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인의 땅의 歷史] 왕비, '노다지'를 팔아치웠다
박종인 여행문화 전문기자 입력 2018.11.21 03:01
[145] 운산금광 노다지가 미국에 넘어간 전말기
박종인의 땅의 歷史
왕비가 나선 금광 양도
1895년 7월 10일 조선 왕실 일등상궁이 미국 공사관 참찬 아내에게 초청장을 보냈다.
엿새 뒤 열릴 개국기원경절(開國紀元慶節) 초대장이다. 조선왕조 건국을 기념하는 날이다.
참찬 아내 이름은 프랜시스다. 참찬인 남편은 호러스(Horace) 알렌이다.
기원경절 파티는 7월 16일 예정대로 열렸다.
한 달 뒤 미국공사 존 실이 미 국무부에 전문을 보냈다.
'(7월 15일) 조선 국왕이 조선에서 매장량 최고인 운산금광 채굴권을 미국 시민에게 양여했다.
'(1895년 8월 15일 '실이 국무부에 보낸 편지' , '한미관계 1896~1905 자료집')
그 무렵 미 공사관 참찬 알렌이 일본 요코하마에 있던 본국 기업인 모스에게 편지를 썼다.
'내 친구들을 고위직에 앉히는 데 성공했다(succeeded in getting all my friends appointed to high office).
운산금광 관할을 농상공부에서 (왕이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궁내부로 옮기는 데도 성공했다.
문제가 좀 있었는데 뜻밖에 왕비가 구원을 해(the Queen came to the rescue) 계약이 이루어졌다.
'(1895년 6월 24일 'J. 모스에게 보내는 편지', 알렌문서 MF361) 계약서 서명 날짜는 7월 15일, 기원경절 하루 전날이었다.
일개 외국 서기관이 한 나라 내각을 갈아치우고 그 나라 왕비가 벌인 작업이 매장량이 아시아 최대였던 운산 금광 팔아치우기였다.
가난한 조선
1894년 농민들이 탐관오리 학정(虐政)에 저항해 군사를 일으키자 조선 정부는 청나라 군사를 불러들였다.
이에 일본군도 개입해 조선에서 청일전쟁이 벌어졌다. 혁명과 전쟁 뒷수습에 많은 돈이 들어갔다.
1895년 11월 15일 확정된 1896년도 조선 정부 세출 예산에 이런 항목이 보인다.
'을미 차관 이자(乙未借款利子)' 18만원. 1895년 3월 일본으로부터 빌린 차관 300만원에 대한 이자다.
세입 총예산은 480만9410원이었다.('고종시대사 3집', 1895년 11월 15일 건양원년도 세입세출예산표)
강원도 정선에 있는 화암광산은 일제강점기 때 이름이 천포금광이었다.
1934년 금광에서 종유굴이 발견됐지만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대한민국 시대, 광산은 종유굴 덕분에‘화암동굴’이라는 관광지로 변했다.
천포금광은 소유자가 친일파 박춘금이었다. 평북 운산금광은 광복 7년 전까지 미국인 소유였다.
매장량이 동양 최대였다.
1895년 이 노다지를 미국인에게 넘긴 사람은 민비였다. 중개인은 호러스 알렌이었다. /박종인 기자
농민혁명도 정부가 원인이었고 외국 군대를 불러들인 것도 조선 정부였다.
그 뒷수습을 위해 그 조선 정부가 비싼 외국 돈을 갖다 쓰고 있었다.
1897년도 이자 18만원은 12월 31일에야 갚을 수 있었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 12권, '을미차관 이자 및 동 서한 전달의뢰') 돈, 돈이 필요했다.
선교사, 의사, 미국 외교관 알렌
1884년 선교사로 조선에 입국한 알렌은 바로 그해 갑신정변을 계기로 왕실과 연을 맺었다.
1884년 12월 4일 서울 종로 우정국에서 왕비 민씨의 조카 민영익이 개화파 자객에게 칼을 맞았다.
이 실세(實勢)를 죽음에서 구해준 의사가 알렌이었다.
알렌은 이듬해 1월 27일 살아난 민영익으로부터 사례금 10만냥을 받고(알렌일기 1895년 1월 27일), 이어 병원 설립까지 허가를 받았다.
이 병원이 조선 최초 근대병원인 광혜원이다. 개원은 4월 10일이었다.
3월 27일 알렌은 궁궐로 들어가 고종 부부를 치료했다. 부부는 천연두 증세를 앓고 있었다.
한 달 뒤 왕비로부터 하사품이 왔다. 100야드짜리 비단 한 필과 황금빛 비단 두루마기 하나였다.
알렌은 곧 왕실 주치의 겸 고종 정치고문이 됐다.
1887년에는 정2품 참찬 벼슬을 받고 조선 사신들과 함께 미국을 다녀왔다.
그리고 3년 뒤 알렌은 주한 미합중국 공사관 서기관에 임명됐다.
조선 권력구조와 재정을 손바닥처럼 알고, 고위층과 깊은 연대를 가진 미-국-외-교-관이 되었다.
"욕심 없는 나라 미국"
알렌과 함께 미국을 다녀온 전권대사 박정양이 고종에게 보고했다.
"미국은 본래 남의 땅에 욕심이 없나이다(美國素無慾於人之土地)."(1889년 7월 24일 '고종실록')
1882년 미국과 맺은 수교조약 1조는 '타국이 유사시 중간에서 잘 조처하여 두터운 우의를 보여준다'고 규정했다.
조선 정부는 이를 철석같이 믿었다.
1897년 알렌이 주한 공사에 취임했을 때 고종이 보낸 편지에는
'미국은 조선에 큰형(Elder Brother)'이라고 돼 있었다.(1897년 9월 13일 '알렌이 국무부에 보낸 편지', '한미관계 자료집')
동양 최대 금광을 미국에 넘긴 민비의 1895년‘기원경절’초청장. /알렌 일기
엿새 뒤 국무부 장관 셔먼이 알렌에게 비밀 편지를 보냈다.
'미국은 조선 국내 문제는 물론 외부의 방위 연대도 맺고 있지 않다.
'(1897년 9월 19일 셔먼의 비밀편지, '한미관계 자료집') 최고지도자 고종부터 하위 관료까지, 조선은 순진했다.
알렌과 금광
알렌이 살려준 민영익은 현금 10만냥만 준 게 아니었다.
1885년 민영익은 알렌에게 광산 이권에 대해 언질을 줬다.(알렌문서 MF 365, 이배용, '한국근대광업침탈사연구' 재인용)
그리고 조선 정부는 알렌에게 병기창과 화약공장 특허권도 제안했다.(F 해링턴)
1888년 미국에 있던 알렌은 광산기사 피어스를 파견해 운산금광을 조사했다.
1889년에도 기사 5명이 내한했다.
조선 정부 예산으로 조선 광산 정보를 모은 사람은 조선 외교관 알렌이었고 그 금광을 미국 소유로 만든 사람은 미국 외교관 알렌이었다.
알렌의 편지
'모스씨에게. 오래도록 왕과 조선을 위해 일을 한 결과, 마침내 중요한 걸 얻었습니다.
왕께서 무보수로 일해줘서 고맙다며 선물을 하겠답니다. 그동안 저는 고위 관직을 다 제 친구들로 채웠죠.
아무도 예상 못 한 박정양이 제 덕분에 총리대신이 됐고요. 이들이 저한테 미국 차관 200만달러를 부탁했습니다.
운산금광을 넘기면 가능하다고 답했습니다.'(모스에게 보낸 편지, 알렌문서 MF361)
선교사, 의사, 美國외교관 호러스 알렌.
심지어 농광산부대신 김가진에게 '금광 관할권을 왕실 궁내부로 넘기면 왕이 좋아할 것'이라고 귀띔해 성공했다는 내용도 있었다.
그러며 알렌은 모스에게 "계약 내용이 마음에 들면 '알렌, 서울, 예스'라고 전보를 쳐달라"고 했다.
금광을 위해 정부를 조직했다는 말이다.
그때 알렌은 주한 미 공사관 서기관이었다.
알렌 문서(Allen Papers) 마이크로필름 데이터베이스화 작업을 진행 중인
건양대 알렌문서팀(연구책임자 김현숙) 연구원 김희연은
"알렌은 자기 과시욕이 강한 인물임을 감안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1901년 7월 5일 미 국무부는 알렌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다른 국가와 친하다는 이유로 한국 정부 관리를 제거하려는 시도는
미국으로서는 정당화할 수 없다.'(힐 국무부 차관보, '알렌에게 보내는 편지', '한미관계 자료집' 문서 174호) 무언가 알렌이 1901년에도 조선 정부 인사에 개입하려는 시도를 했다는 증거다.
어찌 됐든, 알렌은 조선 정부를 자기 파벌로 가득 채워 넣고 운산금광 채굴권을 따냈다.
1895년 7월 15일이다. 을미사변으로 왕비가 시해된 뒤 잠시 중단됐던 계약은
이듬해 4월 17일 정식으로 맺어졌다.
실록에는 '을미년 윤5월에 허가했다가 조금 뒤 취소하였는데
다시 허가한 것이다'라고 기록돼 있다.(1896년 4월 17일 '고종실록')
그런데, 엉터리였다.
헛물만 켠 조선 정부
계약서 '운산광약' 초안에는 '자본 가운데 25%를 궁내부를 통해 대군주에게 진상한다'고 돼 있다.
(통감부 문서 2권, '운산광산 채굴권 계약서 한국측 서명자 보고 건')
고종이 원했던 현금 200만달러가 빠진 것이다.
1899년 3월 27일 현금이 필요했던 조선 정부는 '운산금광회사'와 '조선정부 지분을 전부 매각하고 해마다 2만5000원을 받는다'고 조건을 수정했다.
1900년 1월 1일에는 일시불 1만2500달러에 채굴 기한을 25년에서 40년으로 연장했다.
또 '필요할 경우 채굴 허가 기간을 1954년 3월 27일까지 연장할 수 있다'는 조항도 넣었다.(이배용, '한국근대광업침탈사연구')
'조선이 겪고 있는 재정 곤란을 영원히 없앨 것'이라 했던 미국공사 실(Sill) 예측(1895년 8월 15일 편지)은 얼토당토않았다.
엉망진창이 된 조선
1900년 재래식으로 금을 캐고 있던 현지 주민들과 충돌이 벌어졌다.
그 주민들에게 미국 업자들이 "금광석 건드리지 마라"며 소리친 "No Touch!"가 금을 가리키는 '노다지'가 되었다.
그때 알렌이 광산회사에 편지를 보냈다.
'조선인을 적법한 채찍형(judicious whipping)으로 처벌해도 좋다.'(1900년 11월 1일 '미서브에게 보낸 편지')
청일전쟁 이후 대일(對日) 부채는 1907년 현재 1300만원이었다.(1907년 2월 21일 '대한매일신보')
1897년부터 1915년까지 18년 동안 운산금광 생산액은 약 네 배인 4956만8632원이었다.(이배용)
망국을 막기 위해 대한제국 황민들은 국채보상운동을 벌였다.
1905년 7월 29일 미국 순회사절단장 육군장관 하워드 태프트와 일본 총리대신 가쓰라 다로가 도쿄에서 밀약을 맺었다.
필리핀과 조선을 나눠 먹자는 내용이었다.
조인을 마치고 일본을 떠난 미국 사절단이 9월 19일 인천항에 도착했다.
사절단 일원인 미 대통령 루스벨트의 딸 앨리스는 황실로부터 국빈으로 성대한 환영을 받았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 25권, '한성 정계 상황보고')
1896년부터 광산을 일본에 넘긴 1938년까지 미국 측이 가져간 순익은 1500만달러였다.
알렌은 광산업자로부터 두 번에 걸쳐 사례를 받아 고향 톨레도에 투자했다.(1905년 4월 26일 '알렌이 모스에게 보낸 편지' 등, 해링턴 재인용)
역사에 만약은 없다. 있었으면 좋겠다.
[동서남북] '고종의 길'은 실패한 길이다
조선일보 이한수 문화부 차장 입력 2018.11.21 03:15
러시아공사관行 피신 길에 감상적 글귀와 연민만 가득
리더는 '결과'에 책임지는 존재… '亡國 치욕' 곱씹는 현장 돼야
이한수 문화부 차장
요즘 며칠 '고종의 길'을 걸었다.
서울 중구 덕수궁길 구세군 서울제일교회 맞은편 철문이 지난달 말부터 오전 9시(월요일 제외)에 열린다.
옛 러시아 공사관(정동공원)에 이르는 약 120m 길이 나타난다.
1896년 2월 11일 고종이 일본군 감시를 따돌리고 경복궁을 탈출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갔던 길의 일부를 복원했다.
정확한 고증은 어렵다.
구한말 미국 공사관이 만든 지도에 'King's road(왕의 길)'라 적혀 있어 근거로 삼았다 한다.
도심 산책로가 늘어난 점은 환영할 일이다.
그러나 이 길을 고종이 대한제국이라는 근대국가를 세워 일제에 저항한 상징처럼 여기는 것은 입맛이 개운치 않다.
치욕스러운 역사를 아프게 직시하지 않고 정신적으로 손쉽게 극복하려는 시도로 보이기 때문이다.
정동공원에는 '고종이 길을 떠났다. 그 길 끝에서 대한제국이 새로 시작되었다'
'근대를 향한 고종의 열정' 같은 감상적 글귀를 적은 사진 설명판을 전시하고 있다.
'고종의 길'은 현 정부가 이전 정부 정책을 적폐로 규정하지 않은 매우 드문 사례에 속한다.
전전(前前) 정부 때인 2012년 3월 입안했고, 전(前) 정부 때인 2016년 10월 공사를 시작했다.
망국의 역사를 안타깝게 여기는 연민(憐憫)은 전·현 정부가 크게 다르지 않다.
최근 종영한 인기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은 이런 정서에 불을 질렀다.
드라마는 고종을 의병에게 밀지를 내리는 등 일제 침략에 항거한 군주로 그렸다.
고종과 대한제국을 다시 평가하게 됐다는 분이 많다.
평가할 부분이 없다는 게 아니다.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1년 만인 1897년 2월 20일 덕수궁(경운궁)으로 돌아온 후 '자주독립 황제국'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토지 조사를 하는 등 그 나름대로 개혁을 추진했다.
고종은 무력한 군주가 아니었으며 일제 침략이 없었다면 대한제국은 근대화에 성공했을 것이라는 평가가 있다.
이런 해석은 우리에게 위로를 준다. 하지만 역사를 직시하는 태도인지는 의문이다.
정치 지도자의 도덕은 필부(匹夫)의 도덕과는 다르다. 정치가는 결과에 대해 혹독한 책임을 져야 한다.
의도가 좋았다 해서 책임이 면제될 수 없다.
고종이 선언한 대한제국은 8년 만에 일제 보호국이 되고, 13년 만에 식민지로 전락했다.
고종은 왕가(王家)를 황가(皇家)로 만드는 데 성공했지만 국가(國家)를 지키는 데 실패했다.
망국 이후 삶은 치욕스럽다. 메이지 덴노(天皇)는 조서를 내려 고종을 '태왕(太王)'으로, 순종을 '왕(王)'으로 삼았다.
고종과 그의 직계 후손은 일제 밑에서 왕족(王族)이 되고, 방계 후손은 공족(公族)이 되었다.
조선의 왕·공족은 일본 황족(皇族)보다 아래지만 귀족인 화족(華族)보다 높은 신분으로 대우받았다.
고종은 일제가 준 지위를 거부하지 않았다. 국가는 사라졌는데 '이왕가(李王家)'는 살아남았다.
'왕족' 고종의 책임을 묻지 않는 것은 일제가 준 '귀족' 작위를 받았다는 이유로 단죄받은 이들과 비교할 때 형평에 어긋난다.
당대 평가는 단호했다.
1919년 3·1운동 이후 성립한 임시정부는 '왕족'을 옹립하지 않았다.
3·1운동은 고종의 인산(장례)에 맞춰 일어났음에도 임시정부는 민국(民國)을 택했다.
나라 빼앗긴 군주 이름을 내건 길이 세계 어디에 또 있는지 모르겠다.
기왕 국민 세금 들여 만든 길이라면 '연민' 수준을 넘어서야 한다.
망국의 원인을 되짚으며 치욕의 역사를 기억하는 현장이어야 한다.
감상적 추억이나 정신적 승리에 도취해서는 한 걸음도 더 나아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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