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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MTB등산여행

미륵리 미륵대원사터

by 한국의산천 2007. 11. 2.

충주 유적지 답사답사 촬영 2007. 10. 28 일요일.[한국의산천]

 

오늘 답사코스

아침 4시에 일어나 준비하고 5시에 길을 나섰습니다 

영동고속도로 ~ 이천IC~ 중부내륙고속도로~ 수안보 IC~ 수안보 ~ 충주 미륵리 ~ 사자빈신사지 석탑 ~ 덕주사 덕주산성 ~ 청풍단지 ~ 제천 동산 무암사 & 남근석 ~  정토사법경대사지 (출발,도착 16시간 /총 소요거리 468km)

 

미륵리 미륵사지정식명칭은 미륵대원사터이다.

 미륵리(彌勒里)충청북도 충주시 수안보면에 있는 리(里)이다. 전설에 의하면 마의태자가 이곳을 지나다가 주변 경관이 장엄하고 수려하여 미륵불상을 조각하고 큰 절을 세웠다 한다.

마을 중심부에 미륵불상이 있어서 미륵리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진것으로 생각된다.

 

 

▲ 미륵대원사터 입구 ⓒ 2007 한국의산천 

 

오늘 답사지는 중원의 미륵리 미륵대원사터. 미륵사지가 또 한군데가 있으니 백제시대 최대의 절이었던 국보 제11호가 있는 전북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미륵사지석탑(彌勒寺址石塔)이 그것이다.   미륵대원사터주소 :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58  
고려시대의 사지로서 사적 제317호로 지정되어있다.

 

옛기록에 전하는 계림령과 충북과 경북을 연결하고 있는 하늘재 사이의 분지에 자리한 사지이다. 여기에 일찍이 석굴사원이 경영되었으나 오래 전에 소실되어 현재는 석조물만 남아 있다. 

 

이 미륵리사지 내에는 보물 95호인 5층 석탑과 96호인 석불입상이 있고 지방 유형문화재 19호인 석등과 33호인 3층석탑이 있다. 이곳의 석불은 국내 유일의 북향 불상이며 석불이 있는 석굴의 방형의 주실은 가로 9.8m, 세로 10.75m의 넓이이며 높이 6m의 석축을 큰 무사석으로 쌓아 올렸고 그 가운데 불상을 봉안하였다.

석축 위에는 지금은 없어진 목조 건물이 있었으며 전당은 목조로 된 반축조석굴이다.  절터 안에는 오층석탑(보물 95), 석불입상(보물 96), 삼층석탑, 석등, 귀부(龜趺), 당간지주, 불상대좌 등의 석조 유물이 있다. 이들 유물의 조형수법으로 보아 고려 초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북쪽으로 지형이 낮아짐에 따라 계단식으로 대지를 조성하여 사원을 형성하고 있다.

 

모든 조영계획은 석굴암을 모방하였고 규모가 웅장한 반면에 퇴화과정이 역력한 석굴이며 확실한 년대는 알 수 없고 발굴 당시 미륵대원이라고 쓰인 기와가 발견되어 삼국유사에 미륵대원 등이 기록된 것으로 보아 일연 스님이 살았던 그 이전에 지어진 사찰이라는 것이 확실히 고증되므로 고려초의 것으로 추정된다.

즉 관련 유물과 기록 등을 종합하여 볼 때 이 사찰은 고려초기인 11세기경에 창건되었다가 고려후기인 고종때 몽고병의 침입으로 소실된 듯하며 사찰 이름은 미륵대원 이었다. 1977년부터 연차적으로 발굴조사가 실시되어 사원의 옛 모습이 밝혀지고 있다. ‘미륵당초(彌勒堂草)’라 새겨진 기와, 연꽃무늬 막새기와, 금동제 귀면(鬼面) 등이 출토되었다.

 

 

▲ 국내 유일의 북향 석불인 미륵석불 ⓒ 2007 한국의산천 

 

보물 제96호 괴산미륵리석불입상(槐山彌勒里石佛立像)  
소재지  충북 충주시  상모면 미륵리 58 
시대 고려시대 
 고려 초기 이 부근에서 많이 만들어진 일련의 커다란 불상들과 양식적 특징을 같이하는 석불입상이다.

전설에 따르면 신라말 마의태자가 나라의 멸망을 비통하게 여기며 이곳까지 와서 불상을 만들고 개골산으로 들어갔으며, 그 여동생은 덕주사마애불(보물 제406호)을 만들었다고 한다.  

1987년 7월 18일 사적 제317호로 지정되었으며 하늘재(寒喧嶺), 계립재(鷄立嶺), 새재(鳥嶺)에 둘러싸인 험준한 산골짜기 북쪽 기슭에 북향하여 있다.

창건 연대나 내력은 물론 사원의 정확한 명칭도 알 수 없으나,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짐작된다. 길이 9.8m, 너비 10.75m, 높이 6m의 인공으로 쌓은 석굴식(石窟式) 법당의 중앙에 대좌를 두어 석불입상을 봉안하고, 측면과 후면 석벽 중앙은 감실(龕室)처럼 만들어 작은 불상들을 부조하여 장식하였다.

상부에는 목조건물을 지어 천장을 만들었던 것으로 짐작되며, 이는 토함산 석굴암의 양식을 계승한, 고려시대의 유일한 석조,목조 구조의 반축조(半築造) 석굴사원으로 평가되고 있다.

 

모두 5개의 돌을 이용하여 불상을 만들고 1개의 얇은 돌로써 갓을 삼았다. 둥근 얼굴에 활모양의 눈썹, 긴 살구씨 모양의 눈, 넓적한 코, 두터운 입술 등은 고려 초기 커다란 불상의 지방화된 양식을 잘 반영하고 있다.

신체는 단순한 옷주름의 표현이라든가 구슬같은 것을 잡고 있는 손의 묘사 등에서 얼굴과는 대조적으로 간략함을 느낄 수 있다. 이 불상의 대담하고 거대한 모습으로 보아 새로 일어난 국력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것임에 틀림없을 것 같다.

 

 

▲ 석실 벽면이 특이하다. 석굴암을 모방하였다는 설도 있다.ⓒ 2007 한국의산천  

 

이 불상은 고려시대(高麗時代) 초기(初期) 이 부근에서 다수 조성된 일련의 거불(巨佛)들과 양식적(樣式的) 특징을 같이하는 석불입상(石佛立像) 이다.
모두 5매의 돌을 이용하여 불상을 조성하고 1매의 얇은 돌로써 갓을 삼았다. 둥근 얼굴에 활 모양의 눈썹, 긴 행인형(杏仁形)의 눈, 넓적한 코, 두터운 입술 등은 고려 초기 거불(巨佛)의 지방화(地方化)된 불상 양식을 잘 반영하고 있다.
신체는 소략한 옷주름의 표현이라든가 앞으로 모아서 구슬 같은 것을 잡고 있는 두 손의 치졸한 묘사 등 얼굴과는 대조적으로 간략화하고 괴체화(塊體化)한 느낌을 강하게 느끼게 한다.

 

▲ 괴산미륵리오층석탑ⓒ 2007 한국의산천  

 

보물  제95호  괴산미륵리오층석탑(槐山彌勒里五層石塔)  
소재지  충북 충주시  상모면 미륵리 56 
시대 고려시대 
 이 탑은 기단부(基壇部)와 탑신부(塔身部)를 갖춘 5층석탑이다. 기단의 중석(中石)에는 우주(隅柱)와 탱주(撑柱)가 모각(模刻)되어 있지 않고, 갑석(甲石)은 형식적인 수법을 가미(加味)한 매우 좁은 두 장의 판석(板石)으로 덮여 있다. 



▲ 보물  제95호  괴산미륵리오층석탑(槐山彌勒里五層石塔) ⓒ 2007 한국의산천 

 

탑신부는 1층 옥개석(屋蓋石)이 두 장일뿐 다른 옥개석은 한 장씩으로 되어 있고, 각층의 탑신석(塔身石) 역시 형식적인 우주(隅柱) 모양을 모각하였을 뿐 별다른 특징이 없다. 상륜부(相輪部)에는 노반(露盤)과 복발(覆鉢)을 남기고 있다. 노반은 지나치게 커서 탑신석으로 오해받기 쉬우며 복발은 장식이 없는 반구형(半球形)으로 정상에 철제찰간(鐵製擦竿)만이 남아 있다.

조성연대는 고려시대(高麗時代)로 추정된다. 전설에 의하면 미륵불(彌勒佛)과 함께 마의태자(麻衣太子)와 관계 있다고 하나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 보물  제95호  괴산미륵리오층석탑(槐山彌勒里五層石塔)과  석등ⓒ 2007 한국의산천 

 

소재지  충북 충주시  상모면 미륵리 56 
시대 고려시대 
이 곳에는 고려시대의 석불과 석굴이 만들어졌던 흔적이 남아 있고, 그 앞쪽에 석등과 더불어 이 석탑이 남아 있다. 석탑은 기단부(基壇部)의 아래부분이 땅 속에 파묻혀 있어서, 그 구조가 어떤지를 정확히 확인할 수 없다. 드러난 부분은 자연석에 가까운 네모난 돌로 특별하게 장식을 하지 않았으며, 그 위로 기단의 맨윗돌이 올려져있다. 탑신(塔身)은 1층 지붕돌이 2장일 뿐 몸돌이나 다른 지붕돌은 모두 1장의 돌로 되어 있다.

각 층의 몸돌에는 몸돌의 넓이에 비하여 좁은 기둥을 모서리에 새겼다. 지붕돌은 급격하게 좁아져 석탑 전체의 균형과 미관을 손상시키고 있다. 지붕 밑면의 받침은 5단이지만 추녀가 짧아서 6단인 것처럼 보인다. 처마는 수평이고 지붕돌의 경사는 매우 급한데 귀퉁이의 치켜올림은 거의 없는 편이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과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이 남아 있는데, 노반은 6층 지붕돌로 보일 만큼 큼직하고, 복발은 반원 모양이다. 정상에는 머리장식의 중심을 지탱하기 위해 세운 긴 쇠꼬챙이모양의 찰간(擦竿)이 남아있다. 5단의 지붕돌 밑면받침과 직선의 처마는 신라시대 석탑의 양식을 따른 것인데, 지붕돌의 급경사와 형식적인 기둥새김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세워진 탑으로 보인다. 

 

 ▲ 석등 ⓒ 2007 한국의산천 

 

▲ 피안의 세계로 가는 문인가?ⓒ 2007 한국의산천 

 

석등사이로 미륵리 석불을 넣어보았다. 마치 특정한 시간에 햇살이 비치는 동굴을 따라 들어가면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는그런 기분을 잠시 가져보있다. 

 

 ▲ 흩어져있던 석물들은 한곳에 모아두었다 ⓒ 2007 한국의산천  

 

 ▲ 커다란 비석이 세워졌을 듯한 돌거북 받침.  ⓒ 2007 한국의산천 

 

 ▲ 기념촬영 ⓒ 2007 한국의산천 

 

  ▲ 일명 공깃돌 ⓒ 2007 한국의산천 

 

 ▲ 하늘재로 가는 길에 ⓒ 2007 한국의산천 

▲ 새벽 일찍 길을 나서면 평상시와는 다른 또 다른 빛을 만날 수 있기에 답사는 가능한 한 일찍 길을 나선다. ⓒ 2007 한국의산천   

 

미륵대원사터에서 하늘재로 오르는 길 하늘에 닿을 듯이 높다 해서 하늘재라 부르지만 실제로는 525m에 불과한 평범한 고갯길 하늘재 그러나 이 작은 고개에 굽이굽이 얽히고 깃든 사연은 고개보다 훨씬 높고 길다.

 

▲ 미륵대원사터 ⓒ 2007 한국의산천   

 

중원 미륵사지
미륵사지 옆으로 우리나라의 최초로 만든 고개 하늘재(520M)가 나 있는 길, 신라가 한강유역으로 진출하기 위해 길을 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고구려의 온달 장군이 남진을 위해 다녔던 길, 고려의 공민왕이 홍건적을 피해 경주로 몽진을 할때도 이용했던 길, 조선 태종때 문경새재 길이 새로 나면서 부터 쇠퇴의 길로 접어 들었지만 문경에서 충주로 넘어 오기 위해 수많은 이들이 이재를 넘었다.

우리가 흔히 ‘삼국시대’라고 부르는 그 시절, 고구려 백제 신라가 치열하게 벌였던 싸움은 궁극적으로 한강유역을 차지하고자 하는 싸움이었다. 국토의 중앙을 흐르는 한강 주변은 국토 전체를 종횡으로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일 뿐만 아니라 서해의 뱃길을 통해 당시의 선진국이었던 당나라로 통하는 가장 가까운 길목이었다. 그래서 이 지역을 차지하는 것은 나라 발전의 가장 중요한 땅을 손에 넣는 일이자 삼국간의 싸움에서도 절대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점하는 길이었던 것이다.

이 한강 유역을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남한강 줄기를 끼고 있는 지금의 충청북도 충주 일원이다. 이 지역은 다른 말로 ‘중원中原’이라고 불렸다. 문자 그대로 국토의 중심부라는 뜻이다. 그래서 이 지역에 형성된 문화권, 이른바 중원문화권은 고대 삼국문화의 접점을 이루고 있는 문화유적지라는 점에서 둘러볼곳이 산재한 곳으로 손꼽힌다.
 이들 유적 중에서 미륵리 절터와 덕주사 마애불은 신라의 마지막 왕족인 마의태자와 그의 동생 덕주공주의 애달픈 전설이 서려있는 흔적으로 중원문화권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경주를 떠난 마의 태자일행은 망국의 한을 안고 신라의 국권회복을 위해 병사를 양병코자 금강산으로 길을 가던 중 문경군 마성면에 이르게 되었다. 일행은 그곳 계곡 깊은 곳에 야영을 하고 하룻밤을 자게 되는데, 그 날밤 왕자는 관음보살을 만나는 신기한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관음보살은 왕자에게 말하기를 " 이곳에서 서쪽으로 고개를 넘으면 서천에 이르는 큰 터가 있으니 그 곳에 절을 짓고 석불을 세우고 그 곳에서 북두칠성이 마주보이는 자리에 영봉을 골라 마애불을 이루면 억조창생에게 자비를 베풀 수 있으리니 포덕함을 잊지말라 "잠에서 깨어난 마의 태자는 꿈이 신기하기에 누이동생인 덕주공주를 불러 꿈 얘기를 전하고 그 내용을 물었더니 놀랍게도 같은 시각에 공주 역시 그와 같은 현몽을 받았다.


두 남매는 서천을 향해 합장배례한 뒤 다음날 서쪽을 향해 고개를 넘으니 고개마루턱 큰 바위에 한 권의 황금빛 포경문이 놓여 있었다. 그 곳에서 일행은 북두칠성이 마주 보이는 곳에 파란 별빛을 받고 있는 최고봉이 보이는 장소를 택해 석불입상을 세우고 별빛을 받고 있는 최고봉 아래에 마애불을 조각하였다. 그리나 태자는 공주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초지를 굽히지 않고 금강산(일설에는 설악산 한계산성)을 향해 떠났고 마지막 혈육인 오빠와 헤어진 공주는 절에 몸 담고 아버지인 경순왕을 그리워하며 태자의 건승을 빌었다 한다.
그러하기에 미륵리 석불입상은 마의 태자의 상이요 덕주사 마애불은 덕주 공주의 상으로 두 남매가 마주보기 위해 마애불은 남향이고, 석불은 북쪽을 향하고 있다고 한다.

 

 ▲ ⓒ 2007 한국의산천 

 

미륵리로 가는 길은 온천으로 유명한 수안보를 거쳐 월악산으로 가는 길이다. 국립공원 매표소를 지나 월악산으로 향하다 보면 미륵리와 송계계곡으로 갈라지는 삼거리에 이르게 된다. 이 삼거리에서 오른쪽 길을 택해 조금만 가다보면 곧 미륵리 절터에 닿게 된다. 주차장에 차를 대놓고 한 5분만 걸어가면 절터에 이르게 되는데, 이 한적하면서도 운치있는 길이 멀리 신라시대부터 개척되었다는 ‘하늘재’로 오르는 길이다.

전국토가 거의 산으로 이루어진 우리나라에는 산줄기 사이로 수많은 고갯길이 뚫려있다. 미시령, 한계령, 대관령, 추풍령, 조령으로 불리는 문경새재등등 ...가 있다

이렇듯 우리에게 잘 알려진 고개는 모두 한반도의 근간을 이루는 백두대간의 안부(산봉우리 사이에 말안장처럼 낮은 부분이나 고개)를 이루는 곳에 있다. 그렇다면 백두대간의 수많은 고개들 중에서 제일 먼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고개는 어디일까 바로 충북 충주시 미륵리와 경북 문경읍 문경 관음리를 잇는 하늘재(525m)다.

계립령(鷄立嶺), 마목현(麻木峴), 지릅재, 한훤령(寒暄嶺) 한티,천티등으로도 불렸던 하늘재를 처음 연 나라는 156년에 한강을 차지하려는 신라에 의해 만들어진 길이다.


삼국사기에 ‘아달라 이사금 3년(156)에 계립령 길을 열었다’고 적고 있다.
죽령은 이보다 2년 뒤에 개척되었으니 기록상으로 볼 때 하늘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백두대간 고갯길인 셈이다.
낙동정맥 동쪽의 변방에 위치한 작은 나라였던 신라는 험준한 백두대간 등줄기에 하늘재를 개척함으로써 비로소 한강 이북으로 향하는 숨통을 열 수 있었고, 이를 삼국통일의 디딤돌로 삼았다.하늘재는 삼국의 북진과 남진의 통로였기에 각국은 서로 이곳을 차지하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예전에는 교통로중에서 물길이 가장 빠른 이동수단이었다.


죽령이나 계립령 모두 경상도 땅에서 넘어서면 곧 남한강 물길을 만날 수 있게 되니 삼국시대의 영토 다툼에 유리한 고지를 가질 수 있는 것은 불을 보듯 빤한 사실이다.

고구려 온달장군은 “계립령과 죽령 서쪽이 우리에게 돌아오지 않으면 나도 돌아가지 않겠다”는 출사표를 던지기도 했다.
후삼국 시대에 궁예가 상주를 칠 때도 이 고개를 넘었고, 망국의 한을 품고 길을 떠난 마의태자도 이 고갯마루에서 쉬어갔다. 그리고 1362년 홍건적이 쳐들어왔을 때 공민왕의 피난행렬도 이곳을 넘어 봉화 청량산으로 갔다.

신라 마의태자와 누이 덕주공주가 망국의 한을 안고 금강산으로 갈때 넘었다는 고개다. 조선 태종때 한양~영남을 잇는 지름길인 문경새재가 뚫리면서 하늘재는 `옛길`이 됐다. 그러나 새재를 지키는 관리들의 횡포가 잦아, 서민들의 발길은 하늘재로 꾸준히 이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시대인 1414년(태종 14) 새재가 개척되면서 하늘재는 점점 잊혀진 고갯길이 되어갔다.

임진왜란때 왜군이 쳐들어오자 조정은 신립 장군께 이곳을 부탁을 했지만 신립장군은 탄금대에서 배수의 진을 치겠다고 하다가 파죽지세로 몰려오는 왜군들에게 전멸을 당하고 말았다.
하늘에 닿을 듯이 높다 해서 하늘재라 부르지만 실제로는 525m에 불과한 평범한 고갯길 하늘재 그러나 이 작은 고개에 굽이굽이 얽히고 깃든 사연은 고개보다 훨씬 높고 길다.

 

 ▲ 하늘재로 오른 길에 있는 3층석탑 ⓒ 2007 한국의산천 

 

 ▲ 두상아래돌은 최근 세운듯한 석상 ⓒ 2007 한국의산천 

 

 ▲ 단풍이 아름다운 길 ⓒ 2007 한국의산천 

 

 ▲ 신선봉~미패봉에서 흘러내린 능선이 아름답다.ⓒ 2007 한국의산천 

 ▲ 아름다운 숲길을 걸어서 ⓒ 2007 한국의산천   

  ▲ 고운 단풍 ⓒ 2007 한국의산천 

 

▲ 미륵대원사터 앞에서 ⓒ 2007 한국의산천   

 

 ▲ 휴식시간에는 촬영 영상을 확인하는 딸 ⓒ 2007 한국의산천  

 

▲ 바쁜 일정에 즐겁게 동행해준 딸이 고맙다. ⓒ 2007 한국의산천 

 

 

▲미륵사지를 떠나며 아쉬움에 기념촬영  ⓒ 2007 한국의산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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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장구(可以長久) 오래도록 편안할 것이다.  - 노자 도덕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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