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초지진 초지돈대
강화 해양관방유적 5진 7보 53돈대 둘러보기 출발!
강화도 53개 돈대 둘러보기 클릭 >>> 강화돈대 둘러보기
강화도는 겹겹이 항쟁의 역사로 점철된 땅이다.
바다를 통해 서울로 입성할 수 있는 지정학적 요충지로 외세의 침략을 가장 먼저 받은곳이다.
또한 육지와 섬 사이에 강처럼 흐르는 바다 '염하(鹽河)'라는 천혜의 자연방어선과 드넓은 농토가 있었기에 전란의 시대에는 늘 피난지 역할을 도맡아 했다.
지금으로부터 약 800년전인 1232년 고려왕조는 수도 개경(개성)을 떠나 강화로 수도를 옮기는 '강화천도'를 단행한다.
고려가 강화도로 천도한 것은 기마병 위주의 몽골군이 해전에 약하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강화도는 물살이 빠른 염하와 갯벌, 겨울철 유빙 등으로 몽골군이 들어오기에 쉽지 않은 조건이었다.
몽골과의 항쟁에서부터 조선시대 신미양요에 이르기까지 굳굳하게 국난극복의 의지가 서려있는 강화를 다시금 돌아보련다
천천히 꾸준하게 모두 돌아 볼것이다.
▲ 강화 12진·보 53돈대 숨은 보물찾기 지도
초지진 초지돈대부터 반시계방향으로 돌아서 장자평 돈대까지 53개소 돈대 탐방
※ 돈대의 주소를 참고하셔서 정확성을 기하시기 바랍니다 -한국의산천
강화도
선명한 항쟁의 역사. 호국안보 요충지, 보석같은 자연이 공존하는 섬
강화도 초지진은 조선시대 강화 해안을 경계하던 부대인 12진보 53돈대 중 한 곳이다.
강화도는 서울의 지근거리에 있어 언제든 들러볼 수 있는 섬이다.
그렇다고 해서 강화라는 섬의 역사적 가치나 볼거리의 무게가 가벼운 것은 아니다.
고인돌부터 시작해 고려의 항몽 유적지, 개화기 외세와의 항쟁 역사가 깃든 여러 진지까지 강화라는 섬 전체는 역사의 현장이다.
강화도에서는 땅만 파면 유물이 나오니 강화의 역사적 가치는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다.
초지진. 조선시대 강화의 해안경계부대인 12진보 중 한 곳이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사들의 말발굽에 짓밟혔던 교훈에 따라 한양으로 향하는 목줄인 강화의 진지들이 보강된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임진왜란과 병조호란 두 번에 걸쳐 쓰라림을 당한 조선 왕조는 한양 방어를 위해 경기도를 비롯한 서해안의 진(鎭)들을 강화로 집중시켰다.
초지진도 그 같은 와중에 안산에서 옮겨온 진지다.
▲ 국가가 존재하는 한 국방을 튼튼하게 해야한다. 그것이 전쟁을 방지하고 평화를 유지하는 길이다
운요호(운양호)사건 상세보기 >>> https://koreasan.tistory.com/15606781
▲ 53개 돈대 둘러보기
초지진 초지돈대부터 출발하여 반시계 방향으로 강화도 한바퀴 돌기
▲ 김포에서 초지대교를 넘어서 초지진으로 이동
화남 고재형(華南 高在亨, 1846~1916) 선생의 심도기행(沁都紀行)
진보돈대 (鎭堡墩堡)
- 화남 고재형(華南 高在亨, 1846~1916)
百里封彊地勢雄 (백리봉강지세웅)
백리 강도는 지세가 웅장하고
山靑水白四環中 (산청수백사환중)
푸른 산 맑은 물이 사방에 둘러 있네
十三鎭與諸墩堡(십삼진여제돈보)
열세개의 진보와 수많은 돈대는
制勝當年凜凜風 (제승당년늠늠풍)
승리하던 당시의 늠름한 풍모네
수도권에서 가깝고 접근성이 좋은 섬 강화도
그렇기에 주말에는 많은 차량으로 다소 정체가 심하지만 그래도 좋은 곳
우리나라에서 4번째로 큰 섬인 강화도는 노천박물관이라고 불릴 정도로 유적지가 많으며
자연경관이 빼어나고 볼거리와 먹을거리 많기에 많은 사람들이 자주 찾는곳이다.
서울에서 52.8㎞ 떨어진 경기만에 위치한 우리나라에서 5번째로 큰 섬이다
강화도는 410.3㎢ 면적에 유인도 11개, 무인도 189개 등 크고 작은 섬으로 이루어졌으며
전원지역으로 자연경관이 수려한 강화는 단군성조의 개국과 그 역사를 같이하며 구한말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 애환과 개국의 얼이 살아 숨 쉬는 역사의 고장인 동시에 조국수호와 국난극복의 현장이다.
고려시대이래 국토방위의 요충지로 전란이 있을 때마다 정부의 피난처로써 중요한 역할을 다했던 강화는
전지역에 걸쳐 우리 민족 가슴 아픈 역사를 고스란히 지닌 곳이다.
개국의 얼이 깃든 마니산 참성단,청동기시대의 유물인 고인돌, 몽고항쟁 39년간 호국의 요람인 고려궁지,
우리 민족의 국난극복의 전란지로서 역사적의미가 서려 있는 전적지 등
호국혼이 살아 숨쉬는 유적이 도처에 산재되어있는 드넓은 지붕없는 역사와 자연사 박물관이다.
▲ 초지진
초지진 ~갑곶돈대~ 초지진 왕복하기
강화도 나들길 2코스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전략적 요충지로써 해안가 철조망은 남북대립의 상징물이며
5진7보54돈대의 옛 군사적 방위시설을 잇는 국방유적인 호국 돈대길.
이 코스는 몇번 달렸던 길이지만
오늘은 라이딩과 더불어 돈대에 입장하여 직접 답사하기로 했다
외침의 역사가 스민 53돈대
그길이 질기고 멀어도
전 구간을 천천히 그러나 꾸준하게 찾아서 돌아 볼것이다
▲ 강화도 5진 7보 53돈대 지도 ⓒ 2019 한국의산천
천천히 오랜시간에 걸쳐서 강화도 돈대 53개 위치를 찾아 다시 기입하였다
자료를 찾다 보니 건립된 돈대의 숫자도 다르고 위치도 다르고
이름이 바뀐 경우도 있어서 혼란스러웠으나 최대한 많은 자료를 통하여 정리하였다
흔적이 희미한 곳도 있고 어명을 받아 폐쇄된 곳도 있고 흔적조차 사라진곳도 있지만
위치를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 지도상에 모두 기록으로 남겼다.
아직 완전하게 정립된 자료는 아니므로 오기가 있는곳은 추후 수정 보완 할 것이다
진이 규모가 크며 돈대는 보에 속해있는 작은 규모이다.
1.강화 5진
1)월곶진 : 강화5진의 하나. 강화읍 월곶리.
2)제물진 : 강화5진의 하나. 강화읍 갑곶리.
3)용진진 : 강화5진의 하나. 선원면 연리. 향토유적 제8호.
4)덕진진 : 강화5진의 하나. 불은면 덕성리. 사적 제226호.
5)초지진 : 강화5진의 하나. 길상면 초지리. 사적 제225호.
2.강화 7보
1)광성보 : 불은면 덕성리에 있는 강화7보의 하나. 사적 제227호.
2)선두보 : 강화7보의 하나. 길상면 선두리.
3)장곶보 : 강화7보의 하나. 화도면 장화리.
4)정포보 : 강화7보의 하나. 내가면 외포리.
5)인화보 : 강화7보의 하나. 양사면 인화리.
6)철곶보 : 강화7보의 하나. 양사면 철산리.
7)승천보 : 강화7보의 하나. 송해면 당산리.
3.강화 53돈대 (가나다 순) ※ 용두돈대 제외
가리산돈대, 갈곶돈대, 갑곶돈대, 건평돈대, 검암돈대,
계룡돈대, 광성돈대, 광암돈대, 굴암돈대, 귀등돈대,
낙성돈대, 덕진돈대, 동검북돈대, 망양돈대, 망월돈대,
망해돈대, 무태돈대, 미곶돈대, 북일곶돈대, 분오리돈대,
불장돈대, 빙현돈대, 삼암돈대, 석각돈대, 석우돈대,
섬암돈대, 소우돈대, 손돌목돈대, 송강돈대, 송곶돈대,
숙룡돈대, 양암돈대, 염주돈대, 오두돈대, 옥창돈대,
용당돈대, 월곶돈대, 의두돈대, 인화돈대, 작성돈대,
장곶돈대, 장자평돈대, 적북돈대, 제승돈대, 좌강돈대,
천진돈대, 철북돈대, 초지돈대, 초루돈대, 택지돈대,
화도돈대, 후애돈대, 휴암돈대 - 이상 53개소.
정리 : 한국의산천
돈대는 총 53개 중에서 2개가 폐지되고 현재 51개가 남아있다.
양암돈(陽巖墩)과 갈곶돈(葛串墩)은 1718년에 임금에게 보고하여 폐지되었다
강화에 남아있는
5진 7보 53돈대 둘러보기 출발.
돈대(墩臺)
본래는 평지보다 높직하게 두드러진 평평한 땅이란 뜻인데 해안가나 접경 지역에 쌓은 요새로 소규모 관측·방어시설을 말한다.
전망이 좋은 곳에 위치하며 병사들이 돈대 안에서 경계근무를 서며 외적의 척후 활동을 비롯한 각종 수상한 정황을 살피고 적이 침략할 때는 돈대 안에 비치된 무기로 방어전을 펼치던 장소이다.
돈대는 10~20명 정도의 지금으로 말하면 분대~소대병력이 주둔하는 초소급이 주둔하던 곳으로 지금은 대부분 훼손되고 일부는 복원된 상태이다
진과보 아래에는 돈대가 소속돼 있다
돈대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보기로 한다
돈대란 외적의 침입이나 척후활동을 사전에 관찰하고 대비할 목적으로 접경지역 또는 해안지역에 흙이나 돌로 쌓은 소규모의 방어 시설물을 말한다. 현재까지 돈대가 알려진 곳은 강화 54개 돈대를 제외하면 파주의 장산진 8개돈대. 연천의 강서리 돈대, 남한산성의 2개 돈대 등이다.
우리나라에서 돈대를 축조, 활용시기의 기원과 설치 목적 등을 소급하기란 매우 어렵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기록을 살펴볼 때, 돈대는 외적의 침략이 예상되는 지역에 설치하고 봉수의 역할도 겸하면서 그들의 동태를 예의 주시하여 도발행위를 사전에 차단하려는 목적하에서 설치, 운영된 것으로 보인다. 강화는 유사시 보장지로서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양란을 거치면서 조정에서는 강화 관방책에 대하여 매우 활발하게 의논하였다. 외성에 대한 증축과 개축문제와 아울러 강화 전해안을 하나의 방위체제하에 운영하고자 돈대 설치, 운영을 시행하게 되었다.
돈대 축조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는 1676년(숙종 5)에 병조판서 김석조에 의해서였다. 그는 월곶진을 기점으로 시계방향으로 돌면서 강화 전 해안에 대한 지형적 특성과 군사적 요해처 등을 관찰하고서 돈대 설치계획을 숙종에게 전했다. 그는 단순히 돈대의 축조만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돈대 축조시 갖추어야 할 시설에 대해서도 함께 건의하였다.
돈대는 주로 해안 돌출부를 따라 배치되어 있다. 동쪽으로는 염하를 따라 초지돈에서 적북돈까지 약 1km 간격으로 18개 돈대가 설치되어 있다. 북쪽으로는 한강구와 조강을 따라 낙성돈에서 광암돈까지 약 1km 간격으로 13개 돈대가 설치되어 있다.
서쪽으로는 서해를 따라 인화돈에서 북일곶돈까지 약 2km 간격으로 13개 돈대가 설치되어 있다. 남쪽으로는 인천방향으로 미곶돈에서 장자평돈까지 약 1.7km 간격으로 10개 돈대가 설치되어 있다. 여기에서 거리는 도상의 직선거리를 말한다. 이와 같이 염하와 한강구지역에 외성도 구축하고(적북돈~초지진) 돈대를 조밀하게 설치한 이유는 김포방면에서 적의 침입을 대비함과 동시에 조운로를 보호하려는 목적의식에서 였던 듯하다. 반면에 서쪽과 남쪽으로는 거리를 두고 설치한 것은 조강과 염하에 비하여 관방상의 필요성이 상대적으로 적은 듯하다. 역사적으로는 19세기 후반 서양 세력이 염하를 통하여 침략하자 이 지역에 해안 포대를 설치하여 방어시설을 더욱 강화하였다.
이러한 돈대 중에서 능선상이라든가, 평지·산 정상 등에도 설치되어 있기도 하다. 이것은 외적 세력에 대한 방어가 목적이라기보다는 관측과 좌우 돈대와의 연락을 염두에 둔 경우이다. 능선상에 설치한 돈대는 망해돈·석각돈·선수돈 등인데, 이것은 좌우 돈대와의 관측이 가능한 돈대이다. 평지지역이면서 수로 측면에 배치된 돈대는 낙성돈과 망월돈 등인데, 이것은 수로를 따라 기습해 오는 외적을 방어할 목적에서 설치하였다. 정상에 설치한 돈대는 동검북돈 등인데, 이것은 침입을 사전에 관측하여 기타 돈대에 연락해 주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 출처 강화로 닷컴
▲ 강화해협 염하의 길목에서 한양을 지키던 조선의 군사기지 강화 초지진과 초지돈대
아픈 역사로 점철된 역사의 현장 초지진과 초지돈대
초지진(江華 草芝鎭 : 사적 제225호)
지 정 일 1971.12.28
위치 :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 624번지 일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외침을 받은 이후 국방을 튼튼히 하기 위해 효종 7년(1656) 당초 안산(安山)의 초지량영을 이곳으로 옮긴 뒤 '진'으로 승격되었다.
진에는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 1명, 군관 11명, 사병 98명, 돈군(墩軍) 18명, 목자(牧子) 210명 등이 진선 3척과 함께 배속되었다.
초지진은 강화도 동쪽 해안의 초지돈(草芝墩)·장자평돈(長子坪墩)·섬암돈(蟾巖墩) 등 3돈과 황남포대·진남포대 등을 관할하였다.
각각의 돈대에는 포좌(砲座) 3개와 대완구(大碗口) 등의 화약병기와 각종 무구류가 있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함대와 싸웠으며 고종 8년(1871) 신미양요(辛未洋擾) 때에는 미국의 아시아함대가 침입하여 필사의 방어전을 전개하다가 함락되었다.
당시 콜로라도호(Colorado號)의 함포사격 등 미군 공격에 의해 초지진은 진내에 있던 군기고·화약고·진사(鎭舍) 등의 군사시설이 모두 파괴되었으며
포대에 남아 있던 40여 문의 대포도 파괴되거나 강화해협에 버려졌다. 신미양요 이후 다시 복구 되었다.
그후 고종 12년(1875) 8월에는 조선을 개항시키기 위해 일본이 파견한 운요호(雲揚號)가
동남방 난지도(蘭芝島) 부근에 정박하고 함정 한척은 먹는 물을 찾는 다는 구실로 초지진에 접근하였다.
병인, 신미양요때 쓰라린 고초를 겪었던 초지포대는 운요호에 대하여 포격을 가하였으나
운요호는 110미리와 40미리 함포로 보복포격을 가해 초지진의 성체와 돈대는 파괴되고 말았다.
이 사건이후 1876년 일본의 강압적인 요구에 의해 불평등조약인 강화도 수호조약으로 이어져
부산, 인천, 원산, 세 항구를 개항하게되었고 그들의 간섭과 침략이 더욱 적극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이후 초지진은 폐진되었고 돈대 등의 시설은 모두 허물어져 돈대의 터와 성의 기초만 남아 있었다.
지금도 초지진 성벽과 '초지진 소나무'에는 전투 때 포탄에 맞은 흔적이 그대로 남아 아픔을 전해준다.
민족시련의 역사적 현장이었던 이곳을 1973년 호국정신의 교육장이 되도록 성곽을 보수하여
성벽 높이 4m, 장축 100m의 타원형으로 초지진의 초지돈만 복원되었다.
현재 초지돈 내에는 3개의 포좌와 100여개의 총좌(銃座)가 시설되었으며 당시의 대포를 진열하였다.
227. 초지동(草芝洞)
息波亭下草芝城
식파정 아래에 초지성이 있는데,
半是漁鹽半是耕
절반은 어염이요 절반은 농경이라.
姜翁何年來寓此
강흥업공 어느 때에 여기 와서 살았는가,
炳然楣上一紅旌
빛나도다 문 이마의 붉은 정려문 글씨.
○ 초지동(草芝洞)은 옛날에 진관(鎭關)이 있던 곳이다. 계미년(1763)에 유수 정실(鄭宲)502)이 첨사 겸 감목관으로 승격하게 하였다.
○ 그 위에는 식파정(息波亭)이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폐지되었다.
강화도 해안가에는 1679년(숙종 5) 5월에 48돈대가 완공되었으며 그 이후 5개 돈대가 추가로 지어졌다.
48돈대는 황해도·강원도·함경도 승군 8,900명과 어영청 소속 어영군 4,262명이 80일 정도 걸려서 쌓았다.
돈대 축조를 기획하고 감독한 이는 병조판서 김석주였고 실무 총괄은 강화유수 윤이제였다.
길상면 초지리 지명소개
조선시대에 길상산의 이름을 따라 길상면이라 칭하였으며 길상산에는 양마목장(良馬牧場)이 있었고
임금께 진상하던 약쑥과 감목관청에서 향탄(香炭)을 공급하는 등 이로 인해 좋은 행운이 깃들었다는 뜻으로 길상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초지리(草芝里)
옛날에 이곳에 광활한 풀밭이 있어 초지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초지리라 하였다.
▲ 1973년에 복원된 초지돈대 ⓒ 2019 한국의산천
돈에는 3곳의 포좌와 총좌가 100여 곳 있다.
성은 높이 약 4m 정도로 타원형으로 쌓았다.
초지진은 강화해협을 남쪽에서 접근하면 제일 먼저 만나는 군사 기지이다.
초지돈대
초지돈대는 초지진에 속한 돈대로서 당초 안산에 설치되었던 초지진을 1656년(효종 7)에 이설했으며,
1665년(현종 6)에는 수장을 종4품 수군만호에서 종4품 병마만호로 교체했다.
병마만호 지휘 하에 군관 23명과 토졸 68명이 배속되어 있었다.
운요호 사건 (운양호) 상세보기 >>> https://koreasan.tistory.com/15606781
지족불욕(知足不辱)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지지불태(知止不殆)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가이장구(可以長久) 오래도록 편안할 것이다. - 노자 도덕경에서
'강화53돈대탐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섬암돈대,택지돈대,후애돈대,양암돈대, 갈곶돈대 탐방 (0) | 2019.04.27 |
---|---|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 (0) | 2019.04.20 |
강화 덕진진 덕진돈대 남장포대 해문방수비 (0) | 2019.04.20 |
강화 광성보 광성돈대 (0) | 2019.04.20 |
강화 손석항돈대 손돌목돈대 광성포대 (0) | 2019.04.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