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어오는 가을 바람속에 흔적만 남은 보령 성주사지 답사 2005. 9월 4일
서울 - 강경 미내다리 - 원목다리 - 보령 성주사지 - 서울 ( 원점회귀 약 450km )
▲ 강경의 아름다운 미내다리 답사 후 성주사지로 이동. ⓒ 2005. 한국의산천
성주사지 통일 신라 말기 구산선문중 하나로 이름이 높았던 성주사.
오랜 역사를 가진 절터인 관계로 성주사지에서는 백제,통일신라,고려,조선조의 유물이 골고루 출토되며 바로 앞에는 성주산 자연휴양림과 ,심연동 계곡,석탄 박물관등이 있어 살아있는 교육현장과 함께 둘러보기 좋은 곳이다.
▲부여 시내를 지나며. ⓒ 2005. 한국의산천
▲ 계백장군의 동상 ⓒ 2005. 한국의산천
계백장군 관등은 달솔(達率)이다. 660년 김유신(金庾信)과 소정방(蘇定方)의 나당연합군이 백제의 요충지인 탄현(炭峴:지금의 大田 동쪽 馬道嶺)과 백강(白江)으로 진격해오자, 결사대 5천인을 뽑아 거느리고 황산(黃山:지금의 連山)벌에 나가 5만여 신라군을 맞이하였다.
그는 전장에 나아가기에 앞서 “한 나라의 힘으로 나·당의 큰 군대를 당하니 나라의 존망을 알 수 없다. 내 처자가 잡혀 노비가 될지도 모르니 살아서 욕보는 것이 흔쾌히 죽어 버리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고는 처자를 모두 죽이고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릴 것을 각오하였다.
그의 결사대는 험한 곳을 먼저 차지하여 세 진영으로 나뉘어 신라군에 대항하였다.
목숨을 버릴 것을 맹세한 5,000 결사대의 용맹은 신라의 대군을 압도할 만하였다. 그리하여 처음 신라군과의 네번에 걸친 싸움에서 모두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반굴(盤屈)·관창(官昌) 등 어린 화랑의 전사(戰死)로 사기가 오른 신라의 5만대군과 대적하기에는 그 수가 너무나 적었다. 결국, 백제군은 패하고 사비성은 함락되고 계백은 장렬한 최후를 마치며 백제는 멸망하였다.
▲ 늠름한 기백 계백장군의 동상 ⓒ 2005. 한국의산천
서거정(徐居正) 등은 계백의 행동을 높이 평가하여 “당시 백제가 망하는 것은 필연적인 사실이기에 자신의 처자가 욕을 당하지 않도록 몸소 죽이고, 자신도 싸우다가 죽은 그 뜻과 절개를 높이 사야 한다.”고 하였다. 더구나, 백제가 망할 때 홀로 절개를 지킨 계백이야말로 옛 사람이 이른바 “나라와 더불어 죽는 자”라고 칭송하였다.
이후 조선시대 유학자들간에 그대로 계승되어 계백은 충절의 표본으로 여겨졌다. 그뒤 계백은 부여의 의열사(義烈祠)와 연산의 충곡서원에 제향되었다.
성주사지
성주사지 (충남 보령) ⓒ 2005. 한국의산천
성주사지는 1984년 8월 13일 사적 제307호로 지정되었다.
성주산을 등에 지고 남향으로 면적 2만 9084㎡의 평탄한 지대를 점유하고 있다. 1960년에 발견되어 모으기 시작한 비석의 파편을 통해, 원래 백제 법왕의 명에 의해 616년 오합사(烏合寺)라는 국찰(國刹)이 창건되었음을 알게 되었고, 이 오합사가 성주사(聖住寺)이며, 신라 제46대 문성왕 때 당나라에서 돌아온 낭혜(朗慧)화상을 맞아 더욱 크게 중창(重刱)된 사실도 밝혀졌다.
절터 입구로 보이는 곳에 계단석이있고, 그 뒤쪽에 석등과 5층석탑 1기, 다시 그 뒤쪽에 금당(金堂)터인 듯한 단이 있으며,3기의 석탑이 나란이 있다. 그 뒤에 최치원(崔致遠)이 찬(撰)하고 최인연(崔仁渰)이 글씨를 쓴 국보 제8호인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 등이 있다.
▲ 성주사지 전경 ⓒ 2005. 한국의산천
법왕이 왕자일 때 삼국전쟁으로 희생된 이들의 영혼을 위령하는 뜻으로 세웠다고 한다.
성주사로 개명된 것은 통일신라 말이다. 성인이 거하는 절이라는 뜻인데, 성인은 신라 말기의 명무염국사를 일컫는다.
무염국사가 성주사의 주지로 있을 당시 성주사는 불전 80칸, 수각 7칸, 고사 50여 칸 등 천 여 칸에 이르는 큰 규모였다. 이때 성주사에서 정진하는 수도승만 2,000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백제 시대에서부터 조선 초기에 이르는 역사 유물이 발굴되고 있다.
사적 307호로 지정된 성주사지에는 현재 국보 8호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보물19호 오층석탑, 보물20호 중앙삼층석탑, 보물47호 서삼층석탑, 지방문화재인 동삼층석탑과 석계단과 석등이 있다. 그 간 발굴 조사에 의해 금당지, 삼천불전지, 회랑지, 중문지 등의 건물터가 드러났다. 절터 서북쪽에는 제법 멋을 부려 세운 전각이 있는데, 그 안에 부도비가 있다.
심연동 계곡을 등지고 성주사지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이 5층석탑이다. 오층석탑 뒤편에 세기의 석탑이 어깨를 나란히 서있다. 모두 삼층석탑으로 신라 하대의 것으로 짐작된다. 성주사지는 자녀들과 둘러보기에 더욱 좋은 곳이다. 성주산 휴양림과 석탄박물관, 심원동계곡 등의 관광 명소가 성주사지 가까운 곳에 있어 함께 둘러볼 수 있다.
▲ 성주사지석등(聖住寺址石燈) ⓒ 2005. 한국의산천
성주사지오층석탑(보물 제19호) 앞에 놓여있는 8각 석등으로, 석탑 앞에 각부분이 흩어져 있던 것을 1971년 석탑을 수리하면서 현재의 자리에 세워 둔 것이다.
형태는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3단을 이루는 받침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다. 하나의 돌로 다듬어 놓은 바닥돌과 받침의 아랫부분은 그 윗면에 연꽃무늬를 둘렀다. 아무런 조각이 없는 가운데기둥은 가늘고 긴 편이다. 윗받침돌은 맨아래의 받침을 거꾸로 놓은 듯 서로 대칭을 이룬다. 화사석은 불빛이 퍼지도록 4곳에 창을 내었다. 지붕돌은 밑면에 1단의 받침을 두었으며, 낙수면의 경사는 완만하다.
화사석에 마련된 창의 주변에 창문을 걸기 위한 구멍의 흔적이 없는 점이나, 가운데기둥이 가늘고 길어 전체적인 균형이 잘 맞지 않는 점 등으로 보아 뒤의 5층 석탑보다 시대가 늦어지는 조선시대의 작품으로 추측된다.
▲ 보물 제 47호 성주사지서삼층석탑(聖住寺址西三層石塔) ⓒ 2005. 한국의산천
성주사지에서 금당터로 보이는 곳의 뒤쪽으로 나란히 서 있는 3기의 탑 중 가장 서쪽에 있는 석탑이다. 성주사는 구체적 유래는 전하고 있지 않지만 백제 땅에 세워진 통일신라시대의 사찰로, 그 배치구조가 특이하며 이외에도 또 다른 3기의 탑과 석비, 귀부, 석축, 초석 등 많은 석조유물이 남아 있다.
탑을 받치고 있는 기단(基壇)은 2단으로 되어 있으며, 기단 맨윗돌에 1층 탑몸돌을 괴기 위한 별도의 받침돌을 두어 고려석탑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양식을 보여준다. 3층을 이루는 탑신(塔身)의 1층 몸돌 남쪽 면에는 짐승얼굴모양의 고리 1쌍을 조각하였다. 지붕돌은 밑면에 4단씩의 받침이 있으며 네 귀퉁이는 경쾌하게 약간 치켜올라갔다. 꼭대기에는 탑의 머리장식이 남아 있지 않고, 장식을 받쳐주던 네모난 받침돌(노반)만 놓여 있다.
1971년 해체 ·수리 당시 1층 몸돌에서 네모난 사리공을 발견하였으나 그 안에 향나무 썩은 가루와 먼지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함께 위치한 다른 두 탑에 비해 너비가 넓어 장중한 느낌이 드는 탑으로, 기단이나 지붕돌의 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 성주사지중앙삼층석탑(聖住寺址中央三層石塔) 보물20 호 ⓒ 2005. 한국의산천
성주사는 삼국사기에 나오는 백제 법왕 때 창건한 오합사(烏合寺)가 이 절이었다고 하며, 통일신라 문성왕대에 당나라에서 돌아온 낭혜화상이 이 절의 주지가 되어 번창시키니 왕이 ‘성주사’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다 한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타서 현재는 절터만 남아 있다.
성주사의 옛터에서 금당터로 추측되는 건물터 뒷편에 나란히 서있는 3개의 석탑 중에서 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는 탑이다.
이 탑은 함께 나란히 서 있는 탑들과 마찬가지로, 상·하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리고 있다. 기단은 각 층의 4면 마다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새겨 놓았다. 그 위로는 1층의 탑몸돌을 괴기 위한 돌을 따로 끼워두었다. 탑신부의 1층의 몸돌은 2·3층에 비해 훨씬 커 보이며, 한쪽 모서리가 크게 떨어져 나갔다.
남쪽의 한 면에는 문짝 모양을 조각하였고, 자물쇠 모양을 그 가운데에, 자물쇠 아래로 짐승 얼굴 모양의 문고리 한 쌍을 배치하였으며, 나머지 공간을 못머리 모양의 둥근 조각으로 채웠다. 지붕돌은 몸돌에 비해 넓어 보이며, 밑면에 4단의 받침을 두었고, 네 귀퉁이 끝이 살짝 위로 젖혀져 있는데 그 모습이 가뿐하다.
1층 탑몸돌을 괴는 돌의 형식이라든가, 지붕돌 받침이 4단으로 된 점 등이 통일신라 후기의 모습을 하고 있어 이 때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여겨진다. 절터 안에 있는 다른 탑들에 비해 화려함과 경쾌함을 지니고 있으나, 가장 많은 손상을 입어 보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 성주사지 중앙 삼층석탑의 문고리 문양 ⓒ 2005. 한국의산천
자물쇠 조각의 빗장을 풀고 저 문고리를 잡아 당기면 금방이라도 문이 열리며 피안의 세계로 가는 통로가 나올 듯...
조각은 3중의 문형액 안에 자물쇠 조각이 있고 그 아래 둥근 고리 1쌍을 양각하였으며 좌우대칭으로 14개씩의 둥근 정두형을 새겼다.
이 탑신 윗면에 거친 솜씨로 구형의 사리공이 파져 있었는데 71년에 해체 수리 했을 때는 이미 도굴당하여 유물이 없었다. 옥개석은 옥개받침의 외연에 선각을 하였으며 처마의 아랫선은 직선이지만 위쪽은 중앙부분에서는 수평이다가 처마 끝에서 반전하였다. 낙수면(落水面)이 호형으로 급하고 그 위에 1단의 탑신괴임이 있다.
상륜부는 남아 있지 않고 3층 옥개석 위에 네모난 찰주공이 있었는데 71년 해체 수리할 때 서3층석탑의 정상에 있던 2개의 노반중(露盤中) 하나를 옮겨 놓았다. 특히 1층 옥개석과 2층 탑신의 결구방식이 주목되는데, 1층 옥개석을 파고 2층 탑신을 끼워 맞추도록 하였다. 서탑과 거의 동일한 양식이고 규모도 비슷하나 서탑에 비하여 경쾌하고 조각수법도 우수하며 상하의 비례나 결구방법도 정제되어 있다.
성주사에 남아 있는 4기의 탑중 가장 많이 손상을 입은 것이지만 화려하고 날카로운 모습을 하고 있다. 성주사 낭혜화상비의 건립연대나 탑의 양식을 고려하면 통일신라 말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 2005. 한국의산천
▲ 성주사지오층석탑(聖住寺址五層石塔) 보물 19호 ⓒ 2005. 한국의산천
이 절의 금당터로 보이는 곳의 앞에 서 있으며, 뒤로 3층 석탑 3기가 나란히 서 있는데, 서로 층수만 다를 뿐 만든 솜씨는 비슷하다. 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각 면마다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새겨두었으며, 기단의 위로는 탑신을 괴기 위한 편평한 돌을 따로 끼워 두었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고, 각 면의 귀퉁이에 기둥 모양을 새겼다. 지붕돌은 밑면에 4단의 받침을 두었으며, 추녀밑은 수평을 이루다가 위로 살짝 치켜 올라갔다.
ⓒ 2005. 한국의산천
전체적으로는 통일신라시대 탑의 전형적인 모습이나, 1층 몸돌 아래에 괴임돌을 따로 끼워둔 것은 고려석탑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형식이며, 통일신라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짐작된다. 각 층의 구성이 짜임새가 있으며 우아한 모습이다.
ⓒ 2005. 한국의산천
▲ 원래 이곳에 오르는 돌계단 양옆에는 사자상을 조각한 측면석이 있어서 그 예술성을 인정받아 문화재로 지정받았으나 1986년 사자장이 도난당해 현재 계단만 남아있는 상태이다.
▲ 성주사지 석불입상 ⓒ 2005. 한국의산천
부처님의 코를 갈아 마시면 아들을 낳는 다는 속설때문인지 얼굴 부위가 많이 훼손되어 원형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해 있습니다.
▲ 성주사지 석불입상 ⓒ 2005. 한국의산천
정확한 제작연대는 알 수없으나 조선시대로 추정하며 안타갑게도 훼손이 심해 원형과는 전혀 다른 듯한 모습으로 시멘트 덧칠이 되어있습니다.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 국보 제8호
▲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 국보 제8호 ⓒ 2005. 한국의산천
무염국사 입 적 두해 뒤에 세운 부도비로 신라의 대문장가 고운 최치원 선생이 글을 짓고 그의 조카 최인연이 글씨를 썼다. 낭혜는 무염국사의 시호이며, 신라 태종 무열왕의 8대손으로 어린 나이에 출가했다. 열세살의 나이에 입문한 낭혜는 21세에 당나라로 유학길을 떠나 그곳에서 선종을 익혔다.
귀국하여 성주사의 주지가 되어 신라의 선종을 크게 융성시킨 낭혜는 88세의 나이로 입적하였으며, 진성여왕이 낭혜를 기리기 위해 시호와 함께 부도비를 세우게 되었다.
이 부도비는 전해오는 신라의 부도비 중에서 가장 큰 규모이다. 높이 4.5미터, 폭1.5미터, 두께42센티미터로 거의 원형모습을 잃지 않고 있다. 또한 비신을 받치고 있는 귀부 역시 조각이 화려하고 뚜렷하여 신라 부도비 중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
비신의 재질은 성주산이 주산지인 남포오석이다. 재질이 강하고 아름다워 세월이 지날 수록 더욱 빛을 발한다는 남포 오석의 비신에는 5천여자의 비문이 기록되어 있다.
▲ 국보 제8호인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 ⓒ 2005. 한국의산천
통일신라시대의 탑비. 국보 제8호. 전체 높이 455cm, 비신 높이 263cm, 너비 155cm, 두께 43cm. 현재 귀부의 머리와 몸체부분이 약간 파손된 상태이나 비신(碑身)과 이수(
首)를 갖춘 완전한 형태의 비석이다.
비문의 내용에 의하면 신라 헌덕왕 때 중국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낭혜화상 무염이 성주사에 머물다가 입적한 지 2년 뒤에 부도를 세웠다고 하므로 이 탑비는 890년(진성여왕 4)에 부도와 함께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비문은
최치원이 찬한 것으로 사산비명(四山碑銘)의 하나이며 글씨는 해서체로 최인곤(崔仁滾)이 썼다. 이수는 앙련이 받치고 있으며 4면에 구름과 용을 생동감 있게 조각하고, 앞면 중앙에 있는 제액(題額)은 마멸이 심하여 해독하기 어렵다. 이 탑비는 신라 석비 가운데 가장 크며 조각솜씨도 뛰어날 뿐 아니라 신라사회제도와 서예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 국보 제8호인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 ⓒ 2005. 한국의산천
ⓒ 2005. 한국의산천
▲ 파손된 유적 잔해 ⓒ 2005. 한국의산천
▲ 문화재 해설사의 안내 ⓒ 2005. 한국의산천
주차장은 넓으며 입장료,주차비는 없다. 문화재 해설 안내 자원 봉사자 이인구님의 자상한 안내로 이해가 빠르고 설명이 매우 유용했다.
▲주차장에서 바라 본 성주사지 ⓒ 2005. 한국의산천
▲ 보령시내 ⓒ 2005. 한국의산천
돌아오는 길에 고개에서 본 보령시내. 찌푸리던 하늘은 어느새 맑게 개어있고 전형적인 가을 하늘을 보여주고 있다.
▲ 바위가 많은 용봉산을 지나며... ⓒ 2005. 한국의산천
성주사지 주요문화재성주사지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국보8호), 성주사지 5층석탑(보물 19호),성주사지 중앙삼층석탑(보물20호), 성주사지 서 삼층석탑(보물 47호), 성주사지 동 삼층석탑(도지정 유형문화재 26호), 성주사지 석등(도지정 유형문화재 33호), 성주사지 석계단(문화재 자료 140호)
교통
서해안 고속도로- 대천 나들목- 보령-40번 국도 성주터널- 성주삼거리-좌회전-성주사지경부고속도로 천안 IC → 아산 → 홍성 → 보령(40번 국도) → 성주터널 → 성주 → 성주사지
유성 IC → 공주 → 청양 → 보령 → 성주터널 → 성주 → 성주사지,휴양림
경부고속도로 → 호남고속도로지선 회덕JC → 유성IC → 공주 → 청양 → 보령 → 성주터널 → 성주 → 성주사지 ,성주산 휴양림호남고속도로, 천안-논산간 고속도로 논산JC → 서 논산IC → 논산 → 부여 → 보령 → 성주 → 성주사지,휴양림
주변 볼거리 성주산, 성주산 휴양림, 석탄박물관, 무량사, 대천해수욕장, 무창포해수욕장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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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족불욕(知足不辱)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지지불태(知止不殆)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가이장구(可以長久) 오래도록 편안할 것이다. - 노자 도덕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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