 70미터 자일을 고정한 후 스타트 지점의 지원대원으로부터 120미터 자일을 지원받아 등반을 계속하여 두 시간 정도에 끝낸다는 것이었다.

 

이날 속초에는 한파주의보가 내렸고 빙질이 백빙에서 점차 청빙으로 변하가는 상태에서 송준호는 등반을 시작했다. 중식으로는 빵, 잼, 초콜릿, 쇠고기 통조림을 준비하고 간식으로는 꿀, 초콜릿, 껌, 사탕을 마련하여 간식 둘과 중식 하나를  지참했다.

장비는 9밀리미터 자일 70미터와  7밀리미터 굵기의 120미터 자일 두 동, 몽블랑 가이드 제품의 피켈, 헬멧, 모래내금강 12치 아이젠, 아이스 대거, 록 해머, 카라비너 17개, 래더 2개, 고글, 아이스 하켄 12개, 헤드램프가 전부였다.

 

하단을 우회한 그들은 장비를 놓아두었던 장소에서 30분 가량 휴식을 취했다.  12시 15분 중단의 빙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송준호는 70미터 자일의 한쪽 끝을 몸에 묶고 올랐으며 다른 한쪽 끝은 지원대원이 몸에 묶지 않고 30미터 정도 사려 배낭위에 얹었다. 중단은 30~50도 정도 경사진 빙벽이다. 바로 앞뒤에서 출발한 지원대원은 처음에는 5~6미터 간격으로 따라올라 앞선 송준호와의 간격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경사가 차츰 급해지면서 간격이 점차 벌어져 송준호가 상단 스타트 지점에 거의 다다랐을 때 간격을 35~40미터가 되었다. 지원대원의 손에 감겨 있던 줄은 점점 더 풀려 나갔다. 지원대원은 경사가 약간 심한 곳을 피해 옆으로 방향을 바꾸려 했다.

 

그 순간 지원대원은 밸런스가 깨지면서 '앙카(확보)'라고 소리치며 넘어져 떨어졌다. 그 바람에 지원대원과 연결된 자일로 목을 묶고 있던 송준호도 밑에서 갑작스레 잡아당기는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함께 추락했다. 앙카(확보) 소리에 놀란 촬영담당 대원은 위를 쳐다보았다. 일부러인 것처럼 자연스레 떨어지는 송준호화 그 밑에서 미끄러져 내리는 지원대원을 목격했다. 먼저 떨어져 내리던 지원대원은 아이젠이 얼음에 걸리며 방향이 바뀌어져 중단의 완경사가 끝나는 부분에서 설사면 쪽으로 퉁겨 정지했다.

 

송준호는 계속 떨어지며 제동을 시도했다. 얼음이 갈라지는 듯한 찌익찌익소리가 한동안 계속되었다. 하지만 점차 가속도가 붙어 그의 몸은 중단을 빠져나가 하단으로 떨어져 120여미터의 허공을 날았다. 그대로 모든 것은 끝났다. 중단과 하단의 접합지점 빙벽 위에 그가 최후의 제동을 시도하며 휘드른 피켈은 얼음을 뚫고 빙벽에 굳게 박혀 있었다.

석·주와의 약속대로…. 

▲ 2008년 2월 2~3일 전국 빙벽대회가 열린 토왕성폭포 ⓒ 2008 한국의산천   

 

9

그 의 토왕폭 단독등반은 무모한 것이었을까?

토왕폭은 그후 국내의 유수한 산악회의 맹렬 산악인으로부터 끈질긴 도전을 받다가 1977년 크로니 산악회의 박영배 씨에 의해 초등되었다.

박영배 씨는 성공의 가장 큰 요인은 바르트 훅(Wart Hog)이라는 아이스 하켄 사용에 있었다고 토로했다. 바르트 훅은 그후 토왕폭 등반에 필수로 등장한, 설치와 회수가 간편한 아이스 하켄이다. 그는 상단에만도 6박 7일이라는 긴 시간의 오름짓 끝에 등반에 성공했다. 그간 70여회의 하켄을 설치했다.

그에 비해 송준호는 기껏 12개의 하켄을 준비했고 등반 소요시간을 두 시간으로 잡았다.

 

그리고 73년 당시는 프론트 포인팅 기술이 제대로 도입되지 않았을 뿐아니라 수직으로 일어선 빙벽은 등반 가능성 자체를 의심받고 있었다. 77년 초등 이후 토왕폭은 거듭 재등되었지만 송준호 이후 단독등반은 80년대 초까지 시도조차 한 사람이 없다.

이처럼 좋아진 장비, 기술변화와 등반시간을 비교해보면 송준호는 엄청난 무리를 감행한 것처럼 보인다. 단지 피켈과 아이스대거에 의지한 채 한국 최대의 빙벽을 두 시간만에 해치우려 했다니 말이다.  

▲ 지난 해 가을 노적봉'한편의 詩를 위하여'코스를 등반하며 노적봉 정상에서 촬영한 토왕성 폭포 상단부 ⓒ 2008 한국의산천 

 

오랫동안 자일 파트너였던 나경봉씨는 송준호가 무섭도록 차갑고 이지적인 사람이었다고 기억한다. 10여 년간의 산행활동 중 송준호는 한 번도 미끄러지거나 추락한 적이 없다고 한다. 이건 확률적으로 거의 제로에 가깝도록 어려운 일이다.

 

그가 얼마나 차분한 성격의 소유자였나 하는 것은 사용한 장비나 글씨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등반 때마다 운행계획과 실제 등반과정을 자필로 남겼다. 그 차분한 글씨에서 표범 송준호를 연상하기란 정말 힘들다. 또 100미터 폭 등반 시 12치 아이젠의 프로트가 박히는 형태와 자세를 촬영해서 가장 균형잡힌 자세를 찾아냈다.

 

그러한 치밀성은 산행일지에 더욱 잘 나타나고 있다. 그는 산행에 여러가지 원칙을 정해두고 있었다. 그 원칙은 종주에서부터 릿지, 암벽, 빙벽에 이르기까지 등반의 모든 분야에 걸친 것이었다. 예를 들어 암,빙벽에서 각 개인의 빌레이 능력을 Body, Hip, Hand Belay 로 나누고 다시 one, Two,Three Karabiner, 즉 자일이 통과한 비너의 개수에 따라 분류하고 거기에 자일이 확보자용 카라비너에 감긴 횟수에 따른 구분까지 한 확보교본을 작성해두고 있었다.

 

하루에 담배 두 갑을 피우던 골초가 산행을 위해 절연했으며 금주까지 단행했다. 군생활 중에도 그는 산행을 계속했다. 위령제에 찾아온 그의 부대친구들에 의하면, 재경부대에 근무하게 된 덕도 있지만 산행을 위해 아침저녁으로 신체단련을 하는 그의 산행의지가 지휘관을 비롯한 동료들의 마음을 움직여 산행을 가능하도록 힘써주었다고 한다.

69년 석주길 개척등반, 70년 설악산 용아장성 등반, 인천 청악산 오버행 인공등반, 71년 설악산 표범골 빙벽등반, 72년 1월 용아장성 동계초등이 사병으로서의 군복무시절에 이루어졌다는 것은 놀랍기만 하다.

 

그는 체질적인 단독등반가였다.

서울 근교 암장과 설악산에서 많은 단독등반을 경험했다. 토왕폭 단독등반 행위는 일시적인 충동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평소 등반 시 그는 매우 적은 양의 장비를 사용했다. 하켄 열 개가 소요되는 코스를 그는 하켄 두 세개로 해치웠다. 이러한 등반방식은 요즈음의 등반조류로 봐서는 바보짓으로 비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공적인 장비를 적게 사용하는 것이 지배적인 미덕인 그 당시의 흐름에 그는 매우 충식했을 뿐이다. 누구나 필요한 만큼의 확보지점과 장비와 시간을 사용한다. 그 확보점의 소요 수는 개인마다 다를 수 있는 상대적인 것이며, 스스로의 등반 리듬에 의해 그 수를 줄여나가는 것이 진보적인 등반 행위라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토왕폭에서 송준호가 택한 장비와 예정 등반시간은 그에게 최선의 것이지 무리라 볼 수 없다.

 

그가 무리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후에 토왕폭을 등반한 후배들에 의해 입증된다. 70년대 말부터 겨울 표범골의 100미터 폭을 30분만에 오른 산쟁이들이 나타났으며, 겨울철에는 두 명이 토왕폭 상단을 일곱시간 만에 올랐다.  이 팀의 경우 한 사람당 세 시간 반이 소요된 것인데, 두 사람이 오르기 위한 확보시간을 제한다면 한사람이 오르는 데 두 시간 정도가 소요된 셈이다. 그 두 시간은 바로 송준호가 꿈꾸던 시간과 일치한다.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그 당시의 장비로 요즈음의 최신 장비를 갖춘 클라이머에 맞먹는 등반력을 가진 그의 능력이다. 그는 7~8년 정도 앞선 사람이었다.

'얼음 송곳'이라는 뜻의 아이스 대거는 빙벽이 아니라 설벽용으로 제작된 장비다.  빙벽용으로 국내에 잘못 인식된 아이스 대거를 쥐고 토왕폭 등반을 시도한 것이 화를 부른 게 아닌가 하는 지적도 있지만, 잦은바위골의 100미터 폭에서 눈에 꽂는 장비를 얼음에 꽂으며 성공리에 올라갔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의 토왕폭에서의 죽음은 그 스스로나, 미끄러졌던 지원조의 잘못 때문은 아니었다.

 

송준호보다 더 높고 험한 산을 오른 사람은 많다.

하지만 그처럼 산행의 동기가 오직 산이었던 사람은 흔치 않다. 우리가 진정한 산쟁이로 살아가기를 원한다면 영원한 삶의 순례자로서 언제나 새로운 산 앞에 다시 서야 하는 숙명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한 산쟁이의 숙명을 받다들이다가 그가 평소 즐겨 쓰던 제2의 선이라는, 현실에서 이상으로 이어지는 초월의지의 선을 타고 산쟁이답게 간 것이다. 

▲ 설악산 C단지 숙박업소촌 뒤에 있는 산악인 10동지 묘 ⓒ 2008 한국의산천   

 

10

제 2의 선, 그것은 어떠한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으며 어떻게 전달되는 것일까?

1973년 1월 2일 새벽, 그의 작별인사는 제2의 선을 타고 서울의 어떤 여자에게 현몽했다. 송준호가 토왕폭에서 떨어지는 꿈을 꾼 그녀가 놀라 깨어났다. 송준호는 등반에 그녀가 짜준 목도리, 모자, 장갑 등을 끼고 있었다. 토왕폭 등반을 깨끗하게 마무리하면 그는 스위스의 등산학교로 유학 갈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1973년 1월 5일 오후 2시 그녀는 토왕폭 등반을 마치고 올 송준호와 중앙극장앞에서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그 극장에서 상영 중이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보기로 약속했던 그는 스스로 바람이 되어 사라져버렸다.

 

그후 꿈에 다시 나타난 그는 그 영화를 보라고 자꾸 보채고는 사라졌다. 예전에 그 영화를 보았지만 그녀는 꿈속의 송준호 때문에 그 영화를 다시 보러 갔다. 그리고 송준호의 뜻을 알았다. 그 영화의 주인공 스칼렛 오하라처럼 살아가달라는 그의 뜻을.

 

그는 그녀를 ‘까만돌’이라 불렀다.

그해 가을 요델 산악회는 송준호의 추모등반을 설악산 용아장성에서 갖고, 추모동판을 제14봉에 부착했다. 까만돌은 그 동판뒤에 송준호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고인의 뜻대로 강하게 살아가겠노라는 그 편지는 제2의 선을 타고 송준호에게 전달되었을 것이다.

 

1974년 1월 2일 송준호의 1주기에 까만돌은 어떤 남자와 설악의 노루목을 찾았다. 송준호에게 두 번 절한 그 남자는 송준호에게 산친구로서, 남자의 이름으로 약속했다. 당신 뜻대로 까만돌이 잘 살아가도록 하겠노라고, 그는 송준호를 잘 알고 있던 동양산악회회원이었고 서울농대출신의 젊은 상록수였다. 까만돌과 상록수는 그 이듬해 결혼했다. 결혼 후 상록수는 고향인 전북 장수로 귀향해 어릴 적 꿈인 목장을 이루었다. 스칼렛 오하라 같은 까만돌과 그 상록수의 집념으로 자그마하던 목장이 5만여 평의 넓이로 늘어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2008년 2월 2~3일 전국 빙벽대회가 열린 토왕성폭포 ⓒ 2008 한국의산천  

 

11

얘기 하나 하지.

옛날 어느 산에 폭포가 하나 있었어.

그 폭포는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지는 높고 곧은 폭포였지. 그 폭포가 얼마나 높은지, 언제부터 언제까지 떨어지는지 아무도 몰랐어. 그런데 그걸 아는 이가 하나 있었어. 그는 노래꾼이었지. 그의 이름은 수영이었고 성은 김을 썼지. 그 사람 노랠 한 번 들어봐.

 

폭포는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규정할 수 없는 물결이

무엇을 향하여 떨어진다는 의미도 없이

계절과 주야를 가리지 않고

고매한 정신처럼 쉴 사이 없이 떨어진다.

금잔화도 인가도 보이지 않는 밤이 되면

폭포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곧은 소리는 소리이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번개같이 떨어지는 물방울은

취한 순간조차 마음에 두지 않고

나타(懶楕)와 안정(安定)을 뒤집어놓은 듯이

높이도 폭도 없이

떨어진다.

  

헌데 말이야, 곧은 소리를 내며 곧게 떨어지던 그 폭포가 어느 겨울날 얼어붙은 후에 풀리질 않았어. 계절을 잃은 폭포는 더 이상 노래하질 않았던 게야. 곧은 폭포소리가 얼어붙은 게야. 얼마나 답답했겠어. 폭포나 보는 사람이나 말이야. 그래도 다들 편히 잠자고 있을 때 곧은 폭포소리를 못내 그리워하던 어떤 소년이 있어 폭포를 풀러 하얗게 얼어붙은 그 폭포를 올라간 게야. 미끄러져도 오르고 떨어져도 오르고 또 올라  소년은 폭포의 언 얼굴에 매달렸어. 그는 젓빛 손으로 차가운 얼음덩어리를 두들겼어. 폭포야 풀려라, 폭포야 한을 폴어라 하고 두드린 게야.

 

두드리다 두드리다 두 주먹은 핏빛 멍이 들었어. 이제는 그의 마음보다 차가운 폭포가 소리칠 때도 되었건만, 그의 가슴보다 답답한 폭포는 풀릴 만도 하였건만 폭포는 그래도 움직이지 않았어. 폭포는 가슴마저 얼어붙은 게야. 그러다, 그러다가 말이야 문득 폭포는 응얼거리기 시작했어.

'네 머리로 이 몸을……'

그는 결국 그 폭포를 푸는 열쇠구멍에 자신의 머리를, 온몸을 던져버린 게야. 그래서 그 폭포는 계절과 밤낮을 되찾고 다시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지기 시작한 게야. 동해에 솟는 맑은 해가 그 폭포를 비출 때면 지금도 머리 깨어진 그 소년의 붉은 피가 폭포수가 되어 곧게 곧게 그 절벽의 폭포로 떨어지고 있지.

그러다가 겨울이면 그 폭포는 하얀 얼음으로 그 소년의 넋을 다시 결정시키곤 하는 게야. -끝- [옮긴이 한국의산천] 

▲ 노루목 산악인의 묘지를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주변분들도 잘 모릅니다. 위치는 설악산 관광단지 C지구 노루목 모텔 오른쪽 가로등 옆 개울 건너, 사진의 오른쪽 건물 바로 뒤편에 산악인 묘지가 자리하고 있다. 설악산을 찾는 일이 있으시면 먼저가신 선배 산악인들에게 간단하게 소주 한잔, 묵념이라도 바치고 간다면 그 영혼들도 기뻐할것입니다. ⓒ 2008 한국의산천 

 

덧붙이는 글

2003년 9월 10일 멕시코 칸쿤에서 열린 WTO 농업 개방 협상 반대시위를 벌이던 이경해(56)전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 회장이 미리 준비해간 흉기로 가슴을 찔러 자해(自害)한 끝에 사망하였습니다. 윗 글에 나오는 상록수가 바로 이경해씨입니다.

 

관련글

[이용대의 나는 오늘도 산에 오른다] 첫 선등 드디어 머리를 올리다

선비같던 자일 파트너 이경해, 지금은 하늘에

선등은 암벽등반에서 또 하나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로프의 끝을 매고 수직의 세계를 오르는 것은 단독 등반을 하는 것과 다름없다.
동료와 줄을 함께 묶고 있긴 하지만 오르는 도중 일어나는 어렵고 위험한 상황을 혼자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선등자에게는 추락의 공포를 극복할 수 있는 용기와, 전광석화처럼 빠른 판단력 및 집중력이 필요하다.

선등은 클라이머로 성숙하기 위한 성장통이요 한번쯤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이며 자기시험의 기회이기도 하다. 흔히 선등에 대해 “머리를 올린다”고 말하는데, 머리를 올리는 것이 상투를 튼다는 의미 즉 어른이 된다는 뜻이기 때문에 선등은 클라이머로 태어나기 위한 성인의식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선등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평생 선등 한번 못한 채 산을 떠나는 사람도 많다. 등산의 즐거움 가운데 하나가 불확실성에 도전하는 것이라면 선등자는 그런 흥분을 만끽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린다.

20대 후반이던 1960년대 내 첫 선등의 자일 파트너는 이경해다. 그는 당시 서울시립농대에 재학중인 조용하고 온화한 학생이었다. 내가 세 번째 맞이한 바위에서 선등을 자처했을 때 그는 걱정스런 눈초리로 나를 쳐다봤다.

로프의 끝을 묶은 뒤 그를 향해 “경해야, 혹 내가 등반 도중 떨어지면 네가 내 목숨을 확실하게 챙겨(확보)줘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형님의 신중함을 저는 믿습니다”라고 응수했을 뿐이다. 선배가 신으로 군림하던 시절이었으니 믿고 따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첫 선등에서 나를 따른 이경해는 농대 졸업 후 낙후한 농촌경제를 살리겠다며 전북 장수로 귀농했다. 산지의 자갈밭을 수만평의 농장으로 일궜고 후계자 육성에도 앞장서 유엔식량농업기구(FAO)로부터 ‘세계의 농부상’을 수상했다. 그가 피와 땀으로 일군 농장이 낙농 교육장으로 지정됐고 농촌 청년들이 문하로 모였다. 이경해가 그들을 열정적으로 지도했으니 사람들은 현대판 상록수라고 격찬했다.

1990년 그는 한국농어민후계자협의회장 자격으로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우루과이라운드 협상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관했다. 그 자리에서 협상을 반대하며 등산용 칼로 할복했는데 그 칼이 내가 귀농 기념으로 선물한 스위스제 군용 나이프였다. 몇 년간 산행을 같이했지만 그가 그런 극단적인 행동을 보인 적이 없었기에 그때 나는 크게 놀랐다.

그는 설악산 적설기 등반에서도 남다른 체력으로 반팔셔츠 차림에 무거운 배낭을 메고 힘겨워 하는 후배의 짐마저 지는 등 힘자랑은 했어도 조용한 선비 같았다.

그는 2003년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의가 열린 멕시코 칸쿤에서 위기에 처한 우리 농민의 절박한 입지를 설명하기 위해 극한적인 의사 전달 수단으로 두 번째 자해를 선택했고 결국 이승을 등졌다.

 

알피니스트로서 그의 마지막 모습은 <에베레스트 100일의 장정>이란 책 속에 세월의 무게가 실린 한 장의 사진으로 남겨졌는데 나는 그것을 보면 지금도 인수봉을 함께 오르던 옛일이 떠오른다.  [이용대]  

 

▲ 밤그늘이 드리운 물치항에서 바라 본 설악산 능선 ⓒ 2008 한국의산천 

먼저가신 山岳人 여러분께 명복을 빕니다. 

산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차안에서 모두가 조용히 노래를 불렀다.

 

내 어이 잊으리오 꿈같은 산행을~ 잘있거라 설악아 내 다시 오리니~ ♪ 

 

참고

북한산 산악인 추모비 >>> https://koreasan.tistory.com/15608050

설악산 토왕성 폭포 전경사진 보기 >>> https://koreasan.tistory.com/13784959

하얀 빙벽 위에 울던 표범. 송준호 傳 >>> https://koreasan.tistory.com/13784103

산악인 애송 詩  설악산 얘기 - 진교준 - >>> https://koreasan.tistory.com/13784952

 

지족불욕(知足不辱)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지지불태(知止不殆)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가이장구(可以長久) 오래도록 편안할 것이다.  - 노자 도덕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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