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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MTB등산여행

덕주사 덕주산성 덕주사마애불

by 한국의산천 2007. 11. 2.

충북 제천 월악산 덕주산성 덕주사 마애불  

답사 촬영 2007. 10. 28 일요일.[ 한국의산천  https://koreasan.tistory.com/

 

미륵리와 하늘재를 돌아본 후 덕주사와 덕주산성으로 이동.      

덕주공주가 세웠다는 덕주사 마애불(보물406호)


미륵사지를 나와 바로 앞 삼거리에서 송계계곡 방향으로 향하면 만수휴게소를 지나 마의태자의 동생 덕주공주가 세웠다는 선이 고운 거대한 덕주사 마애불과 중원지역을 방어했던 덕주산성을 만날 수 있다. 

 

 

딸과 같이 걷는 길 울긋 불긋 단풍이 절정을 이룬 월악산과 충주호, 미륵사지, 덕주산성, 동산의 단풍... 

 

답사코스(덕주사, 덕주산성, 덕주사마애불)충주 미륵리 미륵사지 ~ 사자빈신사지 석탑 ~ 덕주사 덕주산성 ~ 청풍단지 ~ 제천 동산 무암사 & 남근석 ~  정토사법경대사지 

 

 "천 년 사직이 남가일몽(南柯一夢)이었고, 태자 가신 지 또다시 천 년이 지났으니,

유구(悠久)한 영겁(永劫)으로 보면 천년도 수유(須臾)던가!

고작 칠십 생애(七十生涯)에 희로애락을 싣고 각축(角逐)하다가

한움큼 부토(腐土)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이라 생각하니,

의지 없는 나그네의 마음은 암연히 수수(愁愁)롭다" -정비석 산정무한 中에서-

 

 

 ▲ 월악산과 영봉 ⓒ 2007 한국의산천

 

월악산과 송계계곡

월악산 국립공원은 1984년 12월 31일에 17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행정구역상으로 충북 제천시, 충주시, 단양군과 경북 문경시 등 4개 시,군에 걸쳐 있으며 북으로 충주호반과 청풍호반이 월악산을 휘감고, 동으로 단양8경과 소백산국립공원, 남으로 문경새재와 속리산 국립공원과 같은 아름다운 자연경관으로 둘러싸여져 있다.

월악산은 신라의 마지막 태자 김일(金鎰: 마의태자)과 그의 누이 덕주공주가 망국의 한을 품고 은거한 산이다. 달이 뜨면 주봉인 영봉(靈峯)에 걸린 달 모양이 아름답다고 '월악'이란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비결잡록에는 "충주월악산하송계 불입병화보신산수"라고 하여 병화를 피해 숨어 살만한 곳으로 기록되어 있고, 그런 연유로 백제나 후백제가 이곳에 궁궐을 지으려 했는데 대신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수도가 될 뻔했다가 "와락" 미끄러졌다고 해서 한때 와락산으로 불리다가 "와락"이 "월악"으로 변했다는 재미있는 유래도 있다.
 

 

▲ 만수산 등산로의 출발점이 되는 만수휴계소 ⓒ 2007 한국의산천 

 

▲  덕주계곡에서 바라본 덕주산성 남문 ⓒ 2007 한국의산천

 

제천 덕주산성(堤川德周山城)
소재지 충북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산1-1 외
지정번호 충북기념물 제35호 

 

문경에서 하늘재를 거쳐 충주 수안보를 잇는 큰 길에서 송계계곡으로 들어서려면 샛길로 닷돈재를 넘어야 한다. 거기에 계곡 하류는 남한강과 곧바로 연결되고, 사방으론 험한 산들이 솟아있으니, 좁은 길에 성벽만 있다면 그야말로 천혜의 요새가 된다.

 

덕주산성은 통일신라시대에 둘레가 9.8km에 이르렀던 성벽은 거의 무너졌으나 조선시대에 쌓은 남문, 동문, 북문 3개 성문이 남아 있다.  

 


▲  남문에서 산으로 이어지는 덕주산성 ⓒ 2007 한국의산천

 

1983년 3월 30일 충청북도기념물 제35호로 지정되었으며 제천시에서 관리하고 있다.

월악산국립공원 남쪽에 있으며 면적 9,800㎡의 석성이다. 성의 유구는 윗 덕주사를 에워싼 내성(內城), 그 바깥의 하성(下城)과 조선시대에 쌓은 남문, 동문, 북문 등 아치형의 성문 3개소만 남아 있다.  

 

남문은 경상북도 문경에서 하늘재(寒暄嶺)를 넘어 미륵리에서 발원하여 월악산 남쪽 기슭의 월천을 막는 차단성 역할을 하는 문이다. 동창에서 문경으로 통하는 도로에 홍예문으로 되어 있고 좌우를 막는 석축은 내외겹축으로 길이가 100간이다. 축성법은 선단석을 3개씩 쌓아올린 뒤 종석(宗石) 1개와 12개의 기석(基石)을 쓰는 방식을 사용하였다.

 

동문은 덕주골 입구에 있는데 좌우를 가로막은 축성법을 사용하였고 문의 홍예 양식은 남문과 비슷하다. 북문은 송계리 1구 새터말 민가 가운데 있다.

 

▲ 남문 월악루 ⓒ 2007 한국의산천 

 

삼국사기에는 월악산은 신라 때 월형산(月兄山)이라 불러 소사(小祀)를 지내던곳으로 미륵원(彌勒院)과 덕산향(德山鄕)을 설치했고 고려 때는 월악사자빈신사지석탑(月岳獅子頻迅寺址石塔.보물 제94호)을 건립했으며 군대를 주둔하게 했던 전략상의 요충지라 기록돼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옛 기록을 종합해 보면 덕주산성은 충주에서 동으로 45리,청풍에서 동남으로 50리 떨어진 월악산 남쪽에 위치, 백제 때 축조된 석성(石城)으로 알려져 있으며 둘레가 3만2천670자(15.27㎞)에 이르고 있고 조선 중종 때 내성(혹은 신내성)을 축조했다는 기록으로 미뤄 고려나 조선 초기까지는 3중의 성벽이 존재했으며 이후 4겹의 성벽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이는유례가 없는 것이며 충청.전라 지역을 통틀어 최대 규모이다.

 

이 거대한 산성은 월악산 꼭대기를 포함, 계곡 전체에 걸쳐 쌓았으나 산성의 유구(遺構)는 거의 무너지고 조선시대 때 문경에서 하늘재를 넘어 미륵리에서 발원,월악산 남쪽 기슭의 월천(月川)을 막는 차단성 구실을 하는 남문, 동문, 북문 등 3개의 성문을 만들었다.

 

▲ 남문에서 바라 본 월악산 영봉 ⓒ 2007 한국의산천

 

 ▲ 만수산릉 ⓒ 2007 한국의산천

 

 

▲ 덕주산성 남문 월악루  ⓒ 2007 한국의산천

 

▲ 덕주산성 월악루 홍예문 ⓒ 2007 한국의산천

 

 

▲ 월악산 월악산장 풍경 ⓒ 2007 한국의산천

 

▲ 월악산 등산로에 있는 동문 ⓒ 2007 한국의산천

 

▲ 월악산 동문옆 계곡 ⓒ 2007 한국의산천 

 

▲ 월악산 동문옆 계곡 ⓒ 2007 한국의산천 

 

▲ 월악산 입구 동문의 성벽 ⓒ 2007 한국의산천

 

 ▲ 월악산 입구의 고운 단풍 배경으로 딸 사진 ⓒ 2007 한국의산천  

 

 ▲ 덕주사 ⓒ 2007 한국의산천  

월악산 남쪽 기슭 덕주골에 자리잡은 덕주사는 신라 진평왕 때 창건 되었다고 하지만,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다.

본래 이름은 월악사였으나 마의태자의 동생 덕주공주가 이곳에 머물면서 덕주사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 덕주사 대웅전 ⓒ 2007 한국의산천 

 

마의태자 누이 덕주공주의 전설이 깃든곳 월악산 덕주사

덕주사라는 이름이 그 옛날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의 딸 덕주공주로부터 유래했다는 전설이 있다.
덕주사는 신라 진평왕 9년(서기586)에 창건되었다. 당시에는 월형산 월악사였으나 신라 경순왕이 천년사직을 고려 왕건에게 손국한뒤 경순왕의 제일녀인 덕주공주가 월악산 경내에 있는 높이 13m의 거암에 마애미륵불(보물406호)을 조성하고 신라의 재건을 염원하며 일생을 마친 후 산 이름을 월악산으로, 절이름을 덕주사로 개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상덕주사는 이곳에서 동편계곡으로 1.5km 올라간 산중턱에 자리했었으며, 마애불보호전실, 우공탑, 삼층석탑 요사 등이 있었던 중원 제일의 사찰이었느나 1951년 12월 전화로 폐사되어 지금은 마애불상, 우공탑, 삼층석탑만이 현존하고 있으며, 옛날의 규모를 알려주는 석축만이 제행무상함을 전해주고 있다.    

▲ 덕주사 앞마당 석축아래에 서있는 남근석 ⓒ 2007 한국의산천 

 

 

예전엔 하덕주사라 불리우는 이곳은 절골이라 했고, 상덕주사인 마애불사지는 윗절이라 했다고 한다. 이곳에 언제부터 사찰이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절 입구에 있는 남근석을 보면 덕주사가 원시신앙으로부터 시작된 곳으로 유추할 수 있다.

 

 ▲ 덕주사 앞마당 석축아래에 서있는 남근석 ⓒ 2007 한국의산천 

 

 ▲ 남근석 안내문 ⓒ 2007 한국의산천 

 

신앙형태로 볼때 특이하게 유서깊은 이곳도 6.25때 불타 없어진 뒤 1963년 지암화상이 5칸 인범당을 중창하였으며, 1985년 성주화상이 현재의 법당을 다시 중창하고 충주댐으로 수몰된 한수면 역리에서 고려시대에 조성된 약사불을 덕주사로 이전하였다.대한불교 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法住寺)의 말사이다.

 

창건자와 연대는 미상이나, 구전으로 587년(진평왕 9)에 세워졌다고 전한다. 그것에 따르면 신라의 마지막 공주인 덕주공주(德周公主)가 마의태자(麻衣太子) 일행과 이곳에 들렀을 때 이 절을 세워 절이름을 덕주사라 하고, 골짜기 이름을 덕주골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때 지은 사찰은 보물 제406호인 덕주사마애불 앞에 세워졌었는데, 6 ·25전쟁 때 훼손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원래의 사지에서 1.7km쯤 떨어진 곳에 1970년에 중창된 것이다.  

 

▲ 덕주사 앞 등산로, 마애불 가는 길 입구 ⓒ 2007 한국의산천  

 

▲ 덕주사 마애불 ⓒ 2007 한국의산천  

 

덕주사 마애불(보물406호)덕주공주의 전설이 서린 마애불은 산 아래 덕주사에서 약 30~ 40분 쯤 올라가야 만날 수 있다. 월악산은 험한 산이지만 마애불까지 가는 길은 험하지도 않고 제법 운치도 있어 가볍게 산책하는 마음으로 오를 만하다. 덕주사에서 1.5km쯤 더 걸어 올라가면 높이가 15m쯤 되는 커다란 바위에 암각 된 마애불이 있으니 이 마애불이 바로 덕주공주와 마의태자 오누이가 조성한 것 전해오며 천년의 세월동안 한결같이 그 자리에 묵묵히 서있다. 신라의 마지막 공주인 덕주공주상이라는 전설이 전해온다. 덕주사 마애불은 고려 초기의 작품이지만 역사적, 예술적 가치에 앞서 슬픈 전설이 절절히 가슴에 와닿는다. 민초들은 신라 마지막 왕자인 마의태자와 누이 덕주공주 남매가 망국의 한을 품고 금강산으로 가던 도중 하늘재를 넘다가 충주 미륵대원지의 대불과 이 덕주사 마애불을 세웠다고 믿었다. 그래서 석불입상은 마의태자 상이요, 월악산 덕주사 마애불은 덕주공주 상이라 여겼다. 마애불은 남향이고, 석불이 북향인 까닭은 두 남매가 마주보기 위해 그렇게 서있다는 전설도 있다.  

 ▲ 미륵리 석불 ⓒ 2007 한국의산천

미륵리 석불입상은 마의태자의 상이요 덕주사 마애불은 덕주공주의 상으로 두 남매가 서로 마주보기 위해 마애불은 남향이고, 석불은 북쪽을 향하고 있다고 전한다.

 

 덕주사 마애불덕주사 마애불은 산 중턱을 가로막고 있는 거대한 바위의 평평한 벽면에 음각과 양각을 섞어가며 새겨넣은 석불이다. 얼굴 부분은 비교적 뚜렷한 양각이지만, 나머지 부분은 선각에 가까울 정도로 얇게 새겼다. 부처의 이름과 역할을 상징하는 수인手印도 형체를 알기 어려울 만큼 형식적이고, 복잡한 선으로 새겨 놓은 옷주름 역시 또렷하지 않다. 전체적으로 15m나 되는 거대한 규모에 비해 거칠고 소박한 솜씨로 만들어진 전형적인 지방양식의 불상이다. 얼굴 부위의 벽면에는 무엇을 박았던듯한 홈이 서너개씩 있어 원래는 불상의 머리 위로 지붕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수법상 그리 세련되고 뛰어난 불상은 아니지만 서민적 신앙의 대상이 되었던 고려시대 지방 마애불의 형식과 흐름을 잘 반영하고 있는 귀중한 유물이다. [문화재청 자료 참고]

   

▲ 단풍 길ⓒ 2007 한국의산천  

마의태자와 그의 동생 덕주공주의 전설이 어려있는 덕주사와 덕주산성을 돌아보며 정비석의 명문장 '산정무한'이 떠올랐다. 

 

"비로봉 동쪽은 아낙네의 살결보다도 흰 자작나무의 수해(樹海)였다. 설자리를 삼가, 구중심처(九重深處)가 아니면 살지 않는 자작나무는 무슨 수중 공주(樹中公主)이던가! 길이 저물어, 지친 다리를 끌며 찾아든 곳이 애화(哀話) 맺혀 있는 용마석(龍馬石)― 마의 태자의 무덤이 황혼에 고독했다. 능(陵)이라기에는 너무 초라한 무던― 철책(鐵柵)도 상석(床石)도 없고, 풍림(風霖)에 시달려 비문(碑文)조차 읽을 수 없는 화강암 비석이 오히려 처량하다. 무덤가 비에 젖은 두어 평 잔디밭 테두리에는 잡초가 우거지고, 석양이 저무는 서녘 하늘에 화석(化石)된 태자의 애기(愛騎) 용마(龍馬)의 고영(孤影)이 슬프다. 무심히 떠도는 구름도 여기서는 잠시 머무르는 듯, 소복(素服)한 백화(百花)는 한결 같이 슬프게 서 있고, 눈물 머금은 초저녁 달이 중천에 서럽다. 

 

 태자의 몸으로 마의(麻衣)를 걸치고 스스로 험산(險山)에 들어온 것은, 천 년 사직(千年社稷)을 망쳐 버린 비통을 한몸에 짊어지려는 고행(苦行)이었으리라. 울며 소맷귀 부여잡는 낙랑공주(樂浪公主)의 섬섬옥수(纖纖玉手)를 뿌리치고 돌아서 입산(入山)할 때에, 대장부의 흉리(胸裡)가 어떠했을까? 흥망(興亡)이 재천(在天)이라. 천운(天運)을 슬퍼한들 무엇하랴만, 사람에게는 스스로 신의(信義)가 있으니, 태자가 고행으로 창맹(蒼氓)에게 베푸신 도타운 자혜(慈惠)가 천 년 후에 따습다.

천 년 사직이 남가일몽(南柯一夢)이었고, 태자 가신 지 또다시 천 년이 지났으니, 유구(悠久)한 영겁(永劫)으로 보면 천년도 수유(須臾)던가! 고작 칠십 생애(七十生涯)에 희로애락을 싣고 각축(角逐)하다가 한움큼 부토(腐土)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이라 생각하니, 의지 없는 나그네의 마음은 암연히 수수(愁愁)롭다".
 

참고 : 경순왕

천년의 역사를 가진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 (敬順王, ?∼978, 재위 927∼935)
왕위에 오른 지 8년 만에 고려에 나라를 넘겨주고 왕위에서 물러남으로써 신라는 56대 922년 만에 막을 내렸다. 
경순왕릉은 경순왕릉은 신라 왕릉 중 경주지역을 벗어나 경기도에 있는 유일한 왕릉으로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에 있다.

경순왕은 신라의 마지막 왕으로써 성은 김, 이름은 부(金傅)이다. 신라 문성왕의 6대손으로, 아버지는 이찬 효종이며, 어머니는 헌강왕의 딸 계아태후이다.927년 경애왕이 후백제 견훤의 습격을 받아 사망한 후 왕위에 올랐다.
재위 당시 각처에서 군웅이 할거하여 국력이 쇠퇴하고, 후백제, 고려, 통일 신라로 분열되어 있었고 특히 여러 차례에 걸친 후백제의 침공과 약탈로 각 지방 호족들의 할거로 국가 기능이 마비되는 상태였다국가의 기능이 마비되었다. 영토는 날로 줄어들고, 민심이 신흥 고려로 기울어지자 군신회의를 소집, 무고한 백성들이 더 이상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막고자 신하들과 큰아들 마의태자의 반대를 무릅쓰고 고려에 귀부하기로 결정하고, 935년 고려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이때 마의태자는 금강산(일설에는 설악산)으로 들어가고 막내 아들 범공은 화엄사에 들어가 스님이 되었다.

귀부후 경순왕은 태조로부터 궁궐 동쪽의 좋은 집 유화궁을 하사받았으며, 낙랑공주를 아내로 맞고 정승공에 봉해졌으며, 경주를 식읍으로 받았다. 한편, 경주의 사심관에 임명됨으로써 고려시대 사심관제도의 시초가 되었다. 43년 후인 고려 경종 3년(978년) 세상을 떠났다.

(우리 역사에는 낙랑공주가 둘있었으니 한 사람은 호동왕자를 지극히 사랑했기에 목숨까지 바친 비련의 주인공 낙랑공주요, 또 한사람은 고려태조 왕건의 맏딸로서 신라의 마지막 임금 경순왕에게 시집간 낙랑공주이다.
후자의 낙랑공주는 왕건의 셋째 왕비인 유씨 부인의 소생으로,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자 태조가 그에게 시집보낸 여인이다.)

 

지족불욕(知足不辱)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지지불태(知止不殆)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가이장구(可以長久) 오래도록 편안하다.  - 노자 도덕경에서

 

대한민국 구석구석 즐겁고 행복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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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산천

거친호흡 몰아쉬며 바람저편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자유 발의자유 정신의자유를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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