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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MTB등산여행

연산군 금표비

by 한국의산천 2012. 2. 10.

[역사] 연산군 금표비 [2012 · 2 · 10 · 금요일 · 한국의산천 ]

업무차 원주에서 일을 본 후  영동~ 중부~ 외곽순환도로를 지나서 파주 거래처에 들리면서 최영장군묘와 연산군의 금표비를 지났다.

 

양묘회신(良苗懷新)! 새싹에 새 기운이 가득하다. "가난이야 족히 근심할 것이 못 된다. 가슴 속에 도를 지니지 못한 것이 부끄러울 뿐." 스승의 가르침을 되새기며 큰 숨을 들이쉬면 알지 못할 생기가 가슴에 가득하다.

 

오늘 나의 행적 

 

▲업무차 원주로 가는 길에 고속도로 옆에 보이는 봄이 오는 산 ⓒ 2012 한국의산천 

 

 

[정민의 世說新語]  양묘회신(良苗懷新)
                           -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도연명의 '계묘년 초봄 옛 집을 그리며(癸卯歲始春懷古田舍)'란 시는 이렇다. "스승께서 가르침 남기셨으니, 도를 근심할 뿐 가난은 근심 말라 하셨네. 우러러도 아마득해 못 미치지만, 뜻만은 늘 부지런히 하려 한다네. 쟁기 잡고 시절 일을 즐거워하며, 환한 낯으로 농부들을 권면하누나. 너른 들엔 먼 바람이 엇갈려 불고, 좋은 싹은 새 기운을 머금었구나. 한해의 소출은 가늠 못해도, 일마다 즐거움이 많기도 하다. 밭 갈고 씨 뿌리다 이따금 쉬나, 길 가던 이 나루터를 묻지를 않네. 저물어 서로 함께 돌아와서는, 술 마시며 이웃을 위로하누나. 길게 읊조리며 사립 닫으니, 애오라지 밭두둑의 백성 되리라. (先師有遺訓, 憂道不憂貧. 瞻望邈難逮, 轉欲志長勤. 秉耒歡時務, 解顔勸農人. 平疇交遠風, 良苗亦懷新. 雖未量歲功, 卽事多所欣. 耕種有時歇, 行者無問津. 日入相與歸, 壺漿勞近隣. 長吟掩柴門, 聊爲隴畝民.)"

 

   이 중 7, 8구는 천고의 절창으로 꼽는 아름다운 구절이다. 드넓게 펼쳐진 들판에 먼데서 불어온 바람이 엇갈려 분다. 새싹들이 초록 물결을 이루며 바람의 궤적을 그대로 보여준다. 바람은 이쪽에서도 불어오고 저쪽에서도 불어와서 새싹들의 춤사위를 경쾌하게 부추긴다. 일하다 말고 잠시 허리를 펴며 그 광경을 바라보는 마음이 더없이 흐뭇하다.

 

  양묘회신(良苗懷新)! 새싹에 새 기운이 가득하다. "가난이야 족히 근심할 것이 못 된다. 가슴 속에 도를 지니지 못한 것이 부끄러울 뿐." 스승의 가르침을 되새기며 큰 숨을 들이쉬면 알지 못할 생기가 가슴에 가득하다.

 

  막상 세상은 어떤가? 이광정(李光庭)은 "지난 일 감개함 가눌 길 없고, 뜬생각 마음 빈틈 파고드누나. 시름겹게 숨어 사는 근심을 안고, 하릴없이 긴 밤을 지새우도다. 좋은 싹은 김맬 때를 하마 놓쳐서, 가을엔 가라지만 무성하겠지. 도를 추구했건만 뜻은 약했고, 생계를 꾸림조차 외려 아득타 (往事多感慨, 浮念乘情罅. 悄悄抱隱憂, 曼曼度長夜. 良苗失時耘, 秋莠萋已荒. 謀道志不强, 爲生計轉茫)"라고 뜻같지 않은 현실을 개탄했다. 김창협(金昌協)도 "교만한 가라지가 좋은 싹 가려, 김맬 시기 놓친 지 오래되었네 (驕莠掩良苗, 久矣失芸耔)"의 탄식을 발했다.

 

  봄이 왔다. 새싹들이 땅을 밀고 올라온다. 청신한 기운이 대지에 편만(遍滿)하다. 어이 가난을 근심하랴. 쭉정이 가라지가 좋은 싹을 뒤덮지 않도록 부지런히 김매고 밭 갈아야 할 때다.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 모처럼 조금 한적한 영동고속도로 ⓒ  2012 한국의산천 

고속도로 좌측에 원주 35km 라고 쓰여있네요

 

▲ 立春이 지났으니 완전히 봄이 왔다고 생각하면 산에서 얼어죽을 수 있는 위험성도 있다 ⓒ 2012 한국의산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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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거래사   - 김신우
 

하늘아래 땅이 있고 그위에 내가 있으니 어디인들 이내몸 둘곳이야 없으리
하루해가 저문다고 울터이냐 그리도 내가 작더냐 별이 지는 저 산넘어 내 그리 쉬어 가리라
바람아 불어라 이내몸을 날려 주려마 하늘아 구름아 내몸 실어 떠나 가련다
해가지고 달이뜨고 그안에 내가 숨쉬니 어디인들 이내몸 갈곳이야 없으리
작은것을 사랑하며 살터이다 친구를 사랑하리라 말이없는 저들녘에 내님을 그려보련다
바람아 불어라 이내몸을 날려주려마 하늘아 구름아 내몸실어 떠나가련다
바람아 불어라 이내몸을 날려주려마 하늘아 구름아 내몸실어 떠나가련다

 

▲ 연산군 금표비 ⓒ 2012 한국의산천

연산군시대 금표비는 1995년 금천군 묘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발굴되어 문화재자료 제 88호로 지정되었다. 연산군은 서울 주변 지역을 왕의 사냥터, 유흥지로 지정하면서 일반인의 출입을 금지하는 금표비를 세웠는데, <연산군 일기>에는 기록이 보이나 실제 연산군의 금표비가 발굴된 곳은 고양시 대자동이 유일하다. 따라서 연산군 금표비를 통해 교과서에서만 접하던 조선 전기의 역동적인 역사 전개 과정과 정치 상황을 생동감있게 이해할 수 있다.

 

▲ 경기도 고양시 대자동에 자리하고 있는 연산군시대 금표비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88호 ⓒ 2012 한국의산천 

 

연산군 燕山君 1476(성종 7)~1506(중종 1). 조선의 제10대 왕(1494~1506 재위). - 두산백과 참고 -

재위중 무오·갑자 사화를 일으켜 사림파를 비롯한 문신들을 대거 처형하고 언관(言官) 제도를 크게 축소했으며, 당시 사대부들의 윤리관에 어긋나는 행동을 거듭하다가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폐위되었다. 조선왕조의 대표적인 폭군으로 손꼽힌다. 이름은 융.

 

즉위와 무오·갑자 사화

성종의 큰아들이며, 어머니는 지평(持平) 윤기묘(尹起畝)의 딸 폐비 윤씨이다. 비는 영의정 신승선(愼承善)의 딸이다. 폐비 윤씨가 사사(賜死)된 뒤인 1483년(성종 14) 세자로 책봉되었다. 세자 시절 허침(許琛)·조지서(趙之瑞)·서거정(徐居正) 등에게 학문을 배웠다.

 

  1494년 12월 성종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즉위초 비융사(備戎司)를 두어 병기를 만들게 하고 변경지방으로 백성을 이주시키는 한편, 녹도(鹿島)에 쳐들어온 왜구를 물리치고 건주야인(建州野人)을 토벌하는 등 국방에 힘썼다. 또한 사창(社倉)·상평창(常平倉)·진제장(賑濟場)을 설치하는 등 빈민구제를 위한 조치를 취하고 사가독서(賜暇讀書)를 부활시켰으며, 〈경상우도지도 慶尙右道地圖〉·〈국조보감 國朝寶鑑〉·〈동국명가집 東國名歌集〉 등을 간행하고 〈속국조보감 續國朝寶鑑〉·〈역대제왕시문잡저 歷代帝王詩文雜著〉·〈여지승람 輿地勝覽〉을 완성했다. 그러나 사림파 제거를 노린 훈구파의 정치적인 공작과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게 되면서 형성된 성격상의 문제가 겹쳐 1498, 1504년 2차례에 걸쳐 대규모의 사화를 일으켰다.

 

  1498년 〈성종실록〉 편찬 때 김일손(金馹孫)이 사초(史草)에 실은 김종직(金宗直)의 〈조의제문 弔義帝文〉이 세조의 즉위를 비방한 것이라 하여, 김종직을 부관참시(剖棺斬屍)하고 김일손·권오복(權五福) 등을 처형했으며, 정여창(鄭汝昌)·이주(李胄)·김굉필(金宏弼)·강혼(姜渾) 등을 귀양보냈다 (무오사화).

 

  1504년에는 어머니 윤씨의 폐비와 사사에 관련했던 후궁들과 윤필상(尹弼商)·이극균(李克均)·김굉필 등을 처형하고 한치형(韓致亨)·한명회(韓明澮)·정창손(鄭昌孫)·정여창·남효온(南孝溫) 등을 부관참시했다 (갑자사화). 이 옥사에서는 무오사화 때와는 달리 김종직 문하의 사림파와 함께 훈구파의 거목들도 대거 참화를 당했는데, 이는 연산군의 사치와 향락 등을 위해 훈구 재상들의 토지를 몰수하려는 조짐이 보이자 훈구파가 이러한 조치에 반발하는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중종반정과 폐위

2차례에 걸친 사화로 연산군에 대한 반감은 사림파뿐만 아니라 훈구세력들간에도 커지게 되었다. 홍문관과 사간원을 없애고 경연(經筵)과 상소제도를 중단시키는 등 왕을 견제할 수 있는 여론제도를 크게 위축시킨데다가, 갑자사화를 계기로 훈구파도 심한 타격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인수대비(仁粹大妃)의 초상 때 역월지제(易月之制)라 하여 3년상 대신 25일상을 치르는 등의 행위가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채청사(採靑使)·채홍사(採紅使)를 전국에 파견해 미녀와 좋은 말을 징발하고, 장악원(掌樂院)을 두어 기녀(妓女)를 양성한데다가 성균관을 유흥장으로 만들고 사대부의 여인들과 관계를 갖는 등 음행을 일삼았다.

 

  더욱이 서총대(瑞蔥臺)라는 유흥장을 만들면서 백성을 강제로 동원하고 베를 무더기로 바치게 하여 민심도 돌아서게 되었다. 또한 자신을 비방하는 한글투서가 발견되었다 하여 한글의 사용을 금지하기도 했다. 마침내 1506년 성희안·박원종 등이 군사를 일으켜 성종의 둘째 아들 진성대군(중종)을 왕으로 세움에 따라 왕위에서 쫓겨나 군(君)으로 강등된 뒤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묘는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에 있다.

 

▲ 연산군 금표비 ⓒ 2012 한국의산천 

 

연산군 시대에 만들어진 이 비는, 연산군의 유흥지인 고양에 일반인의 출입을 금하기 위하여 세운 금표비로 무단으로 들어올 경우 처벌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연산군은 1494년에 왕위에 올랐는데, 왕으로 있으면서 성균관 유생을 쫓아내고 그 자리에 전국의 기생들을 불러모아 유흥장을 차리고, 선종(禪宗)의 본산인 흥천사(興天寺)도 마굿간으로 바꾸고, 민간인이 한글로 연산군의 행동을 문제삼는 글을 올리자 이를 계기로 한글의 사용을 엄금한 일 등을 저질렀다. 이러한 일로 결국 중종반정으로 임금자리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그후 강화도 교동(喬桐)에 유배되었다가 그해 세상을 떠났다.

 

▲ 금표비 '禁標內犯入者 論棄毁制書律處斬' ⓒ 2012 한국의산천

 

덕양구 대자동 간촌마을 금천군 묘소 입구에 위치하고 있다. 비 주변에 다른 건축물이나 표시는 보이지 않는다. 현재 비는 땅속에 오랜 기간 묻혀 있다가 출토되어 황토 빛이 뚜렷하게 남아있다. 비의 대좌는 장방형이며 후에 새롭게 세운 것으로 보인다. 비신의 앞면에는 '禁標內犯入者 論棄毁制書律處斬'이라 표기되어 있다.

 

비문의 내용을 통해볼 때 이 금표비는 조선조 연산군 때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비문은 ‘금표 내에 들어온 사람은 기훼제서율에 의해 처참한다.’는 것이다. 이 금표비는 1980년대 중반 인근의 전주 이씨 자손들이 묘역 정화사업을 벌이던 중 발견되어 이곳에 세워진 것이다.

 

 

연산군 (燕山君)
 
  휘 융(提). 성종의 맏아들.  어머니는 우의정 윤호(尹壕)의 딸로 정현왕후(貞顯王后)이다. 즉위 3년 동안은 별탈 없이 보냈으나, 1498년 훈구파(勳舊派) 이극돈(李克墩) ·유자광(柳子光) 등의 계략에 빠져, 사초(史草)를 문제삼아 김종직(金宗直) 등 많은 신진 사류(士類)를 죽이는 최초의 사화인 무오사화(戊午士禍)를 일으키게 하였다. 《성종실록》 편찬 때 그 사초 중 김종직(金宗直)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 발견됨으로써, 이에 관련되었던 사림학자들이 많이 참화를 당하였던 사건이다.

 

   1504년에는 생모인 폐비윤씨가 성종의 후궁인 정씨(鄭氏) ·엄씨(嚴氏)의 모함으로 내쫓겨 사사(賜死)되었다고 해서 자기 손으로 두 후궁을 죽여 산야에 버리는 포악한 성정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또한 조모 인수대비(仁粹大妃)를 구타하여 죽게 하고, 윤씨의 폐비에 찬성하였다 하여 윤필상(尹弼商) ·김굉필(金宏弼) 등 수십 명을 살해하고, 이미 죽은 한명회(韓明澮) 등을 부관참시(剖棺斬屍)하였다[甲子士禍]. 또 그의 난행을 비방한 투서가 언문으로 쓰여지자, 한글 교습을 중단시키고 언문구결(諺文口訣)을 모조리 거두어 불태웠다.

 

  한편, 각도에 채홍사(採紅使) ·채청사(採靑使) 등을 파견해서 미녀와 양마(良馬)를 구해오게 하고, 성균관의 학생들을 몰아내고 그곳을 놀이터로 삼는 등 황음(荒淫)에 빠졌다. 경연(經筵)을 없애 학문을 마다하였고, 사간원(司諫院)을 폐지해서 언로(言路)를 막는 등 그 비정(秕政)은 극에 달하였다. 급기야 1506(중종 1) 성희안(成希顔), 박원종(朴元宗), 유순정(柳順汀) 등의 중종반정에 의해 폐왕이 되어 교동(喬桐:江華)으로 쫓겨나고, 연산군으로 강봉(降封)되어 그해에 병으로 죽었다. 그의 치세는 개국 100년의 조선조에 한 시대의 획을 긋게 하여, 이후 50년은 사화(士禍)라는 유혈극이 잇따라 일어나 그것은 선조 이후 다시 붕당(朋黨) 및 붕당정치로 확대 악화되고, 한편으로는 임진 ·병자 등 국난으로 국운은 쇠퇴의 길을 밟게 되었다.

 

  그렇지만 왜인과 야인의 입구(入寇)를 의식한 끝에 비융사(備戎司)를 두어 병기를 만들게 하였다든가, 또는 변경지방에로의 사민(徙民)의 독려, 기타 《국조보감 國朝寶鑑》, 《여지승람 輿地勝覽》 등의 수정 등 치적이 있다. - 문헌참고-

 

 

강화 교동도에 있는 연산군 유배지 가는 길 

 

▲ 고요하고 평야가 드넓은 아름다운 섬 교동도 ⓒ 2012 한국의산천

교동도는 민통선안 그것도 북단에 위치하고 있다. 그래서 민간의 출입이 자유롭지 못하지만 요즘은 많이 완화되었다. 교동도를 들어가기 위해서는 출입항신고서를 작성하여 군에 제출한다. 교동도내에 방문자 및 방문자의 주소, 전화번호를 기록하게 되어있다.

 

교동도는 석모도 바로 위쪽  북쪽에 위치하며 방문자가 그리 많지 않기에 도로가 한산하여 편하게 자전거 여행을 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주로 평야로 이루어진 곳이기에 라이딩에 어려움은 없으며 아주 넓은 난정저수지와 고구저수지가 있다

교동도는 섬이라는 느낌보다는 거대한 간척지를 보는 듯 너른 평야다. 강물이 실어 나른 옥토의 땅이라 비옥하기 그지없어 예부터 교동의 쌀은 으뜸으로 손꼽혔다.

 

▲ 교동도 연산군 유배지 가는 길에 고구저수지에서 ⓒ 2012 한국의산천

현재도 민통지역이지만 그 당시는 자전거를 가지고 어렵게 교동도에 들어갔습니다.  

 

역사적으로 조선시대때 나라에 중대한 죄를 범한 경우에는 전라도 방면으로 귀향을 보냈지만 왕족이나 또는 왕손에 한하여는 강화도로 보내고 조금 더 중죄를 졌다면 강화도에서 또 배를 타고 들어가는 교동도로 보내어졌다. 그렇다면 왕족은 왜 전라도로 귀향을 보내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 왕족과 왕손을 가까이서 관찰해야했기 때문이다.   

 

교동도는 일단 강화도의 ‘황복마을’로 잘 알려져 있는 창후리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한다. 바로 눈앞에 바라보이는 교동도까지는 배로 불과 15분 거리이지만 썰물때는 해엽 가운데로 도로의 중앙선처럼 모래톱이 길게 4~5미터 솟아오르기에 돌아서 건너가면 1시간 이상 걸리는 곳이기도 하다 

가시적 거리로는 가깝지만 심리적으로 멀게만 느껴지는 것은 교동도가 한번 가면 다시 돌아오기 어려운 유형의 길이기 때문일 것이다. 교동도는 고려시대부터 유배지로 손꼽히던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역모에 연루된 왕실 친·인척들의 유배지가 되어 그곳에서 사사된 사람이 많기 때문에 ‘돌아오지 않는 섬’으로 잘 알려져 있다.

 

교동도로 유배되어 다시 돌아오지 못한 채 그곳에서 죽은 사람으로는 고려의 희종, 조선의 연산군 등 두 왕이 있다. 그리고 안평대군, 임해군, 능창대군 등도 교동도에서 비참한 생을 마쳤다.

 

▲ 교동도 화개산 기슭에 자리한 연산군 유배지를 찾아가는 길 ⓒ 2012 한국의산천  

 

연산군

조선조 제10대 왕이며, 1476년 성종과 숙의 윤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태어난 해에 어머니 윤씨가 왕비로 책봉되자 연산군에 봉해졌으며, 1479년 윤씨가 폐출된 후 5년 만인 1483년 8세의 나이로 세자에 책봉되었다. 그리고 그는 1494년 12월 성종이 죽자 19세의 나이로 왕에 등극했는데, 곧 20세가 되므로 섭정을 받지 않고 즉위하자마자 직접 왕권을 행사했다. 초기 4년은 그런대로 선정을 베풀었으나, 무오년과 갑자년 두 차례의 사화를 겪으면서 포악한 정치를 일삼다가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었다. 연산군으로 강등된 그는 강화도의 교동에 유배된 지 2개월 만에 전염병으로 죽었다. 재위 기간은 12년이었으며, 죽을 때 그의 나이는 31세였다. 

 

▲ 화개산 기슭에 자리한 연산군 유배지 (2010년 교동도 답사시 촬영한 연산군 위리 안치장소) ⓒ 2012 한국의산천

위리안치(圍籬安置) : 죄인이 귀양지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집 둘레에 가시로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가두어 두던 일.

 

연산군이 교동도로 유배된 것은 1506년 9월이었다. 성희안, 박원종 등이 군사를 일으켜 성종의 배다른 둘째아들 진성대군을 왕위로 세우는 ‘중종반정’이 성공하면서, 연산군은 왕자의 신분으로 강등되어 유배당하게 된 것이다.

 

연산군은 부왕 성종이 죽은 해인 1494년 12월 19세의 나이로 조선 제10대 왕으로 등극했다. 초기 4년 동안 그는 비교적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1498년 김종직을 필두로 한 사림파와 훈구세력들의 대립으로 인한 무오사화가 일어나면서, 연산군의 포악한 정치는 시작되었다. 재위 8년째인 1502년에는 장록수에게 빠져 방탕한 세월을 보냈으며, 간신 임사홍은 그런 행태를 더욱 부추겼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504년에는 폐비 윤씨 사건이 밝혀지면서 갑자사화가 일어나 다시 한번 피바람을 불러왔는데, 이 두 차례의 사화로 조정의 쓸 만한 인재들은 거의 처단되거나 숨어버렸다. 친어머니인 폐비 윤씨 사건 진상을 알고 성질이 광포해진 연산군은 자신을 비판하는 신하들을 귀양 보내거나 무참하게 죽였으며, 홍문관과 사간원을 혁파하고 사헌부의 언로 기능을 없애버렸다. 또한 자신을 비방하는 신하들이 있다는 소문이 돌자 관리들에게 ‘신언패(愼言牌)’라는 패쪽을 차고 다니게 하여 말조심을 하도록 억압했다. 또한 자신을 비난하는 글이 국문으로 씌어져 나돈다고 하여, 국문을 배우지 못하게 하고 국문서적을 불사르기까지 했다. 그리고 이전까지 도성 밖 10리를 한계로 삼았던 금표(禁標)를 100리 밖으로 늘려 그 안에 살던 주민들을 철거시킨 뒤 자신의 사냥터로 삼았다.
 
뿐만 아니라 연산군은 장록수 외에도 수많은 후궁을 거느렸으며, 전국 양가의 여자들까지 뽑아 올려 노리개로 삼은 미녀가 거의 1만명에 이르렀다. 이렇게 뽑은 미녀들을 ‘흥청악(興淸樂)’이라 했는데, 그는 이 흥청들과 매일 금표 안에서 사냥을 하거나 술과 춤, 노래로 질탕한 유희를 즐겼다. 후일 ‘흥청망청’이란 말이 생겨난 것도 그러한 유희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특히 연산군은 자신의 백모이기도 한 월산대군의 아내 박씨에게 ‘승평부대부인’이라는 호를 주고 사사롭게 가까이 했는데, 두 사람 사이의 아이가 잉태한 박씨가 자살했다는 소문이 백성들 사이에 나돌기도 했다. 이에 화가 난 박씨의 남동생 박원종이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을 폐위시키면서, 그의 12년 왕권은 막을 내렸다.

기록에 의하면 연산군은 31세에 전염병으로 죽었다고 한다. 유배 생활 2개월 만의 일이다. 조정에서는 연산군이 죽자 왕자의 예로 현지에 장사를 지냈다고 하며, 나중에 경기도 양주(지금의 도봉구 방학동)로 이장했다.

 

▲ 연산군 위리안치장소에서 ⓒ 2012 한국의산천

 

즉위 초에는 사창, 상평창, 진제창의 설치, 사가 독서의 부활 '국조보감', '여지승람'의 간행등 다소의 업적을 이룩했으나 어머니인 폐비 윤씨가 사사된 후 세자시절을 불우하게 보낸 탓으로 이상성격이 형성, 점차 향락과 횡포를 일삼아 많은 실정을 저질렀다. 무오사화, 갑자사화를 일으켜 사림파를 대량 학살 숙청했고 성균관을 유흥장으로 만들어 황음을 일삼는 등 갖은 횡포를 자행했다


연산군은 성종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 윤기무(尹起畝)의 딸인 폐비 윤씨이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학문을 좋아하지 않아서 공부하기를 권계하는 이가 있었지만,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한다. 왕으로 등극하여 사창, 상평창, 진제창의 설치와 사가독서의 부활, '동국여지승람'의 간행 등 국방과 내치면에서 다소의 업적을 이루기도 했다. 그러나 폐비 윤씨 사건을 계기로 점차 향락과 횡포를 일삼아 많은 실정을 하기도 했다. 만년에는 주색에 빠지고 도리에 어긋나며, 포학한 정치를 극도로 하여, 대신·대간·시종을 거의 다 주살하여 불로 지지고 가슴을 쪼개고 마디마디 끊고 백골을 부수어 바람에 날리는 형벌까지도 자행했다고 한다.

중종반정이 일어나 폐위되어 교동으로 유배되어 31세에 병으로 죽었다. 연산군의 적거지는 봉소리 신골과 고구리 연산골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어, 종합적인 정확한 고찰이 필요하다.

 

▲ 금요일 저녁 집으로 가는 길에 ⓒ 2012 한국의산천