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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MTB등산여행

비극과 눈물의 청령포

by 한국의산천 2005. 8. 16.

장릉,청령포,자귀루 답사

[ 한국의산천 

 

      

 

청령포 귀향 열두 살 어린 나이에 조선왕조 여섯 번째 임금자리에 오른 단종. 그는 수양으로 상징되는 왕족과 집현전으로 대표되는 대신들 사이의 권력암투 희생양이다. 임금자리에 오른 세 해 뒤인 1457년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의금부 도사 왕방연과 중추부사 어득해가 이끄는 군졸 50여명의 호송을 받으며 유배 길에 올랐다.

 

한 여름으로 접어드는 음력 6월 22일, 단종은 한양을 출발하여 일주일만인 6월 28일 영월 청령포에 도착했다. 단종이 피눈물을 흘리며 거쳐 온 유배 길 700리 한양~하남시 배알미리를 거쳐 여주군 대신면 상구리 어수정을 거쳐 그리곤 초현리의 원통고개와 원주시 부론면 단강리와 귀래면 운남리 뱃재를 넘었다. 다시 발길을 재촉하여 제천시 박달재와 원주시 신림면의 황둔고개를 또 넘었다.

 

영월군 주천면 신일리의 어음정을 지나 서면 광전리의 군등치와 신천리의 배일치를 힘겹게 넘었고, 영월읍 나들목 소나기재를 지나 청령포까지 7일만에 도착했다. 신림과 황둔을 잇는 황둔고개는 가파르고 험준해 겨울철엔 눈이 조금만 와도 차량통행이 어려웠으나 이제는 터널이 뚫려 수월하게 오갈 수 있다.

 

황둔에서 영월 방향으로 가다가 처음 만나는 고개가 군등치. 영월군 주천면 거안리와 서면 신천리 사이에 있다. 군등치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굽이굽이 휘어서 올라간다. 고개를 오르면서 단종이 "이 고개는 무슨 고개인 데 이다지도 험한가"라고 물으니 수행하던 왕방연이 "노산군께서 오르시니 군등치(君登峙)라 하옵지요"라고 대답했다. 임금이 오른 고개라 하여 군등치라는 이름이 붙었다.

 

군등치를 지나면 서면 면사무소가 있는 신천리가 나온다. 단종이 이곳을 지난다는 소문을 듣고 마을사람들이 몰려나와 단종의 행렬을 향해 통곡했다. 그래서 옛 지명은 울 명(鳴)자 벌일 라(羅)자를 써서 명라곡이라 불렀다. 명라곡 마을은 서면 면소재지로 변했다. 배일치(拜日峙)는 신천면사무소와 남면 북쌍리 사이에 있다. 유배지가 가까워지자 단종은 불안한 마음을 가누지 못한 채 서산에 기우는 해를 향해 절을 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규섭 칼럼 참고)

 


 

청령포 영월군 남면 광천리 남한강 상류에 위치한 단종의 유배지로, 1971년 강원도 기념물제5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 제6대 왕인 단종이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상왕으로 있다가,그 다음해인 1446년 성삼문 등 사육신들의 상왕복위의 움직임이 사전에 누설됨으로써 상왕은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중추부사 노득해가 거느리는 군졸 50인의 호위를 받으며 원주, 주천을 거쳐 이곳 청령포에 유배되었다.


청령포는 동, 남, 북 삼면이 물로 둘러싸이고 서쪽으로는 육육봉이라 불리는 험준한 암벽이 솟아있어 나룻배를 이용하지 않고는 밖으로 출입할 수없는 마치 섬과도 같은 곳이다.


단종은 이 적막한 곳에서 외부와 두절된 유배생활을 했으며, 당시에는 이곳에 거처할 수 있는 집이 있어 호장 엄흥도는 남몰래 밤이면 이곳을찾아 문안을 드렸다고 전한다.


그 해 뜻밖의 큰 홍수로 강물이 범람하여 청령포가 물에 잠기게 되니 단종은 영월 동헌의 객사로 처소를 옮겼다.
지금 청령포에는 단종 유배시에 세운 금표비(禁標碑)와 영조때 세운 단묘유지비(端廟遺址碑)가 서있어 옛일을 전하고 있다. 또한 망향탑, 노산대, 관음송이 있다.

 

 

▲ 청령포 단종은 청령포(서강 청룡포의 물줄기는 동ㆍ남ㆍ북 삼면으로 둘러 흐르고, 서쪽은 험한 산이 절벽을 이루어 배가 아니면 건너갈 수가 없는 창살 없는 감옥이다)에서 2달 정도 머물다 서강에 홍수가 나는 바람에 영월 동헌의 관풍헌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 그 다음해인 세조 3년(1457년), 순흥으로 귀향을 가 있던 금성대군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다시 발각이 되어 금성대군은 죽음을 맞게 되고 단종은 서인으로 강등되었다가 그해 10월 사약을 받고 죽었다. 이때 단종의 나이 17세였고, 영월로 유배된 지 1년 5개월만이었다. 

 

단종(端宗) 1441. 7. 23생 조선 제 6대 왕(재위 1452~1455)
이름은 홍위(弘暐).
12세 왕위 등극
14세 결혼
15세 세조의 왕위 찬탈, 상왕으로 밀려남
17세 1456.  6. 28일 유배
17세 1457. 10. 24일 승하 
제 5대왕 문종의 아들로 어머니는 현덕왕후 권씨이고 비는 정순왕후 송씨이다. 1448년(세종30) 왕세손, 1450년 세자에 책봉되었고 52년 문종의 뒤를 이어 12세에 즉위하였으나, 연소하여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1455년 상왕, 1457년 노산군으로 강봉되었다가 다시 서인에 떨어졌다가 1457년 유배지인 영월에서 죽음을 당하였다.
1681년(숙종7) 대군으로 추봉, 1698년(숙종24) 왕위에 복위되었다.

 

 

 

▲ 배에서 내리면 울창한 송림이 반가이 맞아준다,

 

 

▲ 숲 입구에 서있는 금표비 이 비석에는 "東西三百尺 南北四百九十尺 此後泥生亦在當禁"(동서삼백척 남북사백구십척차후니생역재당금)이라 기록되어 있다.  강봉된 노산군이 이 청령포에서 동서로는 삼백 척을, 남북으로는 사백 구십 척을 벗어날 수 없다는, 이른바 행동 반경을 제한하는 금지령 팻말인 것이다.

 

 

 

관음송
청령포수림지에 위치하고 있는 소나무로 단종 유배시의 설화를 간직하고 있다. 1988년 천연기념물 제349호로 지정되어 있다.
단종 遺址碑閣(유지비각)서편에서있다. 단종이 유배생활을 할 때는 두 갈래로 갈라진 이 소나무에 걸터앉아 쉬었다는 전설이 있다. 또한 단종의 유배 당시 모습을 보았으며(觀), 때로는 오열하는 소리를 들었다(音)는 뜻에서 관음송(觀音松)이라 불리어 왔다. 소나무 크기는 높이 30m, 가슴높이의 둘레 5m로 지상에서 두 갈래로 갈라져 동,서로 비스듬히 자랐다. 갈라진 줄기의 밑둘레는 3.3m, 남북 20m로 가지를 펼치고 있다. 수령은 600년으로 보고 있는데, 이는 단종 유배시의 수령을 80년으로 하여 계산된 것이다.
청령포는 남한강 상류에 3면이 강으로 둘러싸인 섬과 같은 곳으로 주변에는 우거진소나무의 숲이 있고, 관음송은 그 소나무 숲 중앙에 자리잡고 있다.

 

 

 

 

 

▲ 물수재비를 뜨는 어린아이들.  세월은 흘러 슬픔은 가슴에 남고 단종의 아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단종의 나이였을 때의 천진 난만한 어린아이들은 청령포 강가에서 돌을 던지며 물수재비를 뜨고있다.

 

여기 청령포에 갇힌 어린 임금 단종은 서울 하늘을 바라보며 비탄에 잠기곤 했다. 실제로 단종이 이곳에 유배된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홍수로 물이 차는 바람에 곧 영월 읍내의 객사인 관풍헌으로 옮겨져 여기서 사약을 받게 된다.
청령포엔 대낮에도 햇빛이 들지 않을 만큼 소나무가 울창하다. 그 중 관음송은 높이가 30여m, 가슴높이 둘레가 6m나 되는 600년생 거목이다. 이 소나무가 처절한 단종의 유배생활을 모두 지켜보았을 것이고 (볼관 觀), 피맺힌 울음소리를 들었을 터라(소리音), 관음송(국가지정 문화재 천연기념물 제 349호)이라 부른다.

관음송을 지나 가파른 언덕을 5분쯤 오르면 천길 낭떠러지 노산대에 이른다. 노산군으로 강등된 단종이 해질녘에 이곳에 올라 한양쪽을 바라보며 시름에 잠기던 곳이다. 그 탓인지 여기서 바라보는 노을은 유난히 붉은 핏빛이다.

 

 

 

 

▲ 관풍헌 자규루 단종이 청령포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중 그해에 큰 홍수가 나는 바람에 이곳으로 거쳐를 옮겼다. 이곳에서 단종은 1457년 10월 24일 세조가 내린 사약을 받고 한 많은 짧은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이곳에서 사약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나 한편으로는 (강요에 의해)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또한 김삿갓이 20세 되던해에 조부의 행적을 모르고 조부를 신랄하게 탄핵하는 글을 지어 장원을 한곳도 바로 이곳 관풍헌이다.

 

관풍헌은 본래 고을의 객사로 쓰던 건물로 영월읍의 중심에 있다.  고색창연한 큰 건물 세 채가 나란히 잇닿아 있는데 해방 전에는 영월군청이 썼고, 해방 후에는 영월중학교가 들어 서기도 했으나 지금은 단종 복위 후 단종의 원찰(願刹) 이었던 보덕사(保德寺)의 포교당으로 쓰고 있다.
동헌 동쪽에 있는 누각을 자규루(子規樓)라 하는데 이 누각은 세종 때 영월군수였던 신근권이 세워서 매죽루(梅竹樓)라고 했던 것을 단종이 이에 올라 '피를 토하듯 운다' 는 두견새(杜鵑: 一名 子規)의 한을 담은 시를 읊었다고 하여 그 시를 자규시라 하고 이 누을 자규루라고 부른다.

 

子規詞(자규사)단종(1441-1457)

月白夜蜀魄 (월백야촉백추)달밝은 밤에 두견새 울음소리 더욱 구슬퍼
含愁情依樓頭(함수정의루두) 수심많은 이내 목 누 머리에 의지하노라
爾주悲我聞苦(아주비아문고) 슬피우는 네 목소리 내 듣기 괴로우니
無爾聲無我愁(무이성무아수) 네 울음 그쳐야 내 수심도 그치리라
寄語世上苦勞人(기어세상고로인) 세상에 괴로움 많은 자에게 한마디 부치니
愼莫登春三月子規樓(신막등춘삼월자규루)   아예 춘삼월에는 자규루에 오르지 말아다오
 자규시  一自寃禽出帝宮; 한 마리 원한 맺힌 새가 궁중에서 나와孤身雙影碧山中; 외로운 몸과 외로운 한 그림자로 푸른 숲에 깃들었다.假眠夜夜眠無假; 밤마다 억지로 잠들려 하지만 잠 이루지 못하고窮恨年年恨不窮; 해마다 한스러움 끝나기를 기다렸지만 원한은 끝나지 않네
聲斷曉岑殘月白; 두견이 울음 끊어진 뫼부리에 조각달만 밝은데
血漏春谷落化紅; 피를 뿌린 것 같은 골짜기에는 붉은 꽃이 지네
天聾尙來聞哀訴; 하늘은 귀머거린가 아직 애끓는 호소를 듣지 못하고
何奈愁人耳獨德  어찌하여 수심 많은 이 사람에게 귀만 밝게 하였는가.

 

 

▲ 장릉  가끔 들르는 곳이지만 이번만큼 이렇게 차가 많고 관람객이 많기는 처음이다.

 

 

▲ 호젓한 산길을 10분정도 올라가면 그리 규모가 크지않은 작은 왕릉이 나타난다.

 

 

▲ 조선 6대 왕 단종릉 장릉. 영월의 호장 엄흥도가 지게에 단종의 시신을 지고와서 산길을 오르다 보니 노루가 한마리 튀어 도망가기에 그곳을 보니 눈이 녹아있어 이곳에 암매장하고 도망을 쳤다고 한다. 역대의 왕릉을보라 그들의 묘는 산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자리에 자리하고 있지만 단종의 묘는 좁은 산릉의 그 끝에 오롯이 비좁게 서 있음을...

 

▲ 배식단

 

 

▲ 배식단사정조 15년(1791)에 건립된 곳으로 단종을 위하여 목숨을 받친 충신위(忠臣位) 32인, 조사위(朝士位) 198인, 환관군노위(宦官軍奴位) 28인, 여인위(女人位) 6인을 합하여 264인의 위폐(位牌)를 모셔놓은 곳이다. 매년 한식날 단종제향후 제사를 지낸다.

 


○ 영월의 호장 엄흥도

 

조선 제6대 단종대왕이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강원도 영월에 유배되었을 때 충의공은 이 고장 호장직(戶長職)에 있었다.
밤낮으로 대왕의 거소(居所) 청령포를 바라보고 대왕이 무사하기를 기원하던 중 어느날 달 밝은 고요한 밤에 청령포 대왕의 거소에서 슬프고 애끊는 비명의 곡성이 들려오므로 황급히 강을 건너가 진배하니 대왕은 울음을 멈추고 “이 심야엔 웬 사람이 나를 찾는가?” 하고 물으니, “소신은 이 고장 영월호장 엄흥도이옵니다”라고 대답하고 옥안을 바라보니 대왕은 “육지고도(陸地孤島)인 이곳 청령포에 유배된 이후 밤마다 꿈속에서 신하들을 보고 추억을 회상하며 탄식하고 지내던 중 비조불입인 이곳에서 너를 보니 육신을 상봉한 것 같구나. 그대는 실로 초야에 묻힌 선인이로구나!”하고 반갑게 맞이 하였다.

그후 호장 엄홍도는 매일 밤 풍우를 가리지 않고 문안을 드렸으며 그해 여름 큰 장마로 인하여 대왕은 청령포 어소에서 영월읍 영흥리 관풍헌에 침소를 옮기게 되어 밤마다 객사 동편에 있는 자규루(子規樓)에 올라 자규시를 읊으면서 지내던 중 금부도사 왕방연(王邦衍)이 가지고 온 사약을 받고 승하하니, 그 옥체는 동강물에 던져지고 시녀는 동강절벽(후일에 낙화암이라고 함)에서 투신절사(投身節死)하였는데 이 때가 매우 추운 겨울이었다.


 
엄흥도는 단종이 관풍헌에서 사약을 받고 승하하자 단종의 시신을 거둔 이로 유명하다. 단종이 서거하자 세조의 명에 의해 단종의 시신은 동강에 버려졌다.세조는 단종의 시신을 거두는 이는 삼족을 멸한다고 엄명했기 때문에 아무도 단종의 시신을 거두지 못했다. 호장 엄흥도는 군수에게 성장(聖裝)을 청하였으나 세조를 두려워하므로 성사치 못하자 즉시 서강과 동강이 합류하는 곳으로 달려가 죽음을 무릎 쓰고 아들 삼형제와 함께 밤에 단종의 시신을 몰래 거두어 달려가 그곳에서 대기하였다가 옥체를 인양하여 미리 준비한 관에 봉안하고 운구하여 영월군 서북쪽 동을지산(冬乙支山)지금의 장릉에 암장하고 자취를 감추었다.

1759년 (영조 34년) 그 벼슬을 공조판서로 추봉하여 사육신 정렬에 배향하고 육신사(六臣祠)에 봉안·치제케 했다. 그후 1516년 (중종 11년)에 어명으로 노산묘를 찾아 수축하고 능전사청을 후인
1791년 (정조 15년)에 어명으로 노산료를 찾아 수축하고 능전사청을 건립
1791년 (정조 15년)에 어명으로 장릉배식단(莊陵配食壇 )에 배합향배(配合享배)케 하고 정려치제(旌閭致祭)케 하였으며, 1833년(순조 33년) 공조판서에 추증되고 고종 13년(1876)에 충의공 시호를 내렸다. 묘소는 영월읍 팔괴리 창평산 186번지에 있다.

 


 

▲ 역사 자료실로 유물과 사진과 함께 전시되어있다.

 

 

 

▲ 창절사 

창절사는 단종 복위운동을 벌이다 세조에게 죽은 사육신 박팽년, 성삼문, 이개, 유성원, 하위지, 유응부 6위(位)와 생육신 가운데 김시습, 남효온 2위, 박심문, 엄흥도 충신 2위를 합쳐 10위의 위패를 봉안한 곳이다.
 

단종이 승하한 이후, 영월의 사림(士林)은 노산군의 묘 앞에 육신사를 세우려고 했지만 당시 사정에 의해 사당을 지을 수 없었다. 그 이후 숙종 11년(1698)에 단종이 복위되면서 노산군의 묘는 장릉이란 능호를 받았다. 따라서 그 격식에 맞게 능을 새로 단장하면서 영월 유림의 오랜 숙원인 육신사를 장릉 아래쪽에 세운 뒤, 충신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올렸다.
숙종 31년(1705), 장릉 안에 있던 육신사를 장릉 밖으로 옮기면서 창절사(彰節詞)란 이름으로 바뀌게 되었다. 창절이란 모든 불의에 항거하며 대의를 따른 사육신과 생육신 등의 절개를 표창한다는 뜻에서 숙종이 사액했던 것. 창절사 앞에 있는 창절서원 원장이 이들 충신들에게 봄과 가을 제사를 올리고 있다.

 

 

사육신과 생육신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악형에도 굴하지 않고 순사(殉死)한 조선 전기의 6충신. 성삼문(成三問:承旨)·박팽년(朴彭年:刑曹參判)·하위지(河緯地:禮曹參判)·이개(李塏:直提學)·김문기(金文起:工曹判書)·유성원(柳誠源:司藝) 을 말한다.
사육신의 가족으로 남자인 경우는 모두 살해당하였고, 여자의 경우는 남의 노비로 끌려갔으며, 사육신 외에도 유응부,권자신, 등 70여 명이 모반 혐의로 화를 입었다. 사육신은 1691년(숙종 17) 숙종에 의해 관직이 복구되고, 민절이라는 사액(賜額)이 내려짐에 따라 노량진 동산의 묘소 아래 민절서원(愍節書院)을 세워 신위(神位)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생육신
조선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탈취하자 세상에 뜻이 없어 벼슬을 버리고 절개를 지킨 여섯 사람으로 생육신이라 하는데, 김시습(金時習)·원호(元昊)·이맹전(李孟專)·조려(趙旅)·성담수(成聘壽)·남효온(南孝溫)이다. 사육신이 절개로 생명을 바친 데 대하여 이들은 살아 있으면서 귀머거리나 소경인 체, 또는 방성통곡하거나 두문불출하며, 단종을 추모하였다.

 


▲ 장릉 바로 옆에 위치한 보덕사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발봉산(鉢峰山)에 있는 절로서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月精寺)의 말사이다. 686년(신문왕 6)에 의상(義湘)이 창건하고 지덕사(旨德寺)라 하였다. 1132년(인종 11)에는 설허(雪虛)와 원경국사(元敬國師)가 극락보전(極樂寶殿)·4성전(四聖殿)·염불암·고법당(古法堂)·침운루(沈雲樓) 등을 증축하였다.
1457년(세조 3) 단종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이곳 영월로 유배되어와 사찰명을 노릉사(魯陵寺)라 개칭하였다. 영조 때 장릉수호조포사(莊陵守護造泡寺)라는 은전이 베풀어지면서 보덕사가 되었다. 6·25전쟁 때 대부분이 소실된 것을 그후 거의 원형대로 복원하였다

.

 

 

어린 단종은 숙부 수양대군이 무력으로 권력을 찬탈하는 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이름뿐인 왕의 자리를 지키며 수양대군의 처분만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결국 1455년(단종 3) 윤6월에 단종은 "내가 나이가 어리고 중외(中外)의 일을 알지 못하는 탓으로 간사한 무리들이 은밀히 발동하고 난(亂)을 도모하는 싹이 종식되지 않으니, 이제 대임(大任)을 영의정에게 전해 주려고 한다."라는 말과 함께 수양대군에게 선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물론 이것은 단종 본인의 뜻이 아닌 수양대군과 그 측근들의 강압에 의한 것이었다.

 

상왕으로 물러난 단종은 세종의 여섯째 아들이자 수양대군의 동생인 금성대군의 집에 연금 상태로 있게 되었다. 그러다가 1457년(세조 3) 6월에 성삼문, 박팽년 등의 집현전 학사들이 단종 복위 운동을 펼친 것을 기화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었다. 이때 단종의 나이 17세였다. 노산군으로 강등됨과 동시에 영월로 유배된 단종은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 계획이 사전에 발각됨에 따라 사약을 받았다. 실록에는 조정 대신들이 노산군을 처형하라고 주장해 세조가 이를 윤허했는데, 사약이 내려지자 노산군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야사에는 노산군의 억울한 죽음이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금부도사 왕방연(王邦衍)이 사약을 받들고 영월에 이르러 감히 들어가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으니, 나장이 시각이 늦어진다고 발을 굴렀다. 도사가 하는 수 없이 들어가 뜰 가운데 엎드려 있으니, 단종이 익선관과 곤룡포를 갖추고 나와서 온 까닭을 물었으나, 도사가 대답을 못했다. 통인(通引) 하나가 항상 노산을 모시고 있었는데, 스스로 할 것을 자청하고 활줄에 긴 노끈을 이어서 앉은 좌석 뒤의 창문으로 그 끈을 잡아당겼다. 그때 단종의 나이 17세였다. 통인이 미처 문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아홉 구멍에서 피가 흘러 즉사했다. 시녀와 시종 들이 다투어 고을 동강(東江)에 몸을 던져 죽어서 둥둥 뜬 시체가 강에 가득했고, 이날에 뇌우(雷雨)가 크게 일어나 지척에서도 사람과 물건을 분별할 수 없고 맹렬한 바람이 나무를 쓰러뜨리고 검은 안개가 공중에 가득 깔려 밤이 지나도록 걷히지 않았다. - 《연려실기술》 권 4, 단종 조 고사본말

조선이 아무리 왕조 국가라고는 하지만 힘이 없는 왕의 즉위는 결국 정국의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었다. 단종의 사례는 보호받지 못한 왕권의 말로가 이처럼 비참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그렇게 그는 권력 다툼의 희생양이 되어 짧은 생을 마감했다. 1457년(세조 3) 10월, 향년 17세였다.

 

이후 단종은 1681년(숙종 7)에 노산대군으로 복위된 데 이어, 1698년(숙종 24)에 왕의 시호를 받고 추증되었다. 단종이 죽은 지 200년이 훨씬 지난 뒤였다. 묘지는 영월에 위치한 장릉(莊陵)이며, 지금도 영월 지역에는 단종과 관련된 전설과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장릉가는 길 

서울에서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만종분기점에 이르러 중앙고속도로를 탄다. 이 고속도로를 따르다가 신림인터체인지에서 영월 방향으로 가는 88번 지방도로를 탄다.
이 국도를 따라 주천에 이르러 군등치, 신천리, 배일재를 넘으면 연당교에 닿게 되는데 이곳에서 좌회전하면 38번 국도로 진입하게 된다. 이어 문곡교, 소나기재를 넘어 내려서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삼거리에서 좌회전하면 장릉에 닿게 된다.우회전하면 청령포로 가는 길이다. 관풍헌은 영월 시내에 위치한다.

 

단종의 비 정순왕후

 

본관은 여산(礪山)이고, 여량부원군 송현수(宋玹壽)의 딸이다. 1454년(단종 2년) 정월 왕비에 책봉되었고, 1455년 세조가 즉위하고 단종이 상왕에 봉해지자 의덕왕대비(懿德大王妃)에 봉해졌으나, 1457년(세조 3년) 단종이 영월로 유배되면서 부인으로 강등되었다.


정순왕후에 대한 일화
정순왕후와 동망봉·영도교·자줏골의 유래

▶ 단종이 영월로 유배된 후, 궁궐에서 추방된 정순왕후는 동대문 밖 숭인동 동망봉(東望峰) 기슭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 단종의 억울한 죽음을 안 왕후는 아침 저녁 이 산봉우리에 소복하고 올라 단종의 유배지인 동쪽을 향해 통곡을 했는데, 곡소리가 산 아랫마을까지 들리면 온 마을 여인들이 땅 한 번 치고 가슴 한 번 치는 동정곡(同情哭)을 하였다고 한다. '동망봉'이라는 이름도 정순왕후가 동쪽을 향해 통곡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청계천에 있는 영도교(永渡橋)에도 단종과 정순왕후의 사연이 전한다. 단종과 정순왕후는 그 다리에서 이별한 후 다시는 못 만났다 하여 사람들이 '영 이별 다리'로 불렀는데, 그 말이 후세에 와서 '영원히 건너가신 다리'라는 의미로 영도교로 불린 것이다.

▶ 정순왕후는 초막집에서 시녀 셋과 함께 살며, 시녀들이 동냥해오는 것으로 끼니를 이었다. 이 소문을 들은 세조가 근처에 영빈전이라는 집과 식량을 내렸으나 정순왕후는 끝내 거부하였다. 그리고 자줏물을 들이는 염색업으로 여생을 때묻히고 살지 않았다고 해서 그 골짜기를 지금도 '자줏골'이라고 부른다. 또 『한경지략(漢京識略)』에 보면 영도교 인근에 부녀자들만 드나드는 채소시장이 있었다고 전한다. 송비(宋妃, 정순왕후 송씨)를 동정하여 끼니 때마다 채소를 가져다주려는 한 부녀자들이 많아 긴 행렬을 이룰 정도여서, 궁에서 이를 못하게 말리게 되었다. 그러자 여인들이 지혜를 모아 송비의 초막에서 멀지 않은 곳에 채소를 파는 척하고 모여들어 송비에게 가져다준 것이 채소시장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정순왕후가 1521년(중종 16년) 6월 4일 세상을 떠나자, 대군부인의 예우로 양주(楊州, 현재의 남양주시) 남쪽 군장리(群場里, 현재의 사릉리)에 모셔졌다. 그후 후 숙종 24년(1698년) 11월 6일단종 복위와 함께 정순왕후로 다시 올려져, 종묘에 신위가 모셔지고 능호는 사릉(思陵, 사적 제209호)이라 했다.


조선 연표


1393년 2월 국호를 조선으로 바꿈.
1394년 10월 한양천도(漢陽遷都)
1398년 8월 제1차 왕자의 난 일어남, 정도전, 남은 등 죽임을 당함
1398년 (태조 7)년 9월 태조, 방과(芳果)에게 왕위를 물려줌(定宗)
1400년 (정종 2)년 1월, 제2차 왕자의 난 발생
1400년 11월 정종, 방원(芳遠)에게 왕위를 물려줌(太宗)

1401년 (태종 1)년 7월 신문고(申聞鼓)설치
1406년 (태종 6)년 3월 선교양종이 사사(寺社) 242개만 남기고 나머지는 없앰. 사찰의 토지와 노비를 제한하고, 나머지는 몰수함.
1420년 (세종 2)년 3월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함
1425년 (세종 7)년 2월 처음으로 동전을 사용
1429년 (세종11)년 정초(鄭招), 『농사직설(農事直說)』을 편찬함
1434년 (세종 16)년 6월 장영실(蔣渶實), 자격루(自擊漏 : 물시계. 시간이 되면 종을 침)를 만듦. 이 해, 동북면에 6진(六鎭) 설치
1443년 12월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
1445년 (세종 27)년 4월 정인지(鄭麟趾), 권제(權踶) 등,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10권을 편찬하여 올림.
1446년 (세종 28)년 9월 훈민정음 반포
1452년 (문종 2)년 2월 김종서 등 『고려사절요』 편찬 : 연대순으로 정리한 고려 역사책.

5월 단종(端宗) 즉위.
1455년 (단종 3)년 윤6월 단종, 수양대군(世祖)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上王)이 됨.
1456년 (세조 2)년 6월 성삼문, 박팽년 등이 상왕의 복위를 도모하다 처형됨(死六臣).
1457년 (세조 3)년 6월, 단종을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하여 영월에 유배, 10월 영월에서 노산군(단종)사망.
1463년 (세조 9)년 11월 홍문관(弘文館) 설치.
1467년 (세조 13)년 5월 이시애의 난(李施愛亂) 발생.
1468년 (세조 14)년 10월 남이(南怡), 반역죄로 처형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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