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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강화53돈대탐방

강화 광성보 광성돈대

by 한국의산천 2019. 4. 20.

강화 광성보 광성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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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3. 광성진(廣城津)

 

 - 화남 고재형(華南 高在亨, 1846~1916)


春風來到廣城樓

광성보 누각에 봄바람 불어오는데,


津吏迎吾指海洲

나루지기 나를 맞으며 바다섬을 가리키네.


三兎三龍三蛇字

묘시 진시 사시의 삼자시가 있으니,


知潮有信可行舟

물때를 잘 알아야 배가 갈 수 있다네.


○ 효종 무술년(1658)에 유수 서원리(徐元履)가 광성진(廣城鎭)을 창설하였다. 지금은 폐지되었다.
○ 조수에 따라 배가 다닐 수 있는데, 조수를 기다리는 시는 다음과 같다.

삼토삼룡수(三兎三龍水) 삼사일마시(三蛇一馬時) 양삼원역이(羊三猿亦二) 월흑부여사(月黑復如斯).

 

 

▲ 광성보 안해루

 

광성보(江華廣城堡 : 사적 제227호)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에 있는 강화 12진보(鎭堡) 가운데 하나이다.

고려가 몽골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강화로 천도한 후에 돌과 흙을 섞어 해협을 따라 길게 축조하였다.

효종 9년(1658)에 강화유수 서원리가 설치하였다.

 

숙종 5년(1679)에 축조된 오두돈대(鰲頭墩臺)·화도돈대(花島墩臺)·광성돈대(廣城墩臺)를 관할하였다.

오두돈대는 둘레가 80보(步) 33첩(堞)이었고, 화도돈대는 둘레 92보 42첩이었으며, 광성돈대는 88보 38첩이었다.

 

영조 21년(1745)에 석성으로 개축하면서 성문을 건립하였는데, 이를 안해루(按海樓)라 하였다. 그 후 1769년에 완전한 석성으로 축조하였다.
이곳에는 군선 5척과 별장 아래에 군관 29인, 군병 100명, 돈군 18명이 배속되어 있었다.

 

고려시대 강화해협을 지키던 외성의 요충지로 1871년 신미양요 때는 최대의 격전지였고, 1874년 만든 오두정 포대를 가지고 있었다.

이 해에 통상을 요구하며 침입한 미국 함대가 강화 해협을 거슬러 올라오는 것을

광성(廣城)·초지(草芝)·덕진(德津)·덕포(德浦) 등의 포대에서 일제히 사격하여 물리쳤으나, 4월 23일에 450명의 미국 해병대가 초지진에 상륙하여 진을 점령하였다.

이튿날 미국이 북상하여 덕진진을 함락시키고 이어서 광성보로 쳐들어왔다.

미국 극동 함대는 9인치 포와 8인치 포 등 약 80문의 함포로 지원사격을 하였으며, 광성보를 지키던 중군장(中軍葬) 어재연(魚在淵)을 위시하여 그의 아우 어재순(魚在淳)·군관(軍官) 이현학(李玄學)·어영초관(禦營硝官) 유풍로(柳豊魯)·천총(千摠) 김현경(金玄暻)·광성별장(廣城別將) 박치성(朴致誠) 이하 49인의 장사와 200여명의 군사가 전사하고 20여명이 부상하였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형편없이 열세한 무기로 분전하다가 중상으로 기동이 어려운 몇 명을 제외하고는 전원이 순국하였다.

이 싸움에서 미국은 맥키 중위를 위시하여 3명이 전사하고 10여명이 부상하였다.

 

1976년 성첩과 문루가 파괴된 것을 복원하는 동시에 당시 전사한 무명용사들의 무덤과 어재연·어재순 형제의 쌍충비각(雙忠碑閣)을 보수·정비하였다.

이곳에는 어재연장군의 전적비와 약 50여 명의 순국영령들을 기리기 위한 ‘신미순의총(辛未殉義塚)’이 있다.

 

 

▲ 멀리 진입로에서도 웅장하게 보이는 광성보 안해루

광성보는 덕진진, 초지진, 용해진, 문수산성 등과 더불어 강화해협을 지키는 중요한 요새이다.

 

강화 광성보는 강화도 해안 경계 부대인 12진보 중 하나로

고려가 몽고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강화로 도읍을 옮기면서

1233년부터 1270년까지 바닷길을 따라 돌과 흙을 이용해 강화외성을 쌓았다.

광해군 때 다시 고쳐 쌓은 후 효종 9년(1658)에 광성보가 처음으로 설치되었다.

숙종 때 일부를 돌로 고쳐서 쌓았으며, 용두돈대, 오두돈대, 화도돈대, 광성돈대 등 소속 돈대가 만들어 졌다.

영조 21년(1745)에 성을 고쳐 쌓으면서 성문을 만들었는데 <안해루>라 하였다.

 

 

 

광성보는 신미양요 때 미국의 아세아함대를 맞아 어재연 장군 휘하 전 수비군이 장렬하게 전사한 역사적 장소다.

안해루를 통해 안으로 들어서면 광성돈대가 나오고, 신미양요 때 순국한 무명용사들을 기리는 ‘신미양요순국무명용사비’와 전사자들의 합동묘인 ‘신미순의총’을 지나면 용두돈대를 만난다.   

 

 

▲ 멋진 위용을 자랑하는 광성보의 안해루


광성보

광성보 안에는 광성돈대, 손돌목돈대, 용두돈대가 있으며

어재연·어재순 형제의 충절을 기리는 쌍충비각, 이름을 알 수 없는 전사 장병들을 모신 신미순의총이 있다.

 

 

 

 

 

 

 

 

 

242. 광성동(廣城洞)

 

        - 화남 고재형(華南 高在亨, 1846~1916)

 

東風東望廣城墩 (동풍동망광성돈)

동풍 맞으며 동쪽으로 광성돈을 바라보니

 

殘堞危譙海雨昏 (잔첩위초해우혼)

허물어진 치첩과 높은 초루는 비에 젖어 밤을 맞네

 

窃想堂堂魚節制 (절상당당어절제 )

당당했던 어재연 절제사를 생각하노니

 

弟兄同日作忠魂 (제형동일작충혼)

형제가 같은 날에 충성 영혼 되셨네

 

불은면 넙성리 광성 마을이다.
불은면(佛恩面) 255 황상 신미년(1871) 4월에 서양의 오랑캐가 강화를 침입하였을 때에

병사(兵使) 어재연(魚在淵)이 강화부의 중군(中軍)으로서 광성보를 지키며 힘써 전투하다가 죽었다.

그의 동생 어재순(魚在洵[淳]) 도 마침 군중에 와 있었는데 동시에 순절하였다.

 

 

 

 

 

 

 

 

 

 

※ 신미양요가 일어난 원인은

1866년 대원군의 쇄국정책당시 미국상선 제너널셔먼호가 통상을 목적으로 평양 대동강으로 들어왔다가 좌초되자

배에 타고 있던 선원들과 배를 모두 불태워 버린 일이 있었는데 바로 이 셔먼호 사건을 트집삼아

그로부터 5년 후인 1871년 음력 4월 24일 미국의 무력적 침공이 감행되었다.

 

 그 당시 미국은 남북전쟁이 막 끝났던 때로 로저스제독이 지휘하는 아세아함대 5척에 1,232명의 병력이 강화전적지 중의 한곳인 초지진으로 침공해 들어왔다.

 이때 진무중군이었던 어재연 장군과 아우 어재순 형제를 필두로 약 3백50여명의 조선수비군이 미군을 맞아 싸우게 됐는데

무기나 병력수에서 우리 조선측이 형편없이 열세했기 때문에 그 전투는 조선군의 패배로 돌아가고 말았던 것이다. 

 

그날 빼앗긴 '수(帥)'자 旗는 미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그들의 노획물로써 보존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대여형식으로 국내로 반입되었다.

그 당시 우리 350여명의 수비군들은 총과 칼이 부러지면 흙과 맨주먹으로 백병전을 전개하며 한사람도 후퇴하지 않고 끝까지 용전분투하다 전원 전사 했다.

 

광성보 용두돈대 >>> https://koreasan.tistory.com/15606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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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족불욕(知足不辱)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지지불태(知止不殆)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가이장구(可以長久) 오래도록 편안할 것이다.  - 노자 도덕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