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 미내다리
건양대학교 논산캠퍼스에 업무를 보고
가까운 강경에 있는 미내다리를 둘러보고 왔다
오래전 열정적으로 전국을 그리고 이곳을 답사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
연무IC에서 나와서 강경대교를 건너는 사거리를 그냥 직진해서 논산 경찰서방향 사거리에서 공주방향 23번 국도를 따라가면 이정표가 나온다.
다리를 건너면서 바로 이정표를 따라 우회전해서 들어가면 철교 아래를 통과해서 약 1km정도 가면 주차장이 있는 미내다리가 나온다
내비검색 : 미내다리
논산에서 그리 멀리 않은 강경은 일찍부터 금강 하류에 발달한 수운의 중심지였다.
논산읍보다 먼저 읍으로 승격한 강경은 곡물과 생선 그리고 새우젓등 젓갈류등 최대규모의 공급시장이었다.
그러나 1899년 군산항이 개항되고 1905년 경부선이 개통되고 군산선과 호남선이 개통되자
금강 수운의 중심지로서 막강한 상권을 누리던 강경의 모습은 초라하게 퇴색해버렸다.
"은진(논산의 옛이름)은 강경 덕에 산다"는 말은 이제 전설이 되었다
▲ 13년전 그러니까 2005년 답사때의 풍경
▲ 홍예 머릿돌 양쪽에 용머리와 귀면을 튀어나오게 한 조각물
이는 다리를 견고하게 지키고 재앙을 막으려 설치한 염원이었을것이다.
다리의 중간 홍예 이맛돌에는 눈은 마치 장승의 눈같고, 코는 뭉툭하며, 얼굴 양옆으로 귀모양과 갈기가 있는 형태를 정확히 알 수 없는 동물의 얼굴이 조각되어 있다.
다리 옆에 있었으나 지금은 부여박물관 뜰에 옮겨져 있는 은진미교비에는 이 다리의 역사가 새겨져 있는데 비에 따르면 미내다리는 조선 영조 7년(1731)에 강경촌에 사는 석설산과 송만운 등이 재물을 추렴하여 1년 만에 완공했다고 한다.
지금은 강경이 많이 쇠락하였지만
옛말에 "은진(논산의 옛지명)은 강경 덕에 산다" 는 말이 있듯이
그 옛날 강경 지방 토호들의 재력을 능히 짐작할만한 대목이다.
▲ 아름다운 미내다리
미내다리는 둑과 나란히 놓여 있다.
미내다리는 강경천을 건너가는 다리가 아니라 강경천 옆구리에서 갈라져나온 지류를 건너기 위해 세워진 다리인 것이다.
장대석을 가지런히 쌓아 3칸의 무지개 모양를 만들고, 그 사이마다 정교하게 다듬은 돌을 가지런히 쌓아 올렸다.
이곳 논산·강경 일대에서 전해오는이야기중
죽어서 염라대왕을 만나게 되면 "너는 이승에 살 때 개태사의 가마솥, 관촉사의 미륵불, 강경의 미내다리를 보았느냐"고 묻는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승에서 이 세가지를 못보고 죽었다면 아까운 죽음이라는 뜻인가?
다리란 지역과 지역을 연결해주며 사람과 사람을 만나게 해주는 아주 중요한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연과 소금장수,방물장수들이 저 다리를 건넜을까?
▲ 아름다운 미내다리
충청남도지정 유형문화재 제11호(1973.12.24 지정)
위 치 : 논산시 채운면 삼거리 541
소 유 : 논산시
수 량 : 홍예교1기
길 이 : 30m
폭 : 2.8m
높 이 : 4.5m
재 료 : 석재
시 대 : 조선시대
논산에서 국도로 강경에 들어가기전 강경천이 나오고, 강경천의 왼편 뚝을따라 1km 쯤가면 제방안쪽으로 다리가 나타난다.
이 하천을 미내라고 부른데서 연유하여 미내다리라고도 하고, 조암교라고도 하는데 길이 30m, 다리 넓이 2.8m에 3개의 홍예로된 다리이다.
비문에 의하면 조선조 영조7년(1731) 강경사람 송만운이 주동이 되어 황산사람 유부업, 중경원 설우 청원 3인과 여산의 강명달 강지평이 재물을 모아 1년만에 전라도와 충청도를 잇는 이 다리를 축조하였는데 당시는 3남 제일의 대교였다 한다.
답사 자료 준비
- 논산시지 권 2 역사와 문화유적 중에서 / 논산시지편찬위원회
강경읍은 우리나라 근대사의 흔적을 가장 많이 갖고 있는 도시 중의 하나이다.
이 강경에 다시금 관심을 갖는 이유는 한 도시의 성장과 정체가 우리 인간사와 다름없기 때문이다.
이 도시를 ‘역사도시’로 이름 붙이고 되살리기 운동을 하는 이유는 그 생명을 후대에까지 이어주고 싶기 때문이다.
‘새것만 좋다’는 인식은 오늘도 이 도시를 파괴하고 있다. 건축물들이 모두 사라질 위기에 놓여 있다.
도시와 건축은 ‘여인네가 가꾸듯’ 관리 보수되지 않으면 무한할 수 없는 것이다.
강경의 근대
오랜전부터 강경은 포구로 유명해 강경포(江景浦)라 불려졌다.
우리나라에는 2대 포구가 있는데, 제1인 원산이요, 그 다음이 강경이라 할 정도였다.
군산,강경,부여,공주의 배들을 한줄기로 연결하던 금강 뱃길의 중심에 강경이 있었다.
공주에서 강경 방면으로 출하되던 곡물들도 이 뱃길을 이용하였다.
이에 따라 채운산의 옥녀봉을 중심으로 생활을 영위하던 상인과 농어민,
그리고 각지에서 몰려든 객주(客主)들은 강경포구를 중심으로 성황을 이루었으며,
조깃배가 들어오는 날은 더했다.
조선 중기 무렵만 해도 제주에서 미역, 고구마,좁쌀 등을 실은 배들과
비단, 소금 등을 실은 중국의 무역선들이 장사를 하기 위해 드나들었다.
일본 대마도, 나가사키에서 온 배들도 기웃거렸다.
강경장은 17세기 말경, 강경천 주변으로 하시장(下市場)이 개설되어 4일과 9일에 장이 열리다가
1870년 경, 옥녀봉 동쪽 기슭에 상시장(上市場)이 열리면서 하시장이 4일, 하시장이 9일에 각각 열렸고,
하시장에서는 주로 수산물이, 상시장에서는 곡물 등의 농산물이 주된 거래품목이었다.
강경의 상시장 개장 이후, 본격적인 상업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하여
조선후기, 강경시장은 대구시장, 평양시장과 함게 우리나라 3대 시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특히, 포구를 중심으로 도시화 현상이 일어났는데,
새우젓 가게, 정미소, 술집, 요정, 극장들이 들어서 풍물거리가 넘쳐났다.
1899년 군산이 개항되면서 새로운 상도로 발전해 가던 강경은 군산과 역할을 나누면서
아래로는 군산으로, 위로는 부여, 공주, 부강 등으로 가는 뱃길을 이엇으며,
이러한 강경과 군산의 관계는 마치 인천과 한양의 양상과도 같았다.
그러나 1905년에 경부선이, 1914년에 호남선이 열리면서 강경은 번성과 쇠락의 기운을 함게 맞는다.
1911년 7월 11일 호남선의 대전-강경 구간이 먼저 개통되었고, 강경역이 세워졌다.
강경역 주변은 새로운 중심가로 태어났다. 포구와 역은 역할이 서로 달랐다.
포구는 기존 재래시장의 중심 역할을, 역 주변은 이른바 근대화의 출발점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 강경역은 한국전쟁때 소실되었으며, 1987년 9월 28일에 새 역사가 준공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12년에는 강경에서 이리를 경유, 군산으로 이어지는 구간이 개통되었다.
그리고 2년 뒤인 1914년 1월 11일에는 목포를 기착지로 하는 나머지 구간도 모두 개통되었다.
금강의 뱃길은 이제 철도와 경쟁할 처지가 못 되었다.
그러나 강경은 금강 뱃길과 철도 양면에서 군산항과 결합될 수 있었기에 얼마 동안은 기존 시장의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잇었다.
더구나 1911년에는 공주와 논산을 경유하는 경성-전주-목포간 큰 도로가 개통되면서 도로, 철로, 뱃길 등 삼박자가 모두 갖춰졌다.
충청도와 내륙지방의 쌀과 면화는 뱃길과 철길을 통해서 신속히 일본으로 실려 나갔다.
강경이 일제의 농어물 수탈 전진기지로 탈바꿈된 것이다.
게다가 1914년에는 논산에, 1921년에는 대전에 각각 기존 행정권과 은행권을 빼앗기면서 서서히 쇄락해 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 가운데서도 1930년 4월 1일, 강경면에서 읍으로 승격되었다.
이는 논산이 1938년 10월10일 논산읍으로 승격된 것을 보면 훨씬 더 빨랐던 것을 알 수 있다.
강경의 근대건축
부여군 세도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금강은 과거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않았던 때에는
서해안의 간만조를 이용한 내륙의 수로로서 매우 중요한 포구 역할을 하여
강경은 금강의 하안 취락으로 발달하여 자연스럽게 상업도시로 번성할 수 있었다.
강경의 근대건축물들은 190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금강의 지류인 강경천의 호안공사가 완료되면서 세워지기 시작했다.
시가지에는 상업도시 구조에 적합한 각종 상점?금융건물, 그리고 점포가 딸린 주택들이 세워졌는데,
일본인들에 의한 것이 E대부분이었다.
일본인들은 갑문 시설을 한 후부터 어업활동에 손을 대기 시작, 1935년 어업보호취체규칙을 만들어 객주들을 탄압했다.
이 규칙의 골자는 어획물은 한 곳에서만 판매토록 하고,
해상에서 고기를 다른 배에 옮겨 싣지 못한다는 것이 강경과 마산에서만 적용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어업조합을 마들어 기존 객주체계를 바꾸려고 하였다.
어획물을 위판장에서 거래토록 한 것은 객주들로 하여금 어업조합에 소속되거나 어협의 허가를 얻도록 해서 그들의 기능을 약화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이 같은 일제의 조치는 조합에 가입된 상인들의 거센 반발을 일으켜
이 규칙을 걸어 행정소송을 하고 강경의 객주들과 연결된 전국의 수산물 도매상인들에게 어업조합에서 고기를 사가지 않도록 하는 등 일제에 맞섰다.
당시 뱃사람들과 도매상들은 객주들의 지시에 따름으로 결국, 행정소송에서도 승소한 객주들이 영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강경 상인들의 저력을 알 수 있는 사례였다.
이즈음 강경천을 중심으로 서창동, 중앙동, 염창동, 홍교동 등지에 주거용 건축물,
관청 및 공공 건축물, 금융 및 상업건축물, 학교건축물 등 다수의 근대건축물들이 새롭게 건축되었다.
급속한 인구의 밀집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사회간접시설 및 문화시설의 보급을 촉진시키게 되고,
그에 따라 1920년대를 전후로 도내에서 처음으로 전기가 들어오게 되는데,
강경읍 만의 전기 공급을 위한 화력발전소가 대흥리에 1백평 규모로 세워졌으며(현 동광상회),
상하수도의 공사와 호남지방 최초의 극장인 강경극장도 이즈음 건축되었다.
중요 관공서와 은행 등도 일찍부터 강경에 자리하게 되는데,
1902년 5월 우체국 고유번호가 충남 1번인 강경 우편수취소를 시작으로
지방법원 지원(1909), 강경면사무소(1914), 강경전기회사(1920), 전주전매지국 대전출장소 강경영업소(1921),
경찰서(1922) 등이 건축되었으며, 관공서의 직급도 강경지점 군산출장소, 강경지점 대전출장소 등의 상급기관이 강경에 유치되기도 하였다.
강경의 상업 발달은 우리나라 5대 명문 상고중의 하나인 강경상업고등학교를 비롯한 교육시설의 확충에 계기가 되었다.
근대시기 강경지방의 주거지는 황산리의 전통 한옥군, 중앙리 주변의 일본인 청국인 주택군들로 뚜렷하게 구분되면서 형성되었다.
1911년 철도가 부설되면서 일본인들은 한옥군으로 형성된 기존의 채운리, 산양리 쪽으로 침점하면서 일본식 가옥을 세워 나갔고,
현재 서창리, 중앙리 일대에는 다수의 주택들이 남아있는데, 이중 점포병용인 상관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들은 당시 공관, 여관 및 주거기능이 부가된 가내공장들로 사용되었으며,
이외에 잡화점, 미곡상, 자재상, 석유, 약국 및 양품점 등과 같은 일상생활과 관련된 소규모 점포들이 다수 분포되어 있었다.
여관은 1904년 1월, 최초의 일본인이 개관한 여관을 시작으로 목조 2층 규모의 금강여관(1906)외에 하시타(橋田)여관 등이 영업을 하였다.
의료기관의 경우, 1904년 5월 일본인 의사의 개업을 시작으로 현존하고 있는 삼성병원(1927), 호남병원(1928)을 비롯하여 다수의 약방 및 약국이 성업하였다.
- 논산시지 권 2 역사와 문화유적 중에서 / 논산시지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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