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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MTB등산여행

미리내 가는 길

by 한국의산천 2005. 7. 8.

미리내

은하수의 순수 우리말은 미리내이다.  [ 답사일 2005.7월8일   한국의산천   ]

용인에 업무를 마치고 잠시 둘러보았습니다.(짧은 시간이라도 활용하기 위해서 업무차 들른곳 주변의 유적지나 성지를 답사 방문하는것은 업무에 대한 스트레스도 해소하고 연료낭비도 덜하겠지요)

 


 

용인 - 안성간 신도로에서 내려서서 미리내 성지 4Km로 이정표가 있는 삼거리

 


 

미리내 성지 못미쳐 저수지 앞의 멋진 느티나무

 

 

느티나무 옆 예쁜 작은 집에 피어있는 자귀나무 꽃, 클릭해서 확대해서 보십시요.

상세보기 클릭 ■☞ 자귀나무 설명

 

 

 
 
 

 

 


 

저수지에 올라 잠시 바람을 쐬고 다시 출발~!

 


 

♣ 안성 미리내성지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미산리(美山里)에 소재하고 있다. 본래 박해 시대의 교우촌으로, 1846년의 병오박해때 순교한 성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신부와 1866년의 병인박해 때 순교한 성 이윤일(요한)의 시신이 이곳으로 옮겨져 안장되면서 순교 사적지의 이름을 얻게 되었다.

미리내는 순우리말로 ‘은하수’라는 뜻으로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 때 미리내를 한자로 미리천(美里川)이라 표기하고 이것과 산촌(山村)의 이름을 따서 미산리라고 하게 되었다.
이곳이 순교 사적지로서 의미를 갖게 된 것은 1846년 서울 새남터에서 순교한 성 김대건 신부의 시신이 교우들에 의해 미리내로 이장되면서부터이다. 당시 김대건 신부의 시신은 순교한지 40일 만에 비밀리에 거두어져 용산 뒤편의 와서(瓦署, 왜고개)에 안장되었다가 10월 26일 서 야고보, 박 바오로, 한경선, 이민식 등에 의해 이곳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 클릭하셔서 확대해서 보시면 더욱 자세히 보실 수가 있습니다.

 

1886년에 시복 판사인 프와넬 신부가 봉분 중앙을 헤치고 홍대를 확인하였으며, 1901년 5월 21일 에는 유해를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옮겨 안치하였고, 10월 17일 이를 다시 신학교 성당으로 옮겼다.
그리고 1960년 7월 5일에 그 유해가 서울 혜화동에 있는 가톨릭대학교로 옮겨지면서 하악골만은 미리내 경당으로, 치아는 절두산 순교 기념관으로 분리 안치되었다. 본래 무덤이 있던 자리에는 1928년에 김대건 신부의 경당이 건립되었다.


 

1853년 2월 3일에 사망한 페레올 주교의 시신도 “거룩한 순교자의 곁에 있고 싶다.”는 유언에 따라 이곳에 안장되었고, 그 무렵 사망한 김대건 신부의 모친 고 우르슬라의 시신도 인근에 안장하였고, 1907년에는 강도영 신부가 석조 성당을 건립하였고, 1921년에 사망한 이민식도 김대건 신부의 경당 앞에 있던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그 후 1965년에 이 공동묘지가 광장으로 조성되면서 고 우르슬라와 이민식의 묘가 현재의 자리에 이장되고, 그 해부터 매년 9월 26일경에 이 광장에서 순교자 현양 대회가 개최되고 있다. 1970년대 미리내는 순례사적지로 가꾸어지기 시작했다. 

1970년 수원교구의 지원으로 노곡 삼거리에서 사적지 입구까지의 길을 확장하였고, 1974년 김대건 신부 기념 시비 건립, 1976년에 무명 순교자 묘역이 조성된 후 16구의 순교자 시신이 이곳으로 이장되었다.
같은 해 정행만 신부가 수도회를 설립한 후, 이곳은 순례지로서의 면모를 더욱 갖추게 되었다. 1982년 가을 사적지 안에 있던 주민들을 새로 조성된 새마을 단지로 이주시켰고, 1991년에는 '한국순교자 103위 시성기념성당'을 건립하였다. (미리내 성지  031-674-1251)

 


 

 


 

 


 

김대건 신부 동상 ( 이 길로 가면 묘역이 자리하고 있다)

 

김대건 1822~1846(순조22 ~ 헌종12)
우리 나라의 최초의 신부, 천주교 성인. 교명 앙드레. 본관 김해. 충청 남도 내포에서 독실한 천주교도 부모사이에서 태어났다. 천주교의 탄압을 피하여 경기도 용인의 골배마을로 이사와서 살았다.
어려서부터 할머니와 부모님에게서 천주교의 교리를 익혔다. 1836년(헌종 2) 프랑스 신부모방한테 영세를 받고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최양업, 최방제 등과 함께 중국의 마카오에  건너가, 파리 외방 전교회의 칼레리 신부로부터 신학을 비롯한 서양학문과 프랑스어. 라틴어 등을 배웠다. 그 후 마카오에서 민란이 일어나자 1839년에 필리핀의 마닐라에 가서  공부하여 6개국어를 익히었다. 1842년(헌종 8) 프랑스 군함 제독 세실의 통역관으로 있다가 몇차례의 실패 끝에 1845년(헌종 11) 고국을 떠난 지 9년만에 돌아왔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포교에 힘쓰다가 페레올 신부를 데려오기 위하여 쪽배를 타고 중국 상하이에 건너갔다.  거기서 탁덕으로 승품되어 24세의 젊은 나이에 한국 최초의 신부가 되었다.
그 후 페레올.다블뤼 두 신부를 데리고 충청남도 강경을 거쳐서 귀국하였다. 그는 지방전도에 나서 10년 만에 고향에서 어머니를 만났으나, 아버지는 순교한 뒤였다. 1846년 최양업과 다른 신부의 입국을 위하여 비밀 항구를 찾다가 체포되었는데, 서울로 끌려와 40회에  걸친 문초를 받고 9월 새남터에서 순교(당시 26세)하였는데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참수하여 군문효수할 것인데 헌종이 편법을 써서 효수하지 않고 매장하게 하였는데 매장 40일 후에  양성면 미리내에 사는 이민식 씨에 의하여 밤으로 7일에 걸쳐 운구하여 현재 미리내묘지에 안장하였으며, 1925년 7월 5일 로마교황 바오로 XI세로부터 복자위에 올림을 받았고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우리 나라에 와서 직접 거행한 시성식에서 카톨릭의 성인 자리에 올랐다.


 

 


 

 


 

 

▼ 미리내 성지에서 나와서 오른쪽 길 용인 방면으로 접어들면 조병화 문학관을 찾을 수 있다.


 

조병화 (1921.5.2 - 2003.3.8)

경기도 안성 출신. 경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45년 일본 동경고등사범학교 물리화학과를 수료하였다. 1959년 경희대학교 조교수를 시작으로 부교수·교수로 있으면서 1972년 경희대학교 문리대학장, 경희대학교 교육대학원장을 지내고 1981년 인하대학교 문과대학장, 1982년 인하대학교 대학원장을 역임하였다. 그 사이 시인협회 심사위원장, 세계 시인대회장, 문인협회 이사장 등을 지냈다.

작품으로는 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遺産)》《먼지와 바람 사이》 《밤의 이야기》 《어머니》, 시선집 《꿈》 등이 있고, 수필 《왜 사는가》 《나보다 더 외로운 사람에게》가 있다.

국민훈장 동백장·모란장, 금관 문화훈장을 받고, 아시아 자유문학상, 서울시 문화상, 예술원상, 삼일문화상, 대한민국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두산백과 참고)

                    찔레꽃

                                  조병화

  

찔레꽃이 한창 피어서

냄새가 가득히 감도는 이 산장의 길을

혼자 걷는다는 것은 서운한 일이어라


하얗게 찔레꽃이 피어서

냄새가 만발하는 이 산장의 길을

혼자 걷는다는 것은 허전한 일이어라


오월도 늦어 여름으로 접어드는

푸른 이 계절, 송이송이 하얗게 피어서

냄새가 진동하는 이 찔레 핀 길을

혼자 걷는다는 것은 황홀한 고독이어라


시를 쓰며, 시를 사는 사람에게

찔레꽃은 하늘의 맑은 선물이려니


서운함도, 허전함도, 황홀한 고독도

하늘의 맑은 은총이려니

아, 시인은 하늘이 보살펴 주는

맑은 나그네이련가.

 


 

의 자
                   조병화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의자를 비워 드리지요

지금 어디 메쯤에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의자를 비워 드리겠어요

먼 옛날 어느 분이
내게 물려주듯이

지금 어디 메쯤에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의자를 비워 드리겠습니다

 


 

조병화 문학관은 토,일요일에만 개방한다는 문구가 적혀있다. 아쉬움을 뒤로 한채 발길을 돌렸다.

 

하루만의 위안
                    조병화

잊어버려야만 한다
진정 잊어버려야만 한다
오고 가는 먼 길가에서
인사 없이 헤어진 지금은 누구던가
그 사람을 잊어버려야만 한다
온 생명은 모두 흘러가는데 있고
흘러가는 한줄기 속에
나도 또 하나 작은
비둘기 가슴을 비벼대며 밀려가야만 한다
눈을 감으면
나와 가까운 어느 자리에
마지막 하늘을 바라보는 내 그날이 온다
그날이 있어 나는 살고
그날을 위하여 바쳐온 마지막
소리를 생각한다
그날이 오면
잊어버려야만 한다
진정 잊어버려야만 한다
오고 가는 먼 길 가에서
인사 없이 헤어진 시방은 누구던가
그 사람으로 잊어 버려야 한다

 


 

용인 안성은 저수지가 참 많은 곳이다.

미리내 성지에서 영화 김기덕 감독의 "섬" 촬영지인 고삼저수지도 가까운 거리에 있다. 

 


 

 


 

고삼저수지 상세보기 클릭 ■☞ 영화 "섬" 촬영지 고삼저수지

 


 

교통

○ 영동고속도로 용인 IC 에서 용인 시내로 빠져 나와 45번 국도를 타고 11km 가면 송전리이다. 

여기서 이동저수지를 끼고 4.8km쯤가면 삼거리가 나오고 여기서 좌회전하여 2.5km쯤가면 다시 삼거리가 나오는데 이곳이 미리내 입구이다.
(용인시내를 벗어나면 오산,평택 신도로가 확장 새로 개통이 되엇는데 그길을 타고 가면 이정표가 나온다)  

1) 영동 고속도로 - 용인 IC - 송전 - 난지실 - 노곡 - 미리내 성지
2) 경부 고속도로 - 안성 IC - 안성 - 고삼 - 노곡 - 미리내 성지
3) 중부 고속도로 - 일죽 IC - 매산리 - 죽산 - 안성 - 고삼 -노곡 -미리내 성지
4) 대중교통 이용:안성버스 터미널 뒤 농협직매장 앞에서 승차(첫차 오전 8시 45분, 막차 오후 9시 10분)
○ 드라이브 코스
안성시내 - 굴암사(4km) - 노곡호수 (6km) - 노곡삼거리(0.5km) - 미리내성지(5km)
안성 I.C - 중앙대입구(안성맞춤박물관) - 보개면(아트센타 마노) - 남사당전수관 - 너리굴 문화마을 - 태평무전수관 - 고삼면 - 미리내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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