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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MTB등산여행

보물 살곶이 다리 전곶교

by 한국의산천 2012. 2. 4.

보물 1738호 살곶이 다리 둘러보기 [ 2012 · 2 · 5  포근한 일요일 · 하니님 / 무사님 /  한국의산천 3명]

 

오늘 라이딩 멤버

 

▲ 왼쪽부터 무사님 /  하니님 /  한국의산천 3명 ⓒ 2012 한국의산천

신은 인간에게 자전거를 선물했고, 인간은 자전거에게 산길을 선물했다

 

▲ 오늘 함께 달린 하니님 ⓒ 2012 한국의산천

 

▲ 새로 지어진 청량리 역사인가? 지하철 입구 큰 건물벽 대형 벽걸이에 ? ⓒ 2012 한국의산천

 

▲ MTB 대단한 실력을 가진 무사님 ⓒ 2012 한국의산천  

나는 가끔 무사님 같은 분을 만나면 의욕이 사그라지고 기가 죽는다~ ㅋ그래도 나는 굳굳이 자전거를 탈것이다. 아름다운 산하를 둘러보기 위해서...

무사님 같은 그 테크닠이 부러운 일요일이었다. 반가웠습니다  

 

▲ 무사님과 함께 ⓒ 2012 한국의산천

 

▲ 오늘 라이딩 멤버 왼쪽부터 하니님 /  무사님 / 한국의산천 3명 ⓒ 2012 한국의산천

 

▲ 산다는 건? ⓒ 2012 한국의산천 

 

산다는 건 

                     -  김 인 구 

꽃잎파리 

저린 밑가슴 안고

파랗게 태어나는 벌판

눈부시다

그 꽃들의 참말 

봄밤에 폭죽처럼 흐드러지면

나무는 보이지 않게 늙어가고

사랑은 보이지 않게 깊어간다

 

▲ 살곶이 공원을 향해 우리 열심히 달렸습니다 ⓒ 2012 한국의산천

살곶이 다리 답사 후 의정부를 향해 라이딩 할 계획입니다  

 

▲ 살곶이 다리 가는 길 ⓒ 2012 한국의산천

 

▲ 달려라 하니. ⓒ 2012 한국의산천

하니님 참 달리십니다. 열정적인 그 모습이 참 보기 좋습니다

자전거타기... 나는 취미생활이라도 진지하게 임하는 그 자세를 좋아한다.   

 

▲ 한복입은 남매 동상 앞에서 하니님 ⓒ 2012 한국의산천  

 

 

▲  오늘 살곶이다리 가이드 하니님 ⓒ 2012 한국의산천

시시때때마다 고운 옷을 입고 있는 남매 동상

人間 사회 참 따듯하네 ~

 

▲ 살곶이 공원에서 ⓒ 2012 한국의산천

 

입춘이 지나고 맹추위가 잠시 주춤거리는 휴일 자전거를 타고 살곶이 다리를 찾았습니다.

문화재청에서 2011년 12월 23일자로 살곶이 다리를 사적 제160호에서 해제하고 보물 제1738호로 변경·지정했다.

 

▲ 따듯하고 예쁜 한복을 입은 남매 동상 앞에서 ⓒ 2012 한국의산천  

 

전곶교(箭串橋 : 살곶이다리)

성산대교에서 내부순환도로를 올라타서 마장 방향 강변도로로 가다보면 중랑천이 청계천과 합류하여 한강으로 접어들기 직전 사근동과 성수동을 잇고 있는 성동교 바로 위쪽에 조그마한 돌다리가 눈에 띈다. 또는 지하철 2호선을 타고 성수역과 한양대역 사이를 지나면서 동쪽으로 아래를 바라보면 하천을 가로지르는 돌다리가 보인다. 한양대학교 바로 옆에 놓여진 이 다리는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다리 가운데 가장 오래된 돌다리 전곶교로서 1967년 12월 15일에 사적 제160호로 지정되고 현재는 보물로 변경되었다. 

 

▲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다리 살곶이 다리 ⓒ 2012 한국의산천 

 

"知則爲眞愛 愛則爲眞看 看則畜之而非徒畜也" (지즉위진애 애즉위진간 간즉축지이비도축야)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에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 유한준(兪漢雋 1732 - 1811 :  조선 정조시대 문장가 ) 

  현재는 착공 당시의 다리 전체 모습을 볼 수 없으며 반 이상이 손실되어 있던 것을 1973년 서울시에서 수리 복원하였다.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다리 끝에 촘촘하게 돌이 들어서 있는 부위가 당시의 다리 모습이고 나머지는 콘크리트로 복원하였다. 일부 복원한 모습이 마치 양복저고리에 한복 합바지를 입은듯 균형미를 잃은채 전혀 어울리지 않은 모양새에 보기가 안스럽다. 

 

▲ 철강재가 발달한 요즘은 다리를 놓기가 쉽지만 그 옛날에는 이렇게 큰돌을 다듬어서 다리를 놓았다 ⓒ 2012 한국의산천

 

  이 다리의 공식적인 이름은 조선의 9대 임금인 성종에 의해 '제반교(濟磐橋)'라 이름지었으나, 조선시대에 이 다리를 중심으로 그 일대를 살곶이벌로 불러 일명 '살곶이다리'라고도 하며 한자 표기는 '전곶교(箭串橋:)'라 하였다.

 

 

살곶이 다리 (전곶교:箭串橋)는 조선시대 석교 중 가장 큰 장석판교(長石板橋)로서 서울과 한반도 동남부를 잇는 주요 교통로 왕십리와 뚝섬사이 중랑천을 가로질러 세워진 다리로 1420년(세종 2년)에 짓기 시작해 1483년(성종 14년)에 완성됐다. 

 

 

태조 이성계가 태종 이방원에게 화살을 쏘았고

그 화살이 태종이 있던 그늘막에 꽂혔다는 일화 때문에 '살곶'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살곶이 다리의 명칭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일찍이 태조 이성계가 가장 사랑하는 계비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 소생인 어린 아들 방석(芳碩), 방번(芳蕃) 형제를 무참히 죽이고 왕위를 앗은 다섯째 아들 태종 방원(芳遠)을 몹시 미워하여 함경도 함흥에 가서 은퇴하고 있었다(이 때 태종이 보낸 사신이 태조에게 죽음을 당하거나, 또는 갇혀 있다가 오랜만에 되돌아 오던 일에서 함흥차사란 말이 생겼다).

 

 

어느 날 새끼가 딸린 어미말을 끌고 가서 간청하는 박순(朴淳)의 정성에 감동되어 서울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러자 태종이 하륜(河崙)의 말을 들어 이 곳에다 햇볕을 가리기 위하여 큰 차일을 치는데 굵고 높은 기둥을 세우고 그 앞에서 태조께 뵈었다. 태조가 갑자기 활을 쏘매, 태종이 황급히 기둥을 안고 피하여 화살이 기둥에 꽂히니 태조가 웃으면서 ‘천명이로다’하였다. 또 잔을 드리는데, 하륜(河崙)의 말을 좇아 중관(中官)을 시켜 바치니 태조가 소매 속에서 철퇴를 꺼내며 ‘모두 천명이로다’하였다.

 

 

그리하여 이 곳을 ‘살곶이벌’줄여서 ‘살곶이’ 또는 한자명으로 전관평(箭串坪), 전관(箭串), 전교(箭郊)라 하였다. 또한 이 다리의 둘레는 삼백여 보나 된다. 마치 집과 같이 편안하고 평평했기 때문에 행인이 평지를 걷는 것과 같았으므로 왕이 제반교라 명명하였다.라고 하여 다리의 이름이 제반교로 지어진 유래를 설명하고 있다.

 

▲ 살곶이 다리 위에서 ⓒ 2012 한국의산천

 

참고로 이번에 새로이 보물로 지정된 곳은 아래와 같다 

▲ 정몽주 초상(보물 제1110-2호) ▲ 허전 초상(1728호) ▲ 경남 창원 성주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1729호) ▲ 경남 창녕 관룡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및 대좌(1730호) ▲ 경남 함양 법인사 감로왕도(1731호) ▲ 경남 창원 성주사 감로왕도(1732호) ▲ 부산 국청사 청동북(1733호) ▲ 경남 양산 내원사 청동북(1734호) ▲ 경남 양산 통도사 청동은입사 향완(향사발·1735호) ▲ 대방광불화엄경 진본 권53(1736호) ▲ 몽산화상 육도보설(1737호) ▲ 서울 살곶이다리(1738호) ▲ 경남 창녕 영산 석빙고(1739호) ▲ 서울 관상감 관천대(1740호) 

 

 

노상왕과 상왕, 왕의 이궁 행차가 잦아 그때마다 수행한 중신들이 살곶이들의 중랑천을 건너는 일이 여간한 고역이 아니었을 것은 추측하고도 남음이 있다. 따라서 이러한 불편의 해소를 위해 다리를 축조하게 되었고, 홍수에도 견딜 수 있으려면 목교가 아닌 석교라야만 했다.  따라서 살곶이다리를 만들어야 했던 이유중의 하나는 왕이나 상왕보다는 중신들의 희망이 더 간절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살곶이 다리 

사적지 정식 명칭 : 전곶교(箭串橋)  

보물 : 제1738호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동구 행당동 58

 

이 곳은 동쪽에서 오는 한강이 둘러 서쪽으로 흐르고, 북쪽으로 오는 중랑천이 서쪽에서 한강과 합하는 중간에 위치한 뚝섬으로 가는 길목이다. 평야로 되어 풀과 버들이 무성하므로 조선 초기부터 나라의 말을 먹이는 목장이 되고 또는 군대의 열무장(閱武場)이 되었던 곳이다. 

 

 

▲ 조선시대의 살곶이 다리 풍경 ⓒ 2012 한국의산천 

 

 이 '살곶이다리'는 조선시대 교량으로는 최장인 길이 76m, 폭 6m로 당시 한양과 동남 지방을 연결하는 주요 통로로 도성내의 금천교, 수표교와 함께 유명하다. 물론 동남방으로 가려면 한강진에서 말죽거리로 가는 통로로 있으나 세 곳으로 연결되는 살곶이다리가 특히 유명하였다. 흥인문이나 광희문을 나가 살곶이다리를 건너면, 동쪽으로 광장동에서 강원도 강릉으로 뻗친 길이 있고, 동남쪽으로는 송파에서 광주 · 이천을 거쳐 충주로 나가는 길이었다. 그리고 남쪽으로는 성수동 한강변에 이르는데 여기서 배로 나루를 건너면 삼성동에 있는 성종과 중종의 능인 선릉(宣陵) · 정릉(靖陵)에 통할 수 있고 또 봉은사(奉恩寺)에도 통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살곶이다리는 교통상 세 갈래의 중요한 출발점이 되기 때문에 도성 외의 교량 중 가장 중요한 교량의 하나였던 것이다.

 

▲ 위 다리의 교각이 촘촘한 왼쪽 부분이 살곶이 다리의 원형부분입니다 ⓒ 2012 한국의산천

 

세종실록에 “상왕과 노상왕(정종)이 동교(東郊)에서 매를 풀어 사냥하는 것을 구경했는데 왕도 함께 갔었다. 마침내 대산 신궁(新宮)에서 주연을 베풀고 어두워서 환궁하다” 라는 기록이 있는 것을 비롯하여, 세종 2년 정월까지의 일년 동안에만 상왕이 이궁에 행차할 때 왕이 함께 갔거나 상왕은 미리 가 있는데 왕이 이른 아침에 이궁에 행차했다가 저녁에 돌아온 기록이 30여회에 이른다.

   이와 같이 노상왕과 상왕, 왕의 이궁 행차가 잦아 그때마다 수행한 중신들이 살곶이들의 중랑천을 건너는 일이 여간한 고역이 아니었을 것은 추측하고도 남음이 있다. 따라서 이러한 불편의 해소를 위해 다리를 축조하게 되었고, 홍수에도 견딜 수 있으려면 목교가 아닌 석교라야만 했다.

 

▲ 다리 아래에서 파란 하늘의 조각이 보이는 아름다운 다리 살곶이 상판 ⓒ 2012 한국의산천

 

그리하여 세종 2년(1420) 5월 6일에 영의정 류정현(柳廷顯)과 박자청(朴子靑)으로 하여금 다리 축조공사를 직접 관리감독하도록 하여 교량공사가 착공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토목과 운반 기술상의 어려움과 시기가 삼복 더위였고 장마도 오기 전에 마쳐야 한다는 시기성도 있어, 교량의 기초공사만 끝내고 가을과 겨울철을 기다려서 하기로 하고 5월 25일 착공 20여일만에 공사를 중단하였다. 이렇게 중단된 살곶이다리는 50여 년이 지나도록 완성되지 않았다. 그것은 상왕인 태종이 세종 4년에 죽은 뒤로 이궁행차가 거의 없어졌고, 세종 3∼4년 이후로 도성 안 개천 축석공사 때문에 이미 역사(役事)의 고역(苦役)을 알고 있던지라 도성 외 교량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후 성종 14년(1483)에 이르러 당시의 지식인이었던 한 승려가 방법을 고안하고 지휘 감독하여 1만개의 돌을 날라 300여보에 달하는 긴 다리를 놓는데 성공하였다. 이를 보고 받은 왕은 이를 높이 치하하고 옥우(屋宇)와 같이 평평하여 마치 평지를 걷는 것과 같다 하여 제반교라는 이름을 하사했던 것이다. 이때가 성종 14년(1483)이었다.

 

다리의 길이는 <용재총화>에는 300여보라고 했으나 <경성부사(京城府史>에는 살곶이다리를 실측한 결과 다리의 폭이 20척(6m), 길이가 258척(78m)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다리는 당시 교통로의 요충지로서 서울의 동남방 세 갈래로 통하는 길목 역활을 하였다. 첫째는 광장동 즉 광나루의 광장교로서 강원도 강릉으로 통하는 길이고, 둘째는 살곶이다리에서 동남쪽으로 현재 신천동과 잠실동이 있는 하중도(河中島)를 건너서 광주군의 송파로 가는 길이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삼전도의 나루터를 지나게 되는 것이다.

이 길은 태종과 태종의 왕비 원경왕후릉인 헌릉(獻陵)이 있는 광주군 대왕면 내곡리와 그 곳에 있는 제23대 순조와 순원왕후릉인 인릉으로 통하는 길이다. 그리고 셋째는 거의 정남으로 성수동의 한강변에 이르는 길이다. 이 곳에서 나룻배를 타고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제9대 성종의 선릉(宣陵)과 봉은사로 통하기 때문에 국왕의 배릉(拜陵)의 길이요, 또한 이궁 왕래로서 살곶이다리는 더욱 필요하였다.

 

 

이 석교는 네모의 돌기둥으로 된 교각과 그 위에 횡량(橫樑)을 놓고 다시 종량(縱樑)을 걸어 교판석(橋板石)을 깔아 만든 것이다. 다리형태가 종횡으로 곡면을 이루어 잘 조화되어 있고 면밀하게 구축되어 있으며 각 부의 석재가 장대하고 질박하여 호쾌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고종 때 경복궁의 중건(1865∼1868)을 위해 이 살곶이다리 일부를 헐어다가 석재로 썼기 때문에 이 다리의 일부가 손실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확인할 수는 없다. 어쨌던 그 후에도 일부 손실된 채로 이 다리는 행당동과 뚝섬 광나루를 연결하는 교량으로 또 서울에서 동남으로 나가는 주요한 교통로로 계속 이용되어 왔다. 그러나 늘어나는 교통량에 대처하고 장마와 홍수에도 사용할 수 있는 성동교가 가설(1938. 5)됨과 동시에 이 살곶이다리는 그 사용가치를 완전히 잃은 채 방치 상태로 있었다.


최근에 이르러 이 다리는 사적 제160호(1967. 12. 15)로 지정되었고, 그 후 2011년 12월 23일자로 살곶이 다리를 사적 제160호에서 해제하고 보물 제1738호로 변경ㆍ지정했다

1973년 서울시가 무너진 다리를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하였다. 그러나 이 때 하천의 폭이 넓어져서 별개의 콘크리트 교량(길이 27m 정도)을 한 중간에 연장 증설하여 이제는 사용가치 뿐만 아니라 균형미마저 잃은 지 오래이다.

 

▲ 1926년 6월 10일 살곶이 다리를 지나는 조선의 마지막 임금 순종의 장례식 대여 ⓒ 2012 한국의산천

 

 1907년 10월12일, 이날 아침 서울의 종로거리에는 이른 시각부터 화려하고 장엄한 행렬이 길게 이어졌다. 헤이그 밀사 사건의 여파로 고종 황제가 퇴위하고 새로 막 등극한 순종 황제가 한·일 경찰과 일본 기병대를 앞세우고 명성황후가 묻힌 청량리 홍릉(洪陵)으로 능행을 나서는 길이었다. 보신각 앞쪽에는 이미 사범학교, 외국어학교, 고등학교, 보통학교 등 서울 시내 관·사립학교에서 총출동한 교원과 생도들이 가지런히 배열해 황제의 행차를 기다리고 있었고, 길옆의 민가와 점포들은 국기를 높이 달아 황제에게 경의를 표시했다. 당시 고종과 순종의 행차 모습은 기우는 국운만큼 사뭇 달랐다. 

 그 시절의 관보(官報)에 수록된 황제의 행로와 일정을 살펴보면, 순종 황제가 덕수궁 대한문을 나선 때는 아침 8시였다. 지금의 광화문 네거리에 해당하는 황토현 신교에서 길을 꺾어 종로로 접어들고 동대문을 지나 청량리 홍릉에 당도해 이곳에서 행례를 한 것이 두 시간 남짓 후였다. 돌아오는 길에는 용두동에서 길을 바꿔 살곶이다리 너머 유릉(裕陵)을 살펴보고 다시 행차로를 거슬러 저녁 6시에 덕수궁으로 되돌아왔다.

 

참고 : 홍유릉 둘러보기 클릭 >>> http://blog.daum.net/koreasan/15605276

 

▲ 살곶이 다리 답사 후 의정부를 향하여 고고씽 ~  ⓒ 2012 한국의산천

 

▲ 포근한 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앞서가는 무사님 그리고 하니님 ⓒ 2012 한국의산천

 

 

 

 

 

 

▲ 무사님이 안내한 부대찌게의 명장이 계시는 의정부 - 오뎅식당- 에서

 

 

 

▲ 오늘 여행 3차中에서 2차 지점에서 ⓒ 2012 한국의산천 

 

 

▲ 의정부 중심부에서 한컷 ⓒ 2012 한국의산천

 

▲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 왼쪽부터 무사님 하니님 그리고 한국의산천  - 의정부역사에서 - 2012한국의산천

 

내가 사랑하는 사람

                                         - 정 호 승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그루 나무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맑고 눈이 부신다

나무 그늘에 앉아

나무잎 사이로 빤짝이는 햇살을 바라 보면

세상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방울 눈물이된 사람을 사랑한다

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기쁨이 아니다

세상도 눈물없이는 사랑이 어디 있을까

나무 그늘에 앉아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의 모습은

그 얼마나 고요한 아름다움인가

  

▲ 너무 늦었기에 의정부에서 국철을 타고 점프 ⓒ 2012 한국의산천

하니님과 무사님 오늘 함께 달려서 즐거웠습니다. 따듯한 봄날에 또 뵙지요

 

 

▲ 지하철 입구 큰 건물벽 대형 벽걸이에 하니님 사진이 ? ⓒ 2012 한국의산천 

▲ 묵묵히 잘 달려준 고마운 애마 ⓒ 2012 한국의산천

땅 위의 모든 길을 다 갈 수 없고 땅 위의 모든 산맥을 다 넘을 수 없다 해도, 살아서 몸으로 바퀴를 굴려 나아가는 일은 복되다.

 

낡은 자전거

                              - 안 도 현

 

너무 오랫동안 타고 다녀서
핸들이며 몸체며 페달이 온통 녹슨 내 자전거
혼자 힘으로는 땅에 버티고 설 수가 없어
담벽에 기대어 서 있구나
얼마나 많은 길을 바퀴에 감고 다녔느냐
눈 감고도 찾아갈 수 있는 길을 많이 알수록
삶은 여위어가는 것인가, 나는 생각한다

자전거야
자전거야
왼쪽과 오른쪽으로 세상을 나누며
명쾌하게 달리던 시절을 원망만 해서 쓰겠느냐
왼쪽과 오른쪽 균형을 잘 잡았기에
우리는 오늘, 여기까지, 이만큼이라도,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